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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324
3월4일 [사순 제1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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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우리가 손가락질 받으며 살아간다면,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욕되게 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가장 잘 나가던 시절이 있었으니, 솔로몬(BC 971~931)이 왕좌에 앉아 있을 때였습니다. 주님을 향한 신앙 뿐 아니라, 탁월한 리더십, 건축과 예술에 대한 깊은 조예 등등, 솔로몬 왕은 뭐 하나 빠지는 게 없던 사람이었습니다. 열왕기에 따르면 그는 잠언을 3천 개나 지었으며, 천 다섯 편이나 되는 노래를 만들었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특별한 지혜와 뛰어난 분별력과 넓은 마음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따라서 주변의 많은 임금들이 솔로몬의 지혜에 대해 칭송했고 배우고자 애를 썼습니다. 특히 남쪽에 위치한 스바의 여왕은 솔로몬 왕을 한번 만난 뒤로 열혈팬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실 그녀가 솔로몬을 찾아온 최초의 이유는 따로 있었습니다. 솔로몬이 정말 항간의 소문대로 지혜로 충만한 사람인가 시험해보고자 했던 것입니다.
풀기 어려운 문제들을 잔뜩 준비해온 그녀는 마침내 퀴즈 보따리를 솔로몬 앞에 잔뜩 풀어놓았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문제를 내는 족족 그 자리에서 정답을 알아맞추었습니다. 솔로몬의 탁월하고 비상한 지혜 앞에 스바의 여왕은 감탄사를 연발하며 칭찬에 칭찬을 거듭했습니다.
“임금님의 지혜와 영화는 내가 소문으로 듣던 것보다 훨씬 더 뛰어납니다. 언제나 임금님 앞에 서서 임금님의 지혜를 듣는 이 신하들이야말로 행복합니다. 주 임금님의 하느님께서 임금님의 마음에 드시어 임금님을 이스라엘 왕좌에 올려 놓으셨으니 찬미 받으시기를 빕니다.”(1 열왕기 10장 7~9절)
놀랍게도 스바의 여왕은 자신이 가져온 금 120 탈렌트, 오늘날 단위로 환산하면 약 4톤의 금과 엄청난 양의 향료, 보석들과 당시 최고급 목재로 손꼽히던 자단나무도 내려놓았습니다. 스바의 여왕은 비록 이방인이었지만 착하고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녀는 솔로몬의 지혜로움을 감탄하면서도, 그 지혜가 인간으로부터 온것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확신했습니다. 그녀는 하느님의 성령께서 솔로몬의 입을 통해 말씀하신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지혜로 충만한 솔로몬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느님을 만나뵌 스바의 여왕이었기에 위험으로 가득찬 장거리 여행이 조금도 피곤하지 않았습니다. 가지고 온 값진 선물들을 하느님께 드린다는 마음으로 기꺼이 내려놓았습니다. 솔로몬을 통해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 들은 것을 큰 기쁨이요 은총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여기 솔로몬보다 몇 천 배, 몇 만 배 더 지혜로운 분이 계십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찬란한 태양빛이시라면 솔로몬은 작은 랜턴 불빛밖에 되지 않는 존재였습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너무나도 당연히 넘치는 열정과 큰 기쁨으로 예수 그리스도께로 몰려와야 하고, 그분의 말씀을 경청해야 하고, 그분을 찬미 찬양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자신들 가까이 다가오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보여준 태도는 어땠습니까? 무관심을 넘어 배척, 시험, 증오였습니다. 선택받은 민족 이스라엘의 냉대와 적개심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고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런 연유로 동족들을 향한 예수님의 말씀에는 강한 날이 서있습니다.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 사람들과 함께 되살아나 이 세대 사람들을 단죄할 것이다. 그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끝에서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루카 복음 11장 31절)
어쩌면 오늘 복음 말씀은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을 향한 강력한 경고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인으로 살아가지만 비신앙인보더 훨씬 초라하고 남루한 삶, 부끄럽고 죄스런 삶을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늘 자신을 돌아봐야겠습니다. 요즘 뉴스의 촛점이 되고 있는 사이비 교주들과 추종자들의 부끄러운 모습을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야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지탄받고 손가락질 받으며 살아간다면,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욕되게 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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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자신을 부정하기를 원치 않으면 표징이 소용없다>
코로나19의 20대 확진자가 53명에서 일주일새 1,235명으로 폭증하였습니다. 이렇게 된 이유에는 신천지 신도 중 상당수가 20대이기 때문입니다. 30대부터는 40대, 50대, 60대 대부분 확진자가 약 500명 수준인 것을 보면 젊은이에 대한 신천지의 영향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습니다. 아무리 봐도 젊은 대학생들이 그런 곳에 빠져서 가출까지 해가며 신천지를 위해 사력을 다하는 모습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도 하느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이와 비슷한 삶을 살았습니다. 지금까지의 삶을 부정할 수 없어 옛 삶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이비에 빠진 사람은 자신이 사이비에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젠 쪽팔려서 못 나가!”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럴 때는 아무리 많은 표징을 줘도 소용이 없습니다.
신천지에 있다가 가까스로 빠져나온 사람들은 자신들의 그 이전의 삶을 영화 “트루먼쇼”와 비교합니다. 트루먼쇼는 트루먼이라는 아기가 태어날 때부터 한 섬에 마련된 아주 큰 세트에서 자랍니다. 자기 외에는 모두 연기자들입니다. 부모도, 형제도, 친구도, 직장동료들도 다 연기자들인 것입니다. 그러니 성장해서도 그 삶이 진실인줄 압니다. 도처에 그 모든 것이 가짜라는 표징이 있고 누군가 그 삶이 속는 것이라고 말해주어도 지금까지 살아온 자신의 삶을 온통 부정할 수가 없어서 그냥 그 표징들을 무시합니다. 과거의 자신을 부정할 수 없는 사람에게는 표징이 필요 없습니다.
