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정색 만큼 고정관념이 많은 색이 또 있을까?
대개의 사람들은 검정을 단순히 죽음과 고통의 색으로 받아들인다. 저승사자의 옷이 검정색이라든가, 까마귀를 보면 재수가 없다는 등의 노골적인 편견이 우리의 의식을 지배한지 오래다. 그러나 그 편견 뒤에는 우리가 놓쳐선 안될 검정에 대한 중요한 의미들이 있다. 앞서 말한 고무신에 대한 아련한 추억을 되씹지 않더라도 검정은 우리네 생활 정서에 세련됨과 권위의 상징으로 자리잡은 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아무 색도 아닌 색, 검정
검정색은 원래 빛이 없는 아니 모든 색깔을 흡수한 색이다. 죽음, 연민, 깊은 잠, 슬픔, 무의식 등을 나타내는 색깔이기도 하지만 인간이 땅을 갈아 씨를 뿌리고 수확을 하는 부의 상징이기도 하다. 태초에 인간이 있으되 그 색 또한 검정이었다. 검정색은 인간이 인식한 최초의 색인 셈이다.
검정은 빛이 전혀 없거나 빛을 모두 흡수하므로 색이 없다. 아무 색도 아닌 색, 검정은 그래서 더 오묘하고 신비한 색이기도 하다. 흑진주나 흑요석같이 빛을 발하는 윤기 있는 검정이 사람의 마음을 동요시키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사람들은 검정을 볼 때 신비로운 감정과 더불어 공포심을 갖는다. 눈으로 사물을 볼 수 없는 어두운 공간이 검정과 밀접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개 검정을 죽음과 암울의 색, 악마의 색으로 인지하게 되는 것이다. 가장 부정적인 측면에서 보면 검정색은 사람들의 범죄 성향을 최대로 악화시킨다고 알려져 있다. 아주 사악한 인간을 마음이 시커먼 자(Black Hearted)라 불리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렇듯 검정색의 상징이 대부분 부정적이긴 하지만 검정색은 또한 근엄함, 교양, 세련됨, 힘, 믿음, 권위 등을 의미하기도 한다.
서양 장례식에서 사람들이 주로 검정색 옷을 입는 것이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면, 고대 이집트 시대에는 상을 당했을 때 입는 옷이 노란색이었고, 고대 로마에서는 짙은 파랑이었다. 검정색이 상복의 색으로 정착한 것은 영국 빅토리아 여왕 시대부터라고 알려져 있는데, 여왕은 1861년 남편이 죽었을 때 검정 상복으로 장례식에 참가해서 그 뒤 그 자신이 죽을 때까지 검정 옷을 계속 입었다고 전해진다.
이렇듯 아무 색도 아닌 검정색은 죽음과 공포의 색인 동시에 영원과 신비의 상징으로 사람들의 은근한 잠재의식을 일깨워 왔다.
블랙박스가 검정이 아닌 이유
불의의 사고로 비행기가 추락했을 때 언론은 블랙박스를 찾았는가 못 찾았는가를 놓고 팽팽한 입씨름을 벌이곤 한다. 흔히들 말하기를 블랙박스에는 조종사와 관제탑간의 교신 내용뿐만 아니라 비행기 안에서 이루어진 모든 비행자료 데이터가 담겨져 있어 추락의 원인을 밝히는 중요한 박스라고 한다.
블랙박스는 커다란 충격이나 화재 속에도 유일하게 손상되지 않고 사고 직전의 모든 상황을 알려주는 장치로서 그 외관의 명칭과는 달리 주황색을 띠고 있다. 블랙박스는 땅에 떨어지는 순간 자기 무게의 3천 4백배를 감당한다고 알려져 있다. 이름만 블랙박스이지 실은 형광빛이 많이 도는 밝은 오렌지색인 셈인데 이유는 매우 간단하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블랙박스 같이 대단히 중요한 장치가 말 그대로 검정색이라고 한다면 시각적으로 잘 보이지 않으므로 찾는데 무진장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낮이나 밤이나 사람의 눈에 잘 띄는 색, 형광끼가 있는 주황색이야말로 블랙박스가 자신의 위치를 알리는 중요한 모티브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굳이 블랙박스라고 했을까? 그냥 오렌지박스라고 하면 더 친밀하고 듣기 좋은데 말이다. 검정색이 무언가를 은밀히 감추고 있는 색처럼 여겨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즉 문제해결에 중요한 열쇠를 제공하는 비밀의 단서로서 검정색이 쓰여진 것이다.
