헛똑똑이 / 양선례
지난 10월 하순에 <전남 초등 여성 행정 연구회>가 목포에서 열렸다. 불과 얼마 전까지 초등 교육계의 관리자는 거의 남성이었다. 그러다 보니 몇 안되는 여성 교장끼리 뭉쳐서 단체를 만든 모양이다. 2013년에 내가 교감 연수를 받을 때만 해도 남성과 여성의 비율이 반반이었다. 그 해를 기점으로, 이후에는 압도적으로 여성이 많다. 이제는 <남성 행정 연구회>가 필요한 시절이 되고 말았지만 한 번 만든 단체는 없어지지 않아서 해마다 회비도 걷고, 행사도 연다.
저명한 인사를 모시고 강의를 듣기도 하고, 각 지부별로 모여 교육 현안을 논의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전라남도교육청 김대중 교육감과의 대화의 자리가 마련되었다. 그는 해직 교사 출신으로 시의원 3선과 전임 교육감의 비서실장을 역임한 진보 성향의 교육감이다. 질문하라는 사회자의 멘트가 끝나자마자 한 사람이 손을 들었다. 그런데 사회자가 무엇을 말하려는 건지 다 안다며 말을 끊었다. 우리가 모르는 무슨 일이 있나? 멀리 손을 든 그 사람이 보였지만 나는 전혀 모르는 얼굴이었다. 둥근 원탁에 앉아 있던 우리 일곱 명도 웅성거렸다. 누군지 물었더니 서부쪽에서 근무하는 김로사(가명) 교장 선생님이라고 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말을 하기도 전에 입을 막으려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그런 분위기를 눈치챘는지, 아니면 바로 단상 아래에 자리를 잡고 있던 임원진의 권고가 있었는지 마이크가 김로사 선생님에게 갔다. 그분은 조금 전 일에 유감을 표시한 다음 현재 학교장 50%, 교육장 50%로 되어 있는 교감의 근무 성적 평정을 교육장은 30%로 줄이고, 대신 교감의 근무 태도를 가장 잘 아는 학교장과 학교 구성원의 비율을 높이자고 했다. 교육감은 자신이 여기서 대답하는 것은 월권이라며 즉답을 피했다. 정책 입안자들과 생각해 보겠다는 말만 했어도, 내 마음이 좀 진정이 되었을 테다.
여러 질문과 대답이 오가고, 나태주의 시와 김호중의 ‘고맙소’라는 노래가 나올 무렵에는 분위기가 달달했다. 질문할 것인가, 말 것인가. 두 마음이 다투었다. 내가 꿈꾸는 평범한 소시민이 되려면 참아야 해. 부당한 일을 겪고도 그걸 당연하게 생각하고 뒤에서 불평만 하는 건 비겁한 일이야. 교육감 앞에서 이야기할 기회는 자주 오는 게 아니잖아. 용기를 내. 짧은 시간, 여러 생각이 스쳤다.
생각을 정리하지 못한 채 손을 번쩍 들었다. 시각은 열두 시 5분 전이었다. 연회장 한쪽에 뷔페 음식을 차리느라고 호텔 종업원들이 음식을 나르는 게 보였다. 맛있는 냄새가 솔솔 풍겼다. 아니나 다를까 사회자가 정해진 시간이 다 되었다며 또 만류한다. 저 사회자, 진짜 별로야. 아까부터 목소리는 웅얼거려 전달력은 떨어지고, 아부성 멘트가 귀에 거슬리더라니.
이 무슨 청개구리 심보람? 거절을 당하니 용기가 불끈 솟았다. 조금 전까지 망설였던 건 어디로 사라지고, 목소리가 커졌다. 이래 봬도 학군단 중대장 출신이야. 마이크 없다고 말하지 못할쏘냐? “딱 3분만 말하겠습니다.” 우렁차게 소리쳤다. 마이크가 내게로 왔다.
맨 처음 의견을 낸 로사 선생님 의견에 덧붙일 말이 있어서 일어섰다고 포문을 열었다. 교감의 승진에 근무 성적이 절대적이다.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아직도 교육장이 주는 50%를 받으려고 골프를 함께 치고, 밥과 술을 사는 현실을 아느냐고 물었다. ‘교감이 을이 되어 자신의 목소리를 전혀 내지 못하고, 갑이 요구하는 대로 끌려다닌다. 정치도 능력이라면 할 말은 없지만 그게 합리적이지 않다면 개선해야 맞지 않느냐? 순리대로 평정이 이루어지게 규정을 고쳐야 한다. 여기 모인 이들 중 그것 따느라고 마음 고생 안 해 본 사람이 없을 것이다. 교육감은 힘이 있는 자리이다. 리더가 알아야 방향 제시를 할 수 있지 않느냐. 그러니 학교 구성원의 만족도, 그리고 교장의 평정 비율을 교육장보다 올려 달라’고 요구했다.
