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직면
수행의 계위
이에 청정혜보살(淸淨慧菩薩)이 대중 가운데 있다가 곧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 발에 정례하며 오른쪽으로 세 번 돌고 무릎을 세워 꿇고 합장하고서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대비하신 세존께서 저희들을 위하시어 널리 이같은 불가사의한 일을 설해 주시니, 본래 보지 못한 바이며 본래 듣지 못한 바입니다. 저희들이 이제 부처님의 간곡하신 가르침을 받고 몸과 마음이 태연하여 큰 요익을 얻었습니다. 원하오니 이 법회에 온 일체 대중들을 위하여 법왕의 원만한 각성(覺性)을 거듭 말씀해주소서. 일체 중생과 모든 보살들과 여래 세존의 증득하는 바와 얻는 바가 어떻게 차별합니까? 말세 중생들로 하여금 이 성스러운 가르침을 듣고 수순 개오하여 점차 능히 들어가게 하소서."
이렇게 말하고는 오체투지하며 이와 같이 세 번 거듭 청하였다.
(<원각경 > ‘제6. 청정혜보살장’
- ‘서재영의 불교 기초 교리 강좌’에서)
1. 또 나는 힘센 다른 천사 하나가 구름에 싸여서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의 머리 위에는 무지개가 둘려 있고, 그 얼굴은 해와 같고, 발은 불기둥과 같았습니다.
2. 그는 손에 작은 두루마리 하나를 펴서, 들고 있었습니다. 그는 오른발로는 바다를 디디고, 왼발로는 땅을 디디고 서서,
3. 마치 사자가 울부짖듯이 큰 소리로 부르짖었습니다. 그가 부르짖으니, 일곱 천둥이 각각 제 소리를 내면서 말하였습니다.
4. 그 일곱 천둥이 말을 다 하였을 때에, 나는 그것을 기록하려고 하였습니다. 그 때에 나는 하늘로부터 나오는 음성을 들었는데, "그 일곱 천둥이 말한 것을 인봉하여라. 그것을 기록하지 말아라" 하였습니다.
5. 그리고 내가 본 그 천사, 곧 바다와 땅을 디디고 서 있는 그 천사가 오른손을 하늘로 쳐들고,
6. 하늘과 그 안에 있는 것들과 땅과 그 안에 있는 것들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것들을 창조하시고, 영원무궁 하도록 살아 계시는 분을 두고, 이렇게 맹세하였습니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
7. 일곱째 천사가 불려고 하는 나팔 소리가 나는 날에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종 예언자들에게 전하여 주신 대로, 하나님의 비밀이 이루어질 것이다."
8. 하늘로부터 들려 온 그 음성이 다시 내게 말하였습니다. "너는 가서, 바다와 땅을 밟고 서 있는 그 천사의 손에 펴 있는 작은 두루마리를 받아라."
9. 그래서 내가 그 천사에게로 가서, 그 작은 두루마리를 달라고 하니, 그는 나에게 말하기를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것은 너의 배에는 쓰겠지만, 너의 입에는 꿀같이 달 것이다" 하였습니다.
10. 나는 그 천사의 손에서 그 작은 두루마리를 받아서 삼켰습니다. 그것이 내 입에는 꿀같이 달았으나, 먹고 나니, 뱃속은 쓰라렸습니다.
11. 그 때에 "너는 여러 백성과 민족과 언어와 왕들에 관해서 다시 예언을 하여야 한다" 하는 음성이 내게 들려 왔습니다.
-(<요한계시록> 10장)
오늘 원각경에서 “본래 보지 못한 바이며 본래 듣지 못한 바입니다.”를 보자.
글쓰기는 자못 이래야 한다. 어떻게 해야 가능할까? 일단 자기가 보고 들은 것을 끊임없이 써야 한다. 그러다 보면 똑같이 쓰기를 꺼려하게 된다. 반복이 싫증나기 때문이다. 발전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새로운 표현들이 생겨난다. 괜찮으면 예술이 되고 그렇지 않으면 억지가 된다. 괜찮다는 준거는 무엇일까? 인간의 본성을 잘 건드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본성은 무엇일까? 규정될 수 없다. 그 무한의 세계를 문자로 드러내는 것 역시 무한의 세계이다. 마지막으로 이미 드러난 무한의 세계는 어떻게 인식할 수 있을까? 기존 텍스트를 열심히 읽는 것, 즉 독서이다. 그래서 글쓰기 원리는 간단하다. 그런데도 왜 실천이 잘 안 될까? 거기서부터 인간의 본성에 대한 물음은 또 시작된다.
오늘 요한계시록에서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를 보자.
비장한 문장이다. 심적으로 위축되는 문장이다. 그 때를 위하여 뭔가를 해야 할 것 같은데 자발적으로 하는 것보다 시키는 대로 해야 할 것 같다. 수동을 요구하는 능동에서 어떻게 능동성을 이끌어낼 것인가? 이를 두고 자유의지라는 딱지를 붙였을까? 피조물의 운명들이 참으로 가혹하다.
장석주의 <은유와 힘>을 보자.
