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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용대, 조선의용군, 동북조선의용군 그리고 조선인민군
6•25 전쟁기념 72주년이 눈앞으로 다가오고 있다.
정전협정을 종전협정으로 바꾸자는 캠페인을 벌이며 100만인 서명운동을 벌였던 것도 아득한 옛날 일처럼 희미하다. 어느 책에선가 한 가지 이념으로 세상을 평정하기 위한 전쟁은 용납될 수 있다는 말을 읽었다. 보다 나은 이념으로 통치하기 위하여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는 전쟁, 보다 나은 세상을 위한 정의로운 전쟁은 선하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한 가지 이념으로 획일화된 위험한 세상을 이미 보았고, 겪었고 인류가 추구하는 보다 나은 이념과 보다 나은 세상은 고정된 것이 아니며 사회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것도 체험하였다. 어떤 이유로도 대량학살과 파괴를 위한 파괴, 반생명적이고 악마적인 전쟁은 미화되거나 정당화될 수 없다.
작년 2월 1일에 일어난 미얀마쿠데타에 저항하는 시위가 내전으로 치닫게 되자 세계 인권과 세계평화에 관심이 많은 한국인들의 단톡방에서 쿠데타세력을 성토하며 반쿠데타, 시민군을 지원하는 응원과 관심이 세차게 일어났다. 그 때 미얀마의 정통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문건 하나가 돌았다. 그 문건의 핵심은 쿠데타군은 항영독립운동을 벌인 미얀마의 정통세력이며 법통이고 그 반대편의 정권은 국제 자본주의 세력에게 조종당하는 하수인이라는 주장이었다. 글쓴이의 역사적 사실에 관한 기술은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는 이미 7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그 정통세력이 정치 독점을 하면서 타락하고 부패하여 제국주의보다 더한 폭력을 휘두르는 반국가적 이기적 집단으로 전락하여 미얀마인들에게 증오와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미얀마의 해방과 독립을 가져온 정통 세력이 권력을 자기 후손들에게 승계하면서 정통과 정의에서 벗어나 부정과 부패의 온상이 되어 미얀마의 적폐세력이 되었지만 그들은 독립운동, 건국의 주역이라는 명분으로 자신들을 절대화, 합리화시키며 국민들을 70년 전의 역사적인 상황, 그 울타리에 가두어 버렸다.
그들의 정권욕으로 시작된 미얀마 내전이 주종족인 버마족과 소수민족들과의 투쟁의 양상으로 전개됨으로서 샨족, 카친족, 몬족들이 북부 산악지대로 피난하여 숨어들었고 친족은 인도 국경지대 미조람으로 카렌족은 태국 국경 쪽으로 피난하여 난민 캠프를 형성하고 있다.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고향과 일터를 떠나 기아와 질병과 죽음에의 공포에 부딪히고 있는 현실이 악의 실체, 전쟁의 실체를 보여준다. 친(CHIN)족 피난민 캠프에서 일하는 어느 지도자가 가장 두려운 것은 굶주림과 종족간의 대량 학살을 야기하게 만드는 내전의 장기화라고 하였다. 굶주림으로 죽느냐? 학살로 죽느냐의 마지노선에서 유령처럼 헤매는 난민들의 마음을 느끼며 마냥 운다.
6•25전쟁은 3년이라는 긴 세월의 내전이었다. 38도선에서 동시에 침공함으로 내전을 일으킨 조선인민군의 전체 21개 연대 병력 가운데 47%인 10개 연대의 병력이 무정, 김두봉, 박효삼, 최창익 등으로 유명한 조선의용군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경악하였다. 일제에 총칼을 겨누었던 우리의 독립군이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남한 동포에게, 사랑했던 사람들에게 총을 겨눌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정황이 너무 슬프다.
김구 주석을 중심으로 하는 임시정부가 1940년 9월 17일, 중경 가릉빈관에서 창설한 광복군은 귀국 후 안타깝게도 해방정국에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한국군 부대 창립에도 큰 기여를 하지 못하였으나 북한에서는 그 사정이 달랐다. 거의 절반의 군인들이 연안파라고 불리는 항일독립운동과 중국의 국공내전에 참가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이론과 실전을 겸비한 군인들로 인민군 5사단, 6사단 12사단을 만들었으며 기타 부대로 배속되어 동족을 살상하는 일에 깊이 관여를 하였다. 감당할 수없는 역사의 아니러니! 5년 전 만해도 우리는 하나가 되어 독립을 부르짖는 한 형제자매였다. 그런데 38도선을 경계로 하여 북은 소련 군정이 남은 미군정이 들어서면서 우리는 서로를 타도의 대상으로 삼았다. 남침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25일만에 전주를 점령한 6사단의 뿌리 더듬어 보니 그들이 조선의용대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중국 관내에서 최초로 세워진 한국인 무장부대가 이율배반적이게도 남침의 선봉에 섰던 조선인민군 절반의 뿌리였다. 역사는 물이라서 담는 그릇에 따라 달라지는 것인가!
아픈 마음을 싸매며 조선의용대, 조선의용군, 동북조선의용군 그리고 조선인민군의 연관성을 고찰해보았다.
