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스럽게 화려한 꽃담에는 다 이유가 있답니다
출처 : 오마이뉴스 | 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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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현충일을 맞는 6월 6일 새벽, 나는 정읍 진산동 영모재에서 눈을 떴다. 현실인지 비현실, 꿈인지 생시인지 잠깐 어리둥절했다.
전날(6/5일) 구파 백정기 의사(윤봉길, 이봉창 의사와 함께 삼 의사 중 한 분) 순국 제89주기 추모식에 참석한 것은 백정기 의사 종질려인 백남이 시인(서사시집 『구파 백정기』의 저자)이 나의 가까운 지인이기도 했고, 현충일로 인해 14년째 이어온 송파문화원 시창작반의 화요일 강의가 모처럼 휴강이 된 덕분이기도 했다.
백정기 의사 기념관은 초입부터 말끔하게 정돈이 되어 있었고, 웅장한 기념관 본채는 넓은 잔디 뜨락을 품고 있었다. 차일이 쳐진 그늘 아래 유족회와 기념사업회 관계자들, 지역 정치인들, 문화인들을 포함하여 이삼백 명은 족히 참석한 것 같았다. 나의 지인 만도 서울 등 각 처에서 박관서, 주선미, 함진원, 김문 시인과 백정희 소설가가 동석하였다.
추모식이 끝나고 기념사업회 측에서 정성껏 마련한 점심을 먹고 나니, 자연스레 떠날 사람은 떠나고 남을 사람은 남는 와중에 지역에서 새로 만난 분들도 합류하게 되었다. 백남이 시인을 비롯하여 이용찬 브레이크뉴스 문화국장, 백신종, 박관서, 한성례, 함진원, 황두승, 백소연 시인과 이도헌 웹툰 작가가 그들이다.
몇 대의 차에 나눠 타고 정읍 출신인 박정만 시비를 찾아 좀 헤맸다. 정읍 출신들도 근래에 그의 시비가 옮겨진 사실을 모르고 있어서였다. 다른 건 몰라도 대부분의 시인들은 "나는 사라진다/ 저 광활한 우주 속으로"란 두 행이 전문인 박정만의 시를 기억할 것이다.
박정만(1946~1988) 시비 앞에서와 영모재로 자리를 옮긴 후에도 박정만 추모위원회 건립에 대한 논의가 이어졌다. 곧 좋은 소식이 있을 것이다.
국가등록문화재(2005년 지정)인 정읍 진산동 영모재에 도착했을 때 경이로움을 가졌던 것은 앞의 기사에서 언급한 내용 전부에 의해서다. 이 댁은 현재 이용찬 국장이 머물면서 관리하고 있으며, 전국의 예인들이 드나드는 명소가 되어가고 있다. 지난 4월에는 이곳에서 '화전놀이' 등록문화재 재현행사도 있었다. (나의 필력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정도이며, 위에 링크된 글을 읽어야 그 전모를 알 수 있다. 필독 엄수^^. 팁 두 개가 더 있다. 윗글에 빠진 게 하나 있다면 '바리'다. 진돗개 교배종으로 아주 순한 녀석인데 인근 농가에서 놓은 덫에 한쪽 뒷다리를 잃었다. 또 하나는 기녀들이 마시기도 하고 목욕도 하던 샘터. 모시풀이 우거져 뜨락 아래쪽의 샘터를 완전히 가렸다고 한다. 호기심이 강한 나는 망설임 없이 물이끼가 풍성한 샘물을 두어 모금 떠 마셨다. 역사의 뒤안길 같은 약간의 짭짤한 맛이 느껴졌다)
고택답게 전면과 측면 창호문을 들어올려 드러난 대청마루. 이용찬 국장이 영모재 곳간을 뒤져서 내온 술과 사과, 백남이 시인이 이웃 마을까지 나가 거의 슈퍼를 털어 온 맥주와 막걸리, 회와 족발, 수박과 과자 등속으로 교잣상이 휘어질 정도가 되었다. 영모재의 내력답게 음주가무는 기본. 백소연 시인은 거문고를 뜯고 한켠에 놓인 피아노를 쳤고, 컨디션이 안 좋다면서도 소프라노로 노래 두 곡을 들려주었다. 늦은 밤 뜰에서는 장작이 타고 우리는 1000cc 맥주잔에 담긴 막걸리를 돌아가며 마셨다.
정읍으로서도 귀중한 사료들인 현판과, 누구누구가 썼다는 글들과 1920~30년대의 사진 등이 대들보를 중심으로 천정 밑과 벽에 돌아가며 걸려 있었다. 이용찬 국장이 사비로 사들인 고가구들도 깊은 울림을 주었다. 그의 작업실이기도 한 사랑채에는 오래되고 무거운 책들이 가득했고, 우리는 첫 번째 시집(『잠자는 돌』, 1979)을 비롯한 박정만 시인의 시집들을 오래 쓰다듬었다.
22시를 전후로 정읍역으로 갈 사람들은 기차 시간표에 맞춰 또 가고, 이윽고 영모재의 밤이 왔다. 남은 자들은 정면에서 오른쪽 두 칸에 있는 안채를 비롯해 곁방, 사랑채 등으로 나누어 이곳에 와서 한결 맑아진 머리를 뉘었다. 이곳을 거쳐간 분들이 올려다보며 잠들었을 대들보와 서까래, 들으며 잠들었을 밖의 고요와 바람 소리를 보고 들으며 나도 아주 편하고 깊은 잠에 들었다.
첫댓글 샘터의 샘물이 제일 궁금해서
여름이 가기전에 가봐야 겠네요.
좋죠. 한 번 가도 잊을 수 없는 시공간 하나가 자산으로 남겨지는 곳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