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발의 전도자 최춘선 목사님
1. 맨발의 전도자 최춘선 할아버지
처음엔 맨발의 이상한 할아버지로만 알았던 최춘선 목사님은 승용차도 몇 대나 있었고, 김포공항으로 들어가는 큰길에서 인천 국도까지의 땅을 소유한 큰 부잣집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루에 두 차례씩이나 옷을 갈아입는 멋쟁이였습니다.
동경 와세다 대학에서 유학하면서 가가와 도요히코의 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였습니다. 그리고 우찌무라 간조에게도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 후 하나님의 사랑과 복음을 전파하는 헌신적인 삶을 살아갔습니다.
6.25 직후에는 길에 떠도는 노숙자들과 거지들을 집으로 데려와 돌봐주었고, 국가나 단체의 보조 없이 고아들도 많이 길렀습니다.
내일 아침 먹을 쌀만 남았을 때도 누가 와서 먹을 것이 없다고 하면 그마저도 퍼주었고, 아내가 “우리 아이들은 무엇으로 먹이냐”고 걱정하면 “성경에 하나님이 다 먹이신다고 기록되어 있다”면서 달랬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많은 땅을 6.25로 인해 생긴 실향민과 가난한 이들과 도와달라고 찾아오는 이들에게 나눠주었습니다.
그리고 남은 건 단지 3천 평뿐이었습니다. 할아버지는 땅은 사람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으로 믿었기에 등기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걸 알고 누군가 그 땅을 자기 앞으로 등기해 남은 땅마저도 다 빼앗겨 버렸지만 힘든 표정 한번 짓지 않고 찬송가를 부르면서 수백 명이나 되는 고아들을 데리고 서른 번도 넘게 이사를 다녔던 것입니다.
할아버지는 김 구 선생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였던 독립유공자였기 때문에 도장만 찍으면 연금이 나오고 자녀들이 학비를 내지 않고 대학을 다닐 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신청을 거부하였습니다. “나는 보상을 받기 위해 독립운동을 한 것도 아니며, 아직도 남과 북이 분단된 상태이므로 완전한 독립이 이뤄지지 않았다”고 말할 뿐이었습니다.
할아버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기 위해 지하철로 매일같이 나갔습니다. 종이 한 장이라도 아끼기 위해 신문지 등에 자신이 직접 문구를 써, 허술하지만 깊은 의미들을 담긴 전단지들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골목 어귀에 붙이고 지하철에 있는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그렇게 30년 동안 맨발로 다닌 것입니다.
할아버지는 자신만의 독특한 어법으로 "진리는 고독해도 날로 담대합니다"란 말을 하였다고 합니다.
맨발로 다니시는 할아버지에게 관심이 끌려 도대체 할아버지는 어떤 분이시고 왜 이 같은 삶을 살게 됐는지 궁금해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할아버지에게 왠지 모르게 마음에 끌려 할아버지를 영상에 담을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8mm 다큐멘터리 ‘팔복시리즈’ 1편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는 김우현 감독이 전철역에서 우연히 만난 이 초라하고도 기이한 노인을 뒤좇는 것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거칠고 더러운 맨발이 차가운 전철 계단을 내려와 출근길 전철에 올라탑니다. 머리와 가슴에는 난해한 문구들로 가득 채워진 종이를 매단 맨발의 주인공, 허리가 굽은 할아버지는 전철에 앉거나 서 있는 사람들을 향해 쇳소리를 내며 무어라 외치십니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오래 기다리십니다." "예수 십자가는 생명의 줄기, 평화의 젖 줄기."
할아버지의 말을 잘 들어보니 익숙한 기독교 메시지였습니다. 목에 매단 종이에 얼핏 ‘예수천당’ ‘종말 부활 영생’ 등의 글자도 보였습니다.
그는 전철에서 전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호기심을 갖고 맨발의 할아버지를 따라가던 김우현 감독은 그 순간 할아버지가 그저 흔한 광신적 전도자일 뿐이라는 생각에 실망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노인은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심판의 때에 불지옥에 떨어진다는 무시무시한 독백을 강요하며, 시민들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다른 광신도들과는 뭔지 모르게 달랐습니다.