조선의용대
1937년 일제가 중일전쟁을 일으킨 해, 11월 12일 남경에서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단체인 조선민족혁명당(김원봉), 조선민족해방동맹(김성숙), 조선혁명자연맹(유자명), 조선혁명청년연맹(최창익)이 모여 조선민족전선연맹을 조직하였다.1) 김원봉, 김성숙, 유자명, 최창익은 의용대 창설에 앞서 중국군사위원회 정치부에 창설계획안을 제출하였다. 당시 중국군사위원장은 장개석, 부장은 진성, 부부장 주은래였는데 주은래는 김원봉의 황포군관학교 시절의 은사로서 정치부를 움직여 창설을 승인받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2) 그러나 군사위원회는 조선의용대를 산하 정치부 관리 하에 두는 조건으로 창립을 승인하였다. 그리하여 1938년 10월 10일 조국으로부터 이역만리 떨어진 중국의 한 도시 무한에서 조선인들이 만든 조선민족전선연맹 산하에 조선인 무장부대인 조선의용대가 항일무장독립전쟁을 목표로 하여 창립되었다.3)
의용대 대장은 조선민족혁명당의 김원봉이 되었으며 의용대 본부에는 기요조, 총무조, 정치조를 두었으며 조장은 각각 신악, 이집중, 김규광이 맡았다. 본부 산하에 2개의 구대(區隊)를 두었는데 1구대 구대장은 박효삼 이었으며 산하에 4개의 분대를 두었고 2구대의 구대장은 이익성 이었으며 산하에 3개 분대를 두었다. 각 분대는 12명으로 편성되었고 전 대원은 도합 89 명 정도였다.4)
조선의용대는 건립 후 바로 무한 보위전에 참가하였다. 대원들은 국민당 사령부를 따라 전선에 나가 일본군에게 반전 선전활동을 벌였으며 적의 정보를 수집하고 중국어로 번역하였으며 위문단을 조직하여 병사들을 격려하고 중국인들의 항일정서를 고무, 추동시켰다. 그러나 무한보위전은 패배하였고 조선의용대는 무한을 떠나 일본의 미점령지역으로 분산되었다. 본부 인원들은 계림으로 옮겼고 가족들과 총무부는 중경으로 옮겼다. 각 구대가 본부와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김원봉은 자주 해당 지구에 가서 각 구대의 활동을 시찰하였다.
중일전쟁이라는 일본의 침략 앞에서 중국국민당과 공산당이 거국적인 항일 여론에 따라 37년 9월에 국공연합을 하였으므로 조선의용대는 출범할 때부터 국민당 정부의 군사위원회 정치부 산하에 속해 있으면서 동시에 중국공산당과 공산당의 무장부대인 팔로군과도 관계를 맺었다. 국공합작 이후 공산당은 무한, 중경에 팔로군 사무소를 설치하였으며 주은래, 동필무, 등영초 등이 사무를 관장하면서 조선의용대를 지지하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조선의용대 본부는 중경에서 주간 모임, 전시회, 좌담회를 열었으며 다양한 항일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조선의용대의 선전활동은 거리에 반전 만화 그리기, 벽보와 표어 부착 그리고 삐라 살포였으며 유동선전대를 조직하여 노래와 연극을 통하여 항일 무드를 조성하였고 라디오방송을 통하여 국내외 한인들에게 항일투쟁에 참여하기를 부추겼다. ❮조선의용대 통신❯이라는 소식지를 발간하였으며 국민당군대 제2포로수용소에서 조선인 포로에 대한 교양공작으로 그들에게 반전항일교육을 실시하였다.
제1구대는 박효삼의 인솔 하에 1938년 10월 23일 한구를 떠난 후에 장사에 이르러 장사의 대화재 복구사업과 이재민 구호를 펼쳤다. 그 후 평강전선에 나가 평강, 통성, 막부산, 신장하 등지에서 싸워 큰 전과를 올렸으며 39년 2월말에 진지선전대와 유격선전대로 나누어 전선과 유격구로 각기 떠났다.
제1구대 선전대는 39년 3월에서 5월에 이르기까지 호북성에서 십여 차례 전투에 참여를 하였다. 또한 십여 차의 매복습격전에서 통신시설을 파괴하고 탱크를 폭파하는 등의 전과를 올려 이름이 널리 알렸으며 따라서 조선의용대의 정치적 영향력도 커졌다. 특별히 김세일이 거느리는 제3지대는 형양에서 8백리가 넘는 강서전선에 도착하여 국민당군대와 함께 봉산, 건주가전투와 서산 유격전에 참여하였으며 전투 후에 일본군 배후에 들어가 삐라 살포와 표어 부착을 하기도 하였다. 40년 초에는 고우, 금하 전선에 나가 유가도와 경강령, 사가령 등지에서 함화선전5)을 하였으며 만산전역에 참가하였으며 항주시내에 들어가 군사시설을 파괴하였다.
제2구대는 무한이 함락되고 있을 때도 한구에서 항일표어를 부착하였다. 그들은 후퇴하는 국민당군대를 따라 서쪽으로 이동하였다. 제 5전구에서 벽보작업, 만화그리기로 선전활동을 펼치면서 여러 전투에 참가하였다. 그들은 39년 2월에 두 부대로 나누었고 일부는 제1전구로 갔고 대부분의 대원들은 5전구에 남아서 전투와 선전활동을 병행하였다. 2구대는 10월에 총회를 열고 구대를 4개조로 나누어 화북과 화중으로 진군하기로 하고 국민당군대와 함께 평한철도의 급현으로부터 고교촌까지의 50리 철길과 전화선을 파괴하며 삐라를 살포하고 표어를 부착하였다. 3일 동안에 15 곳의 철길을 폭파하는 쾌거를 이루기도 하였다.
제2구대는 11월에 조선의용대 제2지대로 이름을 개칭하였고 지대장은 이익성, 정치지도원은 임평이 맡았으며 대원은 73명으로 늘어났다.6)
조선의용대는 중경에서 40년 10월 10일에 창립2주년 행사를 가졌다. 11월 4일에는 확대간부회의를 열어 많은 격론 끝에 조선의용대의 화북행을 결정하였다. 당시 조선의용대가 후방에서 선전활동만을 하기에는 중국 내 정세가 급변하고 있는데 국민당 정부는 일제와 싸우기보다는 공산당 세력타도에 전력을 쏟고 있어서 젊은 의용대원들은 염증을 느꼈으며 화북지역으로 가서 일제와 치열하게 싸우기를 원하였다.
