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든지 말을 하든지 항상 따라다니는 虛辭(허사)가 '나이 들어' 라는 말이 자주 사용된다.
정작 내 나이에 하나 둘 보고 싶고, 밟고 싶은 산이나 고개 마루 아니면 걷고 싶은 둘렛길도 아직도 많이 있다.
내딴에는 그래도 기회가 주어질 적 마다 산을 타고 걷고 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웬만한 산은 올라가 보았고,
지금도 기회가 주어지면 산에 가기도 한다.
그래서 오늘은 우이령 옛길에 대해 쓰고 싶은 생각이 든다.
그 동안 우이령은 통행이 금지되어,
오랜 세월을 자연보호 옛길 살리기 차원에서 통제가 되었는데 아마 올 해 들어와서 해제가 되었는가 보다
사람들은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고,
통행을 막으면 개구멍이라도 찾아 들어가는 것이 상례인 바
그래서 우이령 길은 그리 높지 않으면서 길도 잘 딱여져 있는 길이라,
초심자나 노인네도 한 두 시간 정도이면,
고개 넘어 교현리로 넘을 수 있는 야트막한 오봉산 자락 아래에 있다.
어제는 마음 먹고 새벽에 우이령을 찾았다.
일산 정발산 역에서 열시에 만날 지인들이 있어 우이령으로 해서 구파발로 가면 시간이 대충 맞을 것 같았다.
임시 공휴일이고 과천에서 지하철 첫 차를 타고,
새벽길에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가운데,
우이 경전철에서 내리니 일곱시 가량 되었고,
비옷을 입고 길을 나서니 사람도 없고 혼자 뚜벅뚜벅 걸어 올라가니 옛 기억이 하나 되살아 난다.
우이동 골짜기는 70년 초 대학 신입생 일 적에 환영회 겸 백일장은 연 곳이기도 하다
벌써 반 세기 전의 일이지만,
잘 먹지 못하는 막걸리를 선배들이 주는 대로 한 모금씩 하니 그날은 정말 악몽같은 하루였다.
명색이 내로라 하는 대학 국문과인데 수준이 이것밖에 안되나 하는 실망감과,
내 자신 술을 이기지 못해 친구의 도움을 받아 겨우 하숙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런데 신입생 가운대 화판과 그림 물감을 가지고 온 여학생이 눈이 띄었다.
아직 학기초라 누가 누군지 모르는 가운데 이런 여학생을 보니 부산 촌놈의 눈에는 상당히 이국적이었다.
이런 행사에 어찌 그림을 그릴려는 마음이 있었는지,
아니면 맨손으로 오기가 무엇했는지,
또 다른 일종의 자시 과시용인지,
분명한 것은 내 눈에 비친 그여학생이 상당히 신비스러워 보였다.
우이동은 나에게 벌써 반세기가 넘는 나의 기억을 소환하는 그런 의미가 있었다.
우이령 고개에서 8시 쯤, 서실에 같이 글씨를 쓰는 친구와 만나기로 하였는데,
우이령 고개 넘어가면 만날 수 있을 것 같아 내려 오면서 전화를 넣었더니,
아무 소식이 없어 안 오는 줄 알고 있었다고 하니 참 싱거운 사람이다 하는 마음이 들었다.
분명 서실에서 우이령에서 8시 전후 만자고 약속을 하였는데,
만일 내가 가지 못하다면 약속을 내가 파기하는 것이 되니까 내가 먼저 연락을 하는 것이 맞고,
나는 그 동안 우이령을 꼭 한번 넘고 싶었고,
화요일이지만 서실에 가지 않으니,
꼭 한번 넘고 싶은 고개를 넘으니 기분이 좋았다.
비는 오락가락하고 사람은 없고 잘 다듬어진 길은 걷기에 딱 좋았다.
아직 단풍이 들 시기는 아니지만,
시월 말일 쯤 단풍이 곱게 물들면 또 한번 올 것을 마음으로 다짐을 하였다.
비가 오고 이른 시간이라 거의 사람을 만나지 못했고,
간혹 산밤이나 주워 까 먹으면서 고개를 넘어 한참 내려가니,
'오봉산 석굴사'라는 팻말이 나오고 길이 갈라진다.
물론 다시 산으로 30분 정도 올라가야 하는 절인데 절 이름 답게 큰 바윗돌에 부처님을 모시고,
그 위로 지붕을 한 그런 요사체가 몇 개 있다.
이 석굴사는 몇 년 전 오봉산 산행을 할 적에 한번 온 절인데,
정발산 역에서 열시에 만나기로 했으니,
시간상으로 가능할 것 같았서 30분 정도 다시 올라 참배하고,
이내 선걸음으로 내려와 교현리로 가니,
마침 서울 나가는 버스가 있어 황급히 차를 타고,
구파발에서 내려 대화가는 삼호선을 타고 정발산역에 도착하니 이십 분 정도 늦었다.
일산 호수공원을 시간 반 정도 돌고 나와 '남도복국'집에 가 점심을 먹었는데 배가 고파 실컨 먹었다.
서울에서는 쉽게 먹을 수 없는 그런 곳인데 여기서는 가격을 그런대로 맞추고 있었다.
이래서 우리령 고개길을 다시 생각하며 글 한 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