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길 / 에드워드 콘즈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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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대중불교(대승불교)
2. 불교와 세속의 권력
국왕이나 황제의 지원이 없었다면,
아시아 전역으로 불교가 전파되는
대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을 것이다.
인도의 위대한 통치자 중 하나인
아소카 왕(BCE 270~236)은
가장 먼저
불교가 세계 종교가 되는데 기여했다.
그는 불교를
인도 전역에 속속들이 전파했을 뿐 아니라
인도 밖의 스리랑카, 카슈미르, 간다라는 물론
당시 그리스의 왕자들이던
시리아의 안티오코스 2세,
마케도니아의 프톨레미 필라텔포스와
안티고노스 고나타스에게까지 전했다.
아소카 이후에도
불교는 북인도를 지배한
위대한 정복자 카니슈카 왕(재위 약78~103),
하르샤 바르다나(재위 약606~647),
그리고 벵골을 지배한
팔라 왕조(750~1150경)의 지원을 받았다.
인도 밖에서는,
중국의 황제들과 여황제들이
불교로 개종한 사례가 많았으며,
몽골의 칸들과
일본의 뛰어난 정치가였던 쇼토쿠 태자 등도
불교를 받아들였다.
인도의 변방에서도
여러 시대에 걸쳐 많은 불교 왕조가 출현했다.
위에 언급한 군주들 가운데
불교를 신봉한다는 이유로
다른 종교를 배척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팔라 왕조와
스리랑카, 미얀마의 지배자만 예외였다.
불교는 신도들에게
배타적 충성심을 요구하지 않았다.
쿠샨 왕조의
카드피세스 1세(재위 약 25~60)는 자신을
'진정한 다르마에 항상 능숙한 자'라고 불렀다.
그가 만든 화폐의 한 면에는 붓다의 좌상이,
다른 면에는
카피사 시의 제우스가 새겨져 있다.
카니슈카 왕은
그의 화폐에 이란의 신들인
베레트라그나, 아르독초, 파르소 등과
힌두교의 시바 신,
그리고 붓다의 입상이나
연화대 위의 좌상을 새기고
그리스 문자로
붓다를 지칭하는 Boddo
또는 Boudo를 써넣었다.
굽타 왕조의 왕들은
비슈누 신앙과 불교 신앙을 둘 다 지지했다.
발라비의 왕들(490년 이래)은
시바 신을 섬겼지만 불교를 보호했고,
하르샤바르다나는
불교 신앙을 태양 숭배와 융합했다.
이외에도 많은 예가 있지만 생략한다.
인도 지역 밖에서도
이와 유사한 일들이 많았다.
1250년경 위대한 칸 몽카는
경교와 불교, 도교 모두를 애호했다.
그가 프란체스코 수도회원인
루브루크의 윌리엄에게 말했듯이
"다양한 종교들은
한 손에 붙어 있는 손가락들처럼 여겼기"
때문이다.
비록 불교도들에게
"다른 종교들이 손가락들이라면
불교는 손바닥"이라고 말했지만 말이다.
쿠빌라이 칸은
주로 불교 성향이었고, 경교도 인정했다.
지배자들은 통치가 목적이기 때문에,
불교 교리의 영성적 가치에 대한 확신이
불교를 보호하는
유일하거나 주된 동기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출세간적이고
무정부적으로 보이는 불교 교리가
어떻게 백성들에 대한
통치권을 강화시켜 주었을까?
불교는
세속을 떠난 이들의 마음에
평화를 줄 뿐 아니라,
세상을 거머쥐고자 하는 자에게도
그것을 건네준다.
게다가 이 세계는 뿌리 깊은 악이며
이 세상에서 진정한 행복을 얻기란
불가능하다는 믿음은
정부에 대한 비판을 억누르는 경향이 있다.
정부 관리의 억압은,
한편으로는 생사윤회하는 세속에
불가피하게 수반되는 일이며,
또 한편으로는
자신의 과거 죄업에 대한 업보이기도 한 것이다.
불교의 비폭력성을 강조하는 방식은
나라를 평화롭게 유지하면서
지배자의 위치를
더욱 안정되게 했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세속의 삶을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소유가 적다고
쾌활함이 저하되지도 않을 것이다.
그리고 통치자로서도
침울한 백성들보다는
쾌활한 사람들을 통치하기가 훨씬 좋다.
불교사회에서는
불교교리에 따라 소박한 삶을 영위하고,
버마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가난한 삶을 원할 것이다.
콜리스는 『버마의 공판』에서,
가난한 버마인들을 경멸하는 영국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적절한 평을 했다.