간부회는 지난 2년의 활동을 평가하고 자체 무장 결여, 자력갱신의 문제를 검토하면서 조선동포 다수가 거주하는 지역으로 진출할 것, 대원들의 무장화를 통한 항일무장대오를 건립할 것, 정치선전 공작으로부터 전투공작으로 방향을 전환할 것, 국민당 정부군 지원활동은 대일선전 간부의 훈련에 치중할 것 등을 결정하였다.
조선의용대의 화북 이동의 이면에는 라이벌 의식을 가지고 김원봉의 지도력에 도전한 최창익의 집요한 공작과 공산당과 국민당 세력의 관계 악화와 조선의용대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고자하는 공산당의 전략의 결과이기도 하였다.7) 실제로 의용대가 화북 행을 결정한 이유는 단순히 국민당과의 본질적 이념 차이, 국공합작의 약화에 따른 화중•화남에서의 활동기반 약화, 국민당군 장교들의 부패한 행태와 행패에 대한 실망 때문만은 아니었다. 중국공산당은 조선의용대를 화북으로 유인하기 위하여 간부들이 갈등을 부추겼으며 김원봉의 비서인 사마로에 의하면 쓰마라는 당원을 조선의용대에 심어서 의용대의 활동을 매주 보고받았으며 그들에게 화북행을 권하게 만들었다고 한다.8)
의용대 본부는 중경에 남겨두고 나머지 부대는 하남성 낙양으로 집결하여 41년 3월에 황하의 맹진나루를 건너 화북으로 이동하였다. 41년 6월 화북조선청년연합회의 인도로 대부분의 대원들이 팔로군의 태항산 근거지에 도착하였다. 중국 팔로군들은 대대적인 환영대회를 열었으며 팔로군 부총사령인 팽덕회가 열렬한 환영사를 하였다. 그 해 7월 10일 임현에서 신악, 윤세주, 박효삼, 감창만 등을 중심으로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를 결성하였다. 본부를 동욕진 상무촌에 두었으며 지대장에 박효삼, 정치지도원은 김학무가 맡았으며 제1대장에 이익성, 제2대장에 김세광, 제3대장에 왕자인이 임명되었다. 그러나 아직은 중경에 있는 본부와 결별하지는 않았다. 이때부터 조선의용대는 팔로군과 함께 편성되어 항일전에 뛰어 들었다.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건립된 후 팔로군과 함께 여러 무장선전대로 나뉘어 태항산, 진찰기변구, 진중, 산동 등지에서 활동을 하였다. 그들은 1941년 7월부터 1942년 8월 사이에 중국어, 한국어, 일어로 만든 삐라 3만 장, 만화 4만여 장을 살포하였으며 팔로군과 함께 40여차의 전투를 진행하였다. 가장 유명한 전투는 관대전투, 호가장전투, 마전전투 등이다. 호가장 전투는 41년 12월 26일에 조선의용대 대원 30명이 무장선전대를 편성하여 일본군 점령 하에 있는 마을에 들어가 항일선전공작을 수행하고 본대로 돌아가던 중 호가장 마을에서 일본군 500여 명에게 포위를 당하여 항복하지 않고 죽기를 각오하고 분전하여 탈출에 성공한 전투이다. 4명의 대원이 전사하고 2대장 김세광이 부상을 당하였고 김학철이 포로로 잡혀서 일본으로 끌려갔다. 마전전투는 일본군 6만여 명과 팔로군과 조선의용군 화북지대의 기천 명이 태항산맥 마전에서 벌인 전투이다. 일본군은 태평양전쟁 도발 이후 대대적인 팔로군 소탕작전을 벌였다. 팔로군 사령부는 박효삼 지대장에게 일본군이 점령한 양산마루를 취하여 퇴로를 열라고 명하였고 의용대원들은 일본이 점령한 양산마루를 취하여 팔로군을 구출하였다. 그러나 팔로군총부 참모장 좌권장군이 죽었으며 윤세주와 전광화도 전사하였다.
1941년 4월 조선의용대 주력이 화북으로 떠난 뒤 김원봉은 민족혁명당 제5기 제4차 당중앙회를 열어 임시정부에 참여하기로 결정하였다. 김두봉은 조선의용대 본부가 광복군에 편입되는 것을 반대하다가 41년 가을 중경에서 태항산으로 떠나 그 다음 해 4월에 도착하였다. 김원봉은 더 이상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를 장악할 수 없음을 깨닫고 조선의용대 본부를 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시키고 군무부장에 취임하였다. 이로써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공산주의 진영으로 본부는 민족주의 진영으로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되었다. 이는 참으로 뼈아픈 결별이었다.
조선의용군 화북지대
화북조선청년연합회는 1942년 7월에 태항산 장하 기슭에서 2차 대표대회를 열고 이름을 화북조선독립동맹으로 개칭하였다. 산하 무장부대인 의용대의 이름도 조선의용군 화북지대로 바꾸었다. 김두봉이 주석으로 중앙상임위원에 무정, 최창익, 채국번, 이유민, 김학무, 박효삼, 김창만이 뽑혔다. 박효삼이 군사부장, 무정이 일본점령지역 공작위원회 회장이 되었다.
