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22:3-5 다윗에게 요새는 [피난처가 아닌] 기다림의 장소이다.
아둘람 굴에 홀로 남아 괴로워하고 있을 때, 가족과 친척들과 400명의 사람들이 다윗을 찾아왔다. 그리고 다윗은 그들의 리더가 되었다. 이 얼마나 기쁘고 감격스러운 일인가! 하나님은 사람에 대한 두려움을 하나님을 의지하는 힘으로 전환한 다윗에게 함께 할 사람들을 선물로 주셨다. 위로가 되었고, 살아갈 힘이 생겼다.
하지만 다윗은 기쁨과 함께 리더로서 책임을 져야할 일이 생겼다. 아둘람 굴에서 다윗이 홀로일 땐 사울에게 발각되어도 신속하게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400명의 공동체가 형성되다 보니 발각되었을 때 신속하게 피할 수 없고, 그 과정에서 심각한 피해를 입을 수 있었다. 물론 추종자 400명은 다윗과 함께 싸울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다윗은 부모님이 걱정되었다. 험난하고 고달픈 도피 생활에 연로하신 부모님을 동참시킬 수 없었다. 따라서 다윗은 미리 안전한 곳을 확보하여 그곳으로 움직이고 싶었다.
다윗이 선택한 곳은 어디인가? 국내? 어렵다. 다윗과 함께 한 자들은 이미 사울에게 등을 돌린 자들이다. 사울의 나라엔 은신처가 없다. 블레셋? 이미 가드 즉 아기스의 나라에서 험악한 꼴을 당하지 않았는가! 다윗이 선택한 곳은 모압 비스베였다. 다윗은 모압 왕에게 “나의 부모를 당신들과 함께 있게 하기를 청하나이다”(3)라고 부탁했다, 다행히도 다윗의 부탁은 받아들여졌다. 또한 다윗과 그 일행에게도 요새에 거주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궁궐에서 도망 나온 이후 다윗은 험악한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드디어 모압 왕의 보호로 요새에 들어와 거주하게 되었다. 사울로부터 완전히 차단된 곳이라 쉽게 평안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이제 두 다리 쭉 뻗고 잘 수 있었다.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들과 함께 있으니 이 얼마나 기쁜가! 다윗은 더 이상 찾아올 것 같지 않았던 모압에서의 행복을 할 수만 있다면 계속 누리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선지자 갓이 다윗에게 찾아와 “너는 이 요새에 있지 말고 떠나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5)고 말했다. 여러분이 다윗이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하고 싶은가? 돌아가고 싶지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사울에게 시달려 고통스러운 트라우마가 생겼는데 어떻게 돌아갈 수 있는가! 돌아가 보았자 다윗은 다시 사울에게 고통을 받아야 한다. 여전히 도망자의 삶을 살아야 한다. 추종자 400명과 함께 뻔히 보이는 험악한 삶을 다시 살아야 한다. 자기 혼자이면 모르겠지만 400명과 함께 그 길을 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매우 부담스럽고 괴로웠을 것이다. 오랜만에 마음 놓고 사는 것 같더니만 다시 사울의 나라로 들어가라니! 압박과 부담이 다윗의 목을 조이는 것 같다. 갈등이다. 인지 부조화가 생겼다. 짜증이 났을 것이다. 사실 다윗 일행이 사울의 나라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사울은 제사장 마을을 학살하게 된다(18,19). 아직 다윗은 모르지만 다윗이 사울의 나라로 들어가면 이런 비극적인 참사가 일어난다. 다윗은 무리를 일으키는 트러블 메이커처럼 보일 수 있다. 자신으로 인해 더 많은 인명피해가 생긴다. 다윗은 유다로 들어가라는 하나님께 하염없이 야속했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선지자의 말이지만 듣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여러분은 다윗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다윗은 어떻게 했을까?