신천지에서 나온 한 청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천지 교회에 입성하기 전 센터 교육을 마쳐야 하는데 7개월 동안 주5일로 진행됩니다. 그 외에도 계속 다양한 활동이 생기기 때문에 친구들에게는 못 만난다며 거짓말을 하게 됩니다. 정신 차리고 보면 신천지 관련인 말고는 주변에 아무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 신천지에서 나오려면 큰 결단력이 있어야 합니다. 자기가 수년간 쏟은 노력을 모두 부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참조: ‘확진자 30%가 20대. 그들은 왜 신천지에 빠졌나’, 박고은 기자, 노컷뉴스, 2020.03.03]
예수님은 “표징을 요구”하는 세대가 “악한 세대”라고 정의하십니다. 악하다는 이유는 변하려고 하지 않으면서 표징이 없어서 변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핑계대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자신을 부정하려고 하지 않으면서 하느님께 “당신이 나에게 해 준 것이 무엇입니까?”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사람이 악해지는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을 부정하고 싶지 않으면서 다른 핑계만 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요나는 물고기 속에서 사흘을 버티다 나와 니네베 사람들에게 회개를 선포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그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들은 단식을 선포하고 자루 옷을 입고 잿더미 위에 앉아서 용서를 바랐습니다. 무슨 용서를 바랐던 것일까요? 자금까지 자신 맘대로 살아온 것에 대한 용서입니다. 이들은 지금까지의 자신들의 모습을 부정할 용기가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솔로몬의 지혜를 배우기 위해 찾아온 남방 여왕의 예도 드십니다. 그녀는 솔로몬의 지혜를 배우기 위해 매우 먼 걸음을 했습니다. 그만큼 시간과 비용을 투자했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비록 한 왕국의 여왕이지만 그 삶으로 만족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지혜를 가진 사람을 찾아와 자신의 삶도 그 지혜를 가진 사람답게 변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솔로몬보다 크시고 요나보다 크신 분이십니다. 그런데도 계속 표징을 요구하는 것은 표징이 없어서가 아니라 변하기를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악한 것입니다. 나로 살아가는 것이 고통이고 주님께 순종하여 사는 것이 행복이라는 표징은 찾으려고만 하면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찾을 수 있습니다.
저는 신학교에 늦게 들어갔습니다. 25살 이전까지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신학교에 입학하여 1학년이 시작하기 전에 피정을 하는 도중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기억나는 모든 것을 써보라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태어날 때부터 주님은 멈추지 않으시고 저를 부르시고 계셨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만 제가 돈 많이 벌고 결혼하는 것을 행복으로 믿고 살았기 때문에 그 목소리를 거부하고 있었던 것뿐입니다. 그리고 가끔 부르심을 느낄 때는 표징을 요구하기도 하였습니다. 지금의 삶이 행복이라고 느끼는 사람들에게는 어떠한 표징도 소용이 없습니다. 이것이 악한 것입니다. 자기를 부정하고 그리스도로 사는 것이 행복으로 여겨지기 전까지는 우리도 끊임없이 표징을 요구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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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가 11,29-32 : 요나의 기적밖에는 따로 보여줄 것이 없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의 기적에 대한 요구를 단호하게 거절하신다. 그리고는 요나의 기적 하나만 주시겠다고 한다. 요나의 기적을 보여주시겠다는 이 말은 무슨 뜻일까? 그것은 요나가 기적적으로 살아서 니네베에 나타났던 것처럼, 예수님도 기적적으로 부활하여 종말론적 사람의 아들로 나타나는 표징을 주시겠다고 하시는 것이다. 왜 예수님은 그들이 요구하는 기적을 거절하셨을까?
요나의 표징은 예수님 안에서 완성된 수난과 부활을 나타낸다.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이들에게는 생명이 주어지겠지만,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죽음이 있을 뿐이다.요나의 표징이 이렇게 니네베 사람들에게 두 가지 면으로 도움이 되었다. 만일 그들이 요나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더라면, 요나처럼 산 채로 저승에 갔을 테지만, 회개했기 때문에 요나처럼 죽음에서 살아날 수 있었다. 즉 주님의 경우에도 사람들은 그분의 죽음을 통해서 살거나 그분의 죽음을 통해서 죽는다는 것이다.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 사람들을 단죄할 것이다.”(31절) 이 여왕은 교회의 모습이다. 남방 여왕이 솔로몬에게 왔듯이 교회는 주님께 왔고, 지나가 버리고 말 세상의 지혜와 죽을 수밖에 없는 임금을 보고자 했던 남방 여왕이 회당을 단죄한다면 영원한 지혜와 영원히 사시는 임금을 사모하는 교회는 얼마나 무섭게 이 믿지 않는 세대를 단죄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예수님은 역사상의 인물인 시바의 여왕과 니네베 사람들을 예를 들어 정신을 차리라고 경고하신다.솔로몬 왕 때, 시바의 여왕은 하느님의 지혜를 드러내는 솔로몬의 소문을 듣고는 먼 길을 여행하여 지혜를 배우고자 찾아왔으며, 니네베 사람들은 요나의 설교를 한번 듣고 즉시 왕으로부터 짐승에 이르기까지 단식재계를 했었음을 상기시켜 주신다.
시바의 여왕이나, 니네베 사람들은 하느님께 선택받은 백성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방인들이었다. 이 이방인들이 솔로몬의 지혜와 요나의 설교를 경청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있던 하느님께 선택받았다고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솔로몬보다, 요나보다 더 훌륭한 현자이며 예언자이신 예수님의 말씀과 기적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죄인가를 일깨워 주신다.