화북조선독립동맹 북만주특별위원회는 본부를 산서성 동욕촌에 두고 산하에 진서북, 진찰기, 연안 등 약간의 분맹을 두었다. 이들은 줄기차게 일본의 점령지역과 미점령지역에 공작원을 파견하여 분맹을 세워 선전활동을 강화하며 반일통일전선을 광범위하게 구축하였다. 동북만주로 파송된 이상조는 화북조선독립동맹 북만주특별위원회를 세워 연수, 바얀 등지에서 유격구를 창건하고 항일활동을 적극적으로 벌였으며 김창만과 문정일은 점령구인 북평, 천진, 할빈, 서울 등 일본군의 점령구에 분맹을 세웠다. 당시 만주와 산동, 산서, 화북 등지의 도시에는 독립동맹의 지하공작대가 있었다.
화북조선독립동맹은 태항산 근거지에 무정을 교장으로 하고 김학무를 교무주임으로 하는 화북조선청년혁명학교를 세워 조직적으로 맑스-레닌주의와 군사지식을 학습시켜 많은 조선족 정치, 군사 인재를 양성하였다. 1943년에는 군사인재를 심도 있게 양육하기 위해 12월에 학교 이름을 조선혁명군정학교로 바꾸고 군사와 정치 두 과목을 설치하고 학생들의 수준에 따라 대를 편성하여 집중적으로 학습을 시켰다. 김두봉이 교장, 박일우가 부교장, 주덕해가 총무과장을 맡았다. 조선독립동맹과 의용군의 본부를 연안의 근교지 라가평으로 옮긴 후 라가평에서도 조선혁명군정학교가 진행되었는데 주덕해, 전우, 장복 등의 맹원들이 개교 준비를 맡았다.
화북조선독립동맹은 일제나 친일파가 경영하는 공장과 광산 등에서도 선전공작을 벌였다. 당산제강소, 승홍밀광산, 대동에서 당고에 이른 철도 부설 현장의 노동자들을 훈련시켜 선전공작에 종사하게 만들었다. 해방구의 조선독립동맹에서는 황무지개간에 참가하는 외 병원, 상점, 이발소, 방사공장, 화물점, 운수대, 타면소 등을 경영하였으며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의 운영비를 해결하였다.
조선의용군 화북지대는 박효삼이 지대장을 맡고 팔로군과 함께 적후에 가서 정치공세를 벌이는 일을 주로 담당하였다. 평한철도와 등포철도 일대에서 화북지대의 적후선전공작은 부족한 한어로 열정적으로 선전한 일로 주민들에게 크게 공감을 얻어 유명해졌다. 또한 일본 군인들을 향한 선전활동도 뛰어나 일본인들의 사기를 저하시키고 조선 적을 가진 군인들로 하여금 부대에서 이탈하도록 선동하였다. 이들의 활동으로 조선 군인들이 끊임없이 팔로군과 조선의용군 쪽으로 넘어왔다. 기열로변구의 조선독립동맹은 1943년에 숫자가 200여명으로 대폭 늘어났고 그들이 팔로군과 함께 유격전을 벌여 일본군 속에 있는 조선인 군인 150여 명을 포로로 잡기도 하였다.
조선의용군
1944년 초에 태항산 근거지에 있던 조선독립동맹 본부와 의용군 화북지대는 본부를 연안으로 옮겨갔다. 이때로부터 화북조선독립동맹은 조선독립동맹으로 개칭하고 조선의용군 화북지대도 조선의용군으로 고쳤다. 김두봉이 조선독립동맹 주석으로 뽑혔고 최창익, 한빈이 부주석이 되고 무정이 조선의용군 사령관이 되고 박효삼, 박일우가 부사령관이 되었다.
독립동맹의 강령의 골격은 반일통일전선을 구축해 조선의 독립을 쟁취하고 종국에는 민주공화국을 건설한다는 것이었으며 독립을 위해 중국공산당과 공동전선을 형성하고 조선인 사이의 항일 민족전선을 확대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독립동맹의 핵심 인물은 무정, 한빈, 최창익은 모두다 공산주의자였지만 강령에 공산주의를 담지 않았다. 9)
이런 기본 방침으로 조선독립동맹에 다양한 세력이 참여를 하였으며 훗날에 이들은 연안파로 불려진다. 당시 조선의용군의 숫자는 500여 명의 규모로 알려졌다. 의용군의 구성을 살펴보면
첫째 중국공산당 소속의 조선인으로 무정, 박일우, 이유민, 정율성, 진광화 등 20여 명이다. 중심인물은 무정이며 이들이 화북에서 조선청년연합회 창설을 주도하였다.
둘째 만주 출신으로 모스크바 동방노동자공산대학을 거쳐 연안에 온 사람들로 방호산, 이권무, 주덕해, 진반수, 임해, 이림 등 10여 명이다.
셋째 조선의용대 출신으로 박효삼, 김학무, 김창만, 호철명, 윤공흠, 문정일, 왕자인, 이익성, 주혁, 강진세 등 50여 명이다.
넷째는 조선공산당 출신으로 최창익, 한빈, 허정숙, 김명시, 이화림, 안병진 등 20여 명이다.
어쨌든 조선독립동맹은 연안 인근에서 새로 모집된 80여 명이 참가하게 되어 연안에 머무는 조선독립동맹 관계자는 200여 명에 이르렀고 각 지역에 파견되어 선전, 공작 활동하는 사람들 약 300명을 더하면 500여 명의 규모가 되었다.
연안으로 이동한 조선의용군은 나가평마을에 본부를 두었다. 무정은 조선의용군 사령관인 동시에 팔로군의 포병사령관의 책임자였기 때문에 라가평의 조선혁명군정학교가 사령부 구실을 하였다.
조선의용군은 라가평의 병력 외에도 산동성에 이익성, 산서성에 김세광, 동북만주에 이상조가 이끄는 독립동맹 분맹이 있었으며 그들은 일본군에 종군한 조선인 병사들을 초모해 조선의용군의 병력을 증강하며 정보수집활동을 하였다.
