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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기억 속의 대나무
어릴 적 우리 집은 대나무 밭 집으로 통했다. 밭이 몇 평인지는 몰라도 처음 들어간 사람은 쉽게 입구를 찾아 나오지 못할 정도로 큰 밭이었다. 짧은 생각으로 대나무의 종류가 4종류인 것 밖에 모른다. 우리 고장에서 부르는 말로 4월에 나오는 분죽대 죽순, 5월에 나오는 왕대 죽순으로 분류한다. 분죽대 죽순은 껍질이 살색을 띠고 있고 왕대죽순은 호피 같은 무늬가 있다. 대나무로 성장하면 그것에 대한 지식이 없는 사람은 잘 구별을 못한다. 섬유질은 분죽 대가 조금 많다고 들었다.
부지런한 서민 가정, 또는 손재주가 있는 사람들은 죽순 껍질을 주어다가 가정에서 가내 공업으로 방석, 돗자리, 반짇고리 고리짝, 등을 열심히 작업해서 담양 관방천 죽물전에 내다 팔았다. 그 일로 인해 각 가정마다 큰 호황을 누렸던 때도 있었다. 대밭에서 썩어버릴 죽피도 상품가치가 있었다. 그러다 보니 전문적으로 주어다 파는 사람도 생겨났고 사람들은 농사일 외에 또 다른 하나의 부업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법을 터득 했다.
그리고 대밭 입구에는 오죽이 빽빽이 들어서 있고 잔등을 넘어 오르면 왕대 밭 뒤에 시누대(산죽)밭이 있다. 오죽으로는 양반들이 긴 담뱃대를 만들어 담배를 피우며 양반의 위세를 세우기도 했다.
시누대는 복 조리를 만들어 정월 대 부름이면 복 복하며 팔러 다니는 장사군도 있었다. 복이 들어오라고 문설주에 걸어두기도 하지만 밥할 때 쌀 또는 모든 곡식에 돌을 고르는 도구이기도 했다.
대나무의 쓰임새가 많아지자, 대밭을 관리하는 대밭지기, 대량으로 사다 파는 도매 꾼, 소매로 사다가 만드는 기술자, 등 이다. 소비가 많아지자 물량이 많이 나올만한 대밭을 물색하여 소개하는 거간꾼도 있었다. 이렇게 서로 어깨동무하고 연계고리를 이어가야 모두가 잘 살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발전하고 성장하여 먹고 살만한 고을로 승화 되었던 것이다. 문명은 날로 발달해갈 때 고을을 넘어 나라의 경제 발전에도 한몫 기여했다.
죽순은 초벌, 두벌, 나오는 것은 상품 가치가 있는 대나무로 키웠다. 세벌 이상 나오는 죽순은 성장하지 못하고 중간에 썩어버리기 때문에 주로 식용으로 쓰였다. 부드러운 죽순은 여러 가지 맛과 색으로 변신하여 뭇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아 가정이나 식당에서 각광을 받고 있다.
댓잎으로는 차로도 만들어 끓여 마셨고 어느 것 하나 버릴게 없다.
대나무는 빨리 자라기 때문에 4~5년에 한번 정도 전문가를 고용해 몇 칠 동안 밭 전채를 단단하고 해 묶은 것만 골라 솎아낸다. 대나무는 4~5년 만에 베어 팔면 광주에 작은 집 한 채는 살수 있었다. 그래서 어른들은 대나무 밭을 생금 밭이라고 했다.
