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아버지
70 년대 최고의 인기 드라마, ‘여로’ 보기 위해서 매일 큰댁에 갔다.
큰댁에는 크다란 독일산 세퍼트가 있었다. 덩치만 컸지 순한 개였는데, 난 덩치에 놀라곤 했다.
텔레비전이 있는 마루 방에는 동네 사람들이 가득 차 있었다. 큰 엄마는 나를 위해 항상 제일 앞자리를 마련해 놓았다.
텔레비전을 보기 전에 큰 엄마는 항상 나를 불러 그 당시 아이들에게는 최고의 과자 ‘아이스 케키’를 주었다.
큰댁은 홍제동 언덕의 끝자락, 그때는 논으로 가득 찬, 넓은 벌판이었던 교동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적산가옥이었다. 방이 열 개가 넘었던 것 같고, 마루로 이어졌다. 화장실은 변기를 덮을 수 있는 덮개가 있었다.
다다미방을 개조하여 옆에 불만 땔 수 있는 작은 부엌이 하나 더 있었다.
큰 부엌 앞에는, 채소 과일 곡물 고기 등 식품을 보관하던 창고도 있었다.
그것 보다 내가 강력 하게 기억하는 것은, 언덕위에 있던 큰댁 밑으로 사꾸람보 나무가 가득 서 있다는 거다.
그 나무에서 열리는 사꾸람보는 대단히 컸다. 열매도 맛있었다. 여름이면, 항상 큰댁 형들과 사꾸람보를 따기 위해 나무에 올라갔던 기억이 있다.
큰 아버지는, 춘천 농고를 거쳐 경성제국대학을 졸업하고 일제 점령기 시절 관리를 했던 것 같다.
그리고, 큰댁은 일본인 강릉시장이 살던 관사를 적산가옥으로 불하 받은 것 같다.
내가 어릴 때 기억나는 것은, 강릉시장으로 부임해오는 인사들은 큰아버지에게 인사를 오곤 했으니, 꽤 높은 자리에 계셨음에 틀림 없었던 같다.
큰아버지가 친일파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일본인 강릉시장의 관사를 적산가옥으로 불하 받을 정도면, 혹시 친일파였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강릉고등학교에 3 등으로 입학하고, 1학년 내내 1등을 왔다갔다 하자, 큰아버지는 나의 미국 유학자금이라며, 미리 아버지에게 돈을 맡긴 것으로 알고 있다.
그 후 그 돈이 어떻게 쓰였는지는 모르겠다.
난, 큰아버지가 돌아가시고 5년 후, 일본문부성 장학생으로 일본에 유학을 갔으니, 큰아버지의 돈을 쓸 일이 없었다.
큰 아버지는 말이 별로 없으셨다. 술 담배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배우 남궁원과 비슷하게 생긴 눈썹이 짙은 미남이었다. 그레고리 팩과도 비슷하기 하고.
공부만 열심히 하던 내가, 공부를 안하고 싸움질만 하고 돌아다니다가, 급기야는 퇴학을 당하고 전학을 갔을 때, 큰아버지가 묵호로 오셨다.
나를 앞에 앉히고, 아무 말씀도 없으셨다. 나의 어깨만 두두려 주었다.
“넌 잘 할거야”
딱 이말만 기억이 난다. 난 당시 내가 뭘 잘 할지도 모르던 철부지였다.
대학 때 데모를 하다가 경찰서에 끌려 갔을 때도, 나를 찾아왔다. 큰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바로 석방이 되었으나, 즉시 다음 달 군대에 끌려갔다.
훈련소에서 큰아버지에게 편지를 쓴 것이 마지막이었다.
“성열이는 잘 될거야 걱정말아라”
아버지에게 이 말을 남기고 돌아가셨다고 한다.
나는, 한 때, 큰댁이 창피했다. 일본의 적산가옥에 살고 있는 큰댁 식구들이 미웠다. 친일파였음에 틀림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친일 명단도 열심히 찾았으나, 큰아버지 이름은 없었다.
난, 시골 친일파들은 등록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몇일 전, 꼬꼬무를 보다가, 일본 적산가옥 살인 사건에 대한 것이 나와서 불현 듯 큰아버지가 생각났다.
큰댁의 적산가옥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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