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의 투쟁(화투)/정동윤
봉은사와 선정릉 탐방 중에 짬짬이
꽃들의 게임인 화투패의 주인공인
꽃과 함께 있는 동물을 확인하며
숲에 깃든 이야기를 하다가 다 마치지
못하고 말았다.
가수겸 화가인 조영남 씨가 화투 그림을 많이 그려서 장안의 화제가 되기도 하고 송사에 걸려 들기도 한지라
언제 다시 나머지 이야기 전할까
고민하다가 글을 전해봅니다
그리 새로운 이야기도 아니니 재미삼아
훑어보시길 바랍니다.
1.정월이라
나무의 우두머리 소나무와 학이 보이지요
소나무는 우리 민족이 가장 사랑하는
절개와 기개의 상징이며 학은 고고한 기품으로 장수하는 새해 첫 해를 바라보는 두루미입니다.
먼저 소나무 관련 시조 두 편을
1 월을 대표하여 올립니다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고 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랑장송 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하리라
-성삼문-
송림에 눈이 오니 가지마다 꽃이로다
한가지 꺽어내어 임계신데 보내고자
임이 보신 후에야 녹아지면 어떠리
-정철-
2.이월이라
매실나무 아래 휘파람새가 정답구나
매화를 좋아하는 꾀꼬리라고 말하는 이도
있지만 휘파람새가 정설입니다
백매, 홍매, 동매, 춘매, 설중매
옛 선비들이 가장 좋아하고 계절의 상징
매란국죽 중에서 봄의 매화가 제일 곱지요
두견이의 알을 품어주는 휘파람새의
탁란이 안타깝지만 타고난 팔자를
작은 새들이 바꾸지도 못하고 받아들입니다
2 월의 시는
달과 설중매/함민복
당신 그리는 마음 그림자
아무 곳에나 내릴 수 없어
눈 위에 피었습니다
꽃 피라고
마음 흔들어 주었으니
당신인가요
흔들리는 마음마저
보여주었으니
사랑인가요
보세요
제 향기도 당신 닮아
둥그렇게 휘었습니다.
3.삼월이라
벚꽃 만발한 나무 아래 장막을 치고
안주를 챙겨 술 잔 기울이고 있지 않을까요
장막에 가려 사람이 보이지 않아도
술 향이 번지는 듯합니다
팔만대장경도 6 할 이상이 벚나무로 만들었고 봄꽃 축제의 대부분은
벚꽃 개화 시기에 맞춰서 진행하지요
이웃 섬나라는 한꺼번에 피고 지는
화끈한 꽃이라 나라꽃인 양 좋아하지요
한꺼번에 전력을 다해 꽃피우느라
에너지 소모가 많아 나무의 수명이 짧아요
하얀 벚꽃이 지고 떠나야 봄이 무르익지요
3월의 시는
벚꽃 그늘에 앉아 보렴/이기철
벚꽃 그늘 아래
잠시 생애를 벗어 놓아 보렴
입던 옷 신던 신발 벗어놓고
누구의 아비 누구의 남편도 벗어놓고
햇살처럼 쨍쨍한 맨몸으로 앉아보렴
직업도 이름도 벗어놓고
본적도 주소도 벗어놓고
구름처럼 하이얗게 벚꽃 그늘에 앉아 보렴
그러면 늘 무겁고 불편한 오늘과
저당 잡힌 내일이
새의 날개처럼 가벼워지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벚꽃 그늘 아래 한 며칠
두근거리는 생애를 벗어 놓아 보렴
그리움도 서러움도 벗어 놓고
사랑도 미움도 벗어 놓고
바람처럼 잘 생긴 알몸처럼 앉아 보렴
더 걸어야 닿는 집도
더 부서져야 완성하는 하루도
도전처럼 초조한 생각도
늘 가볍기만 한 적금통장도 벗어 놓고
벚꽃 그늘처럼 청청하게 앉아보렴
그러면 용서할 것도
용서 받을 것도 없는 우리 삶
벌떼 잉잉거리는 벚꽃처럼
넉넉하고 싱싱해짐을 알 것이다
그대, 흐린 삶이 노래처럼 즐거워지길 원하거든
이미 벚꽃 스친 바람이 노래가 된
벚꽃 그늘로 오렴.
4.사월이라
등꽃 향기에 두견이 반갑습니다
등꽃은 보라색인데 처음 화투를 만들 때
보라색 염료가 귀해 검은색으로 대신하였고
두견이는 귀촉도, 자규, 접동새,
불여귀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우리 민족의
정서에 깊이 들어와 사연도 많은 두견새가 등꽃 향기에 취해 밤새 울 것만 같구나
4 월의 시는
접동새/김소월
접동/접동/아우래비 접동//
진두강 가람 가에 살던 누나는
진두강 앞 마을에/와서 웁니다.
