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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지문을 기억하는 건 그의 지문이 아니다
깍지 낀 손의 기억이 식어가므로
아직 완성하지 못한 문장의 페이지가 아닐까
노트 속 마침표 대신 찍힌 지문들
급한 약속이 생각난 듯 내가 사라지면,
그는 간발의 차이로 때를 놓쳐버린 손님처럼 지난 시절을 잠시 후회할지도 모른다
너무 늦게 왔다는 후회는 쉽게 씌어진 문장과 같고
이번 생에선 마주치지 말자
일찍 이루어진 꿈, 서늘하겠다
노트의 시간이 멈추면 주인을 잃는 내 책상 모서리는 혼자 닳아가겠지
불면의 베갯잇에 머리카락 몇 올, 검은 외투 안쪽 주머니엔 무엇이 남아 있을까
혹시 깜박 잊고 두고 간 마음 따위
그러나 근황 이어지다
사과 주름이 깊어질 때까지 바라만 보는 화가와 같이
하루 한 줄만 쓴다, 마침표와 지문 사이
문득 떠오른 어느 학자의 말
세상의 모든 책보다 숨겨놓은 포도주 한 병이 더 향기롭다
기억의 풍경이 기우는 동안
안부는 없고 오늘도 조금밖에 죽지 못했다
지문의 문장을 마치기에 이른, 먼
- 오래된 근황 / 이은규
너는 모르지 네가 황급히 떨어뜨린 슬리퍼 한 짝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오늘 밤도 종이 울리고 나는 네가 흘린 슬리퍼를 주우러 다니지
네가 뭘 보고 웃었는지 너는 잘 모르지
나는 일러주러 왔다
커다란 발을 가진 재미난 사내를 만들기 위해
무한히 신발을 줍고 있는 밤이야
다 가져가도 좋아
나의 젖은 손과 나의 취한 시간과 나의 목소리
고장난 시간들로 붐비는 시계를 좋아해
너는 잘 돌아가는 빅벤을 열고,
작은 나사 하나를 던진다
혁명의 텔로스는 빛나는 구름 위로 숨겨드렸지
그러니 우린 그냥 지나가는 길에
뻐꾸기의 익살스런 울음을 위해
5시25분 26분 27분
쉬지 않고 노래하는 새들의 빨갛게 젖은 깃털을 위해
유리 숲 속으로 슬리퍼를 던지네
폭탄은 정각에 터지지 않네
구름은 매일 흩어진다네
그래도 저기 오는 가난한 유리장수
한 번도 손목시계를 차본 적 없는 추억처럼
나는 너를 사랑했네
하나 남은 흰 발을 사랑했네
- 신발장수의 노래 / 진은영
잊혀지지 않는 그리움이 있어
으스름 달빛
소쩍새 소리 타고 오지만
흔적 찾을 수 없는 눈꺼풀 속에
절절하게 살아있어도
하늘가에 지워져 가는
엷은 구름처럼
읽어낼 수 없는 그리움이
나를 오래도록 붙들고 있어요
- 그리움 / 홍혜원
혜성의 숨겨진 이름은 살별
서로의 살에 별이 뜨는 순간
궤도를 이탈한 별들은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않았을까
살별이 뜰 확률은
핵과 먼지와 얼음이 섞여
섭씨 57도의 온도가 되었을 때 가능하다는 가설
궤도를 이탈할수록
비늘처럼 떨어지는 먼지들로 별의 꼬리는 자꾸 길어졌다
움직이는 방향의 반대쪽을 향해있는 꼬리
서로의 꼬리를 보지 못했으므로
그런 건 없다고 믿어버린 별들은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않았을까
이국의 먼 나라에서
살별은 오랫동안 흉조의 상징이었다
그런 날 사람들은 꼭꼭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재앙은 문틈으로 미풍처럼 오는데
시간이 흐르고
살별의 자리는 서로의 환부가 된다
궤도 내로 다시 진입한 별들은 다는 별을 만나거나
궤도이탈을 위해 끊임없이 떠돈다는 것
종종 환부를 기억하다 스스로, 먼지가 되는 별도 있다
신의 마음을 알고 싶다는
어느 과학자가 정설이라는 듯 말했다
혜성은 밝고 총명한 마음을 가진 별이다
가설과 정설 사이를 망설이는, 별 하나
- 살별 / 이은규
아무 것도 없는 호수를 가졌다
이 호수를 버릴 데가 없다
- 사람도 그림자라 불리는 호수에서 / 서정윤
겨울에 오셨다가
그 겨울에 가신 님이
봄이면 그리워라
봄이 오면 그리워라
눈 맞고 오르던 산에
진달래가 피었소
- 진달래 / 피천득
너에게 반을 줄게
나는 나머지 반을 가지면 되니까
나는 반과 반을 합치면 하나가 된다고 생각했다
너는 하나와 하나가 만나면 둘이 된다고 생각했다
나는 불완전했고
너는 가득 차 있었다
가뭄과 홍수 사이에서