예수님의 이 경고는 바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무서운 말씀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우리가 바라고 하느님께 청해야할 기적이 있다.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이 변화되는 기적이다. 이 세상이 모두 변화되고 그야말로 기적이 일어난다 해도 그 기적을 알아볼 수 있도록 내 눈이 바뀌지 않으면 그것은 기적이 있지만 기적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기적을 보여 달라고 하면서 기적을 볼 수 없다면 그 기적은 항상 없는 것이다. 이제 바로 내가 사랑할 수 있고 또 다른 사람들로부터 사랑 받으며 살아가는 나 자신으로 변화될 수 있는 기적을 청하며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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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교무부처장)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오늘의 묵상
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요나 예언자는 독특한 인물입니다. 예언자로 부름을 받은 요나는 하느님을 피하여 도망치지만 결국 니네베에 가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그 과정에서 요나는 큰 물고기의 배 속에서 사흘 밤낮을 보내며 회개합니다. 그리고 니네베에 가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며 회개하라고 외칩니다.
니네베 사람들의 반응은 요나의 반응과 대조적입니다. 사십 일이 지나면 멸망한다는 요나의 외침에 모든 사람이 곧바로 죄를 뉘우치고 회개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내릴 재앙을 거두십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요나는 예수님을 예시하는 역할을 한다고 여겼습니다. 물고기 배 속에서 사흘 동안 갇혀 있던 시간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암시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꽉 막혀 도무지 회개하지 않고 복음을 믿지 않으려는 사람들을 안타까워하시며 요나 예언자를 상기시키십니다. 하느님을 피하여 도망쳤지만 결국 뉘우치고 돌아온 요나 예언자, 또 그의 선포를 진심으로 받아들여 지체 없이 회개하고 구원을 청하였던 니네베 사람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요나의 표징은 바로 회개입니다. 가던 길에서 하느님의 길로 돌아오고, 생각을 바꾸어 자신의 생활 방식을 버리고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것이 회개입니다.
회개를 위해서는 엄청난 기적이나 대단한 표징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믿음 안에서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을 따르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회개는 단죄나 하느님의 진노를 두려워하라는 것이 아니라 구원으로의 초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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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요나의 표징 - 회개하라는 표징>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구세주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지만, 예수님께서 구원하시려고 하는 그 사람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고(요한 1,10), 믿지 않았고, 구세주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표징을 보이라는 요구만 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아무런 표징이 없었어도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곧바로 알아보고 믿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루카복음에 나오는 ‘시메온’과 ‘한나’가 대표적인 인물입니다.(루카 2,25-38) 물론 시메온과 한나가 순전히 자신들의 능력만으로 예수님을 알아보고 믿은 것은 아닙니다. 복음서를 보면, 그들은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예수님을 알아보고 믿었습니다.(루카 2,27) 그렇다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사람들은 성령의 인도를 못 받아서 그랬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 누구는 성령의 인도를 받고, 누구는 그 인도를 못 받았을까? 루카복음서 저자는 시메온이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린” 사람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루카 2,25) 그리고 한나는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긴” 사람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루카 2,37) 성령의 인도를 받으려면 받을 준비를 잘하고 있어야 합니다. 단순하게 말하면, 시메온과 한나처럼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구세주를 맞이할 준비를 잘하고 있었던 사람들은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예수님이 구세주라는 것을 알아보았고, 믿었습니다. 반면에 아무런 준비도 안 하고 있었던 사람들은, 즉 하느님 뜻에 합당한 신앙생활도 하지 않고, ‘회개하는 삶’을 살지도 않고, 자기들 마음대로 살고 있었던 사람들은, 성령의 인도를 받을 수가 없었고, 그래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들 자신들이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 탓도 아니고, 성령 탓도 아니고, 그들 자신들의 탓입니다.)
유대인들 경우는 그렇고, 종교와 신앙 없이 살다가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의 경우에는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선한 생활을 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선을 알아보고, 사랑 실천을 잘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사랑을 알아본다. 그리고 그 사람 안에 가득한 선과 사랑이 그를 구세주 예수님에게 인도해 준다.” 이 말을 반대로 표현하면, “악한 생활을 하면서, 사랑 없이 사는 사람은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을 받아도 받았다는 것을 모른다.” (선이 선을 알아보게 하고, 사랑이 사랑을 알아보게 합니다.) 이미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의 경우에는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신앙인이라도, 죄를 짓고 나서 회개하지 않으면 예수님에게서 멀어지게 되고, 사랑 없이 이기적으로 살면 예수님의 사랑을 잃어버리게 된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루카 11,29-30)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루카 11,32)
이 말씀은, 예수님을 믿으려고 하지는 않고, 메시아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표징을 보이라고 예수님께 요구하기만 하는 사람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그냥 꾸짖기만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믿고 회개해서 구원을 받으라고 타이르시는 말씀입니다.) ‘요나 예언자의 표징’이라는 말은, 요나 예언자가 사흘 낮과 사흘 밤을 큰 물고기 배 속에 있다가 살아난 일을 가리키는 말입니다.(요나 2,1-11) 또는, 요나 예언자의 선포를 듣고서 니네베 사람들이 회개한 일을 가리키는 말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표징’이라는 말에는, “믿고 회개하면 구원을 받고, 안 믿고 회개하지도 않으면 구원받지 못하는 표지판”이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여기서 표징이라는 말은, “‘구원의 길’과 ‘멸망의 길’로 갈라지는 갈림길에 서 있는 신호등”과 같은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니네베 사람들은 갈림길에서 요나 예언자라는 신호등이 가리키는 대로 구원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요나서를 보면, 요나 예언자가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라고 선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요나 3,4), 실제 선포는 “회개하지 않으면, 사십 일 뒤에 니네베는 무너진다!”였을 것입니다. 그 선포는 니네베의 멸망이 확정되었다는 선포가 아니라, 회개하지 않으면 그렇게 된다는 선포였다는 것입니다.>
또 요나서를 보면, 요나 예언자의 선포를 들은 니네베 사람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하느님을 믿은 일이었습니다.(요나 3,5) 그들은 단식과 회개를 하기 전에 먼저 하느님을 믿는 일부터 했습니다. (믿음도 없이 그저 멸망을 피하려고 단식하고 회개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믿었기 때문에, 하느님의 자비도 믿었고(요나 3,9), 그 믿음 속에서 단식하고 회개했습니다. 그들은 또 단식과 회개만 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악한 삶을 버렸습니다.(요나 3,8) (겉으로만 회개를 한 것이 아니라, 삶 전체를 변화시켰습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라는 말씀은, “니네베 사람들이 요나의 선포를 듣고 회개해서 멸망을 피할 수 있었던 것처럼, 죄 속에서 살고 있는 이 세대 사람들도 나의 복음을 받아들여서, 믿고, 회개하면,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나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가 됩니다.)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라는 말씀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 회개하지 않은 것은 죄라고, 니네베 사람들이 심판 때에 증언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지시대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기만 하는 심부름꾼이지만, 구세주 예수님은 사람들을 구원하거나 구원하지 않을 권한을 가지고 계신 분이기 때문에 “요나보다(예언자들보다) 더 큰(위대하신) 분”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면서,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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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장재봉 스테파노 신부님]
<시대의 표징>
‘시대의 표징’이라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그것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통해서 이 세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알려 주고자 하는 하느님의 참된 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이를 깨닫고 이에 응답하여 실현해 나가는 사람이 예언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바쁜 일상 속에서 세상과 이웃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노력해야 합니다. 보잘것없는 찬으로 식사하는 가정과 최악의 식량난 속에 있는 북한 가정들과 아프리카 가정들의 소식을 접하면서 그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을 생각했다면 시대의 표징을 본 것입니다. 끝날 줄 모르는 전쟁 속에서 무수한 민간인과 군인들의 소식을 들을 때 나의 가족들을 한 번 돌아보며 마음이 안타까운 순간들이 있었다면 시대의 표징을 본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마음은 매일 나의 주변과 이웃을 통해서 보여지는 많은 시대의 표징들 가운데서 지내고 있습니다.
