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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771년 주(周) 왕실은 북방 민족의 침입으로 도읍 호경(鎬京, 지금의 西安)이 함락되자 동쪽 낙양(雒陽)으로 천도했다. 이때부터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기원전 221년까지 550년간을 춘추전국시대라 한다. 이 시대에 진(秦)나라, 조(趙)나라, 연(燕)나라가 북방 민족과 국경을 마주하여 싸웠고 연(燕)나라는 고조선과도 싸웠다. 사기(史記)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史記 匈奴列傳]
匈奴,其先祖夏后氏之苗裔也,曰淳維。唐虞以上有山戎、獫狁、葷粥,居于北蠻,隨畜牧而轉移。其畜之所多則馬、牛、羊,其奇畜則橐駞、驢、驘、駃騠、騊駼、騨騱。逐水草遷徙,毋城郭常處耕田之業,然亦各有分地。毋文書,以言語爲約束。兒能騎羊,引弓射鳥鼠;少長則射狐兔:用爲食。士力能毋弓,盡爲甲騎。其俗,寬則隨畜,因射獵禽獸爲生業,急則人習戰攻以侵伐,其天性也。其長兵則弓矢,短兵則刀鋋。利則進,不利則退,不羞遁走。茍利所在,不知禮義。自君王以下,咸食畜肉,衣其皮革,被旃裘。壯者食肥美,老者食其餘。貴壯健,賤老弱。父死,妻其後母;兄弟死,皆取其妻妻之。其俗有名不諱,而無姓字。
흉노의 선조는 하후씨(夏后氏)의 후예로 순유(淳維)라고 한다. 당요(唐堯)와 우순(虞舜) 이후에는 산융(山戎) 험윤(獫狁) 훈육(葷粥)으로 불리었고 북만(北蠻)에서 목축을 하며 이리저리 옮겨 살았다. 그들이 기르는 가축은 주로 말, 소, 양이고 진기한 가축으로는 낙타, 나귀, 노새, 결제(駃騠)、도도(騊駼)、탄해(驒騱) 등이다. 물과 풀을 쫓아 옮겨 다니며 성곽(城郭)이나 일정한 거처가 없고 농사를 짓지 않으나 각 부족은 영역을 분명히 나누어 가졌다. 문자와 서적이 없고 언어(言語)로 약속했다. 어린 아이도 능히 양(羊)을 타고 활을 당겨 새나 쥐를 쏘며, 조금 더 자라면 여우나 토끼를 쏘아 잡아 식량으로 먹는다. 장정들의 힘은 능히 활을 당길 수 있어 모두 무장한 기병이 된다. 그들의 풍속은 평상시에는 목축에 종사하며 새나 짐승을 사냥하는 일을 생업으로 삼고 긴급할 때는 모든 사람들이 각기 싸움을 연습하여 다른 부족들을 침략하여 약탈했다. 그들의 천성이 그러했다. 그들이 먼 곳을 공격하는 무기는 활과 화살이고 단병전을 행할 때 쓰는 무기는 칼과 선(鋋 : 자루가 짧은 창)이다. 유리하면 진격하고 불리하면 퇴각하며 도망가 숨는 행위를 부끄러워 하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이익이 있으면 예의(禮義)를 차리지 않는다. 군왕(君王) 이하가 모두 가축의 고기를 먹으며 그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고 털이 달린 모피는 외투로 입는다. 장정들은 기름지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노약자들은 나머지를 먹는다. 건장한 자를 귀히 여기고 노약한 자를 천하게 여긴다. 아비가 죽으면 그 후처(後妻)를 아내로 삼고 형제가 죽으면 그 아내를 남은 형제가 취해 아내로 삼는다. 그들의 풍속은 이름 부르는 것을 꺼리지 않으며 성(姓)이나 자(字)는 없다.
周幽王用寵姬褒姒之故,與申侯有卻。申侯怒而與犬戎共攻殺周幽王于驪山之下,遂取周之焦穫,而居于涇渭之閒,侵暴中國。秦襄公救周,於是周平王去酆鄗而東徙雒邑。當是之時,秦襄公伐戎至岐,始列爲諸侯。
주(周)나라 유왕(幽王)이 포사(褒姒)를 총애하여 왕비를 내치자, 왕비의 아버지 신후(申侯)와 틈이 생겼다. 신후는 노하여 견융(犬戎)과 함께 쳐들어와 유왕(幽王)을 여산(驪山) 아래에서 죽였다. (기원전 771년). 견융은 주(周)나라의 초호(焦穫)를 점령하고 경수(涇水)와 위수(渭水) 사이에 살면서 중국을 침범하고 약탈하였다. 진(秦)나라 양공(襄公)이 주(周)나라를 구원하여 주나라 평왕(平王)은 풍호(酆鄗)를 떠나 동쪽 낙읍(雒邑)으로 도읍을 옮겼다. 이 때에 진양공(秦襄公)이 견융을 정벌하고 기산(岐山)에 이르러 처음으로 제후의 반열에 올랐다.
是後六十有五年,而山戎越燕而伐齊,齊釐公與戰于齊郊。其後四十四年,而山戎伐燕。燕告急于齊,齊桓公北伐山戎,山戎走。其後二十有餘年,而戎狄至洛邑,伐周襄王,襄王奔于鄭之氾邑。初,周襄王欲伐鄭,故娶戎狄女爲后,與戎狄兵共伐鄭。已而黜狄后,狄后怨,而襄王後母曰惠后,有子子帶,欲立之,於是惠后與狄后、子帶爲內應,開戎狄,戎狄以故得入,破逐周襄王,而立子帶爲天子。於是戎狄或居于陸渾,東至於衛,侵盜暴虐中國。中國疾之,故詩人歌之曰「戎狄是應」,「薄伐獫狁,至於大原」,「出輿彭彭,城彼朔方」。周襄王既居外四年,乃使使告急于晉。晉文公初立,欲修霸業,乃興師伐逐戎翟,誅子帶,迎內周襄王,居于雒邑。
그로부터 65년 후(기원전 706년) 산융(山戎)이 연(燕)나라를 넘어와 제(齊)나라를 공격하니 제나라 희공(釐公)이 제나라 교외에서 산융과 싸웠다. 그로부터 44년 후(기원전 664년) 산융이 다시 연나라를 공격했다. 연나라는 급히 제나라에 위급함을 알렸고 제나라 환공(桓公)은 북쪽으로 가서 산융을 공격하니 산융이 달아났다. 그로부터 20여 년 후(기원전 636년) 융적(戎狄)이 낙읍(雒邑)을 침범하여 주나라 양왕(襄王)을 공격했다. 이에 양왕은 정(鄭)나라의 범읍(氾邑)으로 도피했다. 본래 주나라 양왕은 정나라를 정벌하고자 융적 족장의 딸을 왕후로 맞이하여 융적의 군사와 함께 정나라를 정벌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얼마 후 양왕이 융적 출신 왕후를 내쫓아서 융적 왕후는 원한을 품었다. 그 때에 양왕의 계모 혜후(惠后)에게는 자대(子帶)라는 아들이 있었다. 혜후는 자대를 왕위에 올리고 싶어 했다. 그래서 혜후는 융적왕후(狄后), 자대(子帶)와 함께 융적과 내통하여 성문을 열어주었다. 이로 인해 융적은 도성으로 쳐들어 와서 주나라 양왕을 내쫓고 자대를 천자로 세웠다. 이때부터 융적은 혹은 육혼(陸渾)에서 살고 혹은 동쪽으로 위(衛)나라에 이르러 중원의 제후국을 침략하여 약탈하고 포학했기에 중원의 제후국들이 괴로워 했다. 주나라 양왕은 도성 밖에서 4년 동안 살면서 사신을 진(晉)나라로 보내 위급함을 알렸다. 진나라 문공(文公)은 막 군주의 자리에 올랐는데 패업을 이룰 생각에 군사를 일으켜 융적(戎翟)을 토벌하여 내쫓고 자대를 죽인 다음 주나라 양왕을 맞이하여 낙읍에서 살게 했다.
