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라 발테아 강옆 절벽 바위 위에 높이 서 있는 까스텔로 디 센 제르맨(Castello di Saint-Germain). 그 옆을 지나 확터진 골짜기를 바라보았습니다. 발 밑에서 터널이 있었습니다. 터널에서 빠져나온 A5번 고속도로가 강을 따라 갔습니다. 그 옆으로 26번 도로, 철도, 강, 바위 산 자락으로 숲이 이어졌습니다. 산자락을 빙둘러 마을로 내려갔습니다. 강을 따라 주택들이 들어선 몬조베(Montjovet) 마을이었습니다. 마을 성당 종탑이 높았습니다. 12세기에 지은 성당이었습니다. 종탑이 성당 본체에서 좀 떨어진 곳에 따로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오고 가기는 했지만 조용했습니다. 샤티욘에서 12km를 걸어왔습니다. 몬죠베 인구 1,800명, 해발 406m. 가게, 식당이 있는 마을입니다.
몬죠베는 “주피터의 산(Mons Jovis)”이라는 로마제국 시대의 이름에서 유래했습니다. 로마시대의 주피터는 하늘과 천둥의 신이었습니다. 고대에 사람들이 살았다는 흔적이 발견되었습니다. 청동기 시대의 유적이 있고, 로마시대 이후에는 아오스타 골짜기로 드나드는 길목으로 군사 요새인 성이 여럿 있었습니다. 중세시대에는 봉건 영주들의 세상이었습니다. 대표적인 지배층이 샤얀(Challant) 가문이었습니다. 이 가문은 11세기에 역사에 등장했다가 19세기 초에 마지막 자손이 사망하면서 문을 닫았습니다. 이 가문이 12세기부터 아오스타 밸리 지역을 실질적으로 지배했고 13세기에 전성기를 누렸습니다. 아오스타 자작을 비롯하여 가문에 속한 영주들이 지배한 대표적인 성이 페니스 성과 샤티온 성이 있습니다. 수백년 동안 대를 이어 사보이 왕국의 봉신으로서 권력을 유지했습니다.
몬죠베에서 충분히 쉬었다 가야 했는데 음식점 말고는 쉴만한 곳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베레스로 가는 길은 두 갈래였습니다. 강변을 따라가는 평탄한 길과 산길이었습니다. 선택의 순간에 망설임이 없다면 눈에 보이는 강렬한 이득이나 확고한 행동습관이 있었을 것입니다. 안전과 건강이라는 두 요인 중에서 안전이 이겼습니다. 다리에는 아직 힘이 남았고 자동차 길을 따라 걷는 위험이 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차가 다니지 않는 산길을 택해 출발했습니다. 가파른 오르막 숲이었습니다. 아침처럼 가파르지는 않았지만 고도 차 150m를 오르는 길은 쉽지 않았습니다. 묵묵히 숲으로 난 길을 걸었습니다. 짙은 숲은 아니었습니다. 가끔 자동차 길을 만나 오르고 또 올랐습니다. 축대 위 작은 초지에 가끔은 소나 양이 풀 뜯으러 올 것입니다. 해발 557m의 레클루(Reclou) 마을은 주민 35명의 작은 산골이었습니다. 과일나무가 있었습니다. 길가의 집 울타리 안에서 개가 앙칼지게 짖어댔다. 목장 길을 따라 내려가다가 숲에서부터 급경사 길이었습니다.
플루(Plout) 마을의 민가가 가까워 지자 다시 오르막으로 한참 아래에 강 고곳도로 철도가 놓였었습니다. 강물 색깔은 탁한 회백색이었습니다. 잡목이 우거진 산 구비를 돌았습니다. 숲이 끝나면 바위 산이었습니다. 산을 돌아 나오자 골짜기에 토릴 마을이 보이고 급경사 내리막이었습니다. 오른쪽은 절벽이나 다름없어 발조심하며 고도차 100m 이상 내려갔습니다. 누군가 오토바이를 타고 올라는 왔는데 내려가지 못해 남겨둔지 오래되어 녹슬고 있었습니다. 콘크리트 포장 산길에 모래가 깔리니 미끄럽기 짝이 없었습니다. 오금이 떨린다고나 할까 … 고소공포증이 있거나 균형감각이 없으면 어려움을 겪게되는 지형이었습니다. 결코 쉬운 길이 아니었습니다. 안전을 찾아 왔는데 안전하지 않은 내리막 길이었습니다.
어렵사리 토릴-리바롤라(Torille-rivarolla) 마을까지 내려갔습니다. 17km 걸어온 지점입니다. 오늘은 더 이상 산으로 올라가지 않습니다. 여기까지 전체적으로 그늘이 많아 걷기에 좋았습니다. 마을 안 주택 가에 작은 경당이 있었습니다. 산타 바바라 경당 (Cappella di Santa Barbara). SS26번 도로와 A5 번 고속도로가 나란히 있었습니다. SS26번 도로는 자전거 경주대회 때 경기용 루트로 시용되는 곳입니다. 이 도로 옆으로 인도가 잘 정비되어 있었습니다. 벼랑 같은 산모퉁이를 돌자 넓은 평원에 곧바로 도시 변두리였습니다. 가파른 산밑으로 직선도로가 났고 발다야스(Val d'Ayas) 골짜기 입구를 향했습니다. 마을 뒤쪽 산비탈에 수도원 건물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몬테로사 빙하(Grande Ghiacciaio di Verra)에서 남북으로 길게 파인 골짜기가 발다야스(Val d'Ayas)입니다. 알프스의 여러 빙하가 물 흐름의 시작입니다. 이 골짜기를 흘러 내려온 에방송 여울(torrente Évançon)이 도라 발테아 강으로 흘러드는 곳, 그곳에 베레스 (Verrès) 마을이 자라잡았습니다. 인구 2600명, 해발 391m. 마을 이름은 라틴어 비트리치움(Vitricium)에서 유래했습니다. 로마시대의 세계지도였던 포이팅거 지도 (Tabula Peutingeriana)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 지도는 12장의 양피지를 이어 붙여 이베리아 반도에서 인도에 이르는 세계지도를 납작하게 압축해서 그려놓았습니다. 폭 34cm, 길이 6.75m의 두루마리 지도로 휴대용으로 만든 것입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습니다. 이 지도에 등장할 정도면 베레스는 로마제국의 중요 거점으로 인정되었다고 봅니다.
