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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낙산사로 100 (강현면 전진리 57-1)
033-672-2447
입장료 : 성인4,000원 / 청소년1,500원 / 어린이1,000원
주차비 : 4,000원
주차비 4,000원 아끼자고 낙산해변 GS25앞 주차공간에 주차를 하고 100m 걸어서 올라가기로 했다.
올라가다가 바라본 낙산해변의 모습은 마치 해일재난영화의 한 장면 처럼 공포스럽기 그지 없었다.
재미있는 것은 입장료 면제 대상에 성직자(이웃종교)가 포함되어 있었다.
내려다 보이는 낙산항[전진항]에도 거세게 파도가 들이치고 있었다.
낙산사(洛山寺) 입장권은 무인 매표기를 이용해야 한다.
키오스크가 세대나 있어서 줄서서 대기하고 그럴 필요는 없을 듯 하다.
부처가 사랑하는 고찰
푸른 동해와 맞닿은 오봉산 끝자락.
천년의 시간을 지나온 사찰이 있다.
짙은 바다 내음과 파도 소리가 진하게 들려오는 아름다운 언덕.
청명한 풍경 소리까지 더해진 낙산사는 부처의 예지로 1300여 년 전부터 이곳에 자리한 강원도 대표 사찰이다.
반짝이는 파도와 소나무 향 가득한 경내는 수려한 절경으로 유명하며,
절을 둘러보는 산책로는 경건하고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동해바다의 너그러움을 품고 있는 이곳에 오늘도 수많은 이들이 간절한 마음을 덜어놓고 간다.
[양양 관광 낙산사 소개글]
먼저 의상기념관으로 들어가 보기로 한다.
의상 기념관
낙산사를 창건한 의상 대사는 한국 불교를 크게 빛낸 신라의 대표적 고승이며
이 땅에 화엄사상의 토대를 굳건히 세운 화엄종(華嚴宗)의 개조(開祖)이다.
2001년 건립한 의상 기념관에는 의상 대사의 얼굴을 그린 진영, 일대기를 재현한 8폭 불화,
저술의 핵심인 '화엄일승법계도'와 백화도량 발원문을 담은 10폭 병풍, 각종 서적과 논문 등이 전시되어 있다.
또한 2005년 양양 산불로 전소된 낙산사 전각을 복원하기 위해 국립문화재연구소가 벌인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통일신라 때부터 조선 시대를 망라한 토기, 청자, 백자, 기와, 철편, 상평통보 등의 유물도 전시되어 있다.
화재와 영험, 해수관음공중사리탑에서 사리 현신
복원전 2006년 비스듬하게 기울어진 공중사리탑을 해체 보수하는 과정에서 탑신안 사라공 속에 봉안된 사리함을 수습하여
출토된 사리장엄구 일괄을 보존처리하였다.
복원이 완료된 후 2011년 해수관음공중사리탑은 보물 제1723호로 지정되었다.
의상대사 설법도
해동화엄의 초조로서 신라의 산사에서 설법하는 의상대사 (화엄연기중 의상도 제4권)
『화엄일승법계도』 번역문
마음됨 원융하여 두 모습 없고
모든 것 동요 않고 마냥 고요해
이름과 모양 다 끊어 버리니
깨달아 안 바라 다른 경지 아닐세
참 내 성품은 깊고도 미묘해
제 것이 어디 있나 연따라 이룩되지
하나 안에 일체요 일체 안에 하나
하나가 곧 일체요 일체가 곧 하나
한 띠끌 속에 시방세계가 포함돼 있고
모든 띠끌 속에 역시 또 그러하다
한량없이 먼 시간이 곧 한 생각이요
한 생각이 곧 한량없는 그 시간이니
구세와 십세가 서로 부합하지만
뒤섞이는 일없이 간격을 두고 따로 서 있네
처음 발심할 때가 그냥 깨달음이니
생사와 열반이 항상 함께 하네
진리와 현실이 그윽하여 무분별하니
10불과 보현 대인의 경지로다
능력있는 사람이 해인삼매 속에서
마음대로 불가사의한 일을 내보이고
비오듯 보배를 뿌려 중생을 돕고 허공을 채우니
중생들이 그릇 따라 이익을 얻네
그러므로 행자는 본원에 되돌아가
망상을 끊고 다시는 얻음이 없으니
무조건 선교하게 뜻대로 되어
집으로 돌아갈 때 차례로 자량을 얻고
다라니의 무진한 보배로써
법계의 실보전을 장엄하여
마침내 실제 중도의 자리에 앉으니
이름하여 부처라 하나 옛부터 움직인 일 없도다
『백화도량발원문(白花道場發願文)』
『백화도량발원문(白花道場發願文)』
이 발원문은 의상이 귀국하던 해인 문무왕 11년에 양양 낙산사를 개창하고 관음본존을 모시고 백일기도를 하여 성취하였다.
