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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2. 11 주일 낮 예배(‘야곱’ 연속 설교 3)
하늘 문 앞에서 행한 서원
창세기 28장 10-22절(364장)
야곱에 대해 살펴보고 있는 중인데, 지난주에는 야곱이 아버지 이삭을 속여서 장자의 축복을 받은 것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형 에서를 피하여 외삼촌의 집으로 가는 길에 ‘벧엘’에서 꿈에 하나님을 만나고 서원하는 장면까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제까지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으로서 야곱과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계셨습니다. 야곱의 경우에도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대면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제 ‘야곱의 하나님’이 되시기 위하여 야곱 앞에 모습을 나타내 보이시고, 직접적인 관계를 맺기 시작하십니다. 오늘은 27장 41절부터 28장까지의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야곱을 빼돌리는 리브가(27:41-46)
27장 41절입니다. “그 아비가 야곱에게 축복한 그 축복을 인하여 에서가 야곱을 미워하여 심중에 이르기를 아버지를 곡할 때가 가까왔은즉 내가 내 아우 야곱을 죽이리라 하였더니.” 꾀 많은 야곱과는 달리 에서는 매우 단순하면서도 과격한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야곱이 이삭을 속여서 장자의 축복을 빼앗은 것은 그에게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었고, 그것은 그로 하여금 야곱에게 장자의 권리를 판 것까지도 속임수로 빼앗겼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습니다(27:36). 그의 마음은 야곱에 대한 원한과 적개심*으로 가득하게 되었고, 결국은 이삭이 죽으면 기회를 봐서 야곱을 죽여 버리겠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생각과 계획을 그의 어머니인 리브가가 알아차렸습니다. 그리고는 야곱을 빼돌리기 위한 계책을 세웁니다.
* ‘미워하여’라고 번역된 ‘사탐’(!f'c;)은 원래 ‘잠복하다, 박해하다, 증오하다, 반대하다’라는 뜻이며, ‘혐오하다, 반대하다, 원한을 품다, 적개심을 품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42절입니다. “맏아들 에서의 이 말이 리브가에게 들리매 이에 보내어 작은 아들 야곱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네 형 에서가 너를 죽여 그 한을 풀려 하나니.” 에서가 마음속으로 말한 것을 리브가가 어떻게 들었을까요? 어쩌면 에서가 이 계획을 혼잣말로 하는 것을 들었을 수도 있고, 에서가 말하지는 않았더라도 에서의 성향을 잘 아는 리브가가 눈치를 챘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에서의 계획을 알아차린 리브가는 야곱을 불러 에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전해 줍니다. 에서가 야곱을 죽여서 한을 풀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한을 풀려 한다’는 말은 ‘한숨 쉬다, 미안하다, 뉘우치다, 위로하다, 원수를 갚다’**라는 뜻으로서, 원수를 갚는 행동을 통하여 자기 자신을 위로하려고 한다는 뜻입니다.
* ‘들리매’라고 번역된 ‘나가드’(dg"n:)는 원래 ‘정면에 두다, 반대편에 서다, 입증하다, 알리다, 보여주다, 예언하다, 설명하다, 칭찬하다, 누설하다, 선언하다, 고발하다’라는 뜻이며, ‘눈에 잘 띄다, 이야기 하다, 알리다, 선포하다, 설명하다, 전하다, 발표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래서 이것은 리브가가 에서의 말을 들었다는 의미라기보다는, 에서의 그런 결심과 변화가 리브가의 눈에 띄어서 그 계획을 알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 ‘나함’(!j'n:)은 원래 ‘한숨 쉬다, (강하게) 숨 쉬다, 뉘우치다, 동정하다, 위로하다, 후회하다, 원수를 갚다, (자기 자신을) 안심시키다’라는 뜻이며, ‘미안하다, 위로하다, 참회하다, 뉘우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래서 [공동번역]은 “너를 죽이지 않고는 속이 풀리지 않을 모양이다”라고, [현대인의 성경]은 “너를 죽여 분풀이하려고 한다”라고 번역했다.
