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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강 창세기 11:10~32 사래는 임신하지 못하므로 57.09
26.09.17(목)
우리는 지난 마지막 시간에 바벨탑에 대해서 우리 함께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홍수 이후에 인간들이 살만해지자 바벨탑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하늘에 닿는 탑을 짓겠다는 것이죠.
바벨탑을 지으려고 했던 동기는 그들이 돌 대신에 벽돌을 구워 만들 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또 진흙 대신에 역청 아스팔트 사용법을 알았거든요. 돌멩이로 돌로 집을 짓는 건 한계가 있지 않습니까? 그렇죠
또 진흙을 햇볕에 말려서 벽돌을 만들어서 진흙을 접착제로 삼아서 쌓아 올린들 얼마나 쌓아 올릴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진흙을 불에 구워서 벽돌을 만들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아스팔트라는 접착제를 발견했단 말이죠.
그러니까 그들의 생각으로 벽돌과 아스팔트가 있으면 하늘 끝까지 탑을 지을 수 있으리라고 그들은 믿었습니다.
당시 수준으로는 과학의 쾌거를 이룬 셈이죠.
그런데 왜 하필이면 하늘에 닿는 탑을 지으려고 생각을 했던가 두 가지 이유였습니다.
첫째는 우리의 이름을 내자는 것입니다.
히브리어 원문을 그대로 직역을 하면 우리 스스로 우리의 이름을 새겨 넣자 이런 말이었다고 그랬죠
그래서 유대 철학자 필로라고 하는 사람은 그 구절을 어떻게 주석을 가했냐 하면 당시 사람들이 벽돌을 구어서 바벨탑을 지어 올릴 때에 벽돌 한 장 한 장에 자기 이름을 다 새겨 넣었다고 주석을 했습니다.
요즘 어디 저 사찰에 가면 기와장에 다 이름 써서 올리는 것과 마찬가지인 셈이죠.
두 번째 이유는 그렇게 하늘에 닿는 높은 탑을 쌓아서 우리가 스스로 흩어짐을 면하자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우리의 건축물이 우리의 중심이 되게 하자
그것은 바꾸어 말하면 인간인 우리 자신들이 우리의 중심지점이 되게 하자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내 이름을 하늘에 닿기까지 새겨놓고 우리 자신들이 인간이 흩어지지 않는 구심점이 되겠다 라고 하는 것은 바꾸어 말하면 인간이 더 이상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죠.
우리가 하나님이 된다는 것입니다 되자는 것이죠.
그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 바벨탑을 받아들이시고 해결하셨는가 인간을 교만으로 받아들이셨죠
그래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은
첫째로 인간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전까지는 언어가 하나였는데 언어를 혼잡하게 하셔서 더 이상 그들이 자기 교만에 빠질 수 있는 의사소통이 불가능하게 만드셨습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죠 잘난 사람들끼리는 의사소통이 안 됩니다. 같은 한국말을 써도 의사소통이 안 돼요.
하나님 아버지께서 잘난 사람들끼리는 서로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게 만들어 두셨거든요.
우리나라 여당 야당 그 저 정치인들이 하는 이야기를 보세요. 대한민국 국회의원이 아닌 것 같습니다.
남의 나라 국회의원들 서로 싸우는 것 같아요.
야당에서 여당이 된 한나라당 보십시오.
친박 친이 해서 같은 당 국회의원들이 아닙니다.
이것은 형제지간도 마찬가지고요.
친구도 마찬가지입니다. 일터에서도 마찬가지여요. 자기를 가장 잘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끼리 모여 있으면 가장 쉬운 말도 의사소통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법칙이거든요.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 흩으셨습니다.
히브리말 푸초라고 하는 것은 산산조각으로 깨트리셨다라는 말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쌓아 올리려고 했던 탑 자체를 산산조각으로 깨트리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흩으셨죠
왜 하나님께서 하늘 스스로 하늘에 닿는 바벨탑을 만들어서 자기 자신들이 하나님이 되려고 하는 사람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시고 그들이 쌓으려던 탑을 왜 산산조각이 나게 하고 흩드시는가 그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에 대한 배려지요 그대로 버려두면 그들은 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스스로 하나님 되겠다고 하는 모든 인간들의 결국은 몰락입니다.
영원한 파멸이어요 하나님께서 그들이 하려는 것을 깨워주셔야 그들이 행하는 것을 흩어주셔야 그들을 흔들어서 깨워 주셔야 그들이 자기 교만에서 벗어날 것 아닙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흩으셨습니다.
이 이후에도 분명히 창세기 11장 서두의 바벨탑 사건이 우리에게 큰 교훈을 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끊임없이 자기 바벨탑 자기 기념비를 세워갑니다.
사무엘상 15장 12절 말씀 제가 읽어드릴게요.
사무엘이 사울을 만나려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났더니 어떤 사람이 사무엘에게 말하여 이르되 사울이 갈멜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발길을 돌려 길갈로 내려갔다 하는지라
여러분 사울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사울 만큼 준수한 사람이 없다고 말씀하실 정도로 사랑하시지 않았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리에게도 왕이 필요하다 라고 이야기했을 때 하나님께서 선지자 사무엘로 하여금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파별로 모아서 먼저 지파를 뽑고 거기에 가문을 뽑고 그 가문 중에 사람을 제비를 뽑아서 왕으로 선택하시지않아요.