그때의 발원문이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머리숙여 귀의하옵나이다. 저 본사이신 관음 대성의 대원경지를 관하며, 또한 제자의 성정본각을 관하옵니다.
진실한 발원 말씀 사뢰오니 가피를 입기 바라옵니다.
오직 원하옵건대 제자는 생생세세토록 관세음을 칭송하여 본사를 삼고자, 보살이 아미타불을 정대하듯이
저 또한 관음 대성을 정대하겠사옵니다.
널리 법계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대비주를 외우고 보살 명호를 염하여 한 가지 원통 삼매 성해에 들게 하여지이다.
또 원하옵건데 제자는 이 보가 다할 때에 친히 대성의 방광 접인을 입어 모든 두려움을 여의고,
몸과 마음이 편안하고 기쁘며, 한 찰나간에 곧 백화도량에 왕생하여서 여러 보살로 더불어 함께 정법을 듣고
법류수에 들어가 생각생각 더욱 밝아져 여래의 대무생인을 발현하겠나이다.
의상대사 귀국도
선묘가 대용이 되어 의상대사의 귀국 배를 짊어지고 바다를 건너는 모습이다. (화엄연기중 의상대 제3권)
<현수법장의 서간>
중국 화엄종 제3조 현수법장이 보낸 편지와 의상의 행적을 기록한 <송고승전> 등 중국 측 반응이 이를 보여준다.
현수법장은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로써 여래가 돌아가신 후 불교를 빛내고 법륜을 다시 굴려 불법(佛法)을 오래 머물게 할 분은
오로지 법사뿐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 법장은 앞으로 나가기는 하였으나 이루어 놓은 것이 없고 활동함은 더욱 모자라서
우러러 이 경전을 생각하면 선사에게 더욱 부끄러울 뿐입니다. …(중략)…
그래서 스님의 은미한 말씀과 미묘한 뜻을 기록하여 의기(義記)를 만들었습니다.
근래에 승전(勝詮)법사가 옮겨 써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가 그 곳 사람들에게 전할 것이오니
스님께서는 좋고 나쁜 점을 상세히 검토하시어 경계해야 할 바와 깨우쳐야 할 바를 가르쳐 주시면 다행으로 여기겠습니다.“
<일연 선사의 의상 찬시>
숲 헤치고 바다 건너
연기와 티끌 무릅쓰고
지상문이 열리자
보배 구슬 받아도다
잡화를 캐어다가
고국에 심었으니
종남과 태백산이
한 빛의 봄일러라
의상 대사의 얼굴을 그린 진영앞에 모형도 만들어 놓았다.
의상대사는 625년 신라 귀족 김한신(金韓信)의 아들로 태어나
19세 때인 643년 (선덕왕 12)에 경주 황복사(皇福寺)로 출가했다.
25세 때 원효(元曉)와 함께 중국 유학에 올랐지만 고구려 순라군에게 잡혀 정탐자로 오인 받고 돌아왔다.