1943년 6월 일본군이 태항산에 일대에 대대적인 공격을 개시하자 조선의용군은 팔로군과 함께 곳곳에서 전투에 참가하였다. 이 때 중국공산당지도부는 조선의용군에게 연안으로 이동을 명하였다. 추후 중국공산혁명 성공 후에 조선에서도 공산주의 혁명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조선의용군을 보호해야할 필요가 있었으므로 중국공산당 지도부가 소수의 무리인 조선의용군을 비교적 안전한 지역으로 보내려고 했다는 해석이 우세하다. 그리하여 연안에 도착한 조선의용군의 주요 임무는 선전 활동과 일본군 점령지구에서 조직 공작을 하며 황무지를 개간하여 자력갱생을 도모하는 것과 공산주의 이론을 학습하는 것이 되었다.
1945년 8월 15일에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였다. 조선의용군 각 부대들은 팔로군과 신사군에 편성되어 일본군의 투항을 접수하고 일본군과 위만군의 잔여세력을 소탕하며 일본군 점령지역에 사는 조선인들의 생명의 안전 보호에 즉각적으로 대처하였다.
8월 11일 팔로군 총사령부 주덕은 연안총부 제6호 명령을 발표하여 조선의용군사령부는 “즉시 산하의 각 부대를 통솔하여 팔로군 및 원 동북군 각 부대들과 함께 동북으로 진군하여 일본군과 위만군을 소멸하라”고 명령하였다. 12일에 기열료변구에서 활동하던 조선의용군부대는 팔로군을 따라 동북에로 진군하였다. 연안에 있던 조선독립동맹총맹과 조선의용군사령부 및 산하의 부대들은 9월 초에 연안을 떠나 동북으로 진군하였다.10) 다음은 연안총부명령 제6호이다.
연안총부명령 제6호
(신화사 연안 12일발 급전)
연안총부명령 제6호
중국 및 조선 경내에 진군하여 싸우는 쏘련 붉은 군대에 배합하고 조선인민을 해방하기 위하여 나는 지금 화북에서 대일작전을 벌리고 있는 조선의용대 사령원 무정, 부사령원 박효삼, 박일우에게 즉시 소속부대를 통솔하여 팔로군 및 원 동북군 X부대와 함께 동북으로 출병하며 적과 괴로군을 소멸함돠 아울러 동북의 조선인민을 조직하여 조선을 해방하는 임무를 완수할 것을 명한다.
총사령 주덕
중화민국 34년 8월 11일 12시
(연안 ❮해방일보❯ 1945년 8월 12일) 11)
조선의용군은 팔로군 총사령 주덕의 전보를 받고 동북으로 달려가며 해방된 조국 조선에 입국할 꿈에 부풀었다. 그러나 조선은 이미 조선인 부대가 마음대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남한에서 임정요인들이 개인의 자격으로 입국이 허락된 것처럼 북한에서도 무장 독립운동가들은 환영받지 못하였다.
동북조선의용군
팔로군 총사령 주덕의 명령에 따라 무정은 조선의용군을 이끌고 9월 5일에 만주를 향해 출발하였다. 당시 그와 함께 3개의 그룹이 출발하였다. 첫째는 조선의용군 300명 정도였고 둘째는 중국공산당 동북 파견되는 간부대가 270명이었고 셋째는 두 그룹을 경호하는 경호단으로 1,000명 정도였다.
조선의용군 대원은 도보 여행을 하였고 마차 두 대에 짐과 무기를 실었다. 무정과 김두봉은 말을 탔다. 산서성 연안을 출발해 내몽골자치구, 하북성을 거쳐 요녕성에 이르는 4천리 장정이었다. 장개석이 팔로군의 이동을 금지시켰기 때문에 그들은 국민당군을 피해 움직여야 했다. 하북성 장가구에 도착해서 기차를 이용해서 북경까지 가려 하였으니 국민당군이 선점을 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검거를 피하기 위해 회래에서 내려 승덕을 거쳐 금주에 도착하여 김웅의 인솔로 태항산에서 출발한 조선의용군 300명과 합류하였다. 그들이 심양에 도착한 것은 11월 초였다.
심양에는 하북성 동북지역의 기동지대 소속 조선의용군 400명이 부지대장 이대성과 지도원 주연의 인솔 하에 먼저 도착해 있었다. 여기에 연안에서 출발한 조선의용군 본대 300명과 김웅이 인솔한 태항산 의용군 300명, 1945년 10월 무장입국을 시도했단 실패하고 돌아온 선견종대 1,500여 명 등이 합류하여 당시 심양에 모인 조선의용군은 2,500명 이상이었다. 심양에서 무정은 모스크바에 있던 일본 공산당 지도자 노사카 산조를 통해 소련 측에 조선의용군의 북한 입국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소련은 허락하지 않았다. 12)
중국공산당과 협의 끝에 조선의용군은 조선의용군을 동북조선의용군으로 개칭하고 만주에 남겨두고, 간부들만 입국하기로 하였다. 그들은 동북조선의용군을 3개의 지대로 새로 편성하고 지원자들을 계속 받았다. 1지대는 김웅을 지대장, 방호산을 정치위원, 안빈을 참모장, 주연을 정치주임으로 만들어 남만주에서 중공군을 돕게 하였다. 무장 입국에 실패한 조선의용군 선견종대도 1지대에 배속하였다. 3지대는 지대장 이상조, 정치위원 주덕행, 부지대장 이덕산, 참모장 김연, 정치주임 이근산, 공급처장 관건을 중심으로 북만주에서 활동하게 하였다. 5지대는 이익성을 지대장, 박훈일을 정치위원, 부지대장을 이권무, 참모장을 전우, 정치주임을 조열광으로 하여 동만주를 거점으로 활동하게 하였다. 아울러 5지대는 박일우의 총 지휘를 받도록 만들었다. 13)
조선의용군은 총사령관 무정이 동북지역에 도착하기 전에 두 차례 입국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두 번 다 실패하였다.