"농가 부채가 한 해에 150억, 미군 군비가 한 해 400억"
할아버지의 입에서는 복음의 메시지에 뒤이어 뜬금없게도 농가 부채며, 주한미군 군비 얘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향해 "Why two Korea?"라며 남북 분단의 현실문제도 질문하십니다.
손가락질하며 킥킥대는 젊은이들에게 유관순·안중근과 같은 애국자를 닮으라고 권면하면서, 비싼 귀걸이와 외제 모자를 지적하기도 하였습니다.
더 흥미로운 것은 "왜 맨발로 다니시냐!" 는 질문에 매번 서슴없이 이어지는 할아버지의 대답입니다. "통일이 되면 신어요."
맨발이라는 이유로 전철역 직원들에게 양팔을 잡혀 힘없이 끌려 나갈 때에도 할아버지는 통일이 되기 전엔 절대 신발을 신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아무에게도 인정받지 못하고 마치 거지나 정신이상이 있는 할아버지로 취급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2003년 여름, 1호선 수원행 열차에서 전도하다 의자에 앉은 채 세상을 떠났습니다.
평소에도 특별한 할아버지였기에 1997년부터 동영상 촬영을 해 왔지만 2003년 8월 마지막으로 할아버지를 만났을 때, 매일같이 빵을 사다가 노숙자와 걸인들에게 나눠주고 여러 곳에서 자원봉사를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김우현 감독은 영혼과 육신에 자기를 비워내고 하늘의 본질로 채운, 모든 것을 내어주신 그리스도를 닮고자 애쓴 할아버지의 삶에 감동을 받아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영상물을 만들게 되었던 것입니다.
최춘선 할아버지의 삶은 구약시대 유대백성의 죄악을 알리기 위해 맨발과 벗은 옷으로 3년 간 다니며 미친 사람 취급을 받은 이사야 선지자를 떠올립니다.
푹푹찌는 무더위 속에서도 굳어지고 갈라진 맨발로, 한파가 몰아친 겨울날에도 여전히 맨발로 알아들을 수 없는 단어들을 외치며~~ 죽는 날까지, 거리를 배회했던 맨발의 가엾은 노인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거리로 나섰던 것입니다.
2. 장남 최바울 목사가 전하는 아버지 최춘선 목사님 "부끄러웠던 맨발의 아버지가 이제는 제 인생의 모델입니다"
최춘선 목사의 장남 최바울 목사는 아직도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으로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갈라져 피가 나오는 발에 깊이 박힌 유리조각을 빼내며 “이제 그만 나가시라” 애원했지만 아버지의 열정을 말릴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 아들은 ‘아버지의 맨발’을 닮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내 “아버지 죄송해요. 얼굴은 아버지 모습을 그대로 닮았는데 발은 닮기 힘들 것 같아요.”
돌아가신 후 아버지의 자리가 더 커져있었기에 ‘맨발의 할아버지’에 대한 물음에 기억을 더듬는 최목사의 눈시울은 촉촉해집니다. “신앙은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보여주는 것이라는 걸 죽기까지 몸소 실천하셨던 분이에요.”
목이 멨는지 말을 잠시 아낀 그는 생전에 육신의 고통까지도 견뎌가며 전도에 힘썼던 아버지의 모습을 전합니다.
“기력이 다하신 아버지께서 한번은 식사 중에 ‘아가 숟가락 좀 가벼운 거 없니?’라고 하시는 거예요. ‘얼마나 기력이 떨어지셨으면 숟가락이 무겁다고 하실까’하고 맘이 아팠지만 아버지의 전도는 막을 수가 없었어요.”
말씀을 전하고 사랑을 전하는데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저 전해야만 했던 ‘맨발 할아버지’라 불리는 최춘선 목사님.
십자가에 빚진 자 된 그의 마음속에는 부인과 자식은 물론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사명감과 열정이 자리 잡아 강직한 전도자의 삶을 그칠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조금의 의심 없는 믿음의 소유자
“아버지는 내일 일은 절대로 걱정하지 않는 분이셨어요. 당장 내일 먹을 쌀이 없어도 전부 나눠주시고, 새 옷을 사다드리면 밖에 나갔다 들어오실 때 다 떨어진 헌옷으로 바꿔 입고 들어오시고, 심지어는 ‘바울아 너는 따뜻한 옷이 또 있지?’라고 하시며 제 잠바들도 모두 나눠 주셨으니까요.”