10년 뒤 661년(문무왕 1) 귀국하는 당나라 사신의 배를 타고 다시 중국으로 들어갔다.
종남산(終南山) 지상사(至相寺)에 머물며 지엄(智儼)으로부터 <화엄경>을 공부했다.
지엄은 중국 화엄종의 2조(二祖)로서 화엄학의 기초를 다진 인물이다.
중국 화엄종 3조며 동문인 현수(賢首)와도 오랫동안 깊이 교류했다.
현수법장(法藏)은 중국 화엄종을 완성한 인물로
화엄경 주석서 <화엄경탐현기(華嚴經探玄記)>와 대승기신론 주석서 <대승기신론의기(大乘起信論義記)> 등을 펴냈다.
원효(元曉), 혜원(慧遠)의 주석서와 함께 ‘기신론삼소(三疏)’라 불린다.
그의 저서는 한국의 역대 화엄대가들에게 필독서였으며 여러 화엄종장들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인물로 꼽힌다.
그런 현수법장은 자신 보다 19살 많은 사형 의상을 매우 존중하고 좋아했다.
대사가 신라로 돌아간 뒤에도 그의 저서와 서신을 보내며 사형사제며 양국 화엄의 대가로서 학문과 정을 나누었다.
의상은 지엄 입적 3개월 전인 668년 7월15일 <화엄일승법계도>를 저술하여 인가를 받았다.
그리고 10월 입적할 때까지 스승을 모시고 화엄교학을 공부했다.
지엄은 의상과 법장에게 각각 의지(義持)와 문지(文持)라는 호를 주었다.
의상은 학문 뿐만 아니라 수행과 실천에도 뛰어났으며
현수는 그가 남긴 불멸의 저서를 볼 때 학문에 뛰어났음을 스승은 간파했던 것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의상은 당나라 고종(高宗)이 신라를 침략한다는 소식을 본국에 알리기 위해서라 한다.
유학을 떠날 때 30대 중반의 의상은 44세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신라가 백제에 이어 고구려를 통합한 후
연합군이었던 당나라가 삼한을 집어 삼키려는 야욕을 드러내 나당전쟁이 벌어진 해다.
4년 뒤에는 전북 익산 옛 백제 땅에서 고구려 부흥 전쟁이 벌어졌으니,
그 이전 삼국 통일을 놓고 벌어진 10여년의 전쟁과 이후 전후 처리를 놓고 벌어진 전쟁 등
한 세대가 온통 피로 물들였던 최악의 시대다.
귀족 평민 노예 신분 구분 없이 승자 패자 가리지 않고 이 땅에 발 딛고 사는 사람이라면 피해갈 수 없는
살육과 이별 통곡 원한이 가득한, 그 이후에도 이전에도 일찍이 없었던 참혹한 시절, 의상은 동해로 갔다.
671년(신라 문무왕 11년) 의상은 동해안에 관음보살이 살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양양의 해안굴을 찾았다.
이레동안 기도를 하다가 앉은 자리 째로 물 위로 뛰어들었는데 팔부신중이 나타나 그를 굴 속으로 안내했다.
의상이 굴 속에서 예를 올리니
동해의 용이 나타나 여의주 한 알을 바쳐l고 수정 염주 한 꾸러미가 내려오므로 그것을 가지고 나왔다.
의상이 다시 이레 동안 기도를 했더니 관음보살이 홀연히 나타나 이르기를,
“앉은 자리 위 꼭대기에 한 쌍의 대가 솟아날 것이니 그 자리에 불전을 지어라”했다.
의상이 쌍죽이 솟아난 땅에 관음상을 빚어 모셨더니 그 대가 없어졌다.
이곳이 진신이 거주하는 보처임을 안 의상은 절 이름을 낙산사라고 하고 수정 염주와 여의주를 성전에 모셨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창건 설화다.