대나무 꽃은 길조인가
대나무 꽃은 60~120년 만에 한번 핀다는 속설이 있다. 오랜만에 핀 꽃이라고 해서 귀하게 여긴 것 같다. 언젠가 전라 북도 정읍시 농업기술 센터에서는 국도변에 대나무 꽃이 핀 모습을 공개했다. 이 광경을 찍기 위해 사진 작가들이 몰리고 꽃을 보면 행운이 오고 길조의 상징으로 여겨 소원을 빌려오는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는 것을 텔레비전을 통해서 보았다. 대나무 꽃이 그렇게 길조란 말인가? 어려서 듣던 어른들 말씀과는 전혀 다르게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알기로는 대나무 꽃은 길조가 아니라 흉조라고 동네 어른 들께 들으며 자랐다. 우선 대나무 꽃이 피면 말라버리기 때문에 상품가치가 없어진다. 그러다 보니 수입이 줄어들어 자연히 가세가 기울어가기 시작하는 것부터 집안의 낭패였다. 나무도 아니고 풀도 아닌 것이 속은 비어도 사철 푸르고 휠지언정 꺾기지 않는 절개를 가진 아름답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누렇게 말라가기 시작한다. 댓잎에 엉켜 율무송이같이 변해가는 것을 요즘은 꽃이라고 한다. 생각하기 나름이다. 옛날에 듣기로는 꽃이 아니라 대나무 병에 걸렸다고 했다. 한 나무에서 시작해서 대밭전채가 전염되어 하얗게 말라 초토화가 되어버렸다. 꽃은 변해서 결국엔 깜묶이 되었다. 해가 지날수록 말라붙은 것들은 건들바람에도 검은 눈비가 내리듯 맥없이 쏟아진다. 잎은 말라버리고 대나무허리는 속절없이 꺾여버렸다.
차나무의 산실
그늘에서 꽃 한번 피워보지 못 하고 무녀리처럼 움츠리고 있던 차나무들이 차츰 영역을 넓혀갔다. 신비하고 오묘한 노란 꽃술을 눈부시게 흰 꽃잎들이 겹겹이 감싸 안고 벌 나비의 수정을 기다린다. 강자에게 밀려 맥도 못 추던 약자는 제세상을 만난 듯 차나무라는 존재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이것이 자연의 순리인 것 같다. 차나무는 건강하게 가꾸어 기꺼이 인간에게 또 다른 모습으로 헌사 하고 있다. 생명은 만물의 영장이라고 했던가 영묘한 힘을 가진 소유자 들이 죽어가자 차나무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커갔다.
어둠은 찾아오고
남의 말 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대나무 집에 망조가 들 모양이라고 수근 대는 것을 보았다. 할머니는 긴장하여 입 밖에도 못 내고 집안식구들 몸조심을 시켰다. 객지에서 나랏일 하는 큰 오빠 걱정을 먼저 했다. 할머니는 부적을 써서 오빠 베게 속에 넣고 오라고 명하셨다. 어머니는 행여 부정이라도 탈까 치마폭 앞 가슴에 동여매고 나가셨다. 지금 생각하면 큰오빠 몰래 베게 속에 넣고 온 것 같다.
늘 해오듯이 부뚜막 좀도리 단지에 끼니마다 쌀 한줌을 모아 없는 사람과 나누는 할머니의 지혜도 있었다. 어머니는 첫 새벽에 우물을 길러다 부뚜막 조왕신께, 받치고 장독대에 정화수 떠놓고 두 손 모아 간절히 빌기도 했다. 스님 승복도 큰오빠 이름을 새겨 지어 들였고 절에도 많은 공덕을 들인 것도 보았다.
어른들은 집안이나 나라에 큰 흉조가 생길 증조라고 걱정을 태산같이 하신다. 그렇게 듣고 자라서 그런지 대나무 꽃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좋지 않았던 기억이 떠올라 온몸에 소름이 쫙 끼치고 마음이 섬뜩했다.
미신이겠지만 대나무 꽃은 피어 하얗게 말라가고 간장, 된장이 맛이 변하고 담벼락 위로는 큰 구렁이가 나와서 온종일 돌아가지 않았다. 할머니는 애가 탄다. 무슨 뜻인지는 몰라도 긴 대나무 끗에 머리카락을 감아 소변을 무쳐서 구렁이 등을 쓸어주며 인간에게 해 끼치지 말고 사람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가라고 축원을 하신다. 그래도 들어가지 않자 무당까지 불러서 달랬다. 구렁이는 무당의 축원에도 꼼짝도 하지 안더니 해질 무렵에야 어슬렁어슬렁 어대론가 들어가버렸다.