당시 고생을 많이 했지만 부족했던 부분들은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항상 채워주셨음을 전했습니다.
“한번은 다음날 아침에 먹을 쌀을 전부 나눠줘 어머니께서 발을 동동 구르시고 계신데 지방에서 한 성도가 첫 수확한 쌀이라며 새벽차로 올라와 문을 두드린 적도 있었어요.”
어린 마음에 자신의 옷이 하나 둘 없어질 때 마다 속상했었다.고 전하는 아들 최목사.
“중학교 때는 동생들을 모아놓고 ‘아버지가 예수를 믿어서 우리가 이렇게 된 것이니 우린 절대로 예수 믿지 말자’라고 했던 때도 있었어요. 김포 일대의 땅이 대부분 아버지 소유였고 자동차가 다섯 대나 있었는데 모두 나눠주고 개천 다리 밑에서 살다가 쫓겨나는 일이 비일비재해서 어린 마음에 상처가 컸었던 것 같아요.”
독립운동을 하셨던 아버지가 도장하나만 찍으면 증손자까지 4대가 학비 지원을 받으며 경제적으로 안정을 찾을 수 있었던 터라 아버지를 원망하는 마음도 없지 않았습니다.
“어떤 이들은 서류를 위조해가며 받아내려는 독립유공자 자격을 ‘나라가 반쪽인데 그 돈을 받을 수 없다’며 끝까지 도장을 찍지 않으셨어요. 목숨을 걸고 지키셨기에 대한민국을 지독히도 사랑하셨죠.”
동생들을 모아놓고 ‘예수 믿지 말자’던 사춘기 시절의 상처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두 채워주시고 회복시켜주시고 인도해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위탁하신 가족의 삶 ‘예수 믿지 말자’던 다짐이 ‘오직 예수, 오직 기도’로 바뀌어 버린 사건도 있었습니다.
모든 재산을 다 나눠주고 쫓기다가 생계를 위해 어머니와 미술학원을 열기로 했을 때였습니다. “미술학원 첫 입학식 때였는데 사회를 맡았던 저에게 기도를 하라고 하시는 거예요. 교회도 아니고 기독교학원도 아니라 망설이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바울아! 너는 그거도 못하니?’라는 불편한 마음을 심어주시더라고요. 그래서 큰소리로 ‘하나님께 기도 드림으로 제1회 동그라미 미술학원 입학식을 시작 하겠습니다’라고 외치고 기도를 드렸죠. 아니나 다를까 4명이 바로 그 자리를 떠나버렸어요. 그런데 다음날 하나님께서 8명으로 채워주셨어요.”
그 이후로 항상 기도를 하며 월요일마다 예배를 드리는 미술학원이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 중에 하나님을 빼고는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어요.”라는 아들 최목사의 고백은 모두 기적이고 이적뿐이라 동감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고등학교를 입학하는 딸을 키우며 아버지의 자리에 있는 최목사에게 한 가지 아쉬움이 있습니다. “저도 아버지가 되어보니 아버지께서 많이 외로우셨을 것 같아요. 늘 죄송한 마음뿐이에요. 제가 친구 같은 아들이 되어드렸어야 했는데…”
가정에서 성경이외에는 아무런 얘기도 하지 않던 아버지를 너무 높이만 바라봤던 후회스러움이 최목사에게 밀려왔습니다. “아버지께서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셨던 거예요. 자신보다 더 잘 키울 수 있는 하나님께 자식들의 교육을 위탁하셨던 거죠.”
무소유와 희생의 삶 자녀들은 하나님께 위탁하고 나라를 위해서 또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몸 바쳐 싸움을 하던 최춘선 할아버지.
어느 날 버스기사에게 떠밀려 골반 뼈가 부서져 처음으로 자식들에게 고통의 눈물을 보이면서도 전도를 멈추지 않았고, 두꺼운 발바닥에 유리조각이 박혀 피가 흘러도, 예수쟁이라는 어떠한 핍박도 할아버지에게는 아무런 염려가 되지 못했습니다.