[불교신문3669호 <의상과 낙산사>]
보물 제479호로 지정되었던 낙산사 동종은 조선시대 세조대왕이 낙산사에 행차하여 낙산사가 중창이 시작된것을 기리기 위해
1469년 예종의 명에 의해 주조되었다.
2005년 4월 5일 양양지역을 휩쓴 대형 산불로 낙산사로 소실될 당시 소실,용해되어 현재의 상태가 되었다.
동종의 복원은 문화재청이 관계 전문가의 고증을 받아 성종사에 의뢰해 이루어졌다.
복원된 동종은 2006년 10월 16일 낙산사 보타락에 임시 봉안하였다가 사천왕문 옆의 범종루가 완성된 후 이전,봉안하였다.
의상이 창건한 이래 낙산사는 이 땅에 전쟁이 날 때마다 전소당하는 아픔을 겪었다.
굴산사를 창건했던 범일국사가 낙산사를 중건했지만 몽고 침입으로 폐허가 되었다.
조선 세조가 1466년 오대산 상원사를 참배하고 낙산사에 들러 세조의 명으로 다시 크게 중창했다.
칠층석탑(보물 제499호), 동종(보물 제476호), 홍예문(지방 유형문화재 제33호)이 모두 이 무렵 만들어졌다.
그러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다시 허물어졌고 6·25 전쟁 때 폐허가 됐다.
전쟁이 끝나고 1953년 복원됐으며, 1977년 16m높이의 해수관음상이 들어섰다.
수십년간 여러 주지 스님과 불자들 노력으로 복원을 마쳤지만
2005년 동해안에 불어 닥친 화재로 원통보전을 비롯하여 주요 건축이 불타는 아픔을 겪었다.
이번에는 사찰 종단 불자 정부 까지 힘을 합쳐 한국 최고의 관음도량을 일신했다.
타고 남은 원통보전의 대들보로 만든 바이올린과 첼로
이렇게 끝날 줄 알았던 잿더미에서 새로운 선율을 만들어 내는 악기로 낙산사의 생명력은 이어진다.
비가 오락가락하니까 의상기념관 맞은편 낙산다래현에서 많은 사람들이 우비를 구입해서 입는다.
금강산, 설악산과 함께 관동 3대 명산의 하나로 손꼽히는 오봉산 자락에 자리잡은 낙산사는
관음보살이 설법을 펼치며 항상 머무는 곳을 이르는 보타낙가산(寶拖落伽山)에서 그 이름이 유래한 것으로,
관음보살의 진신을 친견하러 온 의상대사가 창건한 이래 전국의 참배객들이 끊이지 않고 찾아오는
국내 최고의 기도발원처이자, 천년고찰로서 어머니의 품과 같은 마음의 안식처이다.
낙산사를 방문할 때마다 잠시 멈춰 생각하게 만드는 화두 "길에서 길을 묻다"
그리고 마치 두 개의 길이 존재한다는 듯이 양갈래의 소나무가 높이 솟아있다.
마음을 씻는 물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표현하고 마음을 나누며 살아가는데
그 마음이 살다보면 먼지도 묻고 오염되며 시간이 지나면서 굳어버릴 수도 있지 않을까?
그래서 가끔은 마음을 들여다보고 씻어내고 가꾸고 싶은 그런 시간을 갖고싶다.
길에서 길을 묻듯이 천년 고찰 낙산사에서 고찰의 시간을 가져본다.
후문으로 입장을 하여 먼저 의상대와 홍련암을 방문하기로 했다.
의상대는 의상스님이 중국 당나라에서 돌아와 낙산사를 지을 때 이곳에 이르러 산세를 살핀 곳이며
의상스님의 좌선 수행처라고 전해지는 곳에 정자를 지은 것이다.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48호 의상대
의상대는 낙산사를 창건한 의상대사를 기념하기 위한 정자로,
만해 한용운이 쓴 "건봉사급건봉사말사사적"에 의하면 1925년에 지었다.