이미 정오는 지났다. 조곤조곤 말하려고 했는데, 사회자의 거절 이야기를 듣는 순간 투사가 되고 말았다. 내가 좋아하는 양송이 스프와 호박죽 한 그릇, 그리고 과일까지 다 비웠지만 맛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어차피 규정이 바뀌어도 내가 득 보는 건 아니야. 불편하더라도 누군가는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다는 게 맞아. 이제 공모 교장도 끝났고, 정년까지도 겨우 3년 남았는데 뭘 겁내고 그래? 불편하고 거슬리면 지금이라도 교직을 떠나면 돼. 친구들의 여유를 부러워했잖아. 잘못한 것 맞아. 말로는 소시민을 외치면서 또 잘난 척한 거야. 후폭풍을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래? 여전히 마음은, 의견을 하나로 통일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오후 출장을 핑계로 급하게 자리를 떴다. 뒤꼭지가 부끄러웠다. 똑똑한 척 시원하게 내질렀지만 종일 마음이 불편했다. 역시 나는 쫄보, 맞아.
며칠 후 교육장이 학교를 방문했다. 도에서 근무하다가 이번 9월 1일 자로 우리 청에 발령받아서 온 터였다. 친분이 있던 사이라서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며칠 전 일을 말했다. 그런데 뜻밖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동안 여러 경로로 자신의 뜻을 도에 전한 ‘김로사 교장 선생님’을 이미 알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런 의견을 낸 이유가 나와는 180도 달랐다. 공정한 기준으로 평가를 원한 나와는 달리 그분은 능력이 안 되는 교감을 걸러 내는 장치로 교장의 비율을 높이려고 한 거였다. 뒤통수를 세게 맞은 듯, 충격이 왔다.
에잇, 망했다. 괜히 말했어.
첫댓글 하하하!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 그래도 하고 후회 한 것에 한 표 던집니다. 잘 하셨습니다. 화이팅!!
이미 엎지러진 물이랍니다.
이런저런 길로 후일담이 들어오는데, 역시 의도와는 다른 말이 많네요.
헛똑똑이라고요. 양선생님이 그러시면 대한민국 사람 다 바보됩니다. 하하.
하하. 무슨 말씀을요. 어디 내기도 부끄러운 내용입니다.
허당이 바로 접니다.
헛똑똑이라니요? 고양이 목에 방울 단
잔다르크 양쌤
교육장 1인의 획일적인 평가는 교감 선생님의 자질이나 인성보다 학연·지연 혈연 그리고 아부가 절대적으로 작용할 거예요. 반드시 다면평가 비율 높여야 공정. 학교 구성원의 만족도, 교장의 평정 비율을 교육장보다 더 올려야 공정한 평가가 이루어질 것 같습니다.
학교 구성원 50% 교장 40% 교육장 10%
하하하하.
마지막 줄이 아주 맘에 듭니다.
정 선생님을 교육감으로 보냅시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그래도 헛똑똑이는 아니지요.
헛똑독이가 아니고 당찬 교장 선생님입니다. 잘 하셨습니다.
와, 익히 멋있는 줄 알고 있었지만
멋집니다.
부럽고요.
저는 뒷담화밖에 할 줄 몰라서. ㅎㅎ
하하하, 김로사라는 가명을 붙인 교장 선생님 눈 앞에 그려집니다. 존경하는 단단한 분입니다. 교감 선생님때문에 애도 많이 쓰셨구요.
그것과는 별개로 양교장 선생님 곁에 있으면 꼭 안아드리고 싶습니다. 항상 현실에 맞는 부조리를 쥐어박는 글도 감사한데 이렇게 용감한, 단단한 후배님 이시군요.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후배들에게 누 끼치지 전에 나이 되어 퇴직한 것이 잘 한 일이군요. 흐흐
어렵습니다. 글은 쉽게 쏙 읽혔는데... 해결책이 보이지 않아 답답하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