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문예대학 출신 작가 작품>
고추 농사 풍년일세
장원태
매의 눈으로 담배꽁초를 찾는다. 개똥도 약에 쓸려면 없다더니 그 많던 게 다 어디로 갔을까. 벌써 반 시간이나 아파트 단지를 쏘다닌다. 목장갑을 낀 채 한 손에는 검은 비닐봉지를 쥐었으니, 주민이 봤다면 청소 봉사자로 여겼으리라. 두 바퀴나 돌다가 흡연자가 자주 보이던 곳에서 횡재라도 한 듯 꽁초를 줍는다. 보물이라도 찾은 듯 공연히 미소가 번진다.
안면 있던 경비 아저씨가 쫓아 온다. 몇 호에 사는지 묻고 청소에 앞장서는 사장님 같은 분이 있어 아파트가 깨끗하단다. 덕담 한마디에 계절 인사까지 나눈 후 “혹시 꽁초로 비료 만드는 법을 아세요?”라고 물었다. 생뚱맞은 질문에 의아해하는 것 같아 꽁초로 유기농 친환경 비료를 만들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게 진딧물에 좋은 것 아니냐?”며 맞장구까지 친다. 집에서 뭘 키우느냐고 묻길래 자식 같은 고추 모종 열 포기를 키우고 있다고 자랑했다.
새 아파트는 베란다가 넓고 햇살이 가득했다. 그 빛이 아까워 화초를 심기 시작했다. 안쪽에는 관상용을, 베란다 밖 사용하지 않는 에어컨 빈 실외기 위에는 긴 화분을 올려놓고 청양고추를 심었다. 시골집에서 가져온 건강한 흙과 거름을 깔고 지지대까지 꽂았다. 아침저녁으로 물 주며 식물학자라도 된 듯 보살폈다. 농작물은 농부의 발걸음 소리를 듣고 자란다고 하지 않던가. 햇살과 공기, 바람은 자연에 맡기고 나는 물만 열심히 주자. 고추는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랐다. 잎사귀 크기도 볼 때마다 변한다.
좁은 터에 나란히 심은 줄이 빽빽해 보였지만 아웅다웅 자라는 모습이 신기하고 이뻤다. 어릴 적 우리 10남매를 보는 것 같다. 부모님 마음도 이랬을까. 자식들의 꿈틀거리는 생명력에 감동했을까. 그래, 고추 포기와 숫자가 같으니 우리 남매의 이름을 붙이자. 내 이름을 가진 고추는 끝에서 두 번째이다.
제일 앞쪽의 큰 누님 고추는 씩씩해 보였다. 잎도 크고 색깔도 짙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잎사귀 뒷면에 개미 같은 벌레가 하나둘 생기기 시작했다. 자세히 보니 진딧물이었다. 다른 고추보다 튼실해 보였는데 얼굴 주름살처럼 시들해졌다. 담배 용액이 진딧물의 특효약이라는 소문에, 문방구에서 사 온 황토 찰흙과 물까지 섞어 담뱃가루를 며칠 묵혔다. 그걸 노인 보약 챙기듯이 아침저녁으로 뿌렸다. 효과가 있었다. 잎사귀는 금세 반짝반짝 윤이 나면서 건강을 되찾았다. 줄기에서 하얀 꽃이 올라왔을 때는 환호성을 질렀고 아내를 불러 “올여름에는 꽃구경 갈 필요 없다” 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미국에 홀로 계시는 큰 누님의 부고 소식이 날아들었다. 슬픈 소식은 거리쯤 아랑곳없이 금방 집안 전체에 퍼졌다. 너무 먼 길이라 자매들만 장례식에 참석했다. 나보다 18살이나 위였던 누님은 어머니와 같은 존재였다. 가난한 시골집에 맏이로 태어나 일찍부터 농사일이 싫다며 집을 나갔다. 도시에서 생활하다 자형을 만났고 미국으로 이주하여 살았다. 결혼해서도 어려운 동생들을 위해 학비며 용돈을 보태곤 했다. 그 시절 맏이의 삶이 대부분 그러하듯 누님은 자신의 온기로 우리 가족 모두가 따뜻해지길 원했다. 최근 한국에 왔을 때도 70대 할머니 같지 않게 건강했는데 갑자기 돌아가셔서 충격이 컸다. 조금이라도 빚을 갚는 심정으로 마지막 길을 배웅하는 게 마땅했지만, 여의찮은 현실이 슬펐다. 가슴 한쪽에 박힌 아린 옹이로 보듬으며 산다.