이곳은 의상대사가 낙산사를 지을 당시 머무르면서 참선하였던 곳으로 옛날부터 의상대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정자는 낙산사에서 홍련암 관음굴로 가는 길 해안 언덕에 있어 좋은 전망대 역할을 하고 있다.
평면은 육각이고, 크기는 작은 편이다.
의상대와 홍련암 일대는 관동팔경 가운데 하나로 동해 해돋이로 유명하며 의상대사와 관련한 많은 전설이 전한다.
동해안 절벽에 위치하여 바닷가 절경을 한눈에 볼 수 있으며
주변의 해안 절벽과 오래된 소나무 등이 사찰과 아릅답게 어우러져 있어
명승 제27호 "양양 낙산사 의상대와 홍련암"으로 지정되어 있다.
우연히 낙산사 누대를 노닐다가
높고 오래된 의상대에서 객의 시름을 씻는구나
의상대사 가신 지 천년이건만 돌아오시지 않아
다만 산 아래로 흘러가는 푸른 물결만 바라보네
체조스님의 활동 연대가 18세기 이므로 위의 시를 통하여 적어도 이때까지는 의상대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 뒤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근대 이전에 폐허가 되었던 듯하다.
근대에 들어와서 1925년 낙산사 주지 김만웅 스님이 이곳에 정자를 새로 지었으며, 만해 한용운스님이 의상대기를 지었다.
정자를 지을 당시가 6월인데, 들보로 쓸 굵은 나무를 구하고 있었다.
그러던 참에 거센 비바람이 몰아쳐 대 위에 있던 소나무 한그루가 넘어졌고,
스님은 그 소나무를 들보로 만들어 육각형의 정자를 완성했다고 한다.
예로부터 이곳을 의상대로 불러 왔으나 이때 정식으로 의상대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러나 1936년 폭풍으로 무너져 있다가 이듬해 중건되었으며, 1974년에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48호로 지정되었고
1975년에도 한차례 중건되었다.
근래는 1994년 11월 강원도에서 의상대를 점검한 결과 기둥, 기와 등 구조체가 10도 가량 기울었고,
기둥이 썩는 흔적이 여러 곳에서 나타나는 등 붕괴의 위험이 이어 해체되었다가
1995년 8월에 육각정으로 복원되었으며 2009년 9월에 다시 해체 복원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의상대에서 바라보는 홍련암의 모습은 거세게 파도가 들이치는 날씨에도 가히 절경이다.
양양 낙산사 홍련암(紅蓮庵)은 강화 석모도 보문사, 남해 금산 보리암과 더불어 한국 3대 관음성지로 꼽힌다.
박여사가 사진을 찍는 줄 알았는데... 동영상을 촬영하고 있었다.
낙산사를 다섯번 방문했는데... 파도가 이렇게 홍련암 절벽을 무섭게 몰아치는 것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박여사가 또 하나의 동영상을 남겼다.
하얗게 부서지는 거센 파도의 모습이 장관이었다.
의상대에서 바라본 홍련암
송강 정철의 "관동별곡"에서 소개한 관동팔경의 하나다.
그런데 하얗게 부서지는 거대한 파도와 더불어 더욱 운치있어 보이는 모습이다.
의상대에서 홍련암을 바라보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지만 조금만 돌아보면 주변의 다른 모습들도 볼 수 있다.
특히 홍련암 위쪽으로 시선을 바꾸면 꼭대기에 해수관음상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의상대에서 홍련암과 해수관음상을 동시에 바라보며 기도하면 속칭 기도빨이 어마어마 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홍련암으로 가는 길에 마음을 씻는 물을 새로운 모습으로 또 만난다.
바닷가에는 보기드문 석간수(石澗水)가 있어 이채롭다. 오른쪽 표지석을 보니 예전에는 감로수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샘은 원효스님이 양양에 있는 영혈사(靈穴寺) 샘물을 석장(錫杖)에 담아 끌어 왔다는 설화가 전한다.
