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이라는 죄는
신이 용서하지 않는다.
한 악마가
사람들을 유혹하는 데 사용해 왔던
도구를 팔려고 시장에 내놓았습니다.
도구의 종류는 참으로 다양했습니다.
악마가 사용하는 도구답게 흉악하고
괴상망측한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진열된 도구들 한쪽에
값을 매기지 않은
작은 쐐기 하나가 놓여 있었습니다.
“저건 뭐죠? 왜 값을 매기지 않았어요?”
물건을 사러 온 다른 악마가
궁금증을 참다못해 물었습니다.
“응, 그건 절망이라는 도구인데,
파는 게 아니야.
난 저절로 틈을 벌려 강하다고 하는
그 어떤 사람도 쓰러뜨려.
그래서 다른 건 다 팔아도
저것만은 팔 생각이 없어.
내가 가장 즐겨 사용하는 것이거든.”
제가 절망에 빠질 때마다
떠올려 보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저는 늘 그 악마가
제 마음의 틈새에다
절망이라는 이름의
쐐기를 박지 않기를 바랍니다.
어린 학생에서부터 대기업 회장,
대법원장, 대학총장, 도지사,
시장, 고등학교 교장,
촉망받는 젊은 여배우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들이 절망에 빠져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게
오늘 우리의 현실입니다.
1년에 평균 400여 명이
한강에 투신자살을 시도하고,
그 중에서 3분의 2가 익사체로 인양됩니다.
언젠가
‘자살하려는 사람들은 꼭 읽어주세요’
라는 글이 쓰인 노트 한 권이
한강대교 난간에 매달려 있다는
신문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 노트는 한강에 투신했다가
살아난 사람이 쓴 것으로
“차가운 물속에서
숨이 끊어질 때까지 받는
고통의 시간을 살아서
고통을 받는 시간보다
수천 배 수만 배 더 길다”
는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 노트가 아직 한강대교 난간에
걸려 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오죽하면 그런 노트까지 등장했을까요.
한강경찰대 구조대원이 말에 의하면
구조된 지 며칠 뒤에
다시 한강에 뛰어드는 사람도 있고,
구조된 뒤 대원들이 방심한 틈을 타
구조선에서 다시 뛰어내리는 사람도 있고,
정신을 차리자마자 왜 살렸느냐고
때리고 꼬집고 하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몇 해 전,
수능시험이 있던 날에
본 신문기사가 영 잊혀지지 않습니다.
남원에 사는 한 여고생이
첫째 시간에 언어영역 시험을 치르다가
그대로 나와 이웃집 아파트 옥상에 올라가
투신자살을 했다는 기사였습니다.
또 재수생이
수능 전날 아파트에서
뛰어 내린 사건도 있었습니다.
저는 그 여고생과 재수생,
또 그들의 부모를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아픕니다.
그때 그들이 자신을 조금만 더 사랑했더라면,
‘그까짓 시험 좀 못 치면 어때?
다음에 또 치지 뭐’
하고 생각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제가 좋아하는 감독
압바스 카아로스타미가 만든 영화
‘체리향기’의 한 장면이 떠오릅니다.
이 영화는 주인공 바디가
수면제를 먹고 누워 죽음을 기다리는 동안
자신의 몸 위로 흙을 덮어 줄 사람을
찾아나서는 이야기인데,
돈을 많이 준다고 해도 아무도
그의 제의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한 노인이 그의 제의를 수락하고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바디에게 들려줍니다.
그 얘기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전에 목매달아 죽기 위해
줄을 매려고 나무에 올라간 적이 있소.
그런데 나무에 달린 체리가 눈에 띄어
무심결에 먹어보니 너무도 달더군요.
그래서 계속 먹어보니
문득 세상이 너무 밝다는 게 느껴졌소.
붉은 태양은 찬란하게 빛났고,
하교하는 아이들의 소리는 너무도 평안했지요.
그래서 아이들에게 체리를 따서
던져주고 나무를 내려왔소.”
바디는 노인의 이야기를 들으며
불현듯 삶에 대해 강한 애착을 느낍니다.
제가 아는 분 중에도
바디 같은 분이 있습니다.
지금은 사업에 크게 성공해서
남부럽지 않게 살고 있으나
그에게도 고생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하도 고생스러워
한번은 목매달아 죽으려고
넥타이 두 개를 끈으로 묶었습니다.
그러나 죽지는 못했습니다.
거실 가득히 스며들어오는 햇살에
먼지가 빛나는 것을 보고,
‘저 먼지도 저렇게 빛나는데’
하는 생각이 들어 묶은 넥타이 두 개를
장롱 깊숙이 넣어 두었습니다.
그리고 30년이 지난 지금도
그 넥타이를 꺼내보고 다시 힘을 얻습니다.
저는 오른쪽 주먹에
자그마한 흉터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제가 젊은 날에 절망에 빠져
골목의 시멘트벽을 주먹으로
힘껏 내리쳤을 때 생긴 것입니다.
저는 그 흉터를 볼 때마다
그때를 생각하며 다시 마음을 추스릅니다.
신이 희망을 주지 않더라도
자기 스스로 희망을 만들어야 합니다.
절망이라는 죄는
신이 절대 용서하지 않습니다.
죽음 가운데 있던 노인에게는 체리향기가,
자살하려던 남자에게는 넥타이 두 개가,
절망에 허우적거리던 저에게는
주먹의 흉터가 결국 희망이 되었습니다.
쥐 한 마리를
캄캄한 독 속에 집어 넣으면
3분을 넘기지 못하고 죽지만,
그 독 속에 한 줄기 빛이 새어 들어가면
적어도 36기간은 죽지 않고 견딥니다.
희망은 죽음 앞에서도
생명을 지켜내게 하는 강한 힘입니다.
부랑자와 빈민들을 위해 평생을 산
프랑스의 피에르 신부는
“어떤 이들이 자살하는 지경까지 가는 것은,
그들에게 용기가 없어서가 아니라
더 이상은 버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용기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결핍된 것은 사랑이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만이 절망을
이겨내게 할 수 있다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이제 다른 사람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나 자신이 나를 사랑하도록
더욱 노력합니다.
그래서 가끔 나의 사랑하는
삶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좋습니다. 한번 열심히 살아봅시다!”
그러면 제 삶도 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좋습니다. 한번 열심히 살아봅시다!”
- 정호승의 산문집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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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이라는 죄는 신이 용서하지 않는다 / 정호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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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2.14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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