우리는 자유롭지 못했다
채울 것이 간절한 사람에게는
희망이 있었다
증식할 것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욕망이 있었다
반반이었다
너는 반밖에 안 되어서
반나절 만에 그것을 다 써버렸다
터벅터벅 돌아오는 네 몸뚱이는
반으로 쭈그러들어 있었다
두 눈에는 빛이 있었다
빈손에는 여지가 있었다
움켜쥘 것이 아직 남아 있었다
나에겐 아직도 반이 남아 있단다
나는 반의반을 떼어주었다
네가 그것을 떼어먹을 것을 알면서도
반에 반했다가
반에 반해버리듯이
갈 때는 반이면 충분했다가
돌아올 때는 반으론 부족하다는 듯
네 몸뚱이의 반만 보여주고
너는 뒤돌아섰다
반나마 늙을 때까지
너는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부풀고자 하는 것의 관성은 대단하므로
갚는 것은 소모를 거역하는 행동이므로
반반이었다
반에 반을 더해도
너는 하나가 되지 않았다 언제나
또 다른 반이 더 필요했다
아무리 반으로 쪼개도
나는 아직 있다
나머지 반이
반의반이
반의반의 반이
콩알만 해졌다가
팥알만 해졌다가
티끌처럼
손가락으로 집을 수 없을 만큼 작아진 반이
나는 그 반으로 다시 시작할 것이다
태산과 점점 더 멀어질 것이다
- 반의반 / 오은
살아 있습니까?
아직 아무 이상 없습니까
비가 내리는 이유는
그것말고는 없습니까
잘 달리는 사람이
더 빨리 갈까요
장미나무에서는 어째서
모란꽃이 피지 않을까요?
- 우문유희 1 / 서정윤
그런 법이 어디 있어요?
사람이 울며불며 매달린다
여기 있습니다
사람이 무덤덤하게 대답한다
없던 법이 생기던 순간,
몸이 무너졌다
마음이 무너졌다
폭삭
억장이 무너졌다
여기를 벗어난 적이 없는데
단 한 번도 여기에 속한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처음처럼 한결같이 서툴렀다
사람이 사람을 에워싼다
둘러싸는 사람과 둘러싸이는 사람이 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사람이 사람을 어색해한다
사람인데 사람인 게 어색하다
여기서 울던 사람이
길에 매달려 가까스로 걷는다
집이 이 근처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집에 가는 길에 사람이 사람을 만난다
익숙한 냄새가 난다
안녕
어떤 말들은 안녕하지 않아도 할 수 있다
속이 상한 것은
겉은 멀쩡하기 위한 거지
겨우내 겨우 내가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봄은 꽝꽝 얼어붙어 있었다
푹푹 꺼지는 땅 위에 사람이 서 있다
여기에 속하지 못한 사람이
여기에 있다
이런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여기 있습니다
여기 있을 겁니다
- 미시강 / 오은
떠나옴과 떠남이 붐비는 소읍의 터미널
얕은 담장 너머로 백작약 말이 없다
저 꽃의 말은 수줍음이라는데
꽃말마저 버린 꽃의 얼굴처럼
그 언저리에 머무는 그늘이 희게 시리다
방금 출발한 차편에
반생이라는 이름의 그가 타고 있다
이제는 지난 생이라 불러야 하나
마음 놓고 수줍을 수도 없었던 때가 길었다
남은 수줍음마저 꽃그늘에 부려두고 가야할 지금
버리다와 두고가다라는 말의 간격이 길다
모퉁이를 막 돌아나가려는 버스
그 순간을 마주하지 못해 고개 돌렸을 때
백작약 거기 있었다, 피었다
말을 버린 것들은 그늘로 말하려는지
끝내 전해지지 못한 말들이
명치의 그늘로만 숨어들어 맴돈다
허공 속 백작약의 향기가 다만 바람으로 차오를 뿐
모퉁이를 빠져나가던 반생이 인사를 전할 때
나는 배후마저 잃은 하나의 풍경이 된다
마련된 인사가 없는 긴 배웅
순간은 얼마나 긴 영원인가
다시는 마중 나올 수 없는 지난 생이
천천히 소실점으로나마 사라지고
나는 아픈 피를 해독한다는 백작약 앞에 선다
꽃그늘에 후둑, 빗방울
정말 꽃이 되고 싶어, 또는 구름
아홉 배는 내가 더 당신을 사랑할걸 그런 꽃,
새털 옷을 입고
당신 고향 가는 길 앞질러 따라가는
그런 구름
석간신문이 배달됐지만 의미가 없네
죽은 고양이도 쥐떼들의 혼령도
이제 더는 문간 근처를 얼쩡거릴 수가 없어
꽃의 사랑, 혹은 구름
정부 쪽에선 비밀에 부치겠지?