그러면서 즉각적으로 야곱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설명합니다. “(43)내 아들아 내 말을 좇아 일어나 하란으로 가서 내 오라버니 라반에게 피하여(44)네 형의 노가 풀리기까지 몇 날 동안 그와 함께 거하라(45)네 형의 분노가 풀려 네가 자기에게 행한 것을 잊어버리거든 내가 곧 보내어 너를 거기서 불러오리라 어찌 하루에 너희 둘을 잃으랴.” 리브가는 기회 포착에 능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개역 성경은 이 단어를 번역하지 않았는데, 43절은 ‘이때에, 이제, 지금, 곧장’*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같은 단어가 이삭의 이야기를 전달하면서 야곱에게 이삭을 속이라고 말하는 장면에서도 사용되었는데, 거기에서는 ‘그런즉’이라고 번역되었습니다(27:8). 리브가는 야곱에게 일어나서 피하라고** 말합니다. 하란에 있는 자기 오라버니인 라반에게 가서 몇 날 동안만 거기 머무르라는*** 것입니다. 에서는 단순하기 때문에 지금은 화가 나서 야곱을 죽이겠다고 하지만, 그리고 실제로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야곱을 보지 못한 채 며칠이 지나면 그 화도 금방 풀려서 야곱을 죽일 생각조차 잊어버릴 것임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 ‘아타’(hT;[')는 ‘이때에, 이제부터는, 지금, 곧장, ~임에 반하여, 이제’라는 뜻이다.
** 개역 성경은 두 단어를 앞 뒤에 배치했지만, 히브리 원문에서는 붙어서 나온다. ‘일어나’로 번역된 ‘쿰’(!Wq)은 ‘솟아오르다, 일어나다, 서다, 상승하다, 입증되다, 확인되다, 지속하다, 세우다, 휘젓다, 조사하다’라는 뜻이고, ‘피하여’로 번역된 ‘바라흐’(jr'B;)는 ‘튀다, 통과하다, 달아나다, 도망치다, 쫓다, 쫓아 버리다, 패주시키다, 도착하다, 뻗다(도달하다), 급히 떠나다’라는 뜻이다.
*** ‘야솨브’(bv'y:)는 원래 ‘앉다, 거하다, 남아 있다, 거주하다, 결혼하다, 계속하다, 안정하다, 견디다, 설립하다’라는 뜻이며, ‘)거주하다, 체재하다, 앉다, 머무르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래서 리브가는 야곱에게 ‘몇 날 동안’만 가 있으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몇’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하루’ 또는 ‘열하루’*라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이것이 복수형으로 사용되어 있어서 ‘하루들’이라고 직역할 수 있는데, 그것을 개역 성경은 ‘몇’으로 번역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리브가는 최소한 하루나 이틀, 최대로 잡아도 열흘 정도만 가 있으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간이 지나 에서의 화가 풀린 것을 확인하면 사람을 보내서 야곱을 집으로 돌아오게 하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루나 이틀이나 그게 뭐 중요하냐?’고 할 수 있지만, 이것은 아들인 야곱으로 하여금 남편인 이삭을 속이게 한 리브가에 대한 하나님의 보응과 관련된 부분이기 때문에 강조해서 설명하는 것입니다.
* ‘몇’으로 번역된 ‘에하드’(dj;a,)는 ‘하나, 첫 번째, 열하나, 열한 번째’라는 의미이다. 본문에서는 이것의 복수형인 ‘아하딤’(!ydIj;a})이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하루들’로 직역할 수 있는 이 단어를 ‘몇’으로 번역한 것은 잘 된 번역이다.
리브가는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아들인 야곱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며칠 혹은 열흘 정도만 떨어져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야곱이 라반에게 가서 머문 기간은 20년이나 되었습니다(31:41). 그는 20년 만에 귀향했어도 리브가를 찾아가지 않고 세겜에 머물다가(33:18) 한참 후에야 마므레에 있는 이삭을 찾아갑니다(35:27). 얼마 후에 이삭이 죽자 장사지냈고(35:29), 심지어는 야곱이 세겜에 머물다가 벧엘로 올라갈 때에 리브가의 유모인 드보라가 죽어서 장사지냈다는 이야기까지 나오지만(35:8) 정작 리브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리브가는 야곱에 하란에 머무는 기간 중에 죽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녀는 잠시 아들을 떠나보낸다고 생각했지만, 이것이 사랑하는 아들 야곱을 보는 마지막 순간이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저주는 자기가 받겠다고 장담했던(27:13) 리브가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이라는 것입니다.