첫 번째 무장 입국시도는 선견종대가 10월 중순에 시도하였다. 선견종대는 심양에서 조선의용군 지하공작활동을 하던 한청이 해방 직후 한인들을 모아 조직한 조선 입국을 위한 부대였다. 연안을 출발한 조선의용군 지도자들이 국민당군과 일본군의 방해로 도착이 늦어지자 소련군과 함께 입국할 생각으로 꾸린 부대였다. 그들은 만주지역에 파견되어 조선의용군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던 이유민의 지도와 지휘를 받았다. 김두봉은 “조선독립동맹의 회고와 전망”에서 입국을 시도한 부대가 “무장해제까지 당했다가 부득이 도로 출국하게 되었다” 고 밝히고 있다. 이 부대의 부대장은 한청이었고 정치주임은 주연이었으며 규모는 1,500명 정도였다. 그들은 소련군과 상의를 하고 신의주에 들어갔으나 10월 12일 소련군과 보안대에 의해 무장해제를 당하였고 쫓겨나왔다.
두 번째 무장 입국시도는 1945년 10월 하순 압록강지대에 의한 것이었다. 규모는 2천여 명, 지대장은 김호, 정치위원은 김강 이었다. 압록강지대는 10월 하순에 안동에 도착하였다. 신흥학교에 자리를 잡고 3개 대대를 편성해 압록강을 건널 준비를 하였다. 김호와 김강은 소련군 평북경비사령부와 접촉하면서 도강을 시도하였다. 11월 초 소련군이 김호와 김강을 면담하고 입국을 허가했다. 그들이 압록강 철교를 걸어서 넘게 되었을 때 자원입대한 만주 한인들로 말미암아 조선의용군은 4천 여 명으로 늘어 나 있었다. 그들은 시가행진을 하였고 열렬히 환영을 받았으나 신의주 역 앞의 동중학교 거처하는 첫날밤에 기습을 당하였다. 그들을 기습한 것은 한웅의 부대였는데 한웅은 무장 해제 사건 얼마 후에 체포되어 평양형무소의 해방 후 제 1호 사형수로 처형되었다. 조선의용군의 무장해제는 처음부터 끝까지 소련군과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의 계획에 의한 것이었다. 그 계획 속에서 한웅이 행동대원으로 이용당한 것이었고
소련은 그 사실을 은폐하기 위하여 한웅의 친일전과를 문제 삼아 사형에 처하였다.
압록강 지대는 무기를 잃고 바로 추방을 당해 만주로 돌아 왔다.
소련은 자신들이 지원하는 만주파의 권력 장악을 위해 조선의용군의 입국을 불허하였다. 그러나 해방직후 각 계파 간의 권력 투쟁을 의식한 김일성의 만주파는 우선 국내파 제거를 위해 연안파의 협력을 구해야 하므로 무장해제 사건을 국내파가 저지른 일로 몰아갔다.
소련은 조선의용군과 독립동맹의 지도자들의 무장을 허용하지 않았으며 독립동맹이라는 이름사용도 허락하지 않고 개인의 자격으로 기차를 타고 입국하는 초라한 무명의 귀국만 허락하였다.
1945년 11월 7일 심양에서 동북조선의용군으로 개칭되고 3개의 지대로 나누어진 지대들은 자체 증원 작업을 계속하며 팔로군을 도와 국민당군과 싸웠다. 전투과정에서 제1지대는 1948년 11월 동북인민해방군 보병 제 166사로 발전하였다. 3지대는 3월 인민해방군 제4야전군 보병 제164사로 발전하였으며 제5지대는 동북항일연군교도려와 합하여 1950년 2월 인민해방군 중남군구 독립 제15사가 되었다. 조선의용군은 동북에 머무는 4년 정도에 크게 성장하여 6만의 대군이 되었다.
조선인민군 5사단, 6사단 그리고 12사단
전쟁이 끝나면 군인, 혁혁한 전공을 세운 유능한 군인은 최고 권력자에게 위협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가 함께 전공을 나눌 수 있는 권력자의 핵심 그룹에 속하지 않았다면 얼마든지 토사구팽(兔死狗烹)을 당할 수 있다. 국공내전이 끝난 자리에 남겨진 6만의 조선인 대군은 중국의 입장에서는 계륵(鷄肋)이었다. 대의명분과 보상 없이 해산시킬 경우 그들이 반란군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고 평화 시에 필요가 없는 6만 대군을 유지시키려는 일은 경제적으로 엄청난 부담이 되었다. 그러나 모택동은 조선의용군이 하루아침에 만난 관계가 아닌데다 전선에서 피로 맺어진 관계이므로 함부로 내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동북조선의용군의 문제로 고심하고 있을 때 생색도 내고 명분도 살릴 수 있는 길이 국토완정을 주장하고 있는 북한에서 나왔다.
북한은 1948년은 2월 8일에 조선인민군 창설을 공개적으로 발표하였다.
1948년 12월 초, 소련군의 북한 철수에 앞서 모스크바에서 북한 인민군의 무력을 증강시키고자하는 비밀회의가 열렸다. 소련 국방상 불가닌과 극동군 사령관 말라놉스키, 해군사령관 글로코브, 제1부수상 말렌코프, 북한 대표 최용건, 그리고 중국 대표까지 참석해 북한에 대한 특별군사사절단 파견문제를 논의하였다. 이 자리에서 중국 측은 만주에 있는 한인 중국군 2만 ~ 2만 5천 명을 입북시켜 인민군을 증강시킨다는 데 합의를 하였다.14)
중국으로서는 일시에 동북조선군의 문제를 보기 좋게 해결하였다.