어떤 버마인들은
여느 마을 사람들처럼
자기 소유의 집과 농장, 아내와 많은 자식들,
말 한 필과 좋아하는 여배우,
와인 한 병과 시집 한 권,
거세한 경주용 송아지들,
그리고 조각 장식이 있는 티크 수레,
장기판, 주사위 한 세트만 있으면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의 절정에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의 현금 수입이
1년에 10파운드밖에 안되어 불쌍하다'
라고 여기는
영국인들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불교는
늘 개인이 수중에
물질적 부를 축적하는 것을 삼가게 했다.
오히려
물질적 부를 보시하거나
경건한 일에 쓰도록 권장해왔다.
실제로 버마와 티베트에서는
이런 일들이 수세기 동안 일어났다.
유럽 대중들 사이에 장려된
물질의 소유와
생활수준 향상에 대한 욕구는
모든 형태의
전제정치를 붕괴시켰을 뿐 아니라
안정되고 영구적인
정부의 권위를 허무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이런 사실을 감안하면,
왜 불교가
아시아의 전통적인 전제 군주들에게
축복이었는지 이해할 수 있다.
신석기시대 이래로
지배자는
특히 여러 종족들로 구성된
광대한 제국을 다스리는 통치자는
어느 정도 신성시되어 왔다.
왕이 신적 존재라는 관념은
이집트, 중국, 일본에서 매우 익숙하다.
로마와 비잔티움에서도
이러한 관념이 일정 부분 역할을 했고,
아주 최근에서야
민주주의 이념으로 대체되었다.
그러나 히틀러를 받아들이는
수많은 독일인들을 보면,
또 소련에서 나오는
스탈린의 선동 선전문을 보면,
아직도 신성화 관념이
놀랄 만큼 살아 있음을 알 수 있다.
인도에서는
아무리 영토가 작은 나라여도
백성들은 통상 왕을 신이라고 믿었다.
왕의 의지가 곧 신의 의지로 여겨진다면,
왕의 도덕적 권위는 엄청나게 증대될 것이다.
그래서 위대한 정복자들 사이에서
특히 불교가 지지를 받았다.
불교도들은
전륜성왕이라는 이론을 통해,
능동적으로
불교를 옹호하는 군주들의
명망을 한껏 끌어올렸다.
여러 경전들은
전륜성왕을 다소 이상화시켜 묘사하고 있다.
여기에서
『디비야 아바다나 Divyavadana』에 서술한
한 구절을 소개한다.
그분은
군대의 최선봉에 선 승리자이시며,
정의 곧 다르마의 왕이시며,
칠보 즉 윤보. 상보(코끼리). 마보(말). 여의주보(여의주), 여보(왕비와 시녀).
장보(장군). 주장 신보(대신)를 거느리신다.
100명의 아들들과
용감하고 아름다운 영운들과
적군을 파괴할 군사들을 이끌 것이다.
그분은 바다까지 이르는
광대한 전 영토를 정복하여,
그곳의 모든 폭압과
고통의 근원을 제거할 것이다.
그분은 벌하지 않고,
칼 없이
다르마와 평화로 세계를 다스릴 것이다.
불교를 애호한 지배자들이
거의 이러한 이상적 이념으로 살았다는 것은
불교도들 사이에 전하는
허구적인 이야기이다.
나중에 대승불교가 공들여
새로운 신들의 사원을 만들었을 때
불교를 숭상한 왕들은 후광을 입었다.
10세기에 자바와 캄보디아,
그리고 스리랑카의 지배자들은 보살로 여겨졌다.
12세기 말엽 캄보디아에서
자야바르만 7세는
모친의 조각상을
반야바라밀, 즉 붓다의 어머니로 조성했다.
20세기에 태국의 왕은
여전히 '신성한 붓다'이다.
1326년에 세워진 위구르 명문에는
칭기즈 칸이
'일생보처의 보살'이라고 새겨져 있다.
몽골 전통에서
쿠빌라이 칸은
전륜성왕이자 현인이고
성인(후툭투Hutuktu)으로 추앙되었다.
여행자들은 종종
몽골과 티베트의 통치자를
'살아있는 붓다[생불, 활불]'라고 부른다.
이것은 부적절한 명칭으로,
달라이 라마를
관세음보살의 화신으로 여기거나
또는 우르가의 후툭투를
아미타불의 현현으로
여기는 의미와는 다르다.
불교에서는
붓다와 보살이 세계 곳곳에
화신으로 나타난다고 보는데,
앞에서 언급한 위대한 사람들이
그러한 화신이라고 말한다.