한편 리브가는 이삭에게 야곱을 하란으로 보낼 것을 이야기하면서 결혼 문제를 끄집어 냅니다. “(46)리브가가 이삭에게 이르되 내가 헷 사람의 딸들을 인하여 나의 생명을 싫어하거늘 야곱이 만일 이 땅의 딸들 곧 그들과 같은 헷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취하면 나의 생명이 내게 무슨 재미가 있으리이까.”* 에서는 부모의 허락도 없이 헷 족속의 딸들을 아내로 삼았는데, 리브가는 그녀들 때문에** 자기의 생명, 자기의 삶이 고달프고 괴롭다고*** 하소연합니다. 그러면서 이제 야곱까지 가나안 땅의 여자들 중에서 아내를 삼으면 자기의 생명, 인생이 무엇이 되겠느냐고 말합니다. 개역 성경은 이 부분을 “나의 생명이 내게 무슨 재미가 있으리이까”라고 번역했는데, 이것은 문자적으로 ‘나의 생명이 무엇****입니까?’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 이삭이 스스로 야곱을 라반에게로 보내도록 만든 것입니다.
* [공동번역] 리브가가 이사악에게 호소하였다. "헷 여자들이 보기 싫어 죽겠습니다. 만일 야곱이 이 땅에 사는 저 따위 헷 여자를 아내로맞는다면 무슨 살 맛이 있겠읍니까?" [한글 킹제임스] 리브카가 이삭에게 말하기를 "내가 헷의 딸들로 인하여 내 삶에 짜증이 나거늘, 만일 야곱이 이 땅의 딸들과 같은 헷의 딸들을 아내로 얻으면 내 삶이 내게 무슨 유익이 되리요?" 하더라. [표준새번역] 리브가가 이삭에게 말하였다. "나는 헷 사람의 딸들 때문에 사는 게 아주 넌더리가 납니다. 야곱이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의 딸들, 곧 헷 사람의 딸들 가운데서 아내를 맞아들인다고 하면 내가 살아 있다고는 하지만 나에게 무슨 사는 재미가 있겠습니까?" [현대인의 성경] 그러고서 리브가는 이삭에게 말하였다. "내가 이 헷 여자들 때문에 사는 것이 지긋지긋할 지경인데 만일 야곱이 이 땅의 헷 여자와 결혼한다면 내가 무슨 낙으로 살겠습니까?"
** ‘인하여’라고 번역된 ‘파님’(!ynIP;)은 원래 ‘얼굴, 앞쪽에, 이전에, 대면하여, 분노, 안색, 가장자리’라는 뜻이며, ‘얼굴, 면전, 사람, 표면, 앞뒤로, 이전에, 함께, 앞에’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 ‘싫어하거늘’로 번역된 ‘쿠츠’($Wq)는 원래 ‘싫어지다, 불안하다, 지겨워하다, 상심하다, 슬퍼하다, 몹시 싫어하다, 괴롭히다, 고달프다, 싫증나다’라는 뜻이며 ‘슬퍼하다, 몹시 싫어하다, 증오하다, 혐오감을 느끼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 ‘마’(hm;)는 ‘무엇?, 어찌하여?, 어떻게?, 언제?, 얼마나!’라는 뜻이다.