내 마음에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이들의 고통을 한순간의 의식으로 흘려 보내지 않고 마음에 간직한다면 그것으로 나는 시대의 표징을 얻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가슴에 간직된 시대의 표징들은 우리를 하느님의 정의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무엇을 어떻게 할지 우리 가슴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예언자는 하느님 앞에서 늘 자기 가슴속을 들여다보며 사는 사람입니다. 요나는 미천한 자신의 힘으로 니네베가 구원되리라 믿지 못해서 도망갔다가 잡혀왔습니다. 그러나 그 작은 외침에 한 도시가 구원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의 복음을 온 세상에 외친다면 얼마나 커다란 구원이 일어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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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님]
요나 예언자에 대해 묵상할 때마다 난 유아기적 망상에 빠져든다. 요나 예언자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외치는 모습보다는 큰 물고기의 뱃속에 사흘 낮과 사흘 밤을 기도하며 지내는 모습을 꼭 그려보게 된다.
물론 이제껏 살아오면서 내가 본 가장 큰 물고기는 ‘고래’였으니 고래 뱃속에서 하느님께 기도하는 요나의 모습을 말이다. 그리고 스스로 묻는다. ‘가능할까?’
어린 시절부터 어른이 될 때까지 사람과 고래의 모습을 함께 그려볼 수 있도록 영향을 준 것은 비단 요나의 기적만은 아니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그리고 멜빌의 「백경」이 있었다.
“인간은 패배하려고 태어난 것은 아니다. 그래, 희망을 버린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지.”
고래를 잡기 위해 상어 떼와 사투를 벌이는 노인에게선 희망을 잃지 않는 불굴의 의지를 보았고, 반면 ‘모비딕’이라는 흰 고래에게 오른쪽 다리를 잃은 에이허브 선장에게선 복수심 때문에 꿈도 희망도 아닌 절망의 뒤안길로 그 고래와 사라지는 모습을 보지 않았던가. 요나의 고래에선 불신에서 돌아선 나약한 인간의 ‘회개’를 본다.
“구원은 주님의 것입니다. …하느님께 힘껏 부르짖어라. 저마다 제 악한 길과 제 손에 놓인 폭행에서 돌아서야 한다.”(요나 2,10- 3,8)
사람의 아들, 예수께서도 우리에게 또 하나의 표징으로 당신을 드러내신다. 메시아의 기적을 통해 사적인 흥미와 자기 중심적 이익에만 급급한 사람들에겐 절망의 표징일 것이고, 매일 미사성제 안에서 빵과 포도주로 당신을 드러내시는 예수님께 자신을 내맡기는 이들에겐 희망의 표징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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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백남해 요한보스코 신부님]
<오만한 기적>
퇴근해서 기숙사로 돌아오면 방문을 열기 전에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조그맣게 ‘야옹’ 하는 소리가 들리면 흐뭇한 마음으로 문을 엽니다. 귀여운 야옹이가 다리 사이를 오가며 얼굴을 비벼 댑니다. 문 앞에 앉아서 기다리는 것을 보면 주인을 알아보는 것도 같습니다.
그러나 간식거리를 밥통에 담아주면 언제 그랬냐는 듯 먹는 데 열중합니다. 아무리 부르고 옆에서 집적거려도 본체만체합니다. 슬그머니 부아가 치밀어 오릅니다. 간식을 주는 사람은 무시하고 간식 자체만 탐식하다니 역시 고양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현대를 기적이 필요 없는 시대라고 합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기적 없이 사람의 힘, 과학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과학이 가져다준 물질의 풍요로움만으로는 행복해질 수 없음을 깨닫는 사람이 많아집니다. 그래서 더욱 하느님께 깊이 안기는 신심 깊은 신앙인들을 만나게 됩니다.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이런 하느님을 갈구하는 신앙을 악용하는 잘못된 신심이 생기기도 합니다. 신앙인의 선의를 악용하여 교회가 금하는 행위를 서슴없이 저지르고 과대광고를 하기도 합니다. 이런 과대선전의 한 방법으로 이른바 ‘기적’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성모상에서 눈물이 흐르고, 성체가 하늘에서 떨어지기도 합니다. 분위기와 군중심리에 의해 사람들은 마술처럼 꾸며진 ‘거짓 기적’을 믿게 됩니다. 시간이 지나면 믿는 차원을 넘어서 열렬한 신봉자가 되고, 스스로 전도자가 되어 다른 사람들을 끌어들이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정작 우리가 믿고 따라야 할 분은 한 분이신 하느님임을 잊고 ‘거짓 기적’을 보여주는 사이비 교주를 믿고 따르게 됩니다. 그야말로 간식을 주는 주인은 모르고 간식 그 자체에만 매달리는 고양이와 같아집니다.