가끔 베란다 창문을 열면 남매들이 바람에 옹알이 소리를 낸다. 자세히 보면 슬픈 표정의 누님도 있고 토라진 여동생도 있다. 시골 고추밭이 부럽지 않았다. 확 풍겨 오는 풀 냄새는 어떤 청량제보다 기분을 상쾌하게 만든다. 애완동물 키우듯 식물에서도 특별한 감정을 느낀다. 좋은 일을 시샘하는 것인가. 밤새 비바람이 불고 새벽까지 창문이 심하게 흔들리던 날 아침, 베란다 밖을 보고 깜짝 놀랐다. 전쟁 영화에서 봤던 죽은 병사들처럼 처참하게 쓰러졌다. 성한 것이라고는 나와 제일 뒷줄 막내뿐이었다. 앞에서 ‘바람막이’해 주던 누님과 형들이 쓰러졌다. 태풍으로 농사를 망친 농부의 심정이 이런 것일까? 테이프를 가져와 쓰러진 것을 다시 붙이고 세웠다. 고개가 꺾여 윗부분이 아예 통째로 떨어져 나간 것은 어찌해 볼 수 없었다. 가족을 잃은 슬픔이 이런 것일까.
10년 전 돌아가신 어머니는 입버릇처럼 얘기했다. 더 나이 들기 전에 누님을 가족 모두가 있는 한국으로 데려와야 한다고. 자신을 희생하며 동생들을 뒷바라지한 그 은혜를 모른다면 금수보다 못한 놈이라고. 누님 인생은 억척같이 동생들을 살피는 삶이었다. 한국에 나올 때마다 초콜릿 하며 먹을 걸 가득 사 와 나눠 주기도 했다. 출가한 동생들 자녀까지 용돈을 챙겨 주었다. 한번은 잣을 가득 숨겨 가져왔는데 그 이유가 미국에는 싸고 한국에서는 비싸기 때문이라고 했다. 6~70년대 못 살던 때의 일이 가슴에 박힌 듯했다. 자형 먼저 보내고 한국에 돌아오지 않은 이유도 동생들에게 폐가 될까 봐 싫었다고 한다. 뭐든지 쓸 줄도 모르고 오로지 동생들에게 베풀기만 했던 미국 생활 40년을 그렇게 홀연히 떨쳐 버렸다.
어머니는‘앞서간 이가 너희들 바람막이’라는 말을 자주 하셨다. 누군가 앞서가면 그의 삶을 통해 새로운 깨우침을 배우고 그들 몫까지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열 명을 낳아 다섯을 잃은 어머니의 독백은 자식 먼저 보낸 한과 서러움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귀에 쌓이도록 들은 지청구와 염원 때문이었을까. 다행히 남은 자식은 건강하고 여유롭게 살고 있다. 앙증스럽고 작은 열매를 달고 있는 청양고추를 보면서 풍성한 여름을 상상한다. 올해 고추 농사 풍년일세.
(《수필문예》 제22집, 2023. 수필문예회)
-------------------
지은이 프로필
3.15의거 62주년 제38회 전국백일장 차상(’22.7.19)
제12회 대한민국 독도문예대전 입선(’22.9.15)
영남일보 배려이야기 공모전 은상(’22.12.3)
수필문예회 회원
대구수필문예대학 34기 수료.
jwt98@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