관음보살이 들고 있는 감로수병으로부터 연꽃으로 물이 떨어지는 구조로 만들어 놓았다.
아마도 곳곳의 특성에 맞춰 컨셉을 잡아서 만들어 놓은 듯하다.
박여사 낙산사에서 마음 깨끗해져 가겠네...
투명하며 자기의 마음 속이 들여다 보일 것이고 거울이면 남의 마음이 비추어 보일 것이고...
우리는 행복한가요
모든것을 소유하지 않아도
작은 행복에도 감사할 수 있는 이 마음
그것이 저희들의 기도입니다.
당신이 옆에 있어 정말 행복합니다.
종이 울릴때마다 저들의 행복이 온 세상에 깊은 울림으로 다가가길...
비가 오락가락 하면서 우산을 폈다 접었다를 반복한다.
홍련암가는 길에 이런 돌계단도 올라가야 한다.
그리고 그 끝에 노란 물고기 풍경이 매달려있다.
제법 풍경소리도 귀여운 물고기의 모습을 닮아 청아하고 맑다.
그 소리가 좋아서 바람에 자연스럽게 흔들리며 소리나는 풍경을 짖굿게 손으로 한번 흔들어본다.
좌측의 두개는 홍련암 중건 공덕비이고 오른쪽이 양양 낙산사 해수관음공중사리탑비이다.
홍련암 가는 길에 왼편에 조금 높이 있어 바다쪽 풍경만 보고 가다가는 쉽게 놓치기 쉬운 보물이다.
양양 낙산사 해수관음공중사리탑비는 낙산사 내력을 기록한 비문을 새긴 비석이다.
비석에는 낙산사가 관동지방의 아름다운 경치를 가지고 있고,
신라시대에 의상대사 등이 *관세음보살을 직접 만난 관음도량이라고 적혀 있다.
또 1619년에 관음상을 봉안한 전각을 중건하였는데, 1683년 관음상의 색이 바래서 새로 금칠을 하였더니
하늘에서 영롱한 사리 1과가 떨어져 이를 봉안한 탑을 만들어 세웠다는 내용 등을 기록하였다.
이 비석은 조선 숙종 19년(1693년)에 강원도 관찰사를 지낸 이현석이 글을 짓고 이듬해에 세웠다.
*관세음보살 : 자비로 중생의 괴로움을 구제하고 왕생의 길로 인도하는 불교의 보살
양양 낙산사 해수관음공중사리탑·비 및 사리장엄구 일괄이 2011년 11월 1일 보물 제1723호로 지정되었다.
양양 낙산사 해수관음공중사리탑비는 이렇게 바다를 등지고 서야 보인다.
홍련암은 낙산사 복동쪽 바닷가에 자리한 낙산사 부속 암자로
신라 문무왕 11년(671년)에 의상대사가 낙산사와 함께 지은 건물이다.
관세음보살을 모시고 있어 관음굴이라고도 한다.
의상대사가 해안 석굴 속으로 들어간 후 자취를 감춘 파랑새를 보고 이를 이상하게 여겨
석굴 앞 바위에서 7일 밤낮으로 기도하다가 "붉은 연꽃(홍련)" 속에서 나타난 관세음보살을 보고 그곳에 세운 암자라고 한다.
조선 숙종 9년(1683년)에는 홍련암의 불상을 *개금할 때 닫집에서 사리 1과가 내려왔으며,
1930년 2월 25일에는 경봉 스님이 이곳에서 관음 기도를 시작한 지 13일째 되던 날
바다 위를 걸어 오는 관세음보살을 보았다고 한다.
*개금 : 불상에 금칠을 하는 것
홍련암은 절벽 위에 세워져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는 곳으로 예로부터 의상대와 함께 *관동팔경의 하나로 알려졌다.
이곳은 주변에 아름다운 소나무와 독특한 해안지형이 자리하는 등 동해안의 아름다운 해안 경관을 보유하고 있어
자연 경관 가치가 뛰어나다.