“아버지의 임종을 지켜드리지 못했었는데 마지막 손을 흔드시는 모습이 아버지의 임종의 모습이었어요.”
할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에 대해 아들인 최바울 목사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젓가락 하나 들어 올릴 힘조차 없다고 하시면서도, 전도해야만 한다고 나가셨어요. 제가 아버님의 시신을 발견한 것은 수원행 1호선 전동차 안이었는데, 의자에 앉으신 상태로 잠든 듯이 그렇게 편안한 모습을 하고 계셨어요. 맨발의 전도로 외롭게, 그러나 올곧게 천국의 길을 열어 가셨던 거여요.”
그의 생전에 예수의 가르침을 '교조적'으로 실천하는 아버지로 인해 가족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었습니다.
장남은 동생들을 모아놓고 '예수를 믿으면 이렇게 힘들게 사니까 믿지 말자'고 얘기했을 정도였으며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사후 부친의 삶의 진실을 알게 될 때까지 신앙을 거부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장남은 목사가 됐으며 차남은 아버지 사후 아버지의 이해할 수 없던 모습의 의미를 깨닫고 통회하며 비로소 신앙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장남 최바울 목사는 예수를 제대로 믿고 나니까 아버님의 삶이 비로소 이해가 되더라고 말합니다.
아들의 결혼식 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신발을 신으셨다는 최춘선 할아버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맨발의 사랑으로 지켜낸 맨발의 천사.
그런 아버지의 삶을 닮아가고자 하는 아들의 마음이 욕심일지도 모르겠지만 아버지가 하나님께 위탁하셨기에 은혜 가득한 무소유의 삶으로 사랑을 전하는 삶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대전 현충원 국립묘지 제2애국지사 묘역 906호 '애국지사 최춘선의 묘'에는 다음과 같은 묘비명이 새겨져 있습니다.
일제 치하 암흑기에는 나라의 광복을 위해 광복 후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사랑과 평화를 꽃피우기 위해 애쓰신 맨발의 전도자 아버님의 그 뜻과 믿음을 저희 자손들이 이어받겠습니다.
3. 최춘선 할아버지와 광신자의 차이
두 가지 면에서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행동에 이론적인 뒷받침이 있는 것과 이론적인 뒷받침이 없는 것의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분의 첫 인상은 광신자의 모습이었습니다.
거리를 30년 동안을 신발을 신지 않고 다닌다든지 몸에 덕지덕지 전도 문구를 붙이고 다니는 모습들은 한 광신자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존경심을 갖게 되는 것은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그는 김구선생님과 함께 귀국한 독립투사였다는 것입니다.
그가 신발을 벗고 다닌 것은 "나라가 통일되지 않아서" 라는 뚜렷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독립투사로서 국가에서 보조금을 지급하겠다고 했으나 통일되기 전에는 완전한 광복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거절했던 분입니다.
둘째는 행동이 따르는 믿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교회를 이끌어가는 목사님이셨습니다. 그는 김포공항에서 경인 국도에 이르는 수백만평의 땅을 갖고 있던 부자였으나 6.25 때 월남한 사람들에게 이사람 저 사람에게 농사지으라고 땅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3000평의 땅을 남겨 두었었으나 자신의 이름으로 등기를 하지 않고 있다가 그 땅조차 다른 사기꾼에게 값없이 넘겨주어 버렸습니다.
그렇기에 그 분은 스스로 가난을 선택한 사람입니다.
세째, 그분의 행동이 철학이 있는 일관성 있는 행동이었기 때문에 그는 광인과는 다른 것입니다.
광인의 행동은 언제나 예측이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최춘선 목사님은 30년 동안을 일정한 시간, 일정한 장소에서 늘 목적이 있는 행동을 하셨습니다.
한겨울에도 맨발로 돌아다니시는 행동은 이해할 수 없었으나 일관성 있는 당당함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반박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자신이 하는 행동에 뚜렷한 목표가 있고, 그 목표를 행동으로 옮기며, 그 행동이 일평생 일관성이 있었기에 무조건적인 광신자가 아니라 이 시대 훌륭한 신앙인 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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