성경에서 제비를 뽑는다라고 하는 것은 철저한 하나님의 섭리를 의미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제비에서 뽑힌 이스라엘 첫 번째 왕이 사울이라는 청년이었습니다.
뽑힌 사람 그 청년을 보니까 다른 사람이 보기에도 왕이 될 만큼 준수한 청년인데 사울이 어느 정도로 겸손했는가 자신이 제비에 뽑히자마자 나는 왕이 될 자격이 없다고 숨을 정도로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왕이 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서 지금 뭐 한다고 그래요. 자기 기념비를 세웁니다. 자기 바벨탑을 세우는 거여요.
내가 잘나서 임금 된 겁니다. 오늘날 이 나라의 평안이 있는 것은 내가 정치를 잘했기 때문에 내가 왕이 되었기 때문에 모든 백성들이 행복해 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 자기 기념비를 짓는 것이죠.
기념비를 짓는다 라고 하는 것 자체는 자기가 이미 하나님이 되어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사울은 기념비를 스스로 만드는 것을 기점으로 해서 자기 자신이 하나님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이상 청종하지 않습니다.
오죽하면 사무엘이 그 사울을 가리켜서 제사를 드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 청종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더 기뻐하시지 않느냐고 질타하시지 않습니까? 그래도 듣지 않았습니다. 결국 어떻게 돼요.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자기가 사랑하던 자식들과 자기가 그렇게 아끼던 군대와 하루에 같은 장소에서 전멸 산산이 붙여 깨어지고 맙니다.
사무엘하 18장 18절이에요.
압살롬이 살았을 때에 자기를 위하여 한 비석을 마련하여 세웠으니 이는 그가 자기 이름을 내게 전할 아들이 내게 없다고 말하였음이더라.
그러므로 자기 이름을 기념하여 그 비석에 이름을 붙였으며 그 비석이 왕의 골짜기에 있고 이제까지 그것을 압살롬의 기념비라 일컫습니다.
압살롬이 다윗의 아들이잖아요. 그런데 압살롬은 자식을 아들을 고작 자기 이름을 세상에 떨쳐주는 도구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딸만 있고 아들이 없어요.
그랬더니 내 이름을 떨쳐 줄 아들이었구나 한탄하면서 자기 기념비를 자기 손으로 세웠습니다. 기념비를 세웠다고 하는 것은 스스로 하나님이 되는 거라고 그러지 않았습니까?
자기 기념비를 세울 정도의 사람이니 아버지 목에 칼을 겨누죠 임금이 되겠다고 구테타 일으키는 겁니다.
내가 제일 잘났는데 내 위에 왕이 있는 것을 어떻게 용납합니까?
그 왕이 내 아버지라도 용납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압살롬의 인생도 부초 산산조각으로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성경속의 이야기만인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오늘날에도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자기 바벨탑 자기 기념비를 세웁니다.
10:06
그리고는 하나님 앞에서 부쳐 깨어져 가요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한국에서 기독교 기업인을 표방하던 큰 기업의 총수들이 있었습니다.
그분들이 무엇을 하든지 당신들의 이름이 새겨진 간판을 세우고 기념비를 세우고 그러시지 않았습니까? 여러분 10년 전에 20년 전에 30년 전에 당신의 이름이 들어있는 기념비를 세우던 기업이 지금 어디에 가 있습니까? 다 부쵸 그런 기업 다 깨졌습니다. 눈을 씻고 보십시오. 없습니다.
오래된 교회마다 가면 다 명찰들 붙어있는 교회들이 있다. 그랬죠 뭘 물건을 하나 내고도 다 자기 헌납자 명찰을 다 붙이는 교회들이 있거든요.
심지어는 교회를 건축하면서 건축 헌금 낸 사람들의 이름을 밀봉을 해서 예배당 밑바닥에다가 집어넣는 교회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 분들이 지금 어떻게 사는지 한번 보자 그거죠. 부초 안 깨진 사람들이 거의 드뭅니다. 왜 그러죠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깨지 않으면 하나님이 될 것 아닙니까 스스로 하나님께서 깨어주시지 아니하시면 그분들이 왜 하나님을 필요로 하겠습니까?
무엇을 하든지 내 이름을 내고 나를 위해서 나의 기쁨을 위해서 행하는 것이지 하나님을 위한 헌신이 아니란 말이죠.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신다면 깨워주셔야 되는 것이죠. 내버려두신다면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그들을 사랑하시지 않는다는 것이죠.
제가 100주년 기념교회 목사로서 교우님들을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제가 여러분들을 사랑할 수 있는 가장 큰 사랑 가운데 하나는 여러분들의 이름을 사람들 앞에서 가려드리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이제 7월달 되면 창립 3주년을 맞습니다. 3년 동안 양화진에서 참 많은 일들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 많은 일을 하는 데에 참 헌신적으로 자기 인생을 바치신 분들도 계시고 큰 돈을 바치신 분들도 계시고 물건을 바치신 분들도 있고 그러나 그 어떤 분의 이름도 여러분 앞에서 공개한 적이 없습니다.
여러분들 앞에서 공개해서 여러분들로부터 박수 받고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한다는 것은 바꾸어 말해서 하나님 앞에서 부초되게 하는 것이거든요. 그건 안 되잖아요.