2. 이삭의 축복 확언(28:1-5)
이제 28장으로 넘어옵니다. “(1)이삭이 야곱을 불러 그에게 축복하고 또 부탁하여 가로되 너는 가나안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취하지 말고(2)일어나 밧단 아람으로 가서 너의 외조부 브두엘 집에 이르러 거기서 너의 외삼촌 라반의 딸 중에서 아내를 취하라.” 이삭은 야곱을 불러서 다시금 그를 축복하고 명령*합니다. 야곱만큼은 가나안 여인을 아내로 삼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밧단 아람**에 사는 외삼촌 라반에게로 가서 사촌 중에서 아내를 취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나서 다시금 야곱을 축복합니다. “(3)전능하신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어 너로 생육하고 번성케 하사 너로 여러 족속을 이루게 하시고(4)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복을 네게 주시되 너와 너와 함께 네 자손에게 주사 너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 곧 너의 우거하는 땅을 유업으로 받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명령은 하나님께서 처음 사람을 만드신 후에 선언하신 복이고(1:28), 홍수 이후에 노아에게도 주어진 복인데(9:1) 이것이 다시금 야곱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이것은 4절에 나온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복’이 아담과 노아에게 허락하신 복과 동일 선상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또한 이삭은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복과 관련하여 ‘자손’에 대한 내용과 ‘땅’에 대한 내용을 구체적으로 언급합니다. 이삭이 여러 번에 걸쳐서 야곱을 축복한 것은 이제는 야곱이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장자권자임을 인정하고 확인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 개역 성경은 ‘부탁’으로 번역했지만, ‘차아’(hw:x;)는 원래 ‘구성하다, 명령하다, 지정하다, (짐을) 맡기다, 명령을 내리다, 명령을 주어 보내다, 전령(전령자)을 보내다, 정돈하다’라는 뜻이며, ‘명령하다, 맡기다, 지시하다, 명령을 내리다, 임명하다, 정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 27:43에서 리브가는 라반이 사는 곳을 ‘하란’이라고 말하는데, 여기에서 이삭은 ‘밧단 아람’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모순되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하란은 도시의 이름이고, 밧단 아람은 하란이 위치한 지역의 이름이다.
이렇게 해서 야곱을 밧단 아람으로 보낸 것을 본 에서는, 이삭이 아내의 문제 때문에 야곱을 보냈고, 또 자기의 아내들이 그 아비 이삭을 기쁘게 못한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이번에는 이스마엘의 딸들 가운데서 또 다른 아내를 취합니다. “(8)에서가 또 본즉 가나안 사람의 딸들이 그 아비 이삭을 기쁘게 못하는지라(9)이에 에서가 이스마엘에게 가서 그 본처들 외에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의 딸이요 느바욧의 누이인 마할랏을 아내로 취하였더라.” 하지만 에서의 행동은 결코 그의 부모에게 기쁨을 주지 못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그가 새롭게 아내로 취한 ‘마할랏’(마하라트, tl'j}m')은 ‘병들었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병든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지는 않았겠지만, 이러한 표현들은 에서의 영적인 상태가 ‘병든’ 것임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 에서의 아내들이 이삭을 기쁘게 못했다는 말은 문자적으로 그녀들이 ‘이삭의 눈에 악했다’고 되어 있다. ‘기쁘게 못하는지라’라고 번역된 단어는 ‘라’([r')로서 원래 ‘나쁜, 악한, 역경, 고난, 재난, 불쾌(하게 하다), 걱정, 사악한(사람, 일), 해, 무거운, 상처, 해로운, 비참’이라는 뜻이고, ‘나쁜, 사악한, 불쾌감을 주는, 해로운, 고통, 상처, 재난’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3. 하나님의 축복 선언(28:10-15)
이제 아버지 집을 떠난 야곱의 모습을 살펴봅니다. “(10)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11)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곳의 한 돌을 취하여 베개하고 거기 누워 자더니(12)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고.” 뒤에 나오지만 야곱이 노숙을 한 곳은 원래 이름이 ‘루스’라고 하는 장소였습니다. 야곱이 출발한 브엘세바에서 약 85km 쯤 떨어진 곳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야곱이 에서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여 하루 만에 이곳에 오게 되었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아버지에게서 축복과 명령을 받고 떠난 야곱이 무리해서 도피했을 것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아마도 사흘 정도 걸려서 이곳에 도착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돌 하나를 베개 삼아 누워서 잠이 들었고 꿈을 꾸었습니다.*
* ‘꿈’으로 번역된 ‘하람’(!l'j;)은 ‘(견고하게) 묶다, 뚱뚱하게 되다, 꿈꾸다, 마음에 들다, 치료하다, 건강하다, 강하다’라는 뜻이다.
그는 꿈에 땅 위에 서 있고* 그 끝이 하늘에 닿아있는 사닥다리, 혹은 계단**을 보았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사자,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그 꼭대기 위에 서 계시는*** 하나님을 발견했습니다. “(13)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14)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15)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하나님의 말씀을 몇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나차브’(bx'n:)는 원래 ‘자리 잡다, 설립하다, 세우다, 놓다, 관리, 기둥, 주다, 우뚝 세우다, 배치하다, 고정시키다, 뾰족하게 하다, 공고히 하다’라는 뜻이며, ‘서다, 똑바로 서다, 세우다, 설립하다, 고정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 ‘수람’(!L;su)은 ‘계단, 사닥다리’라는 뜻이다.