의상대사, 원효대사, 범일국사와 관련한 영험한 이야기가 얽혀 있으며, 시문에 등장하는 등
역사, 문화 가치가 높아 의상대와 함께 명승으로 지정되었다.
2005년 양양 산불 당시 주지인 금곡 정념 스님과 사부대중의 기도 원력으로 화마를 피할 수 있었다고도 한다.
*관동팔경 : 강원도 동해안에 있는 여덟 곳의 명승지
낙산사의 산내암자인 홍련암은 의상대 북쪽 300m 지점에 있다. 의상대사가 본절인 낙산사를 창건하기 앞서
관음보살의 진신을 친견한 장소이며, 또한 관음보살을 친견하기 위해 석굴 안에서 기도하던 바로 그 장소이며,
낙산사의 모태가 된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
어느새 박여사가 홍련암에 먼저 도착하여 손짓을 한다.
홍련암의 연혁은 주로 만해 한용운이 쓴 <건봉사급건봉사말사사적>에 의거해 살펴볼 수 있다.
그 책에 따르면 의상대사의 창건 이후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1619년(광해군 11년)에 중건되었고,
1752년(영조 28년)에 덕린 스님이 중수했다. 이어서 1797년(정조 21년)에 혜민 스님이 중건하고,
1869년(고종 6년)에 의연 스님이 중건했으며, 1911년에 흥운 스님, 청호 스님 두 스님이 중수했다고 한다.
1869년의 중건은 1866년의 홍수로 무너졌기 때문이며, 1911년의 중수는 1908년(융희 2년)에 절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연혁이 비교적 짧고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의 연혁이 거의 전하지 않는 점이 아쉽지만,
남겨진 기록을 통해서나마 그런대로 낙산사와 더불어 꾸준히 법등을 이어왔음을 알 수 있다.
절의 당우로는 관음전과 요사가 있다.
관음전 등은 1975년의 중창 때 지어졌으며, 안에 봉안된 탱화 역시 같은 해에 조성되었다.
관음전 앞면과 옆면 각 3칸식인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로서 바닷가 암석굴 위에 자리잡고 있다.
홍련암 전체가 현재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36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전각은 법당 가운데쯤에 조그맣게 마루를 뚫어 놓아 그곳으로 출렁이는 바닷물을 볼 수 있도록 만든 것이 특이하다.
여러 번의 중수(낡고 헌 것을 손질하여 고침)와 중건(보수하거나 고쳐 지음)을 거치면서 굉장히 견고해 졌음을 알 수 있다.
절벽위에 세운 것도 놀랍지만 울퉁불퉁한 바위위에 차곡차곡 정교하게 쌓아올린 벽돌모양의 돌의 모습이 경이롭기까지 하다.
홍련암으로 가는 길 게시판에 홍련암 주련을 옮겨 해석한 종이가 붙어있다.
주련이라 함은 기둥이나 벽 따위에 장식 삼아 세로로 써서 붙이는 글씨를 말한다.
그리고 옆에 파도라는 시조가 붙어있는데...
오늘같은 날씨도 너무도 잘 어울리는 시조라는 생각이 들었다.
홍련암의 주련은 4개의 기둥에 적혀있는데...
세개는 문이 열려 있어서 가려져 있고 닫힌 문이 하나 있어 오른쪽에서 세번째 글귀만 보인다.
白衣觀音無說說 (백의관음무설설)
南巡童子不聞聞 (남순동자불문문)
甁上綠楊三際夏 (병상녹양삼제하)
巖前翠竹十方春 (암전취죽시방춘)
집어삼킬 듯 무섭게 다가오는 성난 검푸른 파도도 바위에 두딪쳐 흩어지면 하얀 순한 양의 색이 되고 마는구나...
요즘 박여사는 어딜가나 열심히 기도를 드린다.