제가 여러분의 이름을 가려 드리고 덮어 드리고 지켜드리면 지켜드리는 만큼 하나님만 아시는 만큼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하나님 방법으로 더 존귀하게 해주시지 않겠냐 말이죠. 그게 제가 여러분들에게 드릴 수 있는 가장 큰 사랑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가 2005년 7월 10일 날 교회가 창립되어서 이 양화진을 보존하고 순교자 기념관을 지키면서 제일 처음 했던 일들 중의 하나가 두 곳에 세워져 있던 기념비들을 제거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양화진에도 기념비들이 있었습니다.
돌아가신 분들의 기념비가 아니라 이분들과 아무도 상관없는 분들이 자기 이름을 박은 기념비들을 세우셨거든요.
그 가운데에는 제가 존경하는 분도 있고요.
저하고 개인적으로 깊은 연분을 맺었던 분들도 계십니다. 그것 제거했습니다. 이유는 그분들을 제가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분들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 이름을 계속 내세우려고 하다가 부쵸되게 제가 방관할 수는 없잖아요.
제가 양화진 묘지기가 되지 않았으면 모르지만 된 이상은 그분들 지켜드려야 되지 않겠습니까?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듯이 여러분 앞으로도 우리가 무엇을 하든 계속 우리를 가리는 이 삶을 계속 하십시다.
지난 5월 4일 날 우리 전교인 합동 예배에 또 체육대회 부천 실내체육관에서 하지 않았습니까? 그날도 다 우리 티셔츠 유니폼을 입고 참 감동적인 하루를 맞이했는데 그 여러분들 모두에게 티셔츠를 나누어 드리기 위해서 작게는 10만원에서부터 많게는 천만 원까지 20여분이 헌금한 돈으로 만든 것입니다.
그날 행운권 추첨해서 수많은 분들이 상을 타시고 기뻐하셨는데 그 모든 상품은 서른여분이 헌납하신 물건입니다. 담당하시는 집사님에게 누구에게도 이름을 공개하지 말라고 부탁했습니다
우리가 앞으로도 이처럼 우리의 이름을 스스로 가려가는 훈련을 할 때 우리의 삶은 하나님에 의해서 더 알차고 더 향기로워질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10절을 보십시다.
10절 위에 보니까 그 단락의 제목을 셈의 족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10절
셈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셈은 100세 곧 홍수 후 2년에 아르박삿을 낳았고 아르박삿을 낳은 후에 500년을 지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런데 10장에 있는 족보와 같은 내용이에요.
10장 21절 보시면
셈은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요.
야벳의 형이라 그에게도 자녀가 출생하였으니
22절
셈의 아들은 엘람과 앗수르와 아르박삿
아르박삿 나왔죠 아르박삿과 룻과 아람이요.
23절
아람의 아들은 우스와 훌과 게델과 마스며
24절
아르박삿은 셀라를 낳고 셀라는 에벨을 낳았다.
11장 12절
아르박삿은 35세에 셀라를 낳았고 셀라를 낳은 후에 403년을 지나며 자녀를 낳았으며
셀라는 30세에 에벨을 낳았고
같은 족보가 되풀이되는 것처럼 지금 보여지고 있거든요. 그런데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이 본문의 족보를 포함해서 그동안 창세기에 네 번의 족보가 등장을 하는데 그 족보마다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다 똑같지 않아요.
제일 첫 번째 족보 창세기 4장 한번 가보십시다.
창세기 4장 16절 보면
가인의 자손 그 소제목이 그렇게 붙어있죠.
그러니까 가인이 아벨을 죽이지 않았습니까?
그리고는 남아있는 가인의 족보인데 이것은 사실은 족보라기보다는 20절에서 22절에서 보시듯이 제가 한번 읽어볼게요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목축업이 시작된 거죠.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예술인이 생겼습니다.
22절 실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또 대장업하는 사람이 생겼죠.
그러니까 이것은 가인의 족보이기도 하지만 가인의 족보라기보다는 인류가 어떻게 문명사회로 발전되어 갔는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엄밀한 의미에서 족보다운 족보는 창세기 5장에 나타나는 두 번째 족보라고 그랬습니다.
창세기 5장 4절부터 볼까요?
아담은 셋을 낳은 후 800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930세를 살고 죽었더라
셋은 105세 때에 에노스를 낳았고 에노스를 낳은 후 800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912세를 살고 죽었더라
여러분들 그 본문에 혹시 어디 공표가 쳐져 있습니까? 죽었더라 그 공표 치신 분은 그때 공부할 때 계셨던 분들이네요. 이 족보가 강조하는 게 뭐여요? 범죄한 인간들은 다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4장 26절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의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왜 에노스 때에 비로소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는가 에노스라고 하는 히브리 말의 뜻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그랬죠
인간이 죽음을 인식하는 순간에 비로소 죽음 이후를 책임져 줄 수 있는 생명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필요로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이후에 나오는 족보는 죽음의 족보입니다.
다 죽었다는 거예요. 누구든지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을 안다면 여호와 하나님을 찾으라 그것이 그 족보의 메시지입니다.
20:17
그 다음에 창세기 10장에 세 번째 족보가 나오죠.