當是之時, 秦晉為彊國. 晉文公攘戎翟, 居於河西圁洛之閒, 號曰赤翟 , 白翟. 秦穆公得由餘, 西戎八國服於秦, 故自隴以西有綿諸、緄戎、翟、獂之戎, 岐、梁山, 涇、漆之北有義渠、大茘、烏氏、朐衍之戎. 而晉北有林胡、樓煩之戎, 燕北有東胡、山戎. 各分散居谿谷, 自有君長, 往往而聚者百有餘戎, 然莫能相一. 自是之後百有餘年, 晉悼公使魏絳和戎翟, 戎翟朝晉. 後百有餘年, 趙襄子踰句注 而破並代以臨胡貉. 其後既與韓魏共滅智伯, 分晉地而有之, 則趙有代句注之北, 魏有河西上郡, 以與戎界邊.
그 당시에 진(秦)과 진(晉)이 강국이었다. 진(晉)나라 문공은 융적을 황하 서쪽 은수(圁水)와 낙수(洛水) 사이로 내쫓고 그들을 적적(赤翟)과 백적(白翟)이라고 불렀다. 진(秦)나라 목공(穆公)은 유여(由余)를 신하로 받아들여 서융의 여덟 나라를 복속시켰다. 옛날 농(隴) 지방의 서쪽에 면저(綿諸), 곤융(緄戎), 적(翟), 원(獂) 등의 융적이 있었고 기산(岐山), 양산(梁山)과 경수(涇水), 칠수(漆水)의 북쪽에는 의거(義渠), 대려(大荔), 오지(烏氏), 구연(胊衍) 등의 융적이 있었다. 그리고 진(晉)나라 북쪽에는 임호(林胡), 누번(樓煩) 등의 융적이 있었고, 연나라 북쪽에는 동호(東胡), 산융(山戎) 등의 융적이 살고 있었다. 이들은 각기 산골짜기에 거주하면서 제각기 군장이 있었다. 1백여 개의 융족들이 합치는 경우가 가끔 있었지만 하나로 통일되지는 못했다. 그로부터 1백여 년 뒤에 진(晉)나라 도공(悼公)이 위강(魏絳)을 융적에 사신으로 보내 화친을 맺음으로써 융적들은 진(晉)나라에 조회하게 되었다. 또 그로부터 1백여 년 뒤에 조양자(趙襄子)가 구주산(句注山)을 넘어 대(代)를 공격하여 그 땅을 병합하고 호(胡)와 맥(貉)에 이르렀다. 그 후 한(韓), 위(魏)씨와 함께 지백(智伯)을 멸하고 진(晉)나라 영토를 나누어 가졌다. (기원전 453년) 조(趙)나라는 대(代)와 구주산(句注山) 북쪽을 차지하고, 위(魏)나라는 하서(河西)와 상군(上郡)을 차지해 융족과 경계를 맞대었다.
其後義渠之戎築城郭以自守, 而秦稍蠶食, 至於恵王, 遂抜義渠二十五城. 恵王撃魏, 魏盡入西河及上郡於秦. 秦昭王時, 義渠戎王與宣太后亂, 有二子. 宣太后詐而殺義渠戎王於甘泉, 遂起兵伐殘義渠. 於是秦有隴西、北地、上郡, 築長城以拒胡.
그 후 의거(義渠)의 융족은 성곽을 쌓아 수비하기 시작했으나 진(秦)나라가 그들의 땅을 점차 잠식해 들어갔다. 진(秦)나라 혜문왕(惠文王, 재위 기원전 324 ~ 기원전 311)에 이르러 마침내 의거(義渠)의 25성을 차지했다. 또 혜문왕은 위(魏)나라를 침공하여 위나라가 서하군(西河郡)과 상군(上郡)을 진(秦)나라에게 바쳤다. 진(秦)나라 소양왕(昭襄王, 재위 기원전 306 ~ 기원전 251) 때 의거의 융왕(戎王)이 소양왕의 모친 선태후(宣太后, ? ~ 기원전 265년)와 사통해 두 아들을 낳았다. 선태후는 의거 융왕을 속여 감천궁(甘泉宮)으로 유인하여 그를 죽이고, 군사를 일으켜 의거를 공격해 멸망시켰다.(소양왕 35년, 기원전 272년) 이로써 진(秦)나라는 농서군(隴西郡), 북지군(北地郡), 상군(上郡)을 차지하고 장성을 쌓아 오랑캐(胡)를 막았다.
후한서(後漢書) 서강열전(西羌列傳)
至王赧四十三年,宣太後诱殺義渠王於甘泉宫,因起兵灭之,始置隴西、北地、上郡焉。
주(周) 난왕(赧王) 43년(기원전 272년) 선태후가 의거왕을 감천궁으로 유인하여 살해하고 군사를 일으켜 의거를 멸망시켰다. 농서군, 북지군, 상군을 설치했다.
[史記 匈奴列傳 ]
趙武霊王亦変俗胡服, 習騎射, 北破林胡、樓煩. 築長城, 自代並陰山下至高闕為塞. 而置雲中、鴈門、代郡.
조(趙)나라 무령왕(武靈王, 재위 기원전 325 ~ 기원전 299)은 풍속을 개혁해 호복(胡服 : 바지와 소매 좁은 옷)을 도입하고 기사(騎射 : 말 타고 달리며 활 쏘기)를 훈련시켜 북쪽의 임호와 누번을 무찌르고 대(代)에서 음산(陰山)산맥을 따라 고궐(高闕)에 이르기까지 장성을 쌓아 요새로 만들고 운중군(雲中郡), 안문군(雁門郡), 대군(代郡)을 설치했다.
[史記 趙世家]
武靈王 十九年 , 遂胡服招騎射。
무령왕(武靈王) 19년 (기원전 307년) 마침내 호복(胡服)과 기사(騎射)를 시행했다.