로마시대 이전부터 사람들이 터를 잡고 살았고 로마시대에 건설된 갈리아 길 (Via delle Gallie)이 지나갔습니다. 이 길은 아오스타에서 둘로 갈라져 프랑스 리용으로 가는 알피스 그라이아(Alpis Graia) 와 스위스 로잔으로 가는 알피스 포에니나(Alpis Pœnina) 가 됩니다. 10세기 시제릭 주교가 지나갔던 비아 프란치제나는 알피스 포에니나(Alpis Pœnina)와 거의 일치합니다. 다음 지도는 포이팅거 지도의 일부입니다. 4세기경 지도로서 아오스타에서 길이 둘로 갈라지는 것이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https://it.wikipedia.org/wiki/Tabula_Peutingeriana
갈리아 길에 왕래가 많아 지면서 강과 골짜기가 겹쳐지는 곳에 시장이 생겨 도시가 되었습니다. 중세시대에 몇 귀족과 교회의 지배를 받다가 샤얀 가문에게 넘어갔습니다. 베리스 성을 건축한 사람은 샤얀 가문의 이블레토(Ibleto di Challant)였습니다. 당시 기사들이 전략적 요충지마다 성을 축조하였습니다.
로마가도가 뚫리면서 기독교가 활발하게 퍼지면서 수도원이 전교활동을 체계화하게 됩니다. 10세기에 세워진 샌 질레(Saint-Gilles) 성당 수도원은 그리스도교가 퍼지기 시작한 초기 활동의 근거지였습니다. 아우구스티노스 수도회가 운영했던 이 수도원은 꾸준하게 성장하며 규모와 자산을 늘려갔습니다. 12세기에는 40개 본당과 십여 곳의 구호소가 수도원 관할 구역 안에 들어서게 됩니다.
돈과 권력의 속성은 세속화와 부패였습니다. 웅장한 건물, 화려한 내부 장식이면 그런 그림자가 틀림없이 어른거립니다. 15세기 말부터는 수도원과 종교활동이 쇠락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종교시설 운영자들이 돈벌이에만 눈독을 들여 규율을 자주 어기게 됩니다. 16세기에 고딕 양식의 건물들이 들어섰고 17세기에는 로랑수도회가 개입하여 개혁을 시도했습니다. 18세기에 로랑 수도회가 포기했고 19세기 나폴레옹에 의해 수도원 재산이 압류되었다가 반환되었습니다. 20세기 들어 래터란 수도회가 종교 공동체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배래스는 19세기에 금속 산업의 번창하다가 시들었습니다. 목재 처리 산업이 있습니다. 한때는 사보트(Sabot)라는 나막신을 만들어 팔기도 했지만 고무가 등장하면서 기념품 가게 품목이 되었습니다. 마을 안쪽에 있는 수도원 앞까지 갔다가 에방송 여울(torrente Évançon)의 다리를 건너 기차역으로 향했습니다. 거리는 작은 규모 도시의 모습으로 고층 건물이나 화려한 상가는 없었습니다. 네거리에 있는 피자 집에서 점심을 먹었습니다. 돼지 갈비와 파스타는 느끼했습니다. 에스프레소 커피까지 해서 착한 가격 12유로.
기차역 근처 식당도 겸하는 곳이었습니다. 호스텔(Il Casello Verrè)에 갔습니다. 이곳을 지나는 순례자들과 산악 트래킹하는 사람들이 묵어가는 유일한 호스텔입니다. 도미토리 6인실에 침대를 배정받았습니다. 다른 방에 유럽 여자 순례자들 몇이 있었습니다. 오후 늦게 이탈리아 사람 넷이 들어왔습니다. 30-40대의 건장한 사람들. 이브레아(Ivrea)를 출발해서 산 베르나로도까지 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역방향 순례자들. 나가면서 동행하자는 제안을 받았으나 호스텔에 저녁 예약이 되어 있다고 사양. 이들은 잠들때까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따라갔으면 밤 늦게까지 떠들고 있었을 것입니다. 쉬다가 식당에 갔습니다. 다른 손님들이 조용히 앉아 있었습니다. 저녁 메뉴는 파스타(펜네), 돼지고기 구이, 샐러드, 초콜렛 케익, 커피였습니다. 호스텔 비용: 저녁식사 + 침대 + 아침식사 = 42유로.
첫댓글 풍경 사진이 너무 근사합니다~^^
빙하에서 시작하는 강물은 어떨까 잠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멋진 여정의 길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