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 수첩 5월호 5월은 어린이에. 사랑을 어버이에게 존경의 마음을 전하는 달이다. 실록의 계절이다. 코로나도 멀리 가버리고 이제 답답한 마스크도 벗어버리고 밝게 인사 할 수 있어서.행복이 가득한 오월이다. 어린이날 하루만 어린이를 사랑하고 어버이날 어버이를 존경하는 날로 행사를. 마치는 것보다 어린이는 이 나라의 기둥이고 어버이는 이 나라의 주인공이시다. 한 시간 정도의 행사로 마치면 바로 이날을 잃어버린다. 지난 5월5일 이월면에서는 우천 관계로 한마음걷기대회취소되고 체육관 실내에서 어린이경품 나누어주기 어르신 선물 드리고 노래자랑으로 행사를 마치는 아쉬운 행사 장 이 되였다. 우천 관계로 가족과 함께 걷기대회 행사가 취소되어 아쉬움이 크다. 지난해 행사를 보니 이월 체육 공원을 출발 할아버지는 손자의 손을 할머니는 손녀와 함께 대화를 나누며 아름답게 놓아진 다리를 건너 아름 중앙아파트 앞 이팝나무 지나. 안산 저수지를 유 톤 돌아오는다복한 가정의 걷기대회와 행운권에 경품이 당첨되어 좋아하는 어르신의 모습과 어린이의 행동이 너무너무 행복한 모습이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올해는 비가 와서 아쉬움을 남기며 내년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 필자는 노인을 바라보는 나이기에 어릴 적 생각나는 품바 축제를 좋아한다. 그러기에 지난 5월21일 음성 품바 축제장에 구경 겸 취재로 음성 품바 축제행사장을 찾았다. 이번 기회 음성 품바 축제 최초의 음성 품바는 누구일까? 취재하기로 했다. 음성군의 자료에 따르면 최귀동 할아버지는 40여 년 동안 무극 다리 및 에서 남의 밥을 얻어다 걸인들과 나누어 먹으며 생활 을 하였다고 한다. 어느 날 동네 사람들이 다리 및 생활 터전에서 쫓겨나자. 용담 산 및 에 음 막을 치고 . 생활을하게 된다. 그 음 막은 그와 오웅진 신부의 역사적인 민 남의 현장이 됐다. 최 옹은 일본에 징용됐다가 정신적인 장애를 갖고 귀국했지만. 가정은 파산되어 있었다. 그래도 그는 자신보다 못한 처지의 사람 들을 위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 현장을 목격한 오 신부는 주머니돈 1.300원을 털어 시멘트 한 포대를 사서 벽돌을 찍고 교우들과 함께 부엌 다섯 칸짜리 건물을 만들어 이들을 입주시켰다, 이때가 1976년 11월 15일이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오 신부는 음성군 맹동면에 꽃동네 사회 복지시설을 만들어 전국적으로 꽃동네 천원 돕기 운동을 펼쳤다. 국제적으로 퍼져 나간 현재의 사회복지 법인 꽃동네에 이르게 했다. 최귀동 할아버지는 이 과정에서 1986년2월15일 가톨릭 대상 (사랑 부분)을수상했다. 그리고 그는 1990년 1월4일 평소 지병인 혈압이 재발해 인곡 자애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중 세상을 떠났다. 최 옹은 인명은 하늘에 달려 있어 라는 한마디 남겼다. 그는 1984년 2월28일 자로 눈못 보는 형제를 위해 사망 후 안구를 기증한다는 유서를 남겼다. 이에 따라 27세 된 젊은 청년이 눈을 뜨게 되었다. 음성에서 많은 품바를 만나게 된다. 거지 성자 최귀동 할아버지가 최초의 음성 품바는 아닐까. 타령을 하실 줄 아는지는 몰라도 그는 분명 나눔과 사랑을 실천한 진정한 음성 품바 인이다. 품바 행사 구경만 하고 돌아오는 것보다 음성 품바의 축제가 전국에서 많은 관광객이 모이는데 충북인으로 음성 품바 축제의 대에 다른 지역 주민보다 이제라도 더 깊히 사랑하며 애정을 가져보는 마음을 함께하자. 군민신문 권태훈 취재 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