武靈王 二十年,王略中山地,至寧葭;西略胡地,至楡中。林胡王獻馬。歸,使樓緩之秦,仇液之韓,王賁之楚,富丁之魏,趙爵之齊。代相趙固主胡,致其兵。
무령왕 20년 (기원전 306년), 왕은 중산국을 공략하여 영가(寧葭)에 이르렀고 서쪽으로 호(胡) 땅을 공략하여 유중(楡中)에 이르렀다. 임호(林胡)의 왕이 말을 바치며 복속해 왔다. 도성인 한단으로 돌아와서 누완(樓緩)을 진(秦)나라에, 구액(仇液)을 한나라에, 왕분(王賁)을 초나라에, 부정(富丁)을 위나라에, 조작(趙爵)을 제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다. 대(代)의 상국 조고(趙固)가 호(胡) 땅에 머물며 군사를 다스렸다.
武靈王 二十一年,攻中山。趙袑爲右軍,許鈞爲左軍,公子章爲中軍,王并將之。牛翦將車騎,趙希并將胡代。趙與之陘,合軍曲陽,攻取丹丘、華陽、鴟之塞。王軍取鄗、石邑、封龍、東垣。中山獻四邑和,王許之,罷兵。
무령왕 21년 (기원전 305년), 중산국을 공격했다. 조소(趙袑)에게는 우군을, 허균(許鈞)에게는 좌군을, 공자 장(章)에게는 중군을 맡기고 왕이 모두 지휘했다. 우전(牛翦)은 전차대와 기병대를 지휘하고, 조희(趙希)는 호(胡)와 대(代)의 군사를 지휘했다. 조나라를 통과하여 곡양(谷陽)에서 합류하고 단구(丹丘), 화양(華陽), 치(鴟)의 요새를 공격하여 점령했다. 무령왕의 군대는 호성(鄗城), 석읍(石邑), 봉룡(封龍), 동원(東垣)을 점령했다. 중산국이 4개 고을을 바치니 무령왕이 화의를 허락하고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二十三年,攻中山。
무령왕 23년 (기원전 303년), 중산국을 공격했다.
二十五年,惠后卒。使周袑胡服傅王子何。
무령왕 25년 (기원전 301년) 혜후(惠后)가 죽었다. 주소(周袑)를 시켜 호복을 입고 하(何) 왕자를 가르치게 했다.
武靈王 二十六年,復攻中山,攘地北至燕、代,西至雲中、九原。
무령왕 26년 (기원전 300년), 다시 중산국을 공격했다. 이로써 그 때까지 빼앗은 땅이 북쪽으로 연(燕)과 대(代), 서쪽으로 운중(雲中)과 구원(九原)에 이르렀다.
武靈王 二十七年 五月 戊申,大朝於東宮,傳國,立王子何以爲王。王廟見禮畢,出臨朝。大夫悉爲臣,肥義爲相國,并傅王。是爲惠文王。惠文王,惠后呉娃子也。武靈王自號爲主父。
무령왕 27년 (기원전 299년), 5월 무신일(戊申日)에 무령왕은 동궁에서 조회를 대대적으로 열고 왕자 하(何)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새 왕은 태묘에 가서 제례를 마친 후 정사에 임했다. 조나라의 대부들은 모두 새로운 왕의 신하가 되기를 맹세했고, 비의를 상국에 임명함과 동시에 사부로 삼았다. 이가 조혜문왕(趙惠文王)이다. 혜문왕은 혜후(惠侯) 오왜(吳娃)의 소생이다. 무령왕은 스스로 주보(主父)라 칭했다.
惠文王二年,主父行新地,遂出代,西遇樓煩王於西河而致其兵。
혜문왕 2년 (기원전 297년) 무령왕이 새로 얻은 땅을 보기 위해 순행를 나갔다가 대(代) 땅에서 서쪽으로 나가 황하의 서쪽(西河)에서 누번(樓煩)의 왕을 만나 그들의 군사들을 징발했다.
惠文王 三年,滅中山,遷其王於膚施。起靈壽,北地方從,代道大通。還歸,行賞,大赦,置酒酺五日,封長子章爲代安陽君。章素侈,心不服其弟所立。主父又使田不禮相章也。
혜문왕 3년 (기원전 296년), 중산국을 멸하고 그 왕을 부시(膚施)에 옮겨 살게 했다. 중산국의 땅에 영수궁(靈壽宮)을 짓기 시작했다. 새로 얻은 북방의 땅이 비로소 조나라에 속하게 되자, 대(代) 땅으로 통하는 길이 크게 뚫려 서로 막히지 않게 되었다. 다시 한단으로 돌아와서 논공행상을 한 후 대사면령을 내리고 온 나라 백성들에게 음식과 술을 내어 닷새 동안 먹고 마시게 했다. 태자의 자리에서 폐위된 공자 장(章)을 대(代) 땅의 안양군(安陽君)에 봉했다. 공자 장(章)은 평소에 사치스러웠고 왕의 자리를 차지한 그의 동생에 대해 마음 속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주보가 전불례(田不禮)를 보내 공자 장(章)을 보좌하도록 했다.
惠文王 四年,朝群臣,安陽君亦來朝。主父令王聽朝,而自從旁觀窺群臣宗室之禮。見其長子章傫然也,反北面爲臣,詘於其弟,心憐之,於是乃欲分趙而王章於代,計未決而輟。
혜문왕 4년 (기원전 295년), 왕이 조회를 열고 여러 신하들을 모이게 하자 안양군 장(章)도 참석했다. 주보가 영을 내려 왕으로 하여금 정사를 보게 하면서 옆에서 여러 신하들과 종친들이 행하는 예절을 지켜보았다. 장자인 안양군의 모습이 의기소침하여 형의 신분임에도 오히려 신하의 몸으로 북면하여 동생에게 몸을 굽히는 모습을 보고 마음 속으로 측은한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에 주보는 조나라를 양분하여 장(章) 을 대(代) 땅의 왕으로 봉하려고 생각했으나 그 계획을 결행하지 못했다.
