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률(The Golden Rule)(마7:12)
예수께서는 천국 시민의 가장 지고(至高)한 행동 규범으로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탁월한 교훈을 제시하셨다. 물론 이 교훈은 정확히 주고받는, 즉 타산적으로 똑같은 양만큼 받을 것을 기대하며 주라는 뜻이 아니다.
① 이 교훈은 철두철미 이타적(利他的)인 윤리 규범으로서 본질적으로 이기적인 우리들에게 내가 남에게 기대하는 만큼 남도 나에게 기대하고 있음을 각성시켜 준다. 실로 우리의 욕구는 이웃의 욕구가 무엇인지를 알게 하는 척도이며, 우리의 요구의 양은 곧 남에 대한 자기 부인(self-deny)과 자기 헌신의 양인 것이다(Lange).
② 서로 자기 권리 주장만을 앞세우지 말고 겸손하게 먼저 사랑하는 적극적 이타주의에의 요구로 이해할 수 있다. 예수께서는 이 적극적 이타주의의 최고의 모범으로써 십자가 희생을 결행하셨다(빌 2:8; 요일 4:10). 한편 이웃 사랑의 실천적 측면에서 이 교훈은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마22:39)는 대계명과 그 맥을 같이한다.
③ 이웃의 뼈아픈 처지에 적극 동참함으로써 불화와 분쟁과 정죄 등으로 일그러져 가는 이사회의 악순환의 고리를 제거하라는 명령으로 이해할 수 있다(G. B. King, The Negative Golden Rule, JR, VIII, pp. 268-89, 1928).
출처: 『톰슨III 성경주석』, “마태복음”.
첫댓글 저는 실력이 부족해서 좋은 주석의 설명 내용을 타붙하여 올렸습니다. 117년만의 대설에 안전하고 평안하시길 기원합니다.
어설픈 설교나 큐티 보다 그게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장코뱅 공감합니다.
황금률은 주님이 직접 가르쳐주신 생활 강령입니다. 어렵더라도 순종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아멘!
<호크마 주석>
마 7: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칼빈은 이 말씀이먼저 말씀(7-11)과는 연락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말씀이 바로 윗말씀과 어떤 관계 있는 것을 발견하지 못한 것뿐이다. 이 귀절의 우리말 번역은 너무 의역이 되어 있다. 이 말씀의 원문을 글자대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곧, "사람들이 너희에게 행해 주기를 원하는 바의 모든 것들을 그와 같이 너희가 저희에게 행하라"고 할 것인데 이것은 두 가지로 적극성을 가지는 도덕률이다. (1) 인본주의에서는 기소불욕을 물시어인하라(내가 원치 않는 것을 남에게도 행치 말아라)라고 하여 겨우 악을 다른 사람에게 하지 않을 정도이지만 여기서는 자기에게 좋은 것을 남에게도 하라고 하였으니 적극적 도덕이다. (2) 이것은 남들이 나에게 선으로 갚아줄 줄 미리 생각하고 행하라는 말씀이 아니고 남들이야 네게 그렇게 행하건 아니 행하건 나는 그들에게 그렇게 행해야 될 것을 가르친다. 눅6:30-26의 말씀을 보면 분명히 그 뜻이다. 이것은 사랑의 정신으로 선을 행함이니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다(롬13:8-10).
세간에는 고래로 이와 비슷한 말들이 많이 있어 왔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다 소극적인 것이었을 뿐 적극적인 것은 아니었다.
@장코뱅 호크마가 톰슨보다는 더 내용이 깊네요.
<매튜 헨리주석>
마7:12
1. 규정된 공의의 규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은 우리가 단지 알고 믿어야 할 것에 대해서만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에게 마땅히 행해야 할 바에 대하여 가르치시기 위함이었다. 또한 우리와 동일한 신앙과 입장을 가진 동료나 제자들에게 분만 아니라 우리와 관계된 일반적인 모든 사람들에게 행해야 할 바를 가르치기 위하여 오셨다. 공평의 황금률은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해 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처럼 다른 사람에게 그와 같이 해 주는 것이다. 이교도의 황제인 알렉산더 세베루스(Alexander Severus)는 이 황금률의 위대한 신봉자였으며, 그의 서재의 벽에 이 구절을 적어 놓고 가끔 재판을 할 때에 인용했으며, 이 구절 때문에 그리스도를 존경하였으며 그리스도인에게도 호의를 가졌다. Quod tibi, hoc alteri-"즉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 이 구절은 부정적으로 취하든지(Quod tibi fieri non vis, ne alteri feceris), 긍정적으로 취하든지 결국 그 의미는 동일하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악한 일을 행하였거나 또는 그들이 악을 행하려고 마음먹더라도 그 일을 그들에게 행해서는 안 된다. 만일 그러한 일이 우리에게 행해졌다면 우리의 생각대로 해서는 안 되며 꾸준히 견딤으로써 우리가 소원하던 것이 이루어지도록 해야할 것이다. 이것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위대한 계명에 근거를 두고 있다. 우리는 자신에게 품은 것과 꼭 같은 사랑을 이웃에게 베푸는 것과 같이, 동일한 선한 임무를 수행해야만 한다. 이 규율의 의미는 3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1) 우리는 스스로 적합하거나 합리적이라고 인정되는 것을 이웃에게 행해야만 한다. 우리 자신의 판단에 호소되고 있다. 그리고 우리의 판단은 그것이 우리 자신의 경우가 될 때 우리가 기대하고 바라는 내용과 관계되어 있다.
(2) 우리는 다른 사람을 우리 자신과 같은 수준에 놓고, 그들이 우리에게 빚진 것만큼 우리도 그들에게 빚진 것으로 생각하라. 우리는 그들과 똑같이 공의를 행할 의무를 가지고 있으며, 그들도 또한 우리와 같이 공의로 말미암은 혜택을 얻을 수 있다.
(3)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에 스스로를 상대방의 특수한 경우와 처지에 똑같이 두고,
대하여야만 한다. 만일 내가 이러한 사람과 계약을 맺는다면, 이러한 사람들이 겪는 질병과 고통을 당한다면 나는 어떻게 취급되기를 바랄 것인가? 그들의 경우가 언제 속히 실지로 우리의 경우가 될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이것은 올바른 추측인 것이다. 적어도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만일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대로 그들에게 행하지 못하였다면 하나님께서 우리가 남에게 행했던 것과 같이 우리에게 심판하지나 않으실까 하는 것이다.
@장코뱅 한편의 설교 같은 긴 설명 감사합니다.
성경의 교훈에서만 적극적으로 남에게 하라고 했고, 다른 데서는 모두 소극적인 규율을 말해 왔었군요.
결국 사랑에 관한 규율인데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었기에 적극적인 사랑의 요청은 구약과 신약에서 비롯되었다고 알게 되니 마음이 웅장해지네요.
어렸을 때부터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에게 대접하라는 말씀을 많이 들어왔고 순간순간 이 말씀을 상기하며 살아왔었는데, 범위와 깊이를 확장시키는 건 신앙의 성숙에 따라 달라질 것 같습니다. 사랑은 실천의 문제이기에 순종과 자기 부인과 십자가를 지는 희생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죠.
주님을 바라보게 하는 좋은 구절이네요.
깊고 풍성한 댓글을 자주 달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공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