노아의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바로 노아의 홍수 이후에 하나님께서 노아의 세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을 통해서 인류의 역사를 새로 시작하게 하셨다고 하는 것이 이 메세지의 족보에 의미입니다
족보의 메세지여요 그런데 그러면 11장에 나와 있는 11장 10절 이후의 이 족보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뭔가
10절부터 볼까요?
셈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셈은 몇 살요 100세 곧 홍수 후 2년에 아르박삿을 낳았고 아르박삿을 낳은 후에 500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이제 그러고는 죽은 거죠.
그럼 몇 살까지 산 겁니까? 아르박삿은 600살 자 수학 공부하십시다.
12절 잘 계산해 보세요.
아르박삿은 35세에 셀라를 낳았고 셀라를 낳은 후에 403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다.
그럼 아르박삿은 몇 살까지 살았습니까? 438세
14절 셀라는 30세에 에벨을 낳았고
15절 에벨을 낳은 후에 403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다.
그럼 몇 살까지 살았습니까? 433세
16절 에벨은 34세에 벨렉을 낳았고
17절 벨렉을 낳은 후에 430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몇 살요 464세
예전에 할 때 다 기록하셨습니까? 예 아주 좋습니다.
그 다음에 18절 벨렉은 30세에 르우를 낳았고
19절 르우를 낳은 후에 209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몇 살요 239세
20절 르우는 32세에 수룩을 낳았고
21절 수룩을 낳은 후에 207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몇 세요. 239세
22절 수룩은 30세에 나홀을 낳았고
23절 나홀읕 낳은 후에 200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몇 세요 230세
24절 나홀은 29세에 데라를 낳았고
25절 데라를 낳은 후에 109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다. 몇 살까지 살았습니까? 148세
자 그러면 이 족보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뭔가
우리 영상자료 한번 좀 보여주시겠습니까?
자 여기에 지금 일목요연하게 나와 있는데 셈이 600세 아르박삿 438세 에벨 464세 벨렉 239세 르우 239세 수룩 230세 나홀 148세
저건 뭘 보여주는 거예요.
인간의 수명이 자꾸 줄어들었다는 것이 이 족보의 메시지입니다.
지금 본문은 나홀까지 있잖아요.
그죠 이제 그 이후를 보면 나홀의 아들이 데라죠
데라는 205세까지 살았습니다.
그 아들 아브라함 175세 이삭 180세
야곱 147세 요셉 110세 창세기가 끝납니다.
쭉 가서 출애굽기에 가면 모세가 120세입니다. 그러니까 저 족보가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수명이 세월이 가면서 계속 줄어들어갔다는 겁니다.
저게 왜 중요해요.
창세기 6장 3절 보십시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120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인간들의 죄가 세상에 관영했을 때 하나님 아버지께서 노아의 홍수를 이 땅에 보내실 것을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 홍수가 끝난 뒤에 인간의 수명이 120년으로 줄어들 것을 미리 예보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미 창세기 1장을 통해서 보았습니다마는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지구가 있고 지구를 감싸고 있는 대기권이 있고 대기권 위에 물이 있고 대기권 아래 땅 위에 물이 있고 물이 나누어져 있었다고 그랬죠
대기권 위를 물들이 감싸고 있을 때에는 지구가 온실효과가 있고 태양광선을 직접 쬐지 않기 때문에 인간들이 800년 900년을 살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대기권 밖에 있던 물들이 다 쏟아졌단 말이죠. 그러니까 홍수 노아의 홍수는 우리가 아는 구름에서 내리는 비가 아니었다고 그랬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의 창문들을 여시고 대기권 밖의 물을 다 쏟아 부어버리신 것이죠.
그래서 인간들이 직접 태양광선을 쬐기 시작하면서부터 인간의 수명이 계속 줄어드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 족보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뭔가
인간의 수명이 줄어든다는 메시지는 뭔가
첫째로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말씀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6장에서 너희들의 수명은 120세에 달할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때는 인간들이 900년 800년 살 때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아마 그 당시 사람들은 콧방귀를 끼었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시간이 지나가면서 정확하게 저렇게 이루어지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모세가 120년 산 이후에 3500년이 지난 지금도 기네스북에서 인간 중에서 제일 오래 사는 사람은 120세 정도입니다. 140세 150세 사는 인간 없잖아요.
우리가 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가?
하나님의 말씀은 이처럼 시간의 흐름 속에서 반드시 말씀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말씀을 쫓지 않으면 누구 손해라고요.
하나님 손해라고요. 아닙니다. 그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결국 내가 내 인생을 버리는 것입니다.
이 족보가 주는 두 번째 메시지가 뭔가 저렇게 인간의 수명이 계속 줄어든다고 하는 사실은 이 성경 말씀이 바로 나 자신을 위한 말씀으로 압축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인간이 900년 800년 살 때 그거 내 이야기 아니죠. 그런데 그 인간의 수명이 계속 줄어들어서 오늘날도 가장 오래 사는 사람이 120년밖에 살지 못하는 그 수명의 인간의 이야기로 줄어든단 말이죠.
그게 뭐냐 이 성경이 지금 나의 이야기로 압축되어서 나의 이야기가 됐다는 것입니다.
11장 26절
데라는 70세에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더라
여기에 아브람이 누구죠 바로 아브라함의 옛 이름이지 않습니까?
그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죠.