기적을 베푸시고, 신앙인을 구원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구원과 기적의 하느님께 신앙인을 올바로 이끄는 역할은 오롯이 교회에 맡겨졌습니다. 교회에 순명하지 않고 ‘거짓 기적’으로 사람들을 현혹하는 자는 하느님보다 자신이 더 크다는 오만에 빠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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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뉴욕에 오기 전에 명동 교구청에서 5년 동안 있었습니다. 미사가 없는 명동성당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픕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미사가 있는 명동성당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명동성당을 찾는 많은 사람들이 계단에서, 성당 마당에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관광객도 있을 것이고, 순례를 오신 분도 있을 것입니다. 언덕 위에 위치한 명동 성당은 아름답고, 둘러볼 곳도 많았습니다. 계단을 올라오면 중간쯤에 성모 동산이 있습니다. 밖에서는 잘 보이지 않지만 조용히 기도하는 분들을 볼 수 있습니다. 성인들의 유해가 모셔진 지하성당이 있습니다. 성당 뒷마당에도 성모상이 있습니다. 그곳에서도 기도하는 분들을 볼 수 있습니다. 본 성전도 아름답습니다. 제단을 바라보며 기도하는 분들을 볼 수 있습니다.
명동성당의 또 다른 모습이 있습니다. 지치고 외로운 사람, 억울한 사람, 불의에 항거한 사람, 부당한 폭력을 피해서 도망친 사람들이 찾는 곳입니다. 지금은 거리의 광장에서 촛불을 들고 자유롭게 이야기하지만 예전에는 명동 성당이 피난처와 같았습니다. 어둠 속의 등불이었고, 독재 권력에 맞서는 사람들이 의지하는 곳이었습니다. 그것은 명동 성당이 만들어 낸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이 찾아왔고, 명동 성당은 받아 주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께서는 이렇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이 젊은이들을 잡아가기 전에 먼저 나를 잡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 뒤에 사제들이 있고, 수도자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젊은이들을 잡아가시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회개하지 않으면, 악한 길에서 돌아서지 않으면 하느님이 자비가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오늘 제1 독서에서 요나는 니네베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선포하였습니다. 니네베 사람들은 요나의 말을 듣고 악한 길에서 돌아와 회개하였습니다. 단식을 선포하였고, 자루 옷을 입었습니다. 니네베의 임금도 동참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악한 길에서 돌아서는 모습을 보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마음을 돌리시어 그들에게 내리겠다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살기를 바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그릇된 길에서 돌아오기를 바라십니다. 그렇게만 하면 하느님의 자비가 강물처럼 흘러넘치십니다.
사제를 ‘제2의 그리스도’라고 이야기 합니다. 물론 세례를 받은 분들도 ‘제2의 그리스도’입니다. 지금 나의 모습이 어떻게 드러나는지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우리들의 모습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느끼면 좋겠습니다. 명동 성당이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표징이 되었듯이, 우리들의 말과 행동이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표징이 되면 좋겠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너그럽고 자비로우니 이제 마음을 다하여 나에게 돌아오너라. 하느님께 드리는 제물은 부서진 영. 부서지고 뉘우치는 마음을, 하느님, 당신은 업신여기지 않으시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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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돌아오라 사랑하는 사람아>
루카 11,29-32 (요나의 표징)
그때에 군중이 점점 더 모여들자 예수님께서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 사람들과 함께 되살아나 이 세대 사람들을 단죄할 것이다. 그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돌아오라 사랑하는 사람아>
돌아오라
사랑하는 사람아
하느님의 품에로
돌아오라
사랑하는 사람아
깨끗한 믿음에로
돌아오라
사랑하는 사람아
새하얀 희망에로
돌아오라
사랑하는 사람아
아낌없는 사랑에로
돌아오라
사랑하는 사람아
살리는 정의에로
돌아오라
사랑하는 사람아
티 없는 진실에로
돌아오라
사랑하는 사람아
아우르는 품에로
돌아오라
사랑하는 사람아
뜨거운 가슴에로
돌아오라
사랑하는 사람아
하느님 닮은 자신에로
돌아오라
사랑하는 사람아
하느님의 품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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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표징을 요구하는 세대를 비판하시며 한탄하십니다.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님께서 직접 세상에 오시어 구원의 소식을 선포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당신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지 않고 표징만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예수님은 율법에 얽메이지 않고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는 메시아, 가진 것 없는 이들과 함께 하시는 메시아셨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메시아가 당시 유다인들이 원하는 모습이 아니었음에 있었습니다. 그들이 원했던 메시아는 로마의 억압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키는 메시아, 타민족을 정복해 지배권을 얻게 하는 메시아, 젖과 꿀이 흐르는 현세의 지상 낙원을 실현시켜주는 메시아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예수님께 그들이 원하는 표징을 자꾸만 요구했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표징은 보잘 것 없는 이들에 대한 사랑 혹은 미래의 구원이 아닌, 현실의 목마름을 당장 해결해 줄 수 있는 세속적인 기적이었습니다.