惠文王 五年 , 主父及王游沙丘,異宮,公子章卽以其徒與田不禮作亂,詐以主父令召王。肥義先入,殺之。髙信卽與王戰。公子成與李兌自國至,乃起四邑之兵入距難,殺公子章及田不禮,滅其黨賊而定王室。公子成爲相,號安平君,李兌爲司寇。公子章之敗,往走主父,主主開之,成、兌因圍主父宮。公子章死,公子成、李兌謀曰:「以章故圍主父,卽解兵,吾屬夷矣。」乃遂圍主父。令宮中人「後出者夷」,宮中人悉出。主父欲出不得,又不得食,探爵鷇而食之,三月餘而餓死沙丘宮。主父定死,乃發喪赴諸侯。
혜문왕 5년 (기원전 294년) 주보가 혜문왕과 함께 사구(沙丘)로 유람 나갔다가 서로 다른 궁에 기거하였다. 공자 장(章)이 그의 일당 및 전불례와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주보의 명을 사칭하여 혜문왕을 불렀는데 비의가 먼저 당도하자 죽였다. 고신(高信)은 즉시 혜문왕과 함께 군사를 동원하여 공자 장(章)에게 대항했다. 도성을 지키고 있던 공자 성(成)과 이태가 네 고을의 군사를 이끌고 달려와 반란군에 대항하여 공자 장과 전불례를 죽이고 그 도당을 멸하여 왕실을 안정시켰다. 공자 성(成)은 재상이 되어 안평군(安平君)이라는 봉호를 받았고 이태는 사구(司寇)가 되었다. 그 전에 공자 장이 싸움에 패하고 도망쳐 주보를 찾아가자, 주보는 문을 열어주고 그를 받아 들였다. 공자 성과 이태는 주보가 묵고 있던 궁궐을 포위하고 수색하여 공자 장을 잡아서 죽인 후에 두 사람이 모의하였다. 「공자 장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주보가 묵고 있는 궁궐을 포위했으니 만일 우리가 포위를 푼다면, 우리 두 사람은 반란죄로 멸족당할 것이다.」 두 사람은 주보에 대한 포위를 풀지 않고 궁궐 안에 있던 사람들에게 영을 내렸다. 「궁궐에서 늦게 나오는 자는 모두 멸족 시키겠다.」 그러자 궁궐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밖으로 나왔다. 주보도 같이 나오려고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고, 또한 음식을 구할 수도 없어 참새 새끼를 잡아먹다가 결국은 석 달 만에 사구궁(沙丘宮)에서 굶어 죽었다. 주보의 죽음을 확인한 두 사람은 비로소 상(喪)을 발하고 제후들에게 부음을 전했다.
[史記 蘇秦列傳]
去遊燕 歳餘而後得見 説燕文侯曰 燕東有朝鮮遼東 北有林胡樓煩 西有雲九原 南有嘑沱易水 地方二千餘里 帯甲數十萬 車六百乗 騎六千匹 粟支數年 南有碣石鴈門之饒 北有棗栗之利 民雖不佃作而足於棗栗矣 此所謂天府者也
소진(蘇秦)이 연(燕)나라로 가서 떠돌다 1년여 후에 연 문후(文侯)를 만나 이렇게 유세했다. 연나라는 동쪽에 조선(朝鮮)과 요동(遼東)이 있고, 북쪽에 임호(林胡)와 누번(樓煩)이 있고, 서쪽에 운중(雲中)과 구원(九原)이 있고, 남쪽에 호타하(嘑沱河)와 역수(易水)가 있습니다. 땅은 사방 2천여 리에 갑옷을 두른 병사가 수십 만, 전차가 600승, 전투마가 6,000필이고 비축된 식량은 몇 년을 먹을 수 있습니다. 남으로 갈석(碣石)과 안문(雁門)의 풍요로움이 있고, 북으로는 대추와 밤이 풍족합니다. 이것이 이른바 하늘이 내려준 창고라는 것입니다.
[史記 燕世家]
文公 二十八年, 蘇秦始來見, 說文公. 文公予車馬金帛以至趙, 趙肅侯用之. 因約六國, 爲從長. 秦惠王以其女爲燕太子婦.
문공(재위 BC 361 ~ BC 333) 28년(기원전 334년)에 소진(蘇秦)이 처음으로 와서 문공을 만나 유세했다. 문공이 마차, 금, 비단을 주어 조(趙)나라로 보내자 조나라 숙후(肅侯)가 그를 기용했다. 6국이 동맹을 약속하니 (소진이 합종을 이끄는) 종약장(縱約長)이 되었다. 진(秦)나라의 혜왕(惠王)이 자기 딸을 연나라 태자의 부인이 되게 했다.
文公 二十九年, 文公卒, 太子立, 是爲易王. 易王初立, 齊宣王因燕喪伐我, 取十城; 蘇秦說齊, 使復歸燕十城.
문공 29년 (기원전 333년)에 문공이 죽고 태자가 들어서니 이가 역왕(易王)이다. 역왕이 즉위하자마자 제나라 선왕(宣王)이 연나라의 장례를 틈타 연나라를 쳐서 열 개의 성을 빼앗았다. 소진이 제나라에 유세하여 연나라의 성 열 개를 돌려주게 했다.
易王 十年, 燕君爲王. 蘇秦與燕文公夫人私通, 懼誅, 乃說王使齊爲反閒, 欲以亂齊.
역왕 10년(기원전 323년), 연나라의 군주가 왕을 칭했다. 소진이 연나라 문공의 부인과 간통했는데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 왕에게 유세하기를, 제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반간계(反間計)로 제나라를 어지럽히겠다고 했다.
易王立十二年卒, 子燕噲立. 燕噲旣立, 齊人殺蘇秦. 蘇秦之在燕, 與其相子之爲婚, 而蘇代與子之交. 及蘇秦死, 而齊宣王復用蘇代.
역왕은 즉위한지 12년 만에 죽고 (기원전 320년) 아들 쾌(噲)가 즉위했다.
쾌(噲)가 즉위한 후 제나라가 소진을 죽였다. 소진이 연나라에 있을 때 재상 자지(子之)와 혼인관계를 맺었다. 그리고 동생 소대(蘇代)도 자지와 교류했다. 소진이 죽자 제나라 선왕이 다시 소대를 기용했다.
燕噲 三年, 與楚ㆍ三晉攻秦, 不勝而還. 子之相燕, 貴重, 主斷. 蘇代爲齊使於燕, 燕王問曰: ‘齊王奚如? 對曰: ‘必不霸. 燕王曰: ‘何也? 對曰: ‘不信其臣. 蘇代欲以激燕王以尊子之也. 於是燕王大信子之. 子之因遺蘇代百金, 而聽其所使. 鹿毛壽謂燕王: ‘不如以國讓相子之. 人之謂堯賢者, 以其讓天下於許由, 許由不受, 有讓天下之名而實不失天下. 今王以國讓於子之, 子之必不敢受, 是王與堯同行也. 燕王因屬國於子之, 子之大重. 或曰: ‘禹薦益, 已而以啟人爲吏. 及老, 而以啟人爲不足任乎天下, 傳之於益. 已而啟與交黨攻益, 奪之. 天下謂禹名傳天下於益, 已而實令啟自取之. 今王言屬國於子之, 而吏無非太子人者, 是名屬子之而實太子用事也. 王因收印自三百石吏已上而效之子之. 子之南面行王事, 而噲老不聽政, 顧爲臣, 國事皆決於子之.