이제 창세기 12장 1절부터 창세기 제 2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펼쳐지기 시작하는데 그 주인공이 아브라함인데 아브라함을 우리는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릅니다.
우리 믿음의 조상이라는 이야기는 무슨 이야기입니까?
그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내 이야기라는 겁니다.
두번째 영상 한번 보여주시겠습니까? 무슨 에덴 동산의 이야기다 그건 나하고 별 상관없는 이야기처럼 보이죠.
800년 900년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것도 나하고 무관한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인간의 수명이 쭉쭉 줄어들어서 오늘날 인간들이 사는 최고 장수하는 정도의 수준까지로 떨어졌다라고 하니까 이 성경 창세기 이 성경 말씀이 정말 너무 크고 광활해서 남의 이야기처럼 보이던 이 성경 이야기가 인간의 수명이 줄어듬과 동시에 점점 나의 이야기로 압축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성경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되는가 그러므로 나에게 압축되는 이 말씀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서 내 심령을 확대시켜 나가야 돼
왜 이제부터는 이 말씀이 전부 내 말씀이거든요.
다 나를 위한 말씀이고 이 성경에 드러나는 모든 사건이 내 사건이거든요. 나의 이야기예요.
그러므로 내게로 이 말씀이 압축되면 압축되는 만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서 더욱더 우리 자신을 확대해서 나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죠.
27절 말씀 보시겠습니다.
데라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데라는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고 하란은 롯을 낳았다.
창세기 11장과 12장이 이제 창세기 1부와 2부를 나누는 분기점이 됩니다.
그러니까 창세기 제1부는 네 가지 큰 사건으로 이루어져 있죠.
하나님의 천지창조
두 번째로 인간의 타락
세 번째로 노아의 홍수
네 번째로 바벨탑 사건 이 큰 사건이 창세기의 제1부를 장식합니다.
그 다음에 창세기 12장부터 시작되는 제 2부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펼쳐지는 이야기로 전개가 돼요.
그런데 아까 말씀드렸듯이 그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 속에 주인공으로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이 아브라함이거든요.
30:40
여러분 인간이 타락하고 홍수가 나서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다 쓸어버리시고 바벨탑 사건으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부초 산산이 흩으시고 하는 그 사건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당신의 구원의 역사를 위하여 창세전부터 택하신 아브라함을 위하여 이 하나님의 구원의 족보의 역사는 면면히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 27절에서 데라는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섭리 가운데에서 아브라함을 이 땅에 태어나시도록 역사하셨다 라고 하는 것은 이것은 단순히 아브라함만의 이야기가 아닌 것이죠.
바로 우리 자신들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창세 전부터 선택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이 근세만 해도 얼마나 큰 격랑들이 많았습니까? 조선 말기의 혼돈 일제강점기 6.25 그 숱한 역사의 질곡과 격랑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를 이 자리에 있게끔 하시기 위해서 우리의 족보를 지켜주시고 우리의 책임자가 되어 주셨거든요.
그렇다면 이 과거의 나를 지키시고 오늘 나의 이 자리를 있게 하신 하나님을 믿는다라고 하면 내가 그 하나님과 내일을 향해 나아가지 않을 수 없죠
바로 그 사실을 믿고 내일을 향해 나아간 것이 창세기 12장부터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27절에
데라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데라는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고 하린은 롯을 낳았다.
여기에 왜 하필이면 하란의 아들 롯 이름만 나오는가
이 롯이 나중에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을 향해서 갈 때 아브라함을 따라갔던 아브라함의 조카죠
그러나 아브라함을 따라가긴 갔지만 결국은 아브라함과 결별하고 소돔과 고모라로 가지 않습니까? 바로 그 인물이었기 때문에 그 인물의 이름을 미리 앞서부터 기록해서 우리에게 일러주고 있는 것이죠.
28절
하란은 하란은 보니까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 데라의 세 아들들 중에 제일 막내 아들입니다.
그런데 하란은 그 아비 데라보다 먼저 고향 갈데야인의 우르에서 죽었더라
여러분 지금 하란은 주인공이 아니에요.
그런데도 그 하란이 데라보다 먼저 죽었다 아버지 데라보다 먼저 죽었다고 지금 성경에 기록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 말씀인 성경을 주실 때 한 구절 한 단어도 의미 없는 건 없다고 그러지 않았습니까? 의미가 없는 이야기이면 하나님께서 이 성경에 들어가게 하시지 않으셨겠죠.
따라서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면 어떤 구절 어떤 단어이든지 깊은 의미가 있음을 우리는 찾아낼 수 있어야 된다고 했습니다.
왜 이제 끝까지 한 번도 이야기하지 않다가 하란이라는 사람은 자기 아비 데라보다 먼저 죽었다는 것을 왜 구태어 우리로 하여금 알게끔 해주느냐 그 말이에요.
여러 가지 의미가 있겠지만 바로 이 한 구절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죽음의 원칙을 우리에게 또 한 번 일깨워 주시는 것이죠.
여러분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죽음의 공통점이 있다고 그랬습니다.
첫째로 죽음은 모두에게 적용된단 말이죠.
죽음에서 예외가 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육체의 죽음을 맞게 되어 있습니다.