이러한 와중에서도 예수님은 묵묵히 온 인류를 죄악에서 구원하고자 사랑의 징표를 보여주셨으며 이를 뒷받침하고 증명해주는 여러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그런데도 영원한 것을 찾기보다는 현세적인 것에 눈이 어두워진 그들은 그 뜻을 못 알아듣고 외면해 버립니다. 이에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남방 여왕과 니네베 사람들을 상기시키십니다. 남방 여왕은 하느님의 지혜를 받고자 땅 끝에서 솔로몬을 찾아 온 사람이며 니네베 사람들은 오늘 독서에 나오듯 쾌락과 세속에 빠져있었으나 요나 예언자의 설교를 단 한 번만 듣고서도 회개한 이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솔로몬과 요나에 비할 수 없는 권능을 가지신 하느님의 아들이 직접 이 세상에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을 외면하고 거절하는 태도가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일깨워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모습은 과연 어떠한지요. 우리는 예수님을 알아보기에 당시의 유다인들보다 더 좋은 환경에 놓여 있습니다. 복음 말씀은 구원의 십자가와 부활의 신비를 직접적으로 증언하고 있으며 교회의 가르침과 해석을 통해 그 모든 것을 얼마든지 알아보고 찾을 수 있는 여건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양한 성인전은 하느님의 존재와 기적을 여러 방식으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종종 우리는 당시의 유다인들과 같이 현실적인 문제들에 눈이 어두워 참다운 예수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기도 중에 원하는 것들 역시 그렇습니다. 세속적인 것을 바라고 당장 이루어질 표징만을 원하기에 구해야할 은총을 청하지 못하고 주어진 은총을 알아보지 못한 채 지나치기도 합니다. “브루스 올마이티”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영화의 주인공 브루스는 사회적으로 안락한 뉴스 앵커의 지위를 꿈꿉니다. 하지만 되는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잘 하고자 노력하지만 자꾸만 실수를 저지르고 다른 동료가 주목을 받습니다. 이에 브루스는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 하느님을 저주하며 당신이 정말 전지전능한 신이라면 왜 나를 이런 식으로 대하냐며 손가락질을 합니다. 이에 하느님이 나타나 신의 권한을 그에게 맡깁니다. 이에 브루스는 세상 모든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겠다는 일념 아래 사람들의 기도를 모두 들어줍니다. 그런데 세상은 오히려 엉망이 되어버립니다. 로또 당첨이 수천 명이 되어 1등 배당액이 조금만 책정되자 폭동이 일어나고 특정 미식축구팀이 우승하자 폭동으로 경기장이 무너집니다. 그 외에도 다양한 문제들이 일어나 세상이 혼란스러워지고 맙니다. 그제야 브루스는 도저히 자기 힘으로 어쩔 수 없다며 다시 하느님께 간절히 도움을 요청합니다. 이에 하느님이 나타나 이야기합니다.
“생각보다 만만하지 않지? 신의 임무 말이야.”
그리고 이어서 이야기 합니다.
“과연 사람들은 자신들이 정말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고서 제대로 소원을 비는 걸까? 두 가지 일로 허덕이는 미혼모가 아이를 축구수업에 보내려고 없는 시간을 짜내는 것이 기적이야. 십대가 다른 길에 빠지지 않고 학업에 열중하면 그게 기적이야. 사람들은 이미 주어진 기적의 능력을 갖고도 그걸 알지 못하고 나에게 소원을 빌지.”
그렇습니다. 우리가 저마다의 소중한 지향을 가지고 한마음으로 기도 할 수 있다는 것. 나에게 힘을 주는 가족 혹은 동료들을 만나 지금 여기 함께 있다는 것이 기적입니다.
내 주변 가족들이 건강하다면 그 또한 기적이며, 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나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힘이 있어 그들에게 희망이 될 수 있다면 그 또한 기적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총이며 기적인 것입니다. 미사를 드릴 수 없는 작금의 상황에서 모두들 알고 계실겁니다. 우리 모두 저마다의 상처와 십자가를 갖고 있지만 거룩한 마음으로 성체를 영하며 위로받을 수 있었던 것은 얼마나 커다란 은총이며 기적이었습니까? 오늘의 복음 앞에서 하느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말씀이 무엇인지, 그분께서 나에게 이미 베푸신 은총의 표징은 무엇인지 기억해보시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그 모든 기적들을 사랑으로 베풀어 또 다른 기적을 만들어 나갈 수 있는 힘을 구해야 하겠습니다. 이 모든 기적들은 자비로우신 하느님으로부터 옵니다. 자비에 지치지 않으시는 주님은 오늘의 복음 환호송과 같이 오늘도 우리에게 손짓하십니다. “나는 너그럽고 자비로우니 이제 마음을 다하여 나에게 돌아오너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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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조창현 클레멘스 신부님]
+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
<십자가 앞으로…>
요즘 코로나 19 감염증으로 안타깝고 힘들어하는 중에, 그 옛날에 이순신 장군님께서 하신 “필사즉생, 필생즉사”라는 말씀을 묵상해 봅니다.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반드시 살고자 하면 죽는다.” 뜻입니다. 여기서 나온 말이 “사즉생, 생즉사”라는 말입니다. “죽는 것이 곧 사는 것이요, 사는 것이 곧 죽는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과 뜻이 같은 성경 구절이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 10장 39절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이순신 장군님은 임진왜란 때 명량해전에서 12척밖에 안 되는 배로 133척(크기가 3배)을 거느린 일군 함대와 싸워 이겼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 싸움에 나가기 전에 이런 시조를 읊습니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긴 칼을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던 차에
어디선가 일성호가(한가락 구슬픈 피리 소리) 남의 애를 끊나니….”
깊은 시름이 무엇입니까? 마음의 근심 걱정입니다. 마음에 걸려서 떨어지지 않는 근심과 걱정입니다. 그래서 장군님은 시름 하고 애가 끊는 마음으로 하늘에 기도하셨습니다. 이순신 장군님께서 보여주신 표징은 “깊은 시름의 고통 끝에 얻은 승리”였습니다.
예) 루카 복음 22장 4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겟세마니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주십시오. 그러나 아버지,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
예수님께서 고뇌에 싸여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핏방울처럼 되어 땅에 떨어졌습니다. 예수님의 버려지는 아픔과 통곡의 기도가 기적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을 보면, 니네베 사람들과 요나 예언자의 표징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요나는 예언자가 싫다며 하느님으로부터 먼 곳으로 달아나려 합니다. 그러기에 그는 죽음을 체험합니다. 바다 한가운데서 폭풍우를 만나자 태풍의 원인이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더구나 자기 때문에 무모한 사람들이 죽는 것을 알게 되자 그들에게 말합니다.