학자들은 이를 1948년 11월 중국의 내전이 승리로 끝남에 따라 중국으로서는 비대해진 한인부대가 부담스러워졌고 조선의용군이 입국을 원하였기 때문이며 소수민족인 한인들을 대대적으로 군에서 강제 퇴출시킬 경우에 발생할 수 있는 현재와 미래의 민족문제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것이며 남한에 있는 미국으로 자신들의 안보를 지키기 위한 속셈을 깔고 있는 결정이라고 말한다.
어쨌든 중국 측의 합의해 따라 동북조선의용군의 입국 문제를 구체적으로 논의하기 회의가 49년 1월 하얼빈에서 열렸다. 북한 대표는 최용건, 무정, 방우용이 동북조선의용군에서는 중국군 166사 사단장 방호산, 목단강군구 독립제3사단 수송사단장 방덕경, 하얼빈 보안여단장 주덕해가 참석하였다. 중국 대표로는 중국공산당 동북정치위원회 이입삼, 동북인민해방군 주보중 등이 나왔고 소련군 대표단도 나왔다.
이런 협상과 배후조정 끝에 방호산이 지휘하는 중국군 166사단은 1949년 7월 25일 입국, 인민군 6사단이 되어 신의주에 사령부를 두었다. 인원은 10,800명이었다.
김창덕이 사단장인 중국군 164사단은 1949년 8월 23일 함북 회령을 거쳐 나남에 도착을 하였고 10,000명 규모의 인민군 5사단으로 개편되었다.
1950년 5월에는 전우가 중국군 20사단 내의 조선의용군과 다른 지역의 한인들을 모아 10,000명 규모의 인민해방군 중남군구 독립 제15사를 조직하였고 이 부대가 원산으로 입북하여 인민군 12사단을 편성했다.
이밖에도 1,000~2,000명 정도의 동북조선의용군이 산발적으로 입북해 인민군 각 부대에 배치되었다. 이렇게 해서 동북조선의용군은 북한군 전체의 3분의 1을15) 북한군 전력강화에 크게 기여하게 되었다.
가슴이 아프지만 한때는 조선의용군이었고 한때는 동북조선의용군이었던 조선인민군 5사단과 6사단, 12사단이 되어서 한국 침략 전쟁 선두에 섰다.
6사단은 1군단에 속하였고 5사단과 12사단은 2군단에 속하였다. 전쟁이 시작되자 인민군 1군단은 해주, 개성, 연천을 거쳐 서울로 향했다. 2군단은 춘천을 거쳐 수원을 점령해 서울을 남쪽에서 포위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인민군 사령부는 서울 점령임무를 6사단에게는 허락하지 않았다. 만주파와 소련파가 지휘하는 1,3,4사단과 105전차여단에게 주었다. 4사단장 이권무는 연안파였지만, 1사단장 최광, 3사단장 이영호, 105전차여단장 유경수는 모두 만주파였다.16)
인민군의 일자척인 목표는 28일 서울 점령이었다. 1군단은 파죽지세로 문산, 의정부를 지난 3일 만에 서울에 다다랐다. 그러나 동부전선을 맡은 2군단은 목표한 시간에 도착하지 못하였다. 6월 25일 춘천 점령, 28일 수원점령이라는 작전 목표가 주어졌고 예하에 모두 3만 5천 명의 병력이 있었으나 그들은 한국군의 강력한 저지로 계획한 시간에 서울 남쪽에 도착하지 못하였다. 2사단은 38도선을 넘어 춘천을 공격하고, 12사단은 603모터싸이클연대의 지원을 받아 춘천을 우회해 홍천을 공격하도록 하였고 5사단은 예비사단으로 화천에 주둔시켰다. 17)
7월 24일 미국 정찰기가 한반도 서남쪽에서 미상의 군대가 이동하고 있음을 발견 하였다.그 부대는 북한군 6사단으로 1개의 모터사이클연대 함께 서해 방면으로 공격하며 7월 20일에는 군산과 전주를, 7월 23일에는 영광과 고창을 점령하고 무서운 속도로 낙동강전선으로 달려가고 있었다.18)
브루스 커밍스는 그의 저서 ⌜브루스 커밍스 한국현대사⌟에서 한때는 조선의용군이자 동북조선의용군이었던 ‘중공군 출신의 한국인들’들을 언급한다.
7월초 미국의 일일전황보고서들은 조선인민군 보병은 “일급”이고, 장갑부대와 포격기술은 “2차 대전의 어떤 군대보다 뛰어나다”고 말했다. 미국인들에게 특히 강렬한 인상을 남긴 부대는 ‘중공군 출신의 한국인들’로만 구성되어 있는 방호산 휘하의 제 6사단이었다. 6사단은 옹진에서 벌어진 최초의 전투에 참여했으며, 전라도 해안을 따라 파죽지세로 남하했고, 7월 말경에는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남해안을 따라 힘차게 나아가더니 8월 1일 진주를 점령하여 부산을 코앞에서 위협했다.
사단장은 방호산으로 그는 40년대 초반에 팔로군에 속하였으며 연안에서 조선독립연맹에 가입하여 조선의용군이 되었고 동북조선의용군시기에는 1지대의 정치위원이었다. 그는 중국의 국공내전에 끝난 시점에 실력을 인정받아 동북인민해방군 보병 제 166사의 사단장이 되어 있었다. 그는 실전과 이론을 겸비한 6•25전쟁 기간 중에 가장 탁월한 전술을 펼친 전략가로 세계에 알려졌다.