*** 이것은 사다리가 서 있었다고 할 때와 똑같은 단어를 사용한 표현이다.
① 첫째로, 자신이 누구이신지를 밝히셨는데,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조상 대대로 섬겨 온 하나님, 야곱이 그리도 가지고 싶어 했던 장자의 권리와 복의 근원이 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야곱이 하나님 때문에 장자권을 탐냈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아니, 사실은 ‘복’ 자체를 원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훨씬 높습니다. 하지만 장자권을 가진 자는 더 이상 하나님과 무관하게 살 수 없음을 보게 됩니다. 야곱은 결국 자신이 추구했던 것은 아니지만 장자의 복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② 둘째로, 아브라함의 복을 다시 확언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땅에 대해 약속하시는데, 그가 누운 땅을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자손에 대해서도 약속하셨는데, 먼저는 그의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많아져서 동서남북에 가득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둘째는 땅의 모든 족속이 야곱과 그의 자손을 인해서 복을 얻게 될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장자의 권리와 축복이 중요한 것은 바로 이 부분 때문입니다. 땅의 소유나 자손이 많아지는 것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가문에서 메시아가 탄생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자손’을 통하여 땅의 모든 족속이 구원의 복을 얻게 될 것이기에 이 복이 중요하다는 것인데, 그것을 다시 확언해 주신 것입니다.
* ‘아파르’(rp;[;)는 원래 ‘티끌, 흙, 땅, 진흙, 재, 먼지, 반죽, 가루’라는 뜻이며, ‘마른 땅, 먼지, 가루, 재, 땅, 모르타르, 쓰레기, 광석’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드실 때 사용하신 재료가 바로 이것이다.
③ 셋째로, 늘 야곱과 동행하며 그를 지키시고 돌아오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개역 성경에는 번역되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보라!’*라는 단어로 15절을 시작하십니다. 야곱이 어디를 가든지 함께 하시고 그를 지켜 주실 것입니다. 울타리를 쳐서 그를 보호하시고 필요를 채워 주시며 그에 대한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또한 결국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 ‘히네’(hNEhi)는 ‘보라, 자, 주목하라, 만약’이라는 뜻이다.
** ‘솨마르’(rm'v;)는 원래 ‘(가시로) 울타리 치다, 지키다, 보호하다, 시중들다, 조심하다, 신중하다, 주의를 기울이다, 세심히 보다, 준수하다, 보존하다, 주시하다, 보관하다, 구하다(자신을), 확실한, 기다리다(잠복하여 기다리고 있다)’라는 뜻이며, ‘지키다, 보호하다, 관찰하다, 주의하다, 책임지다, 감시하다, 감시자, 보관하다, 축하하다, 자제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④ 마지막 네 번째로, 이 모든 말씀이 이루어질 때까지 그를 떠나지 않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허락한’이라고 번역된 말은 ‘말하다, 선언하다, 약속하다’*라는 뜻입니다.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이 의미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약속하시고,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지키시는 분’으로 소개할 때에 주로 ‘여호와’라는 이름을 사용합니다. 훗날 모세는 가시떨기 나무 앞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물어 ‘여호와’라는 답변을 받았지만(출 3장),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는 스스로 자신의 이름이 ‘여호와’이신 것을 밝히신 것입니다.
* ‘다바르’(rB'D;)는 원래 ‘정돈하다, 말한다, 정복하다, 대답하다, 지명하다, 명령하다,친하게 사귀다, 선언하다, 파괴하다, 주다, 이름하다, 약속하다, 연습하다, 이야기하다’라는 뜻이며, ‘말하다, 선포하다, 이야기하다, 명령하다, 약속하다, 경고하다, 협박하다, 노래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4. 야곱의 서원(28:16-22)
하나님의 말씀을 다 들은 야곱은 잠에서 깨어납니다. 이것은 단순한 꿈이 아닌, 꿈을 통한 계시였기에 야곱은 그에 합당한 반응을 보이며 행동을 합니다. “(16)야곱이 잠이 깨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17)이에 두려워하여 가로되 두렵도다 이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18)야곱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베개하였던 돌을 가져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19)그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본 이름은 루스더라.” 야곱의 행동을 몇 가지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① 첫째로, 그는 하나님께서 이곳에 계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두려워하면서 그곳이 하나님의 전, 하늘의 문임을 인정합니다. ‘과연’이라고 번역한 단어는 ‘확실히, 분명히, 정말로’*라는 뜻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이 아버지 이삭이 거주하는 땅, 브엘세바에만 계신 것이 아니라 이곳에도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이것은 ‘깨달음’이라고 할 것조차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당시의 상황에서는 매우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사람들은 대부분 신은 특정한 지역만을 다스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렇게 멀리 떨어진 곳에도 계시다는 깨달음은 야곱에게 매우 큰 충격을 주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가는 곳 어디든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은 그에게 큰 격려가 되었을 것입니다.