연 쾌왕 3년(기원전 318년) 초(楚)나라 및 삼진(趙, 魏, 韓)과 함께 진(秦)나라를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왔다. 자지가 연나라의 재상이 되어 더욱 귀하신 몸이 되자 국정을 독단했다. 소대가 제나라를 위해 연나라에 사신으로 왔다. 연왕이 “제나라의 왕은 어떻소?”라고 묻자 “분명 패주가 못 될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연왕이 “왜 그렇소?”라고 하자 “신하를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소대는 이렇게 연왕을 자극하여 자지를 더욱 존중하게 만들려고 하였다. 연왕이 자지를 크게 신임하였다. 자지는 소대에게 100금을 주어 마음대로 쓰게 했다. 녹모수(鹿毛壽)가 연왕에게 “나라를 국상(國相) 자지에게 양보하느니만 못합니다. 사람들이 요(堯)를 현자라 하는 까닭은 그가 천하를 허유(許由)에게 선양(禪讓)했기 때문입니다. 허유가 받지 않았지만 천하를 선양했다는 명성을 얻었고, 실제로 천하를 잃지도 않았습니다. 지금 왕께서 나라를 자지에게 양보한다 해도 자지는 감히 받지 못할 것이고, 왕께서는 요와 같은 덕행을 쌓게 됩니다.”라 했다. 이로써 연왕은 자지에게 나라를 맡겼고, 자지는 더욱 중요해졌다. 누군가 말하기를 “우(禹)는 익(益)을 추천하고 계(啓)의 사람을 관리로 삼았다. (우가) 늙어서 계에게 천하를 맡기기는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익에게 자리를 전했다. 얼마 후 계가 무리들과 함께 익을 공격하여 자리를 빼앗았다. 천하는 우가 명목상 익에게 천하를 전했지만 실제로는 아들 계에게 알아서 천하를 취하게 하였을 뿐이라고 말한다. 지금 왕이 나라를 자지에게 맡긴다고는 했으나 관리들은 태자의 사람이 아닌 자가 없으니 명목상 자지에게 맡기고 실제로는 태자에게 일을 처리하라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자 왕은 300석 이상의 녹봉을 받는 관리들에 대한 임용권을 자지에게 넘겼다. 자지가 남면하여 왕의 일을 행사했다. 쾌는 늙어서 정치를 돌보지 않았고 도리어 신하가 되었으며 국사는 모두 자지가 결정했다.
三年, 國大亂, 百姓恫恐. 將軍市被與太子平謀, 將攻子之. 諸將謂齊湣王曰: ‘因而赴之, 破燕必矣. 齊王因令人謂燕太子平曰: ‘寡人聞太子之義, 將廢私而立公, 飭君臣之義, 明父子之位. 寡人之國小, 不足以爲先後. 雖然, 則唯太子所以令之. 太子因要黨聚衆, 將軍市被圍公宮, 攻子之, 不克. 將軍市被及百姓反攻太子平, 將軍市被死, 以徇. 因搆難數月, 死者數萬, 衆人恫恐, 百姓離志. 孟軻謂齊王曰: ‘今伐燕, 此文ㆍ武之時, 不可失也. 王因令章子將五都之兵, 以因北地之衆以伐燕. 士卒不戰, 城門不閉, 燕君噲死, 齊大勝. 燕子之亡二年, 而燕人共立太子平, 是爲燕昭王.
그로부터 3년 후(기원전 314년) 나라에 큰 난리가 일어나 백성들이 공포에 떨었다. 장군 시피(市被)가 태자 평(平)과 모의하여 자지를 공격했다. (제나라의) 여러 장군들이 제나라 민왕(湣王)에게 “이 틈에 공격하면 틀림없이 연나라를 깰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제나라 왕은 사람을 연나라 태자 평에게 보내 “과인은 태자가 대의를 알아 사사로움을 버리고, 공적인 도를 세우고, 군신관계를 정돈하고, 부자간의 지위를 바로잡으려 한다고 들었소. 과인의 나라가 작아 앞뒤에서 도울 수는 없지만 태자의 명령이라면 기꺼이 따르겠소.”라고 전했다. 이에 태자는 당파와 무리를 모으고, 장군 시피는 궁궐을 포위하여 자지를 공격했으니 이기지 못했다. 장군 시피와 백성들이 태자 평에게 반격했다. 장군 시피가 죽자 저자거리에서 조리를 돌렸다. 몇 달에 걸친 난리 때문에 죽은 사람이 수만 명에 이르렀다. 사람들은 공포에 떨었고 백성들은 마음을 잡지 못했다. 맹자(孟子)가 제왕에게 “주나라 문왕과 무왕 때와 같으니 지금 연나라를 정벌할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라고 했다. 이에 제왕은 장자(章子)에게 5도(五都)의 군사와 북방의 무리들을 거느리고 연나라를 정벌하게 했다. (연나라의) 사졸들은 싸우지 않았고, 성문도 닫지 않았다. 연나라의 군주 쾌가 죽고(기원전 314년) 제나라는 대승을 거두었다. 연나라의 자지가 죽은 지 2년(기원전 312년)에 연나라 사람들이 태자 평을 세우니 이가 연나라 소왕(昭王)이다.
[史記 燕世家]
燕昭王於破燕之後卽位, 卑身厚幣以招賢者. 謂郭隗曰: ‘齊因孤之國亂而襲破燕, 孤極知燕小力少, 不足以報. 然誠得賢士以共國, 以雪先王之恥, 孤之願也. 先生視可者, 得身事之. 郭隗曰: ‘王必欲致士, 先從隗始. 況賢於隗者, 豈遠千里哉! 於是昭王爲隗改筑宮而師事之. 樂毅自魏往, 鄒衍自齊往, 劇辛自趙往, 士爭趨燕. 燕王噲死問孤, 與百姓同甘苦.
연 소왕(昭王)은 연나라가 무너진 후 즉위하여 몸을 낮추고 후한 대우로 현자를 초빙했다. 곽외(郭隗)에게 “제나라가 우리의 난국을 틈타 연나라를 기습하여 무너뜨렸소. 우리 연나라의 땅은 작고 힘이 약해 되갚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을 내가 너무 잘 알고 있소. 그러나 정말 유능한 인재를 얻어 함께 나라를 다스리며 선왕의 치욕을 씻는 것이 나의 바람이오. 선생께서 보기에 이런 인재가 있다면 이 몸이 친히 그를 모시리라.”라 했다. 곽외가 “왕께서 꼭 그런 인재를 모시려 한다면 먼저 이 곽외부터 시작하십시오. 하물며 이 곽외보다 나은 인재들이 어찌 천 리를 멀다 하겠습니까?”라 했다. 이에 소왕은 곽외를 위해 궁을 짓고 스승으로 그를 모셨다. 악의(樂毅)가 위(魏)나라에서, 추연(鄒衍)이 제나라에서, 극신(劇辛)이 조(趙)나라에서 오는 등 인재들이 다투어 연나라로 달려왔다. 연왕은 죽은 사람에게는 조의를 표하고, 혼자 유족들을 찾아가 위문하는 등 백성들과 동고동락했다.
燕昭王 二十八年, 燕國殷富, 士卒樂軼輕戰, 於是遂以樂毅爲上將軍, 與秦ㆍ楚ㆍ三晉合謀以伐齊. 齊兵敗, 湣王出亡於外. 燕兵獨追北, 入至臨淄, 盡取齊寶, 燒其宮室宗廟. 齊城之不下者, 獨唯聊ㆍ莒ㆍ卽墨, 其餘皆屬燕, 六歲.