이와 다른 얘기지만 블랙이 블랙일 수 없는 예는 또 있다. 흔히 영어에서 녹차는 Green Tea라고 하는데 홍차는 Red Tea라 하지 않고 Black Tea라고 부른다. 차 자체는 붉은 색이지만 차 잎은 검정색이라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바둑에서 검은 돌을 잡는 하수
흔히 바둑을 보면 한 수 아래의 사람이 검은 돌을 잡는다. 백색과 흑색의 사이에서 자신을 낮추는 색을 검정으로 인식하기 때문인데 왜 일까? 물론 프로기사들의 공식 대국은 초단에서 9단까지 말할 것도 없이 호선(互先)을 두는 것으로 정해져 있긴 하다. 호선이란 양 대국자간에 흑백 바둑돌을 번갈아 잡고 둔다는 뜻이다. 호선대국에서도 흑백 돌을 가리는 방법은 단위가 높은 사람 또는 연장자가 몇 개의 백돌을 움켜쥐면 상대방이 짝홀수를 알아 맞추는 방식에 의해 흑백이 정해진다. 왜 하필 연장자가 백 돌을 쥘까 ?
여기에 묘한 사연이 있다. 바둑은 원래 중국에서 전해 내려 왔는데 당시 고대 중국 황실에서 주로 두어졌다. 백은 고대황실의 황제가 착용하던 백색 장갑에서 비롯된 것이고, 검은 돌은 황제의 시중을 들던 사람들의 흑색 장갑에서 유래했다. 황제의 장갑이 흰색인 이유는 순결과 정결을 상징하기 위한 것이며, 시중의 장갑이 검은 이유는 황제보다 천한 직위임을 알리기 위함이란다. 이것이 바로 하수가 흑 돌을 잡을 수 밖에 없는 사연이다.
태권도에서도 검은 띠가 최고의 고단자로 알고 있지만 사실 흰 띠를 착용한 사람이 더 고수다. 처음 무도를 입문할 때 흰띠를 매고 수련을 하면 시간에 따라 그 색이 짙어져 갈색에서 검정색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흰색이 된다는 의미에서 검정은 늘 흰색의 한 수 아래로 평가 받는다.
책의 글씨가 검은 까닭은?
비단 책의 글씨뿐만이 아니라 사람들이 흔히 쓰는 글씨는 모두 검정색이다. 이 어둡고 칙칙한 색을 사람들이 선호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색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책의 글씨가 초록색으로 쓰여져 있다면 어땠을까? 눈의 피로는 줄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책의 글씨색깔과 전혀 통일감을 줄 수 없을 뿐더러 잘 보이지도 않을 것이다. 붉은 색이라면 눈이 금방 피로할 것이고, 파랑이라면 어지러울 것이다. 검정색은 모든 빛을 흡수하는 성질을 갖고 있어 색감이 변함이 없고 늘 똑같다. 어느 책을 보나 검정은 검정인 것이다. 우리 생활에 있어 가장 밀접하게 연관되고 보여지는 색상임에도 잘 잊고 지나칠 때가 많다.
바코드를 예를 들어 바코드의 선이 검정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굳이 컬러이어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바코드는 단지 인식을 위한 존재일 뿐이다. 굵고 얇은 선들로 이루어진 바의 두께가 상품의 상태를 표시하기 때문에 컬러가 작용할 필요가 없다. 한 가지 더 바코드 색이 빨간색이거나 파란색이라면 빛의 반사 성질로 상품정보의 정확도에서 문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자동차의 타이어가 검은 것도 같은 까닭일까? 물론 아니다. 타이어가 모두 검은 것은 타이어를 만드는 물질이 오직 검은색인 카본 밖에 없기 때문이다. 카본은 타이어가 지면과의 마찰로 금세 닳게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고무 속에 집어 넣은 소재인데, 이 물질의 색깔 때문에 타이어를 검은색으로 밖에는 만들지 못하는 것이다. 콜라가 검은 것도 그 속에 캐러멜이라는 검은색 색소가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까마귀가 길조다?