* ‘아켄’(@kea;)는 ‘확고하게, 확실히,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참으로, 진실로, 정말로’라는 뜻이다.
하지만 야곱이 보인 가장 대표적인 반응은 ‘두려움’이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경외’*의 감정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하면서도 ‘두려움’을 가지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에게 필수적인 부분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을 때에 큰 화를 자초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을 만난 그곳이 하나님의 전/집**이며 하늘의 문***, 즉 하늘이 열린 곳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벧엘만 하늘이 열리는 곳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면 어느 곳이든 하늘이 열리는 곳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칼빈이 말한 것처럼 우리가 늘 하나님 앞에(Coram Deo) 존재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을 기억하면 늘 두려움과 경외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 ‘야레’(arey:)는 원래 ‘두려워하다, 경외하다, 외경하다, 무서워하다, 깜짝 놀라게 하다, 놀라게 하다, 겁나는 (행동/일)’이라는 뜻이다.
** ‘베이트’(tyIB')는 ‘1)집 2)장소 3)대피소 4)가정, 가족을 포함한 집 5)가족 6)가정의 일, 가정사 7)내부에(은유) 8)사원 9)안쪽에 10)안’이라는 뜻이다.
*** ‘솨아르’(r['v')는 ‘열림, 문, 대문, 도시’라는 뜻이다.
② 둘째로, 자기가 베었던 돌을 기념비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곳의 이름을 벧엘이라고 붙였습니다. ‘기둥’이라는 번역은 좀 아쉬운데, 이것은 ‘기둥’이라는 뜻도 있지만 ‘기념 비석’*이라고 해야 적합합니다. 베개로 삼았던 돌을 세워 놓았으니 그것도 기둥은 기둥이지만 그보다는 기념비가 더 옳을 것 같습니다. 기름을 붓는 것은 그것을 거룩하게 성별한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축복한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곳의 이름을 ‘벧엘’이라고 붙이는데, 이것은 ‘베이트-엘’(laeAtyBe) 즉,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 ‘마체바’(hb;Xem')는 원래 ‘자리 잡힌 (어떤 것), 기둥, (기념) 비석, 우상, 요새’라는 뜻이며, ‘기둥, 고대 이집트 귀인의 무덤, 그루터기’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런 다음 야곱은 하나님 앞에 서원을 합니다. “(20)야곱이 서원하여 가로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21)나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22)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이것도 몇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① 이것은 조건이 있는 서원이었습니다. ‘서원’은 하나님께 대한 약속, 맹세*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처럼 함께 계시고, 지켜 주시고, 필요한 것(먹을 양식과 입을 옷)들을 공급하시고, 궁극적으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신다면 아래의 것들을 이행하겠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야곱은 역시 야곱이다’라는 것을 발견합니다. 잠시 동안 그는 하나님의 영광에 압도되어 ‘두려워’했습니다. 하지만 곧 그는 ‘야곱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을 자기에게 유리하게, 더욱 구체적으로 요약합니다. 그리고 거래를 하듯이... 하나님께서 그러한 것들을 이행하신다면 자기도 아래의 것들을 행하겠다고 말합니다. 물론 야곱이 약속을 이행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몫을 다 하신 이후에나 가능한 것들입니다. 그는 이 기회를 통해 무언가 확실한 것을 차지하고자 한 것입니다.
* ‘네게르’(rd,n<)는 ‘(하나님께 대한) 약속, 약속된 (것), 서원, 맹세, 서원제'라는 뜻이다.