武成王七年, 齊田單伐我, 拔中陽.
연소왕 28년(기원전 285년) 연나라는 부유해지고 병사들은 기꺼이 전투에 나가려 했다. 이에 (기원전 285년) 악의를 상장군으로 삼아 진(秦)나라와 초(楚)나라, 삼진(三晉)과 모의하여 제나라를 정벌했다. 제나라 군대는 패했고 민왕은 도성 밖으로 도망쳤다. 연나라의 군대가 단독으로 추격하여 임치에 진입해서 제나라의 보물을 빼앗고 궁실과 종묘를 불태웠다.(기원전 284년) 함락되지 않은 제나라의 성은 요(聊), 거(莒), 즉묵(卽墨) 뿐이고 나머지는 모두 연나라의 차지가 되어 6년 동안 지속되었다.
[史記 趙世家]
趙 惠文王 十四年,相國樂毅將趙、秦、韓、魏、燕攻齊,取靈丘。與秦會中陽。
十五年,燕昭王來見。趙與韓、魏、秦共撃齊,齊王敗走,燕獨深入,取臨菑。
조(趙)나라 혜문왕 14년(기원전 285년), 연나라의 재상 악의(樂毅)가 조(趙), 진(秦), 한(韓), 위(魏), 연(燕) 오국 연합군을 이끌고 제나라를 공격하여 영구(靈丘)를 빼앗았다. 진나라 왕과 중양(中陽)에서 회동했다.
혜문왕 15년(기원전 284년), 조나라를 방문한 연소왕(燕昭王)과 회견했다. 조나라가 위(魏), 진(秦), 한(韓), 연(燕) 나라 등과 함께 제나라를 공격했다. 제왕이 싸움에서 패하고 도망쳤다. 4국의 군대가 진격을 멈추자 연나라 단독으로 제나라를 깊숙히 쳐들어가 그 도성인 임치성(臨淄城)을 점령했다.
[樂毅列傳]
樂毅留徇齊五歲, 下齊七十餘城, 皆爲郡縣以屬燕, 唯獨莒ㆍ卽墨未服. 會燕昭王死, 子立爲燕惠王. 惠王自爲太子時嘗不快於樂毅, 及卽位, 齊之田單聞之, 乃縱反閒於燕, 曰: “齊城不下者兩城耳. 然所以不早拔者, 聞樂毅與燕新王有隙, 欲連兵且留齊, 南面而王齊. 齊之所患, 唯恐他將之來.” 於是燕惠王固已疑樂毅, 得齊反閒, 乃使騎劫代將, 而召樂毅. 樂毅知燕惠王之不善代之, 畏誅, 遂西降趙. 趙封樂毅於觀津, 號曰望諸君. 尊寵樂毅以警動於燕ㆍ齊. 齊田單後與騎劫戰, 果設詐誑燕軍, 遂破騎劫於卽墨下, 而転戰逐燕北至河上, 盡複得齊城, 而迎襄王於莒, 入於臨菑.
[악의열전]
악의가 5년 동안 제나라 땅을 순행하면서 70여 개 성을 점령하고 군현(郡縣)으로 만들어 연나라에 복속시켰으나 오직 거(莒)와 즉묵(卽墨)만은 함락시키지 못했다. 그때 연나라 본국에서는 소왕이 죽고 (기원전 279년) 그 아들 혜왕이 새로 연왕의 자리에 올랐다. 혜왕은 태자 시절부터 악의를 불쾌하게 여겼다. 연나라에 태자가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들은 제나라 장수 전단(田單)이 반간계를 쓰기 위해 첩자를 연나라로 보내 다음과 같은 소문을 퍼뜨렸다. 「함락되지 않은 제나라의 성은 거와 즉묵 두 성뿐인데 빨리 함락시키지 않는 이유는 악의가 연나라의 새로운 왕과 사이가 좋지 않기에 군사를 거느리고 제나라에 계속 머물면서 남면하여 제나라 왕이 되려고 하기 때문이다. 제나라는 오로지 악의를 대신해서 다른 장수가 올까봐 두려워 한다.」 그 소문을 전해듣고 악의를 의심하게 된 연혜왕은 제나라의 반간계에 떨어져 기겁(騎劫)을 보내 대장의 직을 대신하게 하고 악의를 연나라 본국으로 소환했다. 악의는 연혜왕이 자기를 좋지 않게 여기는 것을 알고 연나라에 돌아가면 주살되지나 않을까 두려워 서쪽 조나라에 투항했다. 조나라는 악의를 관진(關津)에 봉하고 망제군(望諸君)이라는 칭호를 내렸다. 조나라가 악의를 받아들여 후대하는 것을 본 연과 제 두 나라는 두려움에 떨었다. 즉묵의 제나라 장수 전단은 후에 기겁과 힘껏 싸웠는데, 우선 연나라 군사들을 미혹시키고 속여 마침내 기겁이 거느린 연군(燕軍)을 즉묵에서 무찔렀다.(기원전 278년). 전단은 계속해서 제나라의 여러 지방을 돌아다니며 싸워 연나라 군사들을 황하 북쪽으로 몰아냈다. 제나라 성을 모두 수복하고 거(莒)에서 제양왕을 맞이하여 임치에 입성하였다.
연나라 혜왕은 7년 만에 죽고 무성왕(武成王)이 즉위했다. (기원전 272년)
한(韓), 위(魏), 초(楚)가 함께 연나라를 공격했다.
무성왕 7년(기원전 265년) 제나라의 전단이 연나라를 정벌하여 중양(中陽)을 빼앗았다.
[匈奴列傳]
趙武霊王亦変俗胡服, 習騎射, 北破林胡、樓煩. 築長城, 自代並陰山下, 至高闕為塞. 而置雲中、鴈門、代郡.
其後燕有賢將秦開, 為質於胡, 胡甚信之. 帰而襲破走東胡, 東胡卻千餘里. 與荊軻刺秦王秦舞陽者, 開之孫也. 燕亦築長城, 自造陽至襄平. 置上谷、漁陽、右北平、遼西、遼東郡以拒胡.
흉노열전
조(趙)나라 무령왕(武靈王, 재위 기원전 325년 ~ 기원전 299년)은 풍속을 개혁해 호복(胡服)을 도입하고 기사(騎射 : 말 타고 달리며 활 쏘기)를 훈련시켜 북쪽의 임호와 누번을 무찌르고 대(代)에서부터 음산(陰山)산맥을 따라 고궐(高闕)에 이르기까지 장성을 쌓아 요새로 만들고 그 땅에 운중군(雲中郡), 안문군(雁門郡), 대군(代郡)을 설치했다. 그 후 연나라의 현명한 장수 진개(秦開)가 호(胡)에 인질로 가 있었는데 호(胡)가 그를 무척 신임했다. 진개는 연나라로 돌아온 후 군대를 이끌고 동호를 습격해 패주시켰다. 이때 동호는 1천여 리나 물러갔다. 형가(荊軻)와 함께 진시왕을 암살하려던 진무양(秦舞陽)은 진개의 손자다. 연나라 역시 조양(造陽)에서 양평(襄平)에 이르는 지역에 장성을 쌓고 상곡군(上谷郡), 어양군(漁陽郡), 우북평군(右北平郡), 요서군(遼西郡), 요동군(遼東郡)을 설치하여 호(胡)를 막았다.