두번째로 죽음의 특정 장소가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살던 내 집에서 편안하게 세상을 떠난다 그것 보장되어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사람이 요즘은 더 드물죠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죽을 수도 있고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하늘에서 죽을 수도 있고 바다에서도 죽을 수가 있고 길을 걸어가다가 죽을 수도 있고 죽음의 특정 장소가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세 번째로 죽음의 특정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아요. 아침에만 죽는다 잠자다가만 죽는다 그렇지 않습니다. 24시간 내내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 어느 곳에선가 지금 사람이 죽어가고 있단 말이죠.
네 번째 공통점 태어날 때는 순서가 있는데 죽을 때는 순서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 위에 족보를 보면 분명히 태어날 때 순서가 있었거든요.
데라가 자기 아버지 나홀 밑에서 먼저 태어나고 데라가 또 아들 세 명을 낳고 큰아들 이름은 아브라함 둘째 아들은 자기 아버지 이름을 따라서 나홀 셋째 아들은 하란이라고 지었습니다.
태어날 때는 분명히 순서가 있었는데 갈 때는 순서가 없습니다. 큰 아들이 먼저 죽은 것도 아니고 막내 아들이 먼저 죽었단 말이죠.
여기에 28절
하란은 그 아비 데라보다 먼저 죽었다
이 먼저라고 하는 말이요. 히브리말로 페네라고 기록이 되어 있는데, 먼저라는 뜻도 되지만 면전이라는 말도 됩니다.
면전 죽어가는 막내 아들을 보는 데라의 얼굴을 여러분 머릿속에 한번 그려보십시오. 그 아들을 살리기 위해서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 아버지 면전에서 아들이 죽었습니다.
그 아버지 면전에서 죽었다고 성경기자가 기록했다면 그 아버지가 이 아들을 살리려고 얼마나 온갖 수단을 다 강구해봤겠습니까? 그래도 죽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순서 없습니다. 그걸 알 때 우리가 오늘 하루 우리에게 호흡 있음을 감사하면서 우리가 의미 있게 살게 되는 것이죠.
아브라함이 자기 막네 동생이 자기 아버지 면전에서 죽는 것 그것은 결국 자기 면전이기도 하죠.
아버지 면전에서 큰형인 내 면전에서 막내 동생 막내 아들이 죽는 것을 보므로 아브라함은 인생에 대해서 아마 큰 깨달음을 얻게 되었을 것입니다.
29절
아브라함과 나홀이 장가 들었으니 아브라함의 아내의 이름은 사래며 나홀의 아내의 이름은 밀가니 하란의 딸이요. 하란은 밀가의 아버지이며 또 이스가의 아버지더라
굉장히 말이 복잡합니다. 그죠 그런데 굉장히 간단한 이야기예요. 도표를 보면 보여주실래요.
이 이야기입니다. 데라에게 아들 아브라함 나홀 하란 세 명이 있는데 하란이 롯을 낳았단 말이죠.
하란은 먼저 죽은 사람이잖아요. 그죠 그런데 롯만 낳은 게 아니라 밀가도 낳고 이스가도 낳았다. 그 말이에요. 그런데 이 밀가가 바로 이 나홀의 아내가 됐습니다.
그러니까 족보가 어떻게 되나요? 삼촌하고 조카가 결혼했습니다. 이때는 이제 근친 결혼을 할 때니까 그리고 아브라함의 아내 이름은 사래였다. 그 말이에요. 그런데 그 다음 절을 한번 보십시다.
30절
사래는 임신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
자 데라에게 세 아들이 있었는데 하란 아들은 지금 딸 둘 아들이 있습니다. 그죠
나홀과 밀가는 나중에 창세기 뒤에 가면 부두엘이라는 아들을 낳고 부두엘이 바로 리브가의 아버지가 되죠. 라반이라는 아들도 낳고 그런데 아브라함하고 사래는 결혼을 했는데 사래가 자식을 못 낳는 여자라는 것이어요
여기에 아브라함이라고 하는 이 이름 뜻인 말이죠.
아브 아브라고 하는 이 말이 아버지라는 말입니다. 우리말 아비하고 비슷하죠.
그 다음에 람이라고 하는 것은 원형이 룸인데 룸이라고 하는 것은 존귀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아브람이라는 말의 뜻은 존귀한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이 데라가 큰아들을 낳고 얼마나 아들을 사랑했으면 야 니 존귀한 아비가 돼라 이러고 아브라함이란 이름을 지어주었겠어요.
아브라함 본인도 자기 뜻을 아는 이상 아 나는 존귀한 인간 존귀한 아버지 되어야지 아마 그런 포부를 갖고 살았을 것입니다.
사래라고 하는 이름은요 히브리말로 사르라고 하면 장관 통치자 지도자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사래는 그 사르라고 하는 히브리 남성 명사의 여성 의미가 붙은 겁니다.
그러니까 사래라고 하는 이름 역시도 존귀한 여자라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세상에서 스스로 존귀하다고 여기는 남자하고 여자하고 만난 겁니다. 행복했으면 얼마나 좋아요.
40:54
그런데 다른 집은 다 자식이 있는데 이 사래는 아이를 못 갖는다는 겁니다. 임신하지 못한다. 그 히브리 말이 히브리 원전에 아카르라고 기록이 되어 있는데 아카르라고 하는 저 뜻은 무슨 뜻인가 하면 뿌리를 뽑아버렸다는 겁니다.