② 첫 번째 서원은, 여호와께서 자기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건 꽤 진지해 보이기는 하지만 참으로 우스운 말입니다. 여호와께서 자기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라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이 하나님이시듯이 ‘야곱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을 자기가 허락한다는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이 경우 오히려 히브리서 기자의 표현처럼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히 11:16)는 것이 옳지, 야곱이 하나님을 자기의 하나님이라 부르시도록 허락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야곱은 대단한 선심을 쓰는 듯이 이것을 허락하겠다고 말합니다.
③ 두 번째 서원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돌’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그 지역 즉, 벧엘을 가리키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야곱은 벧엘에 하나님의 전은커녕 집 한 채도 하나님을 위해 지어 드린 적이 없습니다. 나중에 딸인 디나가 강간당한 사건 이후에 어쩔 수 없이 벧엘로 올라가 제단을 쌓고 제사를 드리기는 하지만(35:3) 그것을 이 서원의 이행이라고 보기에는 석연치가 않습니다.
④ 세 번째 서원은,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것의 십일조를 반드시 드리겠다는 것입니다. 십일조는 하나님이 주신 것 가운데서 1/10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야곱이 잘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 가운데서 1/10을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이게 허락하신 모든 것의 1/10을 하나님께 드리는 훈련을 하셔야 합니다. 신약 이후의 성도에게 십일조가 의무 사항인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도의 표현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돌려 드려야 하는 하나님 소유의 하나님 몫임을 기억하십시오. 야곱은 십일조를 드리는 부분을 가장 강조해서 표현합니다.* 하지만 이 부분도 결론적으로 말하면, 야곱이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렸다는 내용은 나오지 않습니다. 이 당시에는 십일조를 드리는 일을 대행할 제사장도 존재하지 않았고, 하나님께 제사의 제물로 드렸다고 할만한 근거 구절도 나오지 않습니다.
* 히브리 원문은 십일조를 드린다는 말이 두 번 반복되어서 ‘아세르 아아세레누’(WNr,C]['a} rCe[')라고 되어 있다. 기본형인 ‘아사르’(rc'[;)는 ‘축적하다, 십일조(하다), 십일조를 내다, 10분의 1을 취하다, 10분의 1을 주다’라는 뜻이다.
결과적으로 말한다면 야곱 자신은 자신의 서원을 하나도 이행하지 않았습니다. 굳이 따진다면 하나님을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있도록 ‘허락’했다는 것을 말할 수는 있지만, 앞에서도 지적한 것처럼 그것은 야곱이 허락하고 자시고 할 문제가 아닌데도 주제넘게 그렇게 말한 것일 뿐입니다. 그것을 야곱이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의미로 본다고 해도... 야곱의 말년을 제외하고는 그는 하나님을 이용은 해먹었을지언정, 섬겼던 적은 없음을 보게 됩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야곱은 자기가 원하던 것을 결국 모두 얻었습니다. 장자의 권리와 장자의 축복을 얻었고, 결국은 아버지 이삭으로부터도 장자권을 확실하게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기지 못했던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만남도 가지게 되었으며, 하나님으로부터 동행과 지키심에 대한 약속까지도 받아 냈습니다. 잠시 두려워하기도 했지만, 그 와중에서도 야곱은 그것을 자기의 유익을 위하여 철저하게 이용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여러분은 이런 야곱의 모습에서 무엇을 발견하십니까? 저는... 사람은 참으로 변하지 않는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야곱은 언제까지나 야곱일 따름입니다. 물론 야곱의 말년까지 추적하다 보면 그도 결국 변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는 됩니다. 하지만 그의 130년의 인생 가운데 하나님 마음에 합하는 모습으로 산 것은 과연 몇 년이나 될까요? 앞으로도 계속 살펴보겠지만... 우리는 지독히도 변하지 않는 야곱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와 같은 야곱의 ‘변하지 않음’과 함께 그와 동일하게 변하지 않는 우리 자신의 모습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얼마나 변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믿으시고 무엇이 얼마나 변하셨습니다. 생각이, 행동이 변하셨습니까? ‘변화’라는 주제를 생각하고 저 자신을 생각하면 한숨밖에 나오질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야곱을 변화시키신 하나님이 우리도 변화시키실 줄로 믿어야 합니다. 그 믿음을 가지고 매일의 삶에서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