군중심리란 게
사랑에 오염된다면 전략은 힘들어지기 마련이니까
그러나 공기는 느끼지
바람은 느끼고말고
내가 당신, 하며
꽃가루를 공중에 뿌려주면 공기들은 명랑해질 거네
새털 옷은 하늘을 얼마나 기쁘게 할까,
사랑인데
- 익명의 사랑 / 이연주
추억 속에
함박 눈이 내리고 있었다
포장마차 속에서
그와 함께
나누던 잔을 놓고
잔 속에 서로의 은은한
말씀들을 담아두고
주고받던 눈길의 시간
지금, 그때처럼 함박눈 내리지만
그는 없고
그의 그림자도 없는데
기억의 잔속에 그대 담아
무작정 비워내는 자리에
눈발 한없이 흩날리고 있다
- 눈 / 홍혜원
생이별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고
이제 때가 되었다
아직도 허리께서 뜨듯한
불을 지핀 흔적의 욕망,
사랑이라는 안개의 냄새로
한 시야 저밖이 움트고 있다고 느꼈으리라
나는 간다
폐가에서는 다시 탄생을 알리는 거미군단들의
바쁜 행보,
분노라는 어미의 고독한 터널의 음부에서
다시 태어나는 나는
지금은 갈 곳이 두려운 짐승이다
박약한 등뼈를 짐보따리에 우그려 넣다 생각하면
한 시야 저 밖은 아무래도
비로소 늙어 아름다운 날들
나는 간다, 종은 울린다
콧등이 이렇게도 싸아해 두렵기 한이 없는
해질녘 안개의 냄새
- 안개통과 / 이연주
아침 꽃을 저녁에 주울 수 있을까
왜 향기는 한순간 절정인지
아침에 떨어진 꽃잎을 저녁에 함께 줍는 일
그러나 우리는 같은 시간에 머물지 않고
떠도는 발자국 하나
지구의 원점, 그리니치 천문대를 지날 때
흩어진 별들의 고개 기울어지다
알고 있니 천문대의 자오선을 경계로 하루쯤 시차가 난다는 걸,
그도 괜찮지만 착란은 날짜변경선이 지나는 나라의 일,
언제나 거짓말 같은 새벽과 짙은 농담의 밤이 찾아오는 곳
감은 눈동자 위로 반짝이는 열
이별은 이 별에서 헤어지는 중입니다
새의 깃도 바람에 해어지는 중입니다
기억하자 날짜변경선을 동쪽에서 서쪽으로 넘으면 하루 늦게,
반대의 경우 하루가 빨라진다는 걸,
착란의 시간과 변하지 않을 운명에 대한 예감은 잠시 접어두기
문득 망설이던 긴 꼬리별
역일의 선을 그으며 떨어지는 순간
때를 달리한 연인은
아침 꽃을 저녁에 주울 수 없고
우리는 너와 나로 파자되어 단출할 뿐이다
이제 잊는 것으로 기다릴까
향기로운 새의 부리가 전해줄 꽃의 절정
한 잎은 이쪽으로
한 잎은 저쪽으로
- 아침 꽃을 저녁에 줍다 / 이은규
네 몰락이 내 가슴을 흔든다
지옥의 변방에서 하나의 경계선을 그으며
두려움에 떨면서
대 던져진 정체불명의 존재인 나
<나는 아니야> 혼자말로 외치면서
어떻게 해야하나
삶의 빠르기, 높낮이에 관해서
어떻게 해야하나
뒤헝클어진 일그러진 잠의 꿈인 내 심장
몰락이여, 내 가슴을 흔들어라
천왕성에서 내가 기억할 너,
명왕성에서 내가 낳을 너, 사랑하는
너를 상실해 버린, 너
어떻게 해야하나
더 좋은 방법은 없을까
- 몰락에의 사랑 / 이연주
너의 입을 틀어막고 나니
내가 할 말이 없어졌다
혼잣말을 하며 외출 준비를 한다
머리를 뒤로 넘기기에 제격인 손
연출을 준비할 때 우아한 손
나를 표현하는 손
반갑습니다
나는 밝게 웃으며 손을 내민다
다른 손과 맞잡기에 적격인 손
연출할 때 우직한 손
순간을 새기는 손
첫인상을 위해
나는 하지 않아도 될 말까지 한다
테이블 아래서
닫힌 손이 자꾸만 꼼지락거린다
너는 여전히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있을 것이다
입을 두 번 다문 채 있을 것이다
기억한다
내가 거짓말을 할 때마다
너의 두 손이
허공을 휘휘 젓거나
허우적거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나는 화가 난 나머지
손아귀에 나머지 힘을 모두 집어넣었었다
반가웠습니다
참다못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통째로 내밀었다
주먹을 쥔 채로 내민 손을
누가 잡을 것인가
누가 감싸 쥘 것인가
손을 만나지 못한 손은
허공의 갈피를 잡지 못한다
아직까지 나는 주먹을 펴지 않고 있다
속에 든 게 없으므로
꺼낼 마음이 없으므로
- 함구하는 손 / 오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