여러분 족보라는 게 자식이 없으면 뿌리가 뽑히는 겁니다. 남의 집에 시집을 갔는데 그 집의 뿌리를 뽑아 버렸습니다.
자 이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두 가지의 교훈이 있습니다.
여러분 부모가 원한다고 해서 자식이 절대로 귀한 인생 사는 것 아닙니다.
부모 원대로 자식이 다 될 것 같으면 자식 때문에 속 썩일 부모가 세상이 어디 있습니까?
저 집안 자식 잘못 둬서 집안 망쳤다 그런 집이 얼마나 많습니까?
자식 잘못 둬서 20년 전에 대한민국을 대표하던 기업들 중에 망한 기업들 얼마나 많습니까?
부모가 원한다고 절대로 원하는 대로 자식 되지 않습니다. 내가 원한다고 내 인생 내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존귀한 아버지 존귀한 여자라는 이름을 갖고 자기 인생을 얼마나 존귀하게 만들고 싶었겠습니까?
그러나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저 당시는 유일한 재산이 자식이란 말입니다.
가축보다도 자식의 수가 더 많아야 부자입니다.
그런데 저 시대에 호적의 아에 이 사람은 아이를 못 낳는 성녀 붉은 글을 탁 찍었습니다.
그러니까 존귀한 여자 존귀한 남자는커녕 저 두 사람의 이름은 당시 수치의 대명사이고 주위 사람들로부터 조소의 대상이었을 것입니다.
볼 때마다 아휴 저러고도 지가 아브라함이래 존귀한 아버지래 존귀한 여자래 조소의 대상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식의 인생도 자기 인생도 절대로 인간의 뜻대로만은 되지 않는다. 이것이 첫 번째 교훈이고요.
두 번째 교훈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저런 사람을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소망이 있는 거예요.
여러분 만약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사래를 부르시고 이제 창세기 12장 1절부터 구원의 역사를 펼쳐가시는데 저 당시에 저 두 사람이 세계에서 가장 유수한 로스쿨을 1등으로 졸업했다.
그 카풀이 만나서 결혼했다.
어느 면으로 보더라도 완벽하다 가문도 완벽하다 성격도 완벽하다 그러면 우리는 소망 없죠 어떻게 우리가 아브라함과 같은 역사의 중심 인물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저처럼 흠 투성이이고 결정적으로 한 집안의 뿌리를 뽑고 모든 사람들로부터 조소의 대상이 된 여자 그리고 그 여자의 남편인 남자를 당신의 도구로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세상에서 가장 결정적으로 부족한 것이 있기 때문에 저 사람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자기 자신을 맡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만약에 저 두 사람이 당시에 가장 잘난 사람이고 자기 삶의 부족함이 없다면 창세기 12장 1절에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왜 응답하겠습니까?
내가 지금 가진 게 충분한데 왜 모험을 하겠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노아를 생각할 때 이미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를 선택하셔서 인류의 중시조가 되게 하셨는데 노아 역시도 몇 세 때 아이를 가졌다고요. 예 예 500세 때 노아도 마찬가지였죠
노아도 500세가 될 때까지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당시의 관점으로는 인생 실패자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노아를 부르셨습니다.
노아 역시도 세상에서 자기들이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하나님만 의지하는 의의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게 부족한 것이 있다. 내 능력으로 아무리 노력해도 해결되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이 자식 문제일 수도 있고 경제 문제일 수도 있고 건강의 문제일 수도 있고 내 능력으로 아무리 노력해도 해결되지 않는 세상의 부족함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복입니다.
그 부족함 때문에 나는 하나님만 바라보게 되고 그 부족함 때문에 부족함이 없는 하나님의 은혜로 채움 만난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23편 1절 말씀을 노아한테 드린 적이 있으시죠.
여호와는 나의 목 자신이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 시는 다윗이 왕좌에 앉아 있을 때 지은 시가 아니란 말이죠. 아니 왕좌에 있었다. 한들 다윗이 태어나서부터 왕자로 태어나서 비담금침만 있고 죽을 때까지 고생 한 번도 안 하고 걱정 한 번도 안 했던가요
그렇지 않지 않습니까? 골리앗을 이긴 뒤에 사울의 칼날을 피해서 10년 동안 도망다니면서 동가숙 서가식 해야 되고 그 인생에 얼마나 많은 격랑이 있었습니까? 부족한 것 투성이였습니다.
그 부족한 것 때문에 하나님만 바라봤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의 모든 것 되심으로 내게 부족함이 없었다 그 말이에요.
31절
데라가 그 아들 아브라함과 하란의 아들인 그의 손자 롯과 그의 며느리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데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하였으며
자 데라가 지금 보면 아주 참 재밌습니다.
데라가 아들이 3명 있었잖아요. 그죠 근데 하란이 자기 면전에서 먼저 죽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데라가 누구를 데리고 가냐 롯 그러니까 아버지 없는 손자 롯 그리고 나홀과 밀가는 자식들도 있고 잘 살아요. 그러니까 그 살던 갈대와 우르에 그대로 둡니다.
아브라함과 사래 그 동네에서 이거 완전히 조소의 대상이 됐거든요. 남은 손가락질 받는 아들 부부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자식 중에서 정말 잘못된 자식 아브라함과 그 며느리 그리고 아버지 없는 고아된 아들 손자 이 세 사람을 데리고 갈대아 우르를 떠나서 이제 새 청착지를 찾아갑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거기에서 저 3명의 후손들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조소의 대상이 됐으면 이 바닥을 좀 떠나자 그리고 데리고 가는 겁니다.
