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 편이 많지는 않지만 서울에서 속리산까지 가는 버스가 존재했기에 보은을 거치지 않고 가까운 터미널에서 내려 도보로 이동할 수 있었다. 정이품송에서 비롯된 법주사로 향하는 이 길은 조선의 7대 왕 세조와 그 결을 함께 한다.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를 때까지 쌓은 업보를 완화시키고자 찾은 이 길에 얽힌 이야기를 떠올리며 가마꾼들과 함께 이곳을 통과했을 당시를 그리니 순간 주변의 분위기가 뒤틀리는 듯했고, 시작부터 약간의 긴장감과 기대감으로 뒤섞인 채 법주사 매표소에 다다를 수 있었다.
입장권 구매 후 매표소에서부터 법주사 경내에 다다를 때까지 우거진 수풀들 사이로 산뜻한 공기가 마스크를 뚫고 느껴질 정도였다. 이런 게 삼림욕을 한다는 거구나 라는 깨달음과 동시에 내가 지금 속리산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자연스레 깨닫게 됐고, 잠시 주변에 앉아 배낭에 담긴 카메라를 꺼내면서 주변을 눈에 담았다. 우거진 나뭇가지들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은 마치 무대 위의 핀 조명처럼 날 부각해주는 듯했고 이유는 잘 모르겠다. 그냥 그날은 모든 순간이 비범했고 특별하게 느껴졌다.
1. 대한민국 유일의 목탑 '팔상전'
다리를 지나 경내로 진입하니 천왕문 너머로 자태만 봐도 팔상전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천왕문 바로 앞에 자리한 나무들 덕분에 시선이 가운데로 모여졌고 어렴풋이 보이는 작은 불상들 덕분에 불국으로 가는 길에 신비로움이 더해져 한창 분위기가 고조됐다. 내 주변으로 보이는 사람도 하나 없어 부처님과 그를 지키는 사천왕들과만 대면한 듯했고 길고 긴 세월만큼 풍기는 고풍스러움도 순간을 더욱 매력적으로 만들어줬다.
법주사 주변을 돌아보니 사방이 속리산으로 둘러싸인 분지로 이뤄져 있었고 순간 해남에서 다녀왔던 대흥사가 떠올랐다. 그곳도 역시 사찰 가장 높은 곳 대신 낮은 곳에 대웅보전이 자리해 특이한 사찰 구성을 보여줬는데, 이곳은 풍기는 존재감 때문인지 자연스럽게 팔상전 주변으로 모든 사찰들이 재편되는 듯했다. 그만큼 희귀했으며 경내 한가운데 자리 잡은 그 존재감은 직접 보지 않고서는 설명하기 힘들 정도였다.
1984년 4월 화순 쌍봉사 대웅전이 전소되면서 이 땅에 유일한 목탑으로 남은 법주사 팔상전의 모습을 마주한 순간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지 못할 정도로 너무 신기했고 그 자체로도 너무 매력적이었다. 일반에 가장 잘 알려진 목탑은 경주의 황룡사 9층 목탑일 것이다. 하지만 그 웅장한 자태는 고려시대 몽골군이 전 국토를 유린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렸고 지금은 그곳의 흔적만이 쓸쓸히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 그 실체를 아는 이는 이 땅에 남아 있지 않았다. 신비롭게 느낀 이유가 이 때문일까? 한참 뒤 구도를 잡기 위해 주변을 돌아보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
팔상전 뒤쪽으로 자리한 거대한 금색의 불상이 인자한 미소로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실내는 사진 촬영이 금지였고 덩달아 청아한 목탁 소리와 함께 한창 불공을 드리는 스님께서 자리해 계셔 주변을 배회한 뒤 조심스레 셔터를 눌러 나갔다. 맑은 하늘 아래 햇빛을 머금은 법주사 전각들은 청아했고 누르는 족족 마음에 드는 작품이 순간 탄생했다.
잠시 카메라 전원을 끄고 캡을 닫은 뒤 안으로 들어가 본다. 내부에는 석가의 일대기를 담은 탱화가 새겨져 있었다. '팔상도'라 불리는 이 그림을 보면서 문득 인도를 여행했을 당시 티베트 망명정부가 자리해 있는 '맥그로드 간즈'를 여행하면서 만났던 교리를 전파하고자 했던 티베트 불교의 모습을 떠올리며 천천히 주변을 거닐어 본다. 내부에 풍기는 묵은 냄새가 그렇게 싫게만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마스크를 벗지 못한 게 아쉽게 느껴질 뿐이었다.