[“화분을 키우고 소리 내어 점을 친다 그리하여 당신이 모르는 일을 알게 된다 죽지 않는 법을 익히고 항상 그래왔다 믿는다 맨 처음 식물이 죽던 날 이유를 몰랐다 왜 죽었을까? 나 때문일까 죽어가는 식물에게 물을 주고 남은 목을 축이는 일 모자란 햇빛이 그늘을 넓히는 일 밤에는 화분을 옮기고 커튼을 친다 누군가 구둣발로 오줌을 누었다 창문을 두드리는 오줌 줄기 어떤 노래를 들으면 지린내가 나는 일 귀를 막고 숨을 참는 일 죽는다 안 죽는다 산다 못 산다 병든 잎을 떼어내면서 낮에는 화분을 들고 산책을 한다 맑고 따뜻한 날씨의 감정을 간직하려고 보드라운 구름의 생각을 따르면서 그러다 보면 그늘에서 쉬어가는 일도 그 중에 좋아하는 그늘이 생기는 일도 조금 더 자라면 분갈이를 해줄게 봐둔 게 있어 그리고 나도 집을 옮기게 되겠지 발코니가 있었으면 좋겠다 죽은 화분을 버리고 돌아오던 날 바로 거기서부터다 나는 당신이 모르는 일을 많이 했다. - 유진목, ‘식물의 방’ 전문
‘식물의 방’은 반지하 방에서 살며 식물을 키우는 이의 소소한 경험을 바탕으로 씌어진다. 이때 중심을 꿰뚫고 지나가는 것은 현실과 꿈의 어긋남에서 빚어지는 슬픔이다. 시의 화자는 화분을 키우고 점을 치며 산다. (중략) 잘 산다는 것은 주어진 세계에 피동적으로 존재하기가 아니라 그것을 넘어섬, 즉 초월적 기투다. 반지하 방에서 발코니가 있는 지상의 집으로서의 이사는 지하에서 지상으로, 그늘에서 빛으로, 죽음에서 생명에로 나아가는 향일성의 무의식적 욕망과 초월적 기투를 드러낸다. 그런 맥락에서 이 시는 햇빛의 생명 정치학, 향일성의 시학을 펼쳐내고 있는 셈이다.]
발코니가 있는 아파트에 살면서 아주 작은 다육식물도 죽인 나는 어떤 생명관을 가지고 있는 걸까? 게으름이 전부이다.
헤세의 <싯다르타>를 보자.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던 그 사색자는 이러한 생각에 사로잡혀 멈추어 섰다. 그러나 바로 그 자리에서 즉각 이 생각으로부터 벗어나 어떤 다른 생각이, 다음과 같은 내용의 새로운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다. ‘내가 나 자신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것, 싯다르타가 나에게 그토록 낯설고 생판 모르는 존재로 남아 있었다는 것, 그것은 한 가지 원인, 딱 한 가지 원인에서 비롯된 것이다. 나는 나를 너무 두려워하였으며, 나는 나로부터 도망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 아트만을 나는 추구하였으며, 바라문을 나는 추구하였으며, 자아의 가장 내면에 있는 미지의 것에서 모든 껍질들의 핵심인 아트만, 그러니까 생명, 신적인 것, 궁극적인 것을 찾아내기 위하여, 나는 나의 자아를 산산조각 부수어버리고 따로따로 껍질을 벗겨내는 짓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면서 나 자신이 나한테서 없어져 버렸던 것이다.]
위 글에서 “나는 나를 너무 두려워하였으며, 나는 나로부터 도망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를 보자.
이 문장을 내 생각으로 바꾸어보자.
“나는 나를 너무 자학하였으며, 나는 나를 직면하기 위해서 참으로 노력하였다.”
실제로 나는 이런 노력을 기울였고, 그로 인해 스스로 과대평가한 나를 끌어내리며 안정된 마음을 찾아가고 있다. 그래서 나는 자아실현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고 자기직면이 중요하다고 본다. 흐름을 만들어가는 자신이 어떤 시공간에서 어떤 일들을 만들어 가는지, 그 파악이 삶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나는 나보다 나아 보이는 사람들에 대한 질투와 시기를 여전히 가지고 있으며, 언젠가 나도 그런 위치에 서고 싶다는 욕망을 꺾지 않고 있다. 하지만 그런 곳에 서 있지 못해도 나를 크게 탓하지 않는다. 그 몽롱한 욕망의 경계에서 아슬아슬 나를 건너가게 한다. 그게 현 내 삶이다.
오늘도 게송으로 마무리하자.
자기 직면이란 무엇일까?
한 달 수입, 가지고 있는 재산,
도움을 얻을 수 있는 네트워크
그것으로 내가 어떤 것을 할 수 있고
그것으로 내가 어떤 것을 누릴 수 있고
그것으로 내가 어떤 것을 베풀 수 있는지
일원 단위조차 아는 것이다
자기 직면이란 무엇일까?
내 능력으로
무얼 할 수 있는지
무얼 할 수 없는지
자구 하나까지 아는 것이다
자기 직면이란 무엇일까?
자기를 과대 평가하지 말고
흐르는 삶에 감사하며
사는 것이다
자기 직면이란!
아, 내 책상 앞 다육식물이 죽어가고 있구나!
이를 슬퍼하면서도 살리지 않는 게으른 통찰이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