현판은 경봉 스님(1892-1982)이 쓴 글씨다.
경봉 스님은 우리나라 근현대의 고승으로 1905년 을사조약 체결 후 덕유산 등지에서 의병활동을 했으나,
1910년 나라가 망하자 출가를 결심하고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홍련암 앞 돌난간에도 홍련암 주련의 뜻풀이가 붙어있다.
홍련암에서 의상대를 바라보는 전망도 멋지다.
그리고 바위에 새겨져 있는 글씨가 보인다.
조선시대에 쓰여진 것인데 사람들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다보니 오랜 세월이 지나도 형태가 잘 유지되었다.
누구누구 왔다감
누구 과거시험 급제 기원
여기 기도빨 죽임
누구랑 누구 그냥 우리 사랑하게 해주세요
혹시 이런거 아닌가 몰라~
다시 돌아가는 길에 절벽위 소나무와 어우러져 멋진 풍광을 자랑하는 의상대의 모습이 보인다.
관음지(觀音池)에 도착했다. 관음지는 보타전 보타락 밑에 있는 큰 연못의 이름이다.
예전과는 또 다른 모습으로 변모해 있는 관음지의 모습에 살짝 당황스러웠다.
예전에는 섬처럼 가운데에 작은 관세음보살이 있었는데...
이제는 연결하여 커다란 길도 만들고 관세음보살의 크기도 엄청 커졌다.
관음지를 돌아서 누각형태의 보타락으로 이동한다.
원래 보타락 또는 보타락가(산)는 관음보살이 산다는 전설의 산으로, 인도 남쪽 바다 건너 섬에 있다고 전해진다.
불교가 중국, 티베트, 한국, 일본 등을 거쳐오는 가운데
각 민족들은 관음보살의 거처를 자기 나라 어딘가에 설정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티베트인들은 입살하를 바다로 간주하고 그 강 유역에 위치한 입살의 '포탈라궁' 이야말로 관음보살께서 거주하는 곳이며,
그곳에 머무는 달라이 라마야말로 관음보살의 화신이라 설명한다.
중국인들은 중국 절강성 영파의 '주산열도'에 보타락가산이 있다고 한다.
일본인들은 일본의 나지산 청안도사에 관음보살이 머물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는 강원도 양양 낙산사 홍련암의 해변 굴속에 관음보살의 거처가 있다고 믿는다.
이들 각국의 관음의 주요거처는 인도의 보타락가산이 그러하듯 모두가 수도 중앙으로부터 남동에 그 위치를 잡고 있으며,
또한 바닷가에 위치한 산 위에 그 거처를 정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당시 신라의 수도 경주의 북쪽 홍련암에 위치해 있으며,
산 위가 아닌 해변 굴속에 관음보살의 거처를 정한 특수성을 찾아볼 수 있다.
관음보살의 주처가 각국에 걸쳐 폭넓게 펼쳐져 있음을 생각해 볼 때
불교신상에 있어 관음신앙의 확산 정도를 가늠해 볼 수 있기도 하다.
[출처: 관음보살의 거처, 보타락가산]
보타락에서 보타전으로 가는 길 오른편에 지장보살을 모신 전각인 지장전이 있다.
<양영 낙산사 지장전 주련(柱聯)>
지장보살님의 위신력은,
항하사겁을 말해도 다하지 못하나니,
보고 듣고 우르러 절하는 한순간 사이에,
사람과 하늘에 이익되는 일 한량이 없도다.
지장보살님 한가로이 계신다고 말하지 말라.
지옥문 앞에서 눈물을 그치지 못하신다네.
地藏大聖威神力 恒河沙劫說亂盡
見聞瞻禮一念間 利益人天無量事
莫言地藏得閑遊 地藏門前淚不收
이제 보타전으로 이동한다.
강원도 양양 낙산사 (전반전) 2022년 6월 6일 끝
강원도 양양 낙산사 (후반전) 2022년 6월 6일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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