여기에 함축된 정확한 의미가 무엇이든 간에,
그 암시가 지배자들의 명망에
큰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 관념은
신민들을 더욱 유순하게 할 뿐만 아니라
승려들이 정부를 위한
영적 경찰관 역할을 하게끔 유도한다.
인도 밖의 인도차이나, 자바, 티베트 등
불교의 영향을 받은 지역에서
이집트 같은 신정국가가 출현한 사실은
역사상 기이한 일 가운데 하나이다.
산업화 이전의 모든 사회에서는
나라의 번영과 안녕이
우주의 진정한 지배자,
보이지 않는 천상의 신성한 힘과
조화를 이루는 데 달려 있다고 믿었다.
고대 그리스의
장편 서사시 「오디세이」에서
오디세우스의 운명은
매 순간 올림포스의 신들에 의해 결정되었다.
지배자는
불교 승려와 친밀해짐으로써
보이지 않는 신성의 힘들과
우호 관계를 지속하려고 했다.
그리고 그 신성의 힘들과
특별히 친밀하다고 자부하는 승려는
책임 있는 조언자로서
높은 직위에 오르기도 했다.
예를 들면, 550년경
위수가 쓴 중국 불교 이야기에는
400년경에 살았던
카슈미르의 승려에 대해 이렇게 서술되어 있다.
그는 미래의 예언과
재난을 막는 주술에 능했다.
그리고 다른 나라의 운명을 상세히 점쳤는데,
많은 부분에서 사실로 증명되었다.
몽손은 자주
그(담무참)에게 나랏일을 물었다.
지금까지 언급한 이유들로
지배자들은 불교뿐만 아니라
그들의 권위를 뒷받침해줄
어떤 종교라도 후원했다.
그렇지만
특히 불교를 선호한 두 가지 요인이 있다.
많은 경우 일본과 티베트처럼
그 나라에 들어온 종교는 다양했지만
고도한 문명의 이점을
함께 지닌 것은 불교뿐이었다.
예를 들면,
일본의 쇼토쿠[성덕] 태자가
불교 신앙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을 때
중국 문화의 전 체계가 바다 건너 전해졌다.
티베트인들은
불법과 더불어 인도의 문법, 의학,
천문학과 점성술 같은
세속의 학문들도 받아들였다.
또 하나,
불교에는 범세계적이고
국제적인 요소들이 있다.
그래서 불교는
광대한 영역을 통일하고자 하는
군주들에게 환영받을 만했다.
불교는 영적 진리가
어떤 특별한 지역이나 풍토,
인종이나 종족과 강한 유대 관계에 있다고
해석한 적이 한 번도 없거나 거의 없다.
이러한 불교에 비하면
힌두교는 종족적 금기들로 가득 차 있다.
불교에는
한 지역에서 타 지역으로
쉽게 옮겨갈 수 없는 것이란 절대 없다.
인도의 건조한 평원이든,
히말라야의 눈 덮인 산정이든,
자바의 열대 기후든, 따뜻한 일본이든,
외몽골의 황량한 추위든
어디든 잘 적응할 수 있다.
인도인, 몽골인,
그리고 중앙아시아의 눈이 푸른
북유럽 인종들 모두
불교를 자신들의 필요에 맞게 조정했다.
비록 불교는
본질적으로 산업주의에 거부감을 보이지만,
지난 40여 년간
일본의 편치 않은 산업 환경 속에서도
잘 적응하며 헤쳐왔다.
유연하고 적응력이 뛰어난 불교 교리는,
광대한 제국을 다스려야 하는 지배자에게
충분히 가치가 있다.
왜냐하면
이질적인 민중들에게
공통된 신행을 공유하게 하고,
여러 지역의 승려들이
상호 교류를 이뤄나가면
제국을 통합하는 데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인도에서 인도 밖 다른 나라들로
불교가 전파되는 데에는
상인들과 교역인들이 두드러진 역할을 했다.
힌두교의 엄격한 카스트제도는
정통 힌두교가
인도 바깥으로 전파되지 못하게 했다.
특히 바다 항해는
힌두교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고,
항해자들은
해외에서 오염되었기 때문에
돌아오면 다시 정화되어야 한다고 여겼다.
결국 중세 인도에서 해외무역의 상당 부분은,
가는 곳마다
자신들의 종교를 전파한
불교도들이 맡게 되었다.
지금까지 불교가
세속의 권력에 기여한 바를 살펴보았다.
이제 불교가
대중과 재가신도들에게
무엇을 해주었는지 살펴볼 차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