한국에서는 까마귀가 예언을 한다고 믿고 있지만 사실 부정적인 이미지가 더 많다. 아침에 까마귀가 집앞 나뭇가지에서 울어 재끼면 그날은 그걸로 불운을 점찍은 것과 같다고 여겼다. 제주도 신화인 ‘차사본풀이’에서 인간의 수명을 적은 적패지(赤牌旨)를 강림이 까마귀를 시켜 인간세계에 전하도록 하였는데, 마을에 이르러 이것을 잃어버린 까마귀가 자기 멋대로 외쳐댔기 때문에 어른과 아이, 부모와 자식의 죽는 순서가 뒤바뀌어 사람들이 무질서하게 죽어갔다고 한다. 이때부터 우리나라에선 까마귀의 울음소리를 불길한 징조로 받아들이기 시작하였다. 중국에서는 검은 까마귀는 불길한 새로 지목하나, 붉은 색이나 금색으로 그린 까마귀는 태양, 효도를 뜻하기도 한다.
또한 옛날에는 행복을 안겨주는 새로 믿었고, 한 해의 신수를 보는데 까마귀를 사용한 예도 있다. 아랍인은 까마귀를 예조(豫兆)의 부(父)라 부르며 오른쪽으로 나는 것을 보면 길조(吉鳥), 왼쪽으로는 흉조(凶鳥)로 믿었다. 유럽에서도 까마귀는 일반적으로 불길한 새로 지목되고 있으나, 북유럽 신화에서는 최고신 오딘의 상징으로 지혜와 기억을 상징한다. 그리스의 종교에서는 예언하는 새의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그리스도교에서는 사람으로 하여 죄를 저지르게 하는 악마의 새이다. 까마귀에 관한 속언에 신성시하는가 하면 불길하다고 하여 싫어하는 등, 극단적인 전승(傳承)이 많았던 것은 신성한 새인 까마귀에게 길흉의 예언을 기대한 신앙의 결과일 것이다.
북태평양 지역에서는 까마귀가 신화적 존재이다. 시베리아의 투크치코랴크족과 북아메리카의 북서안 인디언들 사이에서는 까마귀는 창세신(創世神)이 변한 모습이라 하여 창세 신화의 주역으로 삼는다. 어쨌든 까마귀는 인간과의 교섭이 많은 새의 하나로서, 그 울음소리가 인간을 자극하는 새임에는 틀림없다.
그런데 이상하리만큼 일본에서는 까마귀를 길조로 신성시한다. 이른 아침 일본 도쿄 한복판을 거닐면 고양이만한 까마귀들이 시꺼멓게 떼지어 울음 운다.
까마귀가 우리나라 비둘기보다 많아 보일 만큼 일본에선 까마귀를 거의 기르다시피 한다. 예부터 까마귀가 사람의 영혼을 편한 저승으로 데리고 간다는 일본인의 생각에서 비롯된 이유에서다. 이렇게 보면 검은색이 늘 어둡고 음침한 것은 아니다 .
검정과 관계된 음식 이야기
자장면(炸醬麵)
자장면은 우리네 정서에 아련한 향수를 자극하는 음식임에 틀림없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자장면을 먹는 날은 학교 가을 운동회가 있는 날 뿐이었는데, 그날은 아이들과 뛰어노는 재미보다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따라 들어가 단숨에 해치우던 검은 자장면에 더 흥이 났었다. 자장면이 검은 건 그속에 들어가는 양념인 이른바 춘장이 검기 때문이다.
서민의 대표적 음식으로 자리한 자장면(炸醬麵 작장면:장을 볶아 만든 음식)은 1960년 최초의 가격이 15원으로 당시만해도 꽤 비싼 고급음식에 속했다. 그러나 실제 자장면은 중국 하류층들이 먹던 음식이다. 1883년 인천항이 개항되면서 산둥 반도 지방의 노동자들이 우리나라로 흘러 들어와 고국에서처럼 볶은 춘장에 국수를 비벼 야식으로 즐겨먹었다. 실제 중국인들은 짠맛의 춘장을 많이 넣지 않았기에 자장면 색깔은 거의 하얗다고 봐야 한다.
그러던 중 인천에 차이나타운이 조성되면서 한국에 정착한 화교들은 이 음식에 야채와 고기를 넣어 한국인의 입맛에 맞는 자장면을 만들었다. 그리고 달콤한 카라멜을 춘장에 섞었기에(이름하여 사자표 춘장) 달면서 고소하고 색깔도 까만 지금의 자장면이 완성된 것이다. 이 카라멜의 원료때문에 자장면이 검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