“나를 들어 바다에 내던지시오. 그러면 바다가 잔잔해질 것이오. 이 큰 폭풍이 당신들에게 들이닥친 것이 나 때문이라는 것을 나도 알고 있소."(요나서 1장 12절)
요나는 마음을 비우고 하느님 말씀에 순명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래서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했더니 임금부터 짐승들까지 죽음의 위협을 느꼈기에 단식과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를 합니다. 요나의 목소리에는 죽음을 이겨낸 힘이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힘을 실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고생하고 죽을 뻔했던 사건들은 모두가 기도하게 만드는 은총”입니다. “고생이 기도를 가르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요나가 3일 밤낮을 고기 뱃속에 머물게 됩니다. 요나는 기도하게 됩니다. 그리고 회개하고 살아납니다.
예수님께서는 ‘표징’을 요구하는 청중들에게 요나 이야기를 하셨던 것입니다. “고생이 기도를 가르친다.”
자신이 처한 상황 안에서 “하늘의 표징(뜻)”을 찾아보라는 말씀입니다. 요나서 2장 3절에 보면, 요나 예언자가 회개하고 살아납니다.
“제가 곤궁 속에서 주님을 불렀더니 주님께서 저에게 응답을 주셨습니다. 저승의 배 속에서 제가 부르짖었더니 당신께서 저의 소리를 들어 주셨습니다.” 아멘.
사랑하는 고운님들!
“전부가 아니면 모두가 아닙니다.”
그리고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주님, 저희를 보아 주십시오. 그렇게 살 수 있는 은혜를 주옵소서.” 아멘.
그러자 예수님께서 사도 베드로에게 물으셨던 것처럼 고운님들에게도 물었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 예수님께서 물으시는 이 말씀은 “내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후 3시에 십자가 앞에서 묵상기도를 합니다.
“주님, 저는 저의 빈 잔을 가지고 고생(고통)의 길을 가로질러 당신께로 천천히 나아갔습니다. 그것은 저의 목마름을 시원하게 해줄 물 한 방울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제가 주님을 제대로 알았더라면 커다란 양동이를 들고 뛰어갔을 것입니다."
저는 거룩한 이 날에, 십자가 앞에서 몸과 마음이 아픈 고운님들과 간호하는 고운님들, 그리고 고운님들의 자녀에게 치유와 회복의 은총이 있으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영적 일기를 마무리하면서….
“아프고 고생스러운 것이 기도를 가르친다.”라는 말씀으로, 기도 안에서 하느님의 마음을 제대로 알아가는 희생과 속죄로 치유와 회복의 은총을 얻는 복된 사순시기를 보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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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단단해지게 하는 시편(426)
♧♧ 시편 76편 8절…
"당신을 경외로우신 분 당신께서 진노하실 때 누가 당신 앞에 서 있겠습니까?"
* 당신은 경외로우신 분...
‘당신...’은 ‘당신 곧 당신’이라는 뜻으로 이는 ‘오직 하느님 당신만...’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경외로우신 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야레’는 ‘놀라우신 분’이라는 뜻으로 큰 기적을 행하시는 분을 말합니다.(신명기 7장 21절. 느헤미야서 1장 5절. 시편 47편 3절, 66편 3과 5절, 68편 35절. 참조) 아삽은 하느님만이 정녕 당신의 큰 권능으로 세상 만물 모든 것을 당신의 뜻대로 다스리시고 이끄시는 분이심을 강조하는 가운데 모든 인간은 이러한 하느님께 마땅히 순명해야 함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 당신께서 진노하실 때...
문자적으로는 말하면 ‘당신의 진노의 때부터는...’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느님께서 늘 악인에게 진노하시어 심판하시며 징벌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악인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기 위하여 오래 참고 기다리시면서 징벌을 유보하십니다.(베드로 2서 3장 9절. 참조) 그러나 일단 하느님의 진노가 내리면 누구도 그 파에서 진노를 피할 수 없습니다.
* 누가 당신 앞에 서 있겠습니까?
하느님께서 인간의 모든 행동을 다 살펴보고 계시므로(시편 130편 3절. 참조) 하느님을 대적하며 당신의 백성을 핍박하는 원수들이 감히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죄악을 숨기려 들거나 변명하려 들 수 없다는 것입니다.
♧♧ 시편 76편 9절…
"당신께서 하늘로부터 심판을 선포하시니 땅이 놀라 숨을 죽였습니다."
* 당신께서 하늘로부터 심판을 선포하시니...
이는 세상을 초월해 계시는 하느님만이 정녕 모든 인간을 심판하실 수 있는 전지전능 하신 분이심과 동시에 하느님의 심판은 이 세상의 재판장들이 판결을 불의하게 내릴 수 있는 것(애가 3장 35-36절. 참조)과 달리 절대적으로 정의롭고도 진실한 것임을 나타내 주는 표현입니다.
* 땅이 놀라 숨을 죽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땅’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에레츠’는 10절의 ‘세상의 가난한 이’와 대죄되는 말로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이 아니라, 그들 중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모든 악인들을 의미합니다. 이들은 하느님의 심판 날에 이르면 자신들이 하느님의 진노와 영원한 징벌을 피할 수 없게 되었음을 두려워하며 하느님의 얼굴을 피해 그 몸을 숨기려 들 것입니다.(요한 묵시록 6장 16절.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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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너무나 술을 좋아하는 남편 때문에 걱정이 많은 자매님이 계셨습니다. 젊었을 때야 술을 좋아해도 실수도 하지 않고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지만, 이제는 술 마시고 하는 실수가 너무나 잦았던 것입니다. 이런 걱정을 친한 자매님께 말씀드렸더니, 남편을 위해 9일 기도를 바쳐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 정성을 다해 기도했습니다.