그러나 나는 그에게서 시작된 전라남북도의 빨치산과 군•경에 의한 토벌과 반 토벌전 및 보급투쟁으로 빚어진 억울하고 비참한 민초들의 죽음과 한(恨)을 본다. 물론 더 큰 책임은 전쟁을 기획하고 준비한 사람들, 약자들 위에 군림하는 권력자들에게 있지만 그와 6사단이 전라남북도의 땅을 누비며 인민 해방을 선포하였으므로 그에게 묻고 싶은 것이다.
영웅이었던 방호산은 1956년 8월 종파사건에서 종파주의자로 몰려 숙청을 당하였다. 그 뿐 만아니라 한국전쟁을 지지하고 참여하였던 연안파, 남로당계 심지어는 소련파까지도 대대적으로 숙청과 사형을 당하였다.
6•25전쟁의 피해는 참으로 참혹하였다. 소년병과 학도병을 포함한 한국군 62만 명, 유엔군 16만 명, 북한군 93만 명, 중국군 100만 명, 민간인 250만 명이 사망하였고 전쟁고아가 10만 명, 전쟁미망인이 50여만 명, 이산가족이 1,000만 명이나 발생하였다. 그런데 70여 년 세월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전쟁의 그림자 속에 있다. 아무도 그림자를 과감히 거두지 못한다. 그림자를 운명으로 받아들이며 서로 적당히 그림자 속에서 긴장과 이완을 반복하고 있다.
전쟁으로 짓밟힌 생명과 산하들이 토해냈던 우주적인 고통과 신음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다. 수틀리면 자기 권력을 지키기 위해 전쟁을 감행할 수 있는 세계의 정치인, 권력자들에게 전쟁고아들의 배고픔과 외로움, 절망과 상처를 보여주고 싶다. 전쟁미망인들의 한(恨)과 멍든 가슴을 보여주고 싶다. 상이군인들의 좌절과 불행을 말해주고 싶다.
조선의용대가 중일전쟁의 발발로 삼엄하기 그지없는 중국 관내에서 조선민족의 해방과 독립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최초의 조선인무장부대였다는 사실에 방점을 찍는다. 그리고 오늘의 문제는 과거의 방법으로 해결될 수 없다는 깨달음에 감사하며 새 술을 새 부대에 담을 수 있는 한국사회의 현재와 미래가 되길 바라마지 않는다.
2022.5.3,화
우담초라하니 올리다
미주
1) 최삼룡편, ⌜승리의 기록⌟, 84쪽, 연변인민출판사, 2015
2) 김삼웅 저, ⌜약산 김원봉평전⌟, 382,383, 시대의 창, 2016
3) 양수천, 차철구 외 다수,⌜중국조선족혁명투쟁사⌟,551쪽, 연변인민출판사, 2009
4) 최삼룡편, ⌜승리의 기록⌟, 84쪽은 창립 시 대원이 120여 명 정도였다고 한다.
김삼웅은 ⌜약산 김원봉평전⌟,390쪽에서 97명으로 밝히고 있다.
5) 함화선전의 뜻을 구체적인 뜻을 모르겠으나 당시 조선의용대가 맡은 임무가 대일본선전공 작이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때 이는 일본군 병사들에게 반전, 염전의 정서를 주입하고 사기를 저하시켜 투항을 유도하는 선전활동으로 이해할 수 있다.
6) 양수천, 차철구 외 다수,⌜중국조선족혁명투쟁사⌟,554쪽, 연변인민출판사, 2009
7) 김삼웅저 ⌜약산 김원봉평전⌟,450, 451쪽, 시대의 창, 2016
8) 앞의 책 455, 456쪽
9) 안문석저, ⌜무전평전⌟ 95쪽, 일조각, 2019
10) 양수천, 차철구 외 다수,⌜중국조선족혁명투쟁사⌟,562쪽, 연변인민출판사, 2009
11) 최삼룡편, ⌜승리의 기록⌟, 41쪽, 연변인민출판사, 2015
12) 안문석저, ⌜무전평전⌟ 114,115쪽, 일조각, 2019
13) 앞의 책, 115쪽
14) 앞의 책, 138쪽
15) 앞의 책, 238쩍 간부뿐만 아니라 사변도 전체 21개 연대 가운데 47%인 10개 연대의 병력이 조선의용군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박영실 저, ⌜8월 종파사건⌟, 81쪽, 재중국 조선인들이 귀국해 조선인민군에 합류하여 6• 25전쟁 개전당일 보병 21개 연대 중 47퍼센트인 10개 연대는 중국에서 온 조선인들이었 다고 한다.
16) 안문석 저, ⌜무전평전⌟ 240쪽, 일조각, 2019
17) 안문석 저, ⌜무전평전⌟ 241쪽, 일조각, 2019
18) 정길현 저 ⌜미국의 6 • 25 전쟁사⌟, 65쪽 , 북코리아, 2015,
19) 브루스 커밍스 저, 김동노 외 다수 번역 ⌜브루스 커밍스 한국현대사⌟, 375쪽, 창비, 2019
참고서적
양수천, 차철구 외 다수,⌜중국조선족혁명투쟁사⌟,연변인민출판사, 2009
안문석저, ⌜무전평전⌟, 일조각, 2019
최삼룡편, ⌜승리의 기록⌟,연변인민출판사, 2015
김삼웅저 ⌜약산 김원봉평전⌟, 시대의 창, 2016
박영실 저, ⌜8월 종파사건⌟, 백년동안, 2014
정길현 저 ⌜미국의 6 • 25 전쟁사⌟, 북코리아, 2015,
김영범 저, ⌜윤세주⌟, 역사공간, 2013
감양주 편 ⌜항일투쟁반세기⌟, 료년민족풀판사, 1995
브루스 커밍스 저, 김동노 외 다수 번역 ⌜브루스 커밍스 한국현대사⌟, 창비, 2019
강준만 저, ⌜한국현대사 산책 2권⌟, 인물과 사상사,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