놀랍게도 다윗은 어떤 군말도 하지 않고 선지자의 말대로 요새를 떠나 유다에 있는 헤렛 수풀로 갔다(5). “왜 하나님과 선지자는 나를 괴롭히냐? 부담스럽게 만드느냐?”고 따지지도 않았다. 조금만 기다려 달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다윗은 항상 하나님과 그 말씀이 우선이었다. 다윗은 골리앗을 물리칠 때도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싸웠고, 집에서 사울의 피해 도망갈 때도 그가 찾은 곳은 하나님의 선지자가 있는 라마와 하나님의 제사장이 있는 놉땅이었다. 비록 사울이란 사람을 두려워하여 아기스의 나라로 가서 모진 수모와 고통을 당했지만, 그 와중에도 다윗은 자신의 잘못된 선택에 대해 회개했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부르짖었다. 그리고 아둘람 굴에서도 밀려오는 우환과 원통함을 기도로 바꿨다. 이것이 다윗의 루틴이었다. 가치관이었다. 따라서 안락한 모압의 요새에서도 하나님이 선지자를 통해 떠나라고 하니 떠날 수 있었다.
사실 그가 모압에 있는 요새에 머무는 이유가 무엇이었는가? 영원히 모압 나라에 살기 위해? 휴식을 얻기 위해? 사울로부터 피하기 위해? 아니다. 모압 왕에게 말했듯이,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어떻게 하실지를 내가 알기까지”(3)이다. 하나님의 답을 기다리기 위해 요새에 있었다. 이에 대해 하나님은 선지자 갓을 통해 답을 주셨다. “너는 이 요새에 있지 말고 떠나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5) 이는 무슨 뜻일까? 장차 이스라엘의 왕이 될 사람이 조국을 버리고 타국 생활을 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울의 나라에서 고난을 받을지라도 하나님만을 의지하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그에 따른 연단을 받으라는 것이다. 피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대로 정면돌파를 하라는 것이다.
다윗은 사울의 나라에서 겪게 될 고통이 얼마나 클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따랐다. 자기를 따르는 400명에게 어떤 심한 고통이 따를지 알고 있었지만,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랐다. 다윗은 누구의 말도 듣지 않았다. 자신의 감정과 상황도 따르지 않았다. 그것들이 다윗에게 하나님이 될 수는 없었다. 오직 전능하신 여호와만 자신의 주인이요, 하나님이셨다. 하나님만 믿고 사울의 나라로 들어갔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눅5:4)고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명령했을 때, 밤이 새도록 수고해도 잡은 것이 없었다는 현실과 정면으로 부딪쳤다. 첨예하게 대립했다. 빈 그물이 이를 증명하고 있는데 무슨 터무니없는 명령을 따르라는 말인가? 하지만 베드로는 증명된 현실을 보고도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렸다. 말씀을 따랐다. 그 결과 평생 어부로 살면서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기적을 체험했다. 그물이 찢어졌다. 만선으로 두 배가 침몰했다.
[청중] 말씀과 여러분의 감정이 대립되었을 때, 말씀과 여러분의 환경이 대치되었을 때, 말씀과 여러분의 생각이 불일치할 때, 여러분의 감정, 환경, 생각을 먼저 선택하고 싶을 것이다. 그리하여 부담스러운 말씀을 피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반대로 생각했다.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피하고 싶은 감정과 생각 속에서도 다윗은 말씀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말씀을 간절히 찾았다. 그에게 유리한 말씀을 해 주길 바라기보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보았을 때 가장 필요한 말씀이 무엇인지를 찾았다. 그리고 그 말씀이 자신과 추종자들에게 전적으로 불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찾았던 하나님 말씀대로 다시 사울의 나라로 들어갔다.
사마리아 여자는 메시야를 기다렸다. 그리고 그 메시야이신 예수님이 그를 찾아가서 만나 주셨다. 그때 그는 자기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물동이를 버리고 예수님을 소개하는 전도자가 되었다.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예수님이 베드로와 안드레에게 말씀하셨을 때, 그들은 그 말씀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소중한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를 수 있었고(마 4:19,20), 야고보와 요한은 소중한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를 수 있었다(4:21,22). 예수님과 그 말씀을 기다리고 있는 자들에게 예수님과 그 말씀이 나타나면(응답되면), 이렇게 소중한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과 그 말씀을 따르게 되어 있다. 다윗도 기다렸던 말씀을 받았으니 그 말씀을 흔쾌히 따랐던 것이다. 다윗과 그의 추종자들에게 힘겨운 날이 기다리고 있지만, 다윗에겐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었다.
이런 다윗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차기 왕으로 지목하셨던 것이고,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서도 순종했기에 사람들을 붙여 주신 것이고, 어려운 중에도 형통하게 하신 것이고, 마침내 왕이 되게 하셨고, 다윗을 통해 이스라엘이 최고의 날을 보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