그런데 1차 목적지가 어디예요 가나안 땅이었습니다. 가나안으로 가고자 하다가 하란에 이르러 거기에 거류를 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데라도 가나안 땅이 이상적인 곳이라는 것은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기 자식 중에서 잘못된 자식을 데리고 가나안으로 출발은 했는데 가다가 중간 지점 하란에서 주저앉아 버렸단 말이여요.
왜 데라가 처음에 가나안 땅을 목적지로 삼고 계속 가지 않고 중간에 주저앉아 버렸는가
여호수와 24장 2절에서 3절이 이유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한번 찾아보십시다.
여호수아 24장 2절에서 3절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하나님 말씀입니다.
50:10
옛적에 너희의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버지 나홀의 아버지 데라가 강 저쪽에 거주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왜 가나안으로 요단강 건너서 가나안 안 간 거여요. 우상 숭배자였다 이 하란이라고 하는 곳이 우상 제조업자들이 많았고 그래서 우상이 성행하던 곳이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다가 보니까 데라도 우상 제조업자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보니까 하란에 턱 가서 보니까 우상들 만들어서 팔아서 다 떼돈을 버는데 어 내 여기에 있으면 큰 돈 벌겠네 그래서 데라는 거기에 주저앉아 버렸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그 아버지 밑에서 사는 아브라함도 그 아버지 닮아갈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3절을 보십시다.
내가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을 강 저쪽에서 이끌어 내어 가나안 온 땅에 두루 행하게 하고 그의 씨를 번성하게 하려고 그에게 이삭을 주었다
그 우상 제조업자 아버지 밑에서 사는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이끌어 끌어내었습니다. 불러내신 거예요. 그리고는 약속의 땅을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기십니다.
여러분 여기 이 구절 자체도 우리에게 참으로 귀중한 교훈을 줍니다. 데라는 가나안 땅에 대한 정보는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속에 품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정보를 많이 갖고 지식을 많이 갖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 말씀을 여러분들의 심령 속에 품고 말씀에 나를 맡길 때만 말씀과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또 이 구절이 우리에게 주는 은혜의 교훈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 자식을 불러내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 속에서 여기에는 화이 왜가 없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일방적인 은혜입니다.
바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입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의 조상들 다 이 땅에서 우상숭배자들 아닙니까 귀신경배자들 아닙니까
그런데도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아브라함을 이끌어내시듯이 우리를 끌어내셨습니다.
어디로 생명의 자리로 그러므로 나를 끌어내신 하나님께 나를 맡길 때 창세기 12장 이후의 구원의 역사가 우리 각자의 삶 속에서도 일어나지 않을 리가 없는 것이죠.
32절 보십시다.
데라는 나이가 205세가 되어 하란해서 죽었더라 죽었더라 공표하십시다.
아까 말씀드렸죠 창세기 11장까지가 창세기 1부 그리고 창세기 12장부터가 창세기 2부가 시작이 됩니다.
1부의 끝마디가 무엇으로 끝나는가 죽었다로 끝나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는 모든 인간은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1부는 끝났습니다.
2부는 뭘로 시작되요.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2부는 여호와의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성경이 특별히 구별할 때 하나님을 쓸 때는 하나님의 능력을 강조할 때이고 여호와를 기록할 때는 하나님의 언약을 강조할 때는 여호와를 기록한다. 그랬죠
하나님 없는 모든 인간은 죽지만 하나님의 언약을 믿는 모든 백성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책임지신다는 말씀으로 2부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아카르 세상에서 조소의 대상인 한 부부를 하나님께서 택하시므로 구원의 역사가 펼쳐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삶 속에 무엇이 부족해서 여러분들의 삶이 곤고합니까? 세상에서 부족함만을 여러분들이 채우시려 하면 데라처럼 하나님의 언약을 상실할런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세상에서의 부족함 때문에 아브라함과 사래부부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여러분들을 맡기면 여러분들의 삶 속에 창세기 12장부터의 구원의 역사가 아름답게 펼쳐질 것입니다.
기도하십시다.
하나님 아버지 아브라함은 우리 믿음의 아버지요 사래는 우리 믿음의 어머니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이 결코 평탄치 아니했고 편안하지 아니했습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조소의 대상이었고
그 아버지가 그 자식들을 다른 곳으로 데리고 가 이주할 정도로 삶이 곤고하기만 했습니다.
삶이 곤고하고 부족했기에 그들은 하나님만 의지했고 하나님만 의지하므로 하나님께서 구원의 역사를 펼쳐주시므로 그들은 열국의 아버지 열국의 어머니가 되었고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주님 우리에게도 많은 부족한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부족한 것을 채우는 것을 목적으로 삼느라 하나님의 말씀을 상실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주님 이제부터 거꾸로 행하는 자가 되게 도와주옵소서 부족하기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만 더 의지하게 도와주옵소서
그리하여 세상의 부족함 때문에 부족함이 없는 하나님의 은혜로 채움받는 영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창세기 12장 이후의 구원의 역사가 우리의 삶 속에서 아름답게 펼쳐질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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