육이오의 고통
스무 살 차이 난 큰 오빠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소학교를 졸업하고 목포에서 배를 타고 일본 유학을 갔다고 들었다. 그 무렵 아버지 금광업이 꽤 잘 되었다고 한다. 큰 오빠는 명치대학을 졸업하고 돌아왔다고 들었다 취직하고 결혼하고 3살 터울 어린 조카도 생겼다. 그리고 어느 날 새벽 북한 공산군이 남북 군사 분계선 38선을 넘어 기습적으로 남침 함으로서 전쟁의 6,25가 상징적으로 남았다고 한다. 어렴풋한 어릴 적 기억으로는 맥아더 장군이 인천 상륙작전에서 크게 승리 하고 다시 공산군에게 밀려 삼팔선을 분계선으로 휴전을 정했다고 들었다. 전쟁은 끝나지 않은 채, 승리한 쪽도 패배한 쪽도 없이 양민들만 희생당하고 말았다.
때는 지금부터다. 미처 북으로 넘어가지 못한 빨치산 잔당들이 낮에는 깊은 산속에 살다가 밤이면 마을로 내려와 황소, 곡식, 신발, 이불, 심지어 부엌 도구 솥까지 털어간다. 우리 집은 그들에 먹이의 대상이 되었다. 오히려 우리보고 반동자, 집안이라고 못 살게 굴었다. 젊고, 힘센 사람들은 다 대려 가기 때문에 작은 오빠들과 큰 올케언니는 군소재지로 피난을 보냈다. 머슴들은 낮에는 일하고 해질 무렵이면 지서 옆 난장에 황소를 메두고 밤을 새우고 아침에 돌아온다. 어린 조카와 늙으신 부모님들, 머슴들과 집을 지키고 살았다. 공비들은 하다 못해 가져갈 것이 없어지자 곡식 내 놓으라고 부모님 들를 마구 때리고 집에 불을 질러 가진 횡포를 다 부렸다.
한 겨울이 오자 추위와 굶주림을 이기지 못하고 자수한 사람도 많았지만, 추위에 굶어 죽었는지 산을 타고 북으로 넘어갔는지 그들이 찾아오는 횟수는 시나브로 줄어들었다.
섣달 그음이 되자 오랜만에 집안식구가 한자리에 모였다. 큰 오빠는 아직도 자리를 비울 수 없었는지 잠깐 다녀갔다. 가족이 모여 설을 쇠는 것만으로도 다행이고 큰 행복 이였다.
어른들은 생업에 열중하고 어린이 들은 학교도가고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다.
세월은 변함없이 봄은 오고 무더운 여름도 지나고 황금 물결 넘실대는 음력 8월 어느 날 아침 이였다. 큰 오빠가 경찰청 관사에서 빨갱이들의 습격에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받았다.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기절하고 말았다. 당신의 보배이자 전부인 아들을 잃었다는 슬픔에 식음을 전패하고 실성한 사람이 되었다. 죽어도 보낼 수 없다던 아들을 않고 통곡을 했지만 끝내는 가는 길이 달라 동작동 묘지에 묻고 말았다. 큰 올케언니는 자기 죄 인양 내놓고 울지도 못하고 23세의 청춘 과부가 되었다. 평생을 고운 옷 한번 입지 못하고 열두 폭 소복으로 휘어 감고 수절을 했다.
부모님들은 평생 자식을 가슴에 묻고 며느리 앞에서는 슬픈 내색 한번 못하고 사셨다.
대나무 꽃이 미리 암시를 주었는데 방법을 찾지 못한 당신 탓이라고 믿고 입버릇처럼 자책하며 사시다 한 많은 생을 마감하셨다.
한마디 덧붙이자면 옛날을 더듬어서 쓰기는 했지만 전설의 고향에나 나올법한 글 같아서 새삼스럽게 온 몸에 소름이 쫙 돋는다. 그러나 전설의 이야기 같지만 실화 인 것 만은 사실이다. 대나무 꽃이 피고 간장 맛이 변하고, 구렁이가 눈에 보이면 흉조로 여겼던 것은 사람들의 짐작이나 오랜 삶과 경험에서 묻어 나오지 않았나 싶다. 구렁이는 집안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인간의 눈에 띄지 않아야 한다고 믿었다. 그렇게 집안이 망해가자 할머니는 자연히 미신을 믿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대나무 꽃이 흉조라고 강조한 것은 아니다. 어른들 믿음 속에서 자라왔기에 나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젖어 든 것이다. 과학이 발달한 현대에서 미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첫댓글 마리아님♡새해에도 건필을 기원드립니다~
교수님 한해동안 고생많았습니다. 2019년 마무리 잘 하셨으니 2020년도에도 꽃길만 걸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