주류학계는 조양(造陽)을 지금의 장가구, 양평(襄平)을 지금의 요양이라고 주장한다.
[三國志魏書東夷傳]
魏略 曰, 昔箕子之後朝鮮侯, 見周衰, 燕自尊爲王, 欲東略地, 朝鮮侯亦自稱爲王, 欲興兵逆擊燕以尊周室, 其大夫禮諫之乃止, 使禮西說燕 燕止之不攻, 後子孫稍驕虐燕乃遣將秦開攻其西方, 取地二千餘里, 至滿番汗爲界, 朝鮮遂弱
[삼국지위서동이전]
위략(魏略)에 이르기를, 옛날 기자의 후손인 조선후는 주나라가 쇠약해지고 연이 스스로를 높여 왕이 되어 동쪽으로 침략하려 하자 조선후 역시 왕을 자칭하고 병사를 일으켜 연을 공격함으로써 주 왕실을 받들고자 했으나 그 대부 예가 간언하므로 그만두었다. 예를 서쪽으로 보내 연나라를 설득하게 하니 연나라도 그만두고 공격하지 않았다. 후에 자손들이 점점 교만하고 포학해지자 연나라가 장수 진개를 보내 그 땅의 서방을 공격하여 이천여 리를 빼앗고 만번한(滿番汗)에 이르러 경계를 삼으니 마침내 조선이 약해졌다.
[史記 朝鮮列傳]
朝鮮王満者 故燕人也 自始全燕時 嘗略屬真番朝鮮 為置吏 築鄣塞 秦滅燕 屬遼東外徼
조선왕(朝鮮王) 만(滿)은 옛 연(燕)나라 사람이다. 연은 전성기 때부터 일찌기 진번(眞番)과 조선을 공략하여 복속시키고는 관리를 두고 장새를 쌓았다. 진(秦)이 연을 멸하고 (그 땅을) 요동외요(遼東外徼)에 속하게 했다.
※ 사기 조선열전은 自始全燕時라 했는데 사기보다 180년 후에 반고가 저술한 한서(漢書) 한서 조선열전은 全을 빼고 自始燕時라 했다. 이는 "연나라 때 처음으로" 라는 뜻이다. 그 뒤는 사기를 옮겨 적었다.
[漢書 朝鮮列傳]
朝鮮王滿燕人。自始燕時,嘗略屬眞番、朝鮮,爲置吏築障。秦滅燕,屬遼東外徼。漢興,爲遠難守,復修遼東故塞,至浿水爲界,屬燕。
※ 사기는 진(秦)나라와 조(趙)나라가 북방민족을 상대로 수행한 전쟁에 관해 흉노열전에 간략히 기술하고 진본기(秦本紀)와 조세가(趙世家)에 상세히 기술하였다. 그러나 연(燕)나라의 경우 동호와의 전쟁은 흉노열전에 약술하고 조선과의 전쟁은 조선열전에 더욱 약술하고서 연세가(燕世家)에는 언급조차 없어서 전쟁의 지리와 시기를 알 수가 없다. 두 전쟁의 주역인 진개는 연세가(燕世家)뿐만 아니라 열전에도 누락되어 생몰년대조차 알 수 없다. 위략(魏略) 또한 마찬가지여서 만번한의 위치를 알 수 없다.
사기 조세가(趙世家)에 의하면 기원전 306년에 조나라 무령왕이 북벌을 감행하여 삼군을 설치했다. 흉노열전에 의하면 무령왕의 북벌 후 연나라 장수 진개가 동호를 몰아냈다고 했으니 그 시기는 연나라 소왕(昭王, 재위 기원전 312 ~ 기원전 279) 때이다. 소왕은 연나라가 내전과 외침으로 거의 다 무너진 기원전 312년에 즉위하여 내치에 주력해서 국력을 키운 후 285년에 제나라를 침공하여 거의 다 점령하였다. 이러한 역사로 보아 필자는 진개가 동호를 침공한 시기는 기원전 300년 ~ 기원전 295년, 조선을 침공한 시기는 기원전 290년으로 추정한다.
기원전 247년에 진(秦) 시황이 왕위에 올랐다. 당시의 형세는 아래와 같다.
진(秦)이 육국을 멸한 시기는 다음과 같다.
기원전 230년 한(韓)
기원전 228년 조(趙)
기원전 225년 위(魏)
기원전 223년 초(楚)
기원전 222년 연(燕)
기원전 221년 제(齊)
기원전 221년 시황은 전국을 36군(郡)으로 나누고 태수를 임명하여 중앙집권체제를 시행했다. 주류학계가 주장하는 36군의 영역은 아래와 같다. 요동군의 동쪽 경계가 청천강 남쪽까지 내려와 있다.
[史記 秦始皇本紀]
始皇 二十六年 分天下以為三十六郡,郡置守、尉、監 .... 地東至海曁朝鮮 西至臨洮羌中 南至北嚮戶 北據河爲塞竝陰山至遼東
시황 26년(기원전 221년) 천하를 36군으로 나누어 군에 태수, 위, 감을 두었다. ... (중략)
땅은 동으로 바다와 조선에 이르고, 서로 임조와 강중에 이르고, 남으로 북향호에 이르고, 북으로 황하를 의지하여 요새를 만들어 음산(陰山)을 따라 요동(遼東)에 이르렀다.
始皇 三十二年,始皇之碣石,使燕人盧生求羨門、高誓。刻碣石門。(中略) 始皇巡北邊,從上郡入。燕人盧生使入海還,以鬼神事,因奏錄圖書,曰「亡秦者胡也」。始皇乃使將軍蒙恬發兵三十萬人北擊胡,略取河南地。
시황 32년(기원전 215년), 시황이 갈석산(碣石山)에 가서 연나라 사람 노생(盧生)을 시켜서 선문(羨門)과 고서(高誓)를 찾게 하고 갈석의 문에다 비문을 새겼다. (중략) 시황이 북쪽 변방을 순시하면서 상군을 지나 돌아왔다. 연나라 사람 노생이 바다에 나갔다가 돌아와서 귀신에 관한 일을 보고했는데 ‘진을 망하게 할 자는 호(胡)다’라고 쓰여 있는 참위서를 올렸다. 시황은 장군 몽염(蒙恬)을 시켜 군사 30만 명을 내서 북방의 호(胡)를 공격하여 하남 땅을 빼앗았다.