불현듯 이런 생각도 전해진다. 문맹률이 낮아진 것은 현대 즈음부터이고 당시에는 글을 아는 사람들도 많지 않았던 시기라 위정자들을 비롯해 지배계층이 아니라면 글을 모르는 것은 당연했고 불교의 교리를 전달하고자 그림을 활용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이 그림을 매번 설명해 줄 사람이 없다면 이 그림을 보고 받아들이는 것도 제각기 일 듯 싶다. 숭유억불 사상 그 사이에서도 민간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던 이 땅에서의 불교. 당시를 살았던 사람들은 이 그림을 보며 무슨 생각들을 했을까? 문득 그들의 생각이 궁금해진다.
2. 방대한 크기의 금동미륵대불
법주사 대웅보전 뒤쪽으로 돌아가지 않는 이상 경내 어디에서도 불상의 모습을 눈에 담을 수 있을 만큼 존재감이 정말 확실했다. 가장 높은 곳에서 인자한 미소로 사찰을 굽어 살피시니 부처님의 뜻에 기반해 수행을 이어가시는 스님들의 모습도 새로운 느낌에 기반해 다가왔다. 억겁의 세월을 거치면서도 끝내 본모습을 되찾아 오늘날에 이르게 됐다.
통일 신라 시대 당시 조성된 이 불상은 지금처럼 금이 아닌 청동으로 주조되어 천년의 세월을 견뎌 냈다고 한다. 하지만 시간은 흘러 이 땅의 주인이 바뀌고 불교를 대하는 풍조도 바뀌게 되며 이 불상에는 암울한 기운이 드리우게 되는데 때는 조선 후기 흥선대원군이 정권을 잡은 뒤 왕권 강화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경복궁 중건을 단행하면서 사건이 시작된다.
실권을 쥔 채 세조 정치의 시기 문란한 정국을 바로잡기 위해 단행했던 개혁들이 탄력을 받으며 조선 정부의 수익은 많이 늘어났지만 경복궁 중건은 그 규모조차도 감당이 안 될 정도의 대공사였기 때문에 부족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대원군은 갖가지 수단과 방법을 강구하게 되는데 그중 한 가지가 바로 당백전 제조다. 당시 부족한 자금을 채워 넣고자 당백전 제조를 명목으로 법주사에 오랫동안 자리매김했던 이 불상이 사라지며 법주사의 전경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1964년 당시 대통령이었던 박정희의 관심에 힘입어 복원됐지만, 안전상의 문제로 해체됐고 이후 1990년에 5년 간의 작업을 거쳐 청동으로 다시 주조했고, 이후 2002년에 약 80kg의 금을 들여 전체를 개금 금동미륵 입상으로 거듭 나 지금에 이르고 있다. 본래의 위치에 그 자리를 찾아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한편으론 그 원형을 훼손하지 않았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계속 들어 아쉬움을 금할 길이 없었다.
3. 다양한 유산들
앞서 언급한 두 개의 유산들을 제외하고서도 야외에 조성된 불교 박물관이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닐 만큼 곳곳에 국보급 문화유산들이 즐비했다. 그중 사진으로 직접 담지는 못 했지만 명성은 뒤쳐지나 여행자가 바라본 관점에서의 유물은 단연코 '석연지'라 말할 수 있을 듯하다. 지나가는 분들의 설명을 귓동냥으로 들었을 당시의 그 소스라칠 정도의 놀라움은 여전히 내 머릿속에 살아 숨 쉬고 있다.
국보로 지정될 정도로 그 가치는 인정받았지만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기에 법주사 한 곳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말 그대로 돌로 만든 작은 연못으로 물을 받은 뒤 그 위에 연꽃을 띄워 두었다고 한다. 오늘날에도 사진 찍는 분들이 가장 좋아하은 주제이면서 동시에 주변을 꾸미기 위한 방식으로 이런 방법을 택했을지는 전혀 가늠치 못했다. 요즘은 행사 때 레드 카펫 주변을 조명으로 수놓곤 하지만 문득 당시의 그 모습이 궁금해진다.