옛날, 우리나라/먼 뒤쪽의
진두강 가람 가에 살던 누나는
의붓어미 시샘에 죽었습니다.
누나라고 불러 보랴/오오 불설워
시새움에 몸이 죽은 우리 누나는
죽어서 접동새가 되었습니다.
아홉이나 남아 되던 오랩동생을
죽어서도 못 잊어 차마 못 잊어
야삼경(夜三更) 남 다 자는
밤이 깊으면
이 산 저 산 옮아 가며 슬피 웁니다
5.오월은 난초라 하는 사람도 많은데
꽃창포로 여겨집니다
꽃창포 핀 호숫가를 나무 울타리와
걷기 좋은 길을 만들어 놓았네요
오월 단옷날에는 창포로 머리를 감으면
머릿결이 아름다워진다고 하죠
계절의 여왕 5 월의 시는
창포/신동엽
축축한 찬비는 주룩주룩 내리는데
찬 유리창에 이마를 기대이고
남색 외로운 창포만 바라본다
빗줄기 속에 떠올랐다간
조용히 숨어버리는
못견디게 그리운 모습
혈맥을 타고 치밀어오르는
애수 고독 적막
눈물이 조용히 뺨을 흘러내린다
찢기운 이 마음
우수 짙은 빗줄기 속을 방황하는데
한결 저 꽃에서만 설레이는 이 가슴에
정다운 속삭임이
아아, 마구 뛰어나가
꽃잎 이즈러지도록 입술에 부벼 보고 싶구나
미칠 듯이 넘치는 가슴에 힘껏 눌러보고 싶구나.
6.유월의 그림엔
모란과 나비, 풀꽃인 작약보다
나무 꽃인 모란이 더 고귀하겠지요
삼국사기에 모란은 향기가 없어
벌 나비가 보이지 않는다는 선덕여왕의
젊었을 때의 예지는
이 시대엔 먹히지 않아 모란도
향기로 나비를 부르고 있는 모습이지요
꽃 중의 꽃, 모란은 천 년이 지나도
최고의 꽃으로 그 농염함은 알아줍니다
6 월의 시는
모란이 피기까지는/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서 봄을 여윈 슬픔에 잠길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버리고는
천지의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오르는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 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예순날 마냥 섭섭해 우옵네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아직 나는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7.칠월이라
싸리꽃과 멧돼지,
불에 태워도 연기가 나지 않는 싸리나무
지리산 게릴라들이 숨어서 밥을 지을 때
연기 나지 않는 싸리를 불쏘시개로 사용,
우리 민족은 싸리로 빗자루, 울타리, 바구니를 만들어 우리의 실생활로
깊숙이 들어왔지요
더위에 지친 멧돼지가
싸리 숲에서 쉬고 있습니다
7 월의 시는
싸리꽃/이병초
잡초 무성한 밭뙤기 오목한 곳에
싸리꽃이 피어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수의처럼 하얀꽃 무더기에
햇살이 잠잠히 흩어진다.
견딜만한 아픔을 내린다는
하늘은 무심히 푸르고
찍어 먹고 싶은 봄햇살
친친 휘감으며 눈을 뜨는 싸리꽃
더는 손꼽아 기다릴 사연도 없다는 듯이
밭두렁 쪽으로 쓸쓸히 바람 타는 꽃
치성드리는 할머니 뒷모습 같은 꽃을
오목 가슴 쓸어내리며 바라본다
8.팔월이라 팔공산,
달은 휘영청 밝아 가을에 피는 풀꽃이
만발하여 모두 그려 넣고 인쇄했는데
풀들이 너무 많아 까맣게 되었어요
그래서 지상은 검게 칠하고
보름달만 크게 남겨두었답니다
8 월의 시는
달/김윤현
한 보름은
오른쪽부터 슬슬 줄이며 산다
또 한 보름은
왼쪽부터 슬슬 불리며 산다
한 달을 그렇게 산다
한 해를 그렇게 산다
영원히 그렇게 산다
달은
좌와 우를 맺었다가 풀었다가
우와 좌를 비웠다가 채웠다가
삶이 참 둥글다
그 달빛 비친 곳곳에는
사람이 살고 있다
좌우가 서로 달달 볶아대며.