始皇 三十三年,發諸嘗逋亡人、贅婿、賈人略取陸梁地,為桂林、象郡、南海,以適遣戍。西北斥逐匈奴。自榆中并河以東,屬之陰山,以為三十四縣城, 河上為塞。又使蒙恬渡河取高闕、陽山、北假中,筑亭障以逐戎人。徙謫,實之初縣。禁不得祠。
시황 33년 (기원전 214년), 병역이나 노역을 피해서 도망간 사람, 가난하여 데릴사위가 된 사람, 장사꾼들을 징발하여 육량(陸梁) 지역을 공격하여 계림군(桂林郡), 상군(象郡), 남해군(南海郡)을 설치하고 죄인들을 보내 지키도록 했다. 서북쪽의 흉노를 쫓아내고 유중(楡中)에서부터 황하를 따라 동쪽으로 음산(陰山)에 이르기까지 34개의 현을 설치하여 황하를 요새로 삼았다. 또 몽염을 시켜 황하를 건너 고궐(高闕), 양산(陽山), 북가(北假) 일대를 빼앗고 초소(哨所)와 장벽을 쌓아 융인(戎人)을 몰아냈다. 유배 받은 자를 옮겨 새로 설치한 현을 채우게 하되 제사는 금했다.
• 蒙恬列傳
秦已并天下,乃使蒙恬將三十萬衆北逐戎狄,收河南。筑長城,因地形,用制險塞,起臨洮,至遼東,延袤萬餘里。於是渡河,據陽山,逶蛇而北。暴師於外十餘年,居上郡。是時蒙恬威振匈奴。
몽염열전
진(秦)이 천하를 합병하자 몽염을 시켜 30만 무리를 이끌고 융적을 북으로 내쫓고, 하남을 거두었다. 지형에 따라 험준한 요새를 통제할 수 있게 장성을 쌓았는데 임조에서 시작하여 요동까지 길이가 만여 리에 달했다. 그리하여 황하를 건너 양산을 거점으로 하여 구불구불 북으로 나아갔다. (몽염은) 외지에서 비바람을 맞으며 십여 년 군대를 이끌다가 상군에 주둔하였다. 이 때에 몽염의 위세가 흉노에 진동했다.
기원전 210년 진시황이 죽은 후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 기원전 206년에 진나라가 멸망하고 항우의 초나라와 유방의 한나라가 4년간 싸웠다. BC 202년 1월 항우가 해하에서 패하여 자결하고 유방의 한나라가 천하를 제패했다. BC 202년 8월 노관이 연왕(燕王)에 책봉되었고 패수를 조선과의 경계로 정했다.
[史記 朝鮮列傳]
秦滅燕 屬遼東外徼 漢興為其遠難守 複修遼東故塞至浿水 為界屬燕
진(秦)이 연을 멸하고 요동외요(遼東外徼)에 속하게 했다. 한(漢)이 일어나고 그곳이 멀어 지키기 어려우매 요동의 옛 요새를 복구 수리해서 패수(浿水)에 이르러 경계로 삼고 燕에 속하게 했다.
[三國志魏志東夷傳]
漢以盧綰爲燕王 朝鮮與燕界於浿水
漢나라가 노관을 燕王에 봉했고 조선과 연이 패수를 경계로 삼았다.
※ 여기까지가 주류설이다. 그런데 주류설에는 치명적인 오류가 있다. 주류학계는 요동이라는 지명에만 집착하여 만리장성의 동쪽 끝은 오늘날의 요동이라 하고 심지어 청천강까지 이어졌다고 하는데 이는 터무니 없는 낭설이다.
사기 진시황본기에 이르기를 爲塞竝陰山至遼東이라 했다. 요새가 음산을 따라 요동에 이르렀다는 것은 음산의 끝이 요동이라는 뜻이다. 西에서 東으로 달리는 음산산맥은 북경 북쪽을 지나 발해 연안 진황도까지 이어진다. 현대의 지리학에서는 조백하(潮白河)를 경계로 서쪽을 음산산맥, 동쪽을 연산산맥(燕山山脈)으로 구분하지만 고대에는 전체를 하나의 산줄기로 보고 음산이라 칭했다. 음산산맥이 끝나는 곳이 진황도이고 이곳에 갈석산(碣石山)과 산해관이 있다. 여기가 진시황이 건설한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며 연장성(燕長城)의 동쪽 끝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주류 역사학계는 다음과 같은 역사적 사실을 고의적으로 누락시켜 왔다.
기원전 210년에 진시황이 죽고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 기원전 206년 1월 진나라가 멸망하고 항우의 초나라와 유방의 한나라가 기원전 202년 1월까지 싸웠다. 이 혼란기에 주변의 여러 민족은 진시황에게 빼앗겼던 영토를 회복했으며 조선도 과거 연나라에게 빼앗겼던 땅을 수복했다. 한무제(漢武帝)를 이은 소제(昭帝) 6년(BC 81년) 염철주(鹽鐵酒)의 국가전매제 폐지를 두고 벌어진 대토론회의 내용을 30년 후 환관(桓寬)이 염철론이라는 책으로 편찬했는데 조선에 관해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염철론(鹽鐵論) 벌공편(伐功篇)
大夫曰 齊桓公越燕伐山戎 破孤竹 殘令支. 趙武寧王踰句注 過代谷 略滅林胡樓煩. 燕襲走東胡 辟地千里 度遼東而攻朝鮮
대부가 말하기를, 제나라 환공은 연을 넘어 산융을 벌하고 고죽을 격파하고 영지를 멸했다.
조나라 무령왕은 구주산(句注山)을 넘어 대와 상곡을 지나 임호와 누번을 경략해 멸하였다.
연나라는 동호를 습격해 천리 밖으로 물리치고 요동을 건너 조선을 침공했다.
염철론(鹽鐵論) 비호편(備胡篇)
大夫曰 往者,四夷俱強,並為寇虐, 朝鮮踰徼,劫燕之東地
대부가 말하기를, 옛적에 사방의 오랑캐가 함께 강해져 나란히 노략질과 포학을 저질렀다. 조선은 요(徼)를 넘어 연의 동쪽 지역을 빼앗았다.
요(徼)는 요동외요(遼東外徼)를 가리킨다. 과거 연나라가 진번을 정복하고 조선의 서쪽 땅을 빼앗았는데 진시황이 연을 멸하고 이 곳을 요동외요라 불렀다. 염철론에 의하면 조선은 진(秦)나라가 망한 후 초한쟁패기에 요동외요를 넘어 연나라의 동쪽 땅 일부까지 점령하였다. BC 202년 1월 항우가 자결하고 유방의 한나라가 중원을 제패했다. BC 202년 8월 노관이 연왕에 책봉되었고 패수(浿水)를 조선과의 경계로 정했다.
주류학계는 연(燕)나라와 조선의 경계인 만번한을 청천강이라고 하면서 한(漢)나라와 조선의 경계인 패수도 청천강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염철론의 기록을 부정하는 낭설이다. 만번한은 청천강이라는 주류설을 인정할 경우 패수의 위치는 태자하를 넘어 요하의 서쪽이다. 따라서 청천강, 압록강, 태자하는 물론이고 요하 역시 패수가 아닌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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