안타깝게도 현재 석연지는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금이 갔다고 한다. 인터넷을 통해 당시의 모습을 시연한 게 없을까 싶어 샅샅이 찾아봤지만 관련 자료들을 찾을 수 없었다. 주변을 서서히 돌아보며 한 철이라고 하더라도 수려함이 묻어나는 법주사 경내를 머릿속으로 그려 본다. 통일신라 시대의 석조 공예 기술을 보여 주는 이 작품 당시를 살았던 사람들의 센스가 상당히 돋보였다.
더불어 석등을 두 발로 선 상태에서 들어 올리고 있는 X자 형태의 쌍사자 석등 또한 통일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유산이다. 부처의 진리를 상징하는 석등을 사자가 높이 치켜들어 올림으로써 불법을 수호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고 전해진다. 법주사 말고도 다른 사찰에도 이런 형태의 석등이 존재한다지만 이 모습을 실제로 본 건 처음이었기에 상당히 신선하게 다가왔다. 아래를 받치고 있는 걷소 좀 달라 보였지만 사자라는 것을 알고 더욱 신선하게 다가왔다.
위에 나열한 것들을 국보와 보물 그리고 지방 유형 문화재로 지정된 것 들까지 포함하면 하루 꼬박 이곳에 머물러도 시간이 부족하다 싶을 정도로 적당한 규모에 알맹이가 꽉 차 있었다. 금동미륵대불이 임진왜란 당시 법주사는 충청도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승병들의 본거지로 활용되며 호국 정신이 깃든 곳으로써도 유명하다. 굴곡진 우리네의 역사 동안 그 형태도 온전히 복원했기에 앞으로 이 땅에 좋은 기억들만 깃든 채 영원히 잘 보존되기를 부처님과 한동안 눈을 맞춘 뒤 조심스레 빌어 본다.
4. 적막감이 감돌던 순간
정말 신기하리 만큼 조용했다. 아무리 평일이라고 해도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분명 있었고 속리산 등산 전 법주사에 들러 사찰을 돌아보고자 하는 사람들도 드문드문 보였다. 덩달아 팔상전 주변으로 문화 해설사로 보이는 분과 함께 이곳에 찾아 조곤조곤 설명을 진행했지만 전혀 들리지 않았고 오롯이 이곳에 분위기에 파묻은 채 하나하나 떠둘러보며 공간을 마음껏 탐닉하고 있었다. 평탄한 지형 덕분에 굳이 오르막 길을 오를 필요 없이 원하는 결과물을 얻기 위해 경내를 수도 없이 왔다 갔다 할 수 있었고 지형은 평탄했지만 그 안에 깃든 서사는 알면 알수록 구미가 당겼기에 더 알고 싶은 생각이 절로 들었다.
이 순간을 마무리 하기 전 법주사에 깔려 있는 전각들을 기준 삼아 모든 것 들을 재구성 해본다. 천왕문 주변을 장식하고 있는 석연지 그 위로 떠다니는 연꽃잎은 부처님의 말씀이 지배하는 이 공간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 준다. 지금과 같은 조명이 없었던 과거 법주사의 밤 모습은 석등을 주변으로 은은한 불빛이 더욱 주변을 그 안에 내포된 의미와 함께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 준다. 그 안에 꽉 찬 내용과 서사로인해 즐거웠던 지나간 시간들은 머리와 사진으로 기억한 채 사찰 밖을 나섰다.
정이품송 공원에서부터 시작된 여정은 세조와 결을 같이한 뒤 순간을 탐닉한 채 공간을 재구성하는 것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다. S자 곡선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곳으로 유명한 말티재 고개로 넘어가기 전에 더위를 달래고자 카페에 앉아 주변을 정돈했다. 태풍으로 부러진 정이품송을 바라보며 일정을 마무리해 본다. 속리산 자락에 올라 법주사를 바라보면 경내 전체를 한눈에 담을 수 있다는 소리를 최근 들었다. 다음 보은을 찾을 때는 그 모습을 담기 위해 장비를 더 챙긴 뒤 쉽게 보지 못하는 모습을 담을 것을 기약하며 순간을 마무리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