9.구월이라
국화와 술잔이 보이는구나
국화 만발한 가을날, 그대와 둘이 앉아
물 위에 술잔 띄워놓고
국화향에 취하여 술잔을 기울여 볼까요
장난 좋아하는 봉이 김선달도
누런 국화주로 골탕 먹은 사건도 있었고
도연명은 늦가을 국화를 남은 삶의
희망처럼 좋아하셨지요
9 월의 시는
국화 옆에서/서정주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뒤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내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보다.
10.시월이라
붉은 단풍 숲의 사슴이라
농사도 끝나고 한가하여 사슴을 사냥하며
가을을 즐기는 시절이라
추수한 들판의 풍요로움과 넉넉한 인심으로
시월을 상달이라 하지 않던가요
계절의 절정으로 여겨지죠
10 월의 시는
단풍의 이유/이원규
이 가을에 한 번이라도
타오르지 못하는 것은 불쌍하다
내내 가슴이 시퍼런 이는 불행하다
단풍잎들 일제히
입을 앙 다문 채 사색이 되지만
불행하거나 불쌍하지 않다
단 한 번이라도
타오를 줄 알기 때문이다
너는 붉나무로 나는 단풍으로
온몸이 달아오를 줄 알기 때문이다
사랑도 그와 같아서
무작정 불을 지르고 볼 일이다
폭설이 내려 온몸이 얼고
얼다가 축축히 젖을 때까지
합장의 뼈 마디에
번쩍 혼 불이 일 때까지.
11.동짓달은
오동나무와 봉황새
봉황은 푸른 오동나무에만 깃들고
대나무 열매를 먹으며 감로수만 마시는
평화로운 때만 나타나는 금슬 좋은 귀한 종족이라 재물이 들어오는 패지요
내 말년의 삶이 동짓달 꽃 본 듯이
봉황이 깃들면 얼마나 좋을까요
11 월의 시는
오동나무의 웃음소리/김선우
서른 해 넘도록 연인들과 노닐 때마다
내가 조금쯤 부끄러웠던 순간은
오줌 눌 때였었는데
문 밖까지 소리 들리면 어쩌나
힘 주어 졸졸 개울물 만들거나
성급하게 변기 물을 폭포수로 내리며
일 보던 것인데
마흔 넘은 여자들과 시골 산보를 하다가 오동나무 아래에서 오줌을 누게 된 것이었다
뜨듯한 흙냄새와 시원한 바람 속에
엉덩이 내놓은 여자들 사이,
나도 편안히 바지를 벗어내린 것인데
소리 한번 좋구나!
그중 맏언니가 운을 뗀 것이었다
젊었을땐 왜 그 소릴 부끄러워했나 몰라, 나이 드니 졸졸 개울물 소리 되려 창피해지더라고
내 오줌 누는 소리 시원타고 좋아라
하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딸애들은 누구 오줌발이 더 힘이 좋은지,
더 넓게, 더 따뜻하게 번지는지
그런 놀이는 왜 못하고 자라는지 몰라,
궁금해하며 여자들 깔깔거리는 사이
문밖까지 땅 끝까지
강물소리 자분자분 번져가고
푸른 잎새 축축 휘늘어지도록
열매 주렁주렁 매단 오동나무가 흐뭇하게
따님들을 굽어보시는 것이었다
12.섣달은
버드나무와 나그네, 뛰어오르는 개구리
장마철 불러난 개울물에서 뛰쳐나오려는
개구리가 수십 번의 실패 끝에 버드나무
가지를 붙잡고 탈출하는 장면을 보고
나그네가 큰 교훈을 얻고 노력하여 성공했다는 사연
그래서인지 다른 패의 광 글자는 모두 아래에 있는데 비광만 위로 올라갔네요.
12 월의 시는
버드나무 한 그루/이홍섭
마을 어귀에 서 있는 버드나무 한 그루
수도승처럼 긴 머리칼과 하염없는 그림자
마을에 들어서는 사람들은
누구나 버드나무 밑을 지나가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온몸에 묻은 버드나무 그림자를
금세 잊어버린다
저물녘, 노을진 하늘을 배경으로
서있는 버드나무 한그루
사람들은 알 수 없는 힘으로
그 밑을 지나왔던 기억을 되살린다
마치 버드나무 아래에서
사진이라도 찍어놓았다는 듯
밝음과 어둠 사이
알 수 없는 신비한 힘이
버드나무 한 그루를 거기에 있게 한다.
아하, 이래서 가수며 화가인 조영남씨도
화투 그림 즐겨 그렸구나.
첫댓글 와이고오 대단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