9일 기도가 끝나는 날, 남편이 자신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여보, 나 오늘부터 술 줄일 거야.” 함께 살면서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고, 주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셨다는 확신을 했습니다. 그래서 더 열심히 기도하면 술을 끊으리라 생각했습니다. 9일 기도를 두 번이나 더 했지만, 남편은 술을 끊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 자매님은 기도를 끊었습니다. 더는 자기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다면서 말이지요. 내 기준에서 하느님을 판단하는 모습입니다. 하느님의 기준은 내 기준과 분명히 다른데도 말이지요. 주님께서는 요나의 표징 이야기를 전해주십니다. 요나가 표징이 되었다는 니네베라는 도시는 아시리아의 수도였습니다. 아시리아는 기원전 25세기부터 기원전 612년까지 존재한 강성했던 국가입니다. 이 나라가 북이스라엘을 멸망시켜 유배시키고, 남유다를 점령해서 조공을 바치게 했었지요. 따라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아시리아는 원수라고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요나에게 명령하셔서 니네베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하고 말 것이라는 말을 전하라고 명령하지요. 당연히 멸망해야 이스라엘의 해방을 가져올 것이기 때문에 반대쪽으로 도망쳤던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을까요?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이방인에게도 당신의 사랑을 베푸시기에 요나를 보냅니다. 이 니네베 사람들이 요나의 뜻과는 달리 모두 회개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멸망하지 않습니다.(물론 기원전 612년 메디아-바빌로니아 연합군으로부터 멸망합니다) 결국, 요나의 표징에는 두 가지가 의미가 있는데, 믿는 이들에게는 그들의 구원을 의미하고,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그들의 멸망을 뜻합니다.
이 요나의 표징이 주님께도 연결이 됩니다. 즉, 주님을 믿는 자는 구원받고, 믿지 않는 자들을 단죄받을 것입니다. 요나의 표징은 지금도 계속됩니다. 함부로 판단하고 단죄하려는 마음은 하느님의 사랑과 정반대의 모습을 취하게 됩니다. 그 사랑을 믿고 따르지 않는다면 우리가 단죄받아 멸망할 수밖에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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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운 사람>
자신이 먼저 행복해야 남에게도 행복을 줄 수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행복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어디에도 구속됨 없는 자유로움이 아닐까 싶습니다.
세상의 물질적인 것들에 대한 자유로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의 자유로움, 더 나아가 내 욕심과 이기심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행복해질 수 있고 남에게도 행복을 주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꽁꽁 묶여서 꼼짝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이때 누가 이 사람을 풀어줄 수 있을까요? 이 사람처럼 꽁꽁 묶여 있는 사람이 풀어줄 수 있을까요?
당연히 아닙니다. 묶여 있지 않은 사람만이 상대방의 밧줄을 풀어줄 수 있습니다. 자유로움이 남을 도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일과 욕망에 묶여 있는 자는 다른 묶여 있는 자를 풀어줄 수 없다는 것을 잊지 말았으면 합니다. 먼저 내가 풀어야지만 남에게도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따라서 먼저 자유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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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영원한 회개悔改와 희망希望, 구원救援의 표징>
-파스카 예수님-
어제 잠시 면담 고백성사를 보고 간 사제와 주고 받은 메시지 내용이 생각납니다. 이 또한 저에겐 회개의 표징이 되는 메시지입니다. 고백성사후 감명깊게 읽은 몇권의 책을 읽으라 빌려 드렸는데 이건 아니다 싶어 수도원 중앙 십자로에 위치한 ‘예수부활상’, 수도원 입구의 ‘성가정상’, 언제나 늘 거기 그 자리의 정주의 ‘불암산’의 사진 셋과 함께 즉시 보낸 메시지입니다.
-“사랑하는 신부님!
파스카 예수님의 위로와 치유의 축복인사 받으시고 행복하세요. 과거는 지나갔고 오늘 지금 여기서 늘 새로운 시작입니다. 다시 일어나 용기백백하여 본연의 자리에서 충실히, 묵묵히, 항구히 책임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신부님!
빌려 드린 책들, 감명깊게 읽은 책들이지만, 거룩한 사순시기 절제하며 보시기 바랍니다. 우선 침묵, 묵상, 기도, 회개, 영적독서로 내면을 깊고 고요하고 평화롭게 해야 하겠습니다. 과도한 인터넷, 휴대폰의 사용이나 활동도 삼가야 하겠습니다. 극단의 혐오와 증오의 시대, 정말 온유와 겸손, 평화의 사제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늘 거기 그 자리! 한결같은 불암산과 성가정의 축복인사도 받으시고 행복하세요.”
-“감사합니다. 수사님!
저의 죄 때문에 여전히 눈물 흘릴 일이 많겠지만 늘 새롭게 주시는 주님 사랑 용서 은총으로 다시 또 시작하겠습니다. 주님 사랑 용서 보여 주심에 항상 감사드립니다. 고해성사를 보고 나니 제정신으로 돌아와서 본당 공사일, 소공동체 복음화 교육 관련, 노인대학, 신자교육, 성경교육, 일들이 머릿속에 꽉차서 다시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습니다. 수사님 말씀 명심하겠습니다.”-
옛 신학교 시절 때의 동료, 후배 사제들이나 지금 만나는 사제들 역시 ‘신부님’이라는 호칭보다는 ‘수사님’이라 부르니 훨씬 친근감있게 마음에 와 닿습니다. 특히 교구사제들은 저를 ‘수사님’이라 부르길 좋아하고 편안해 합니다. 정말 ‘수도사제’답게 살아야 겠다는 각오를 새로이 하게 됩니다.
정말 첨예하게 대치한 극단의 시대, 양극화의 시대, 분열의 시대같습니다. 여유와 웃음, 유머의 품위가 몹시도 그리운 시절입니다. 인터넷 곳곳의 댓글들에서 남발되는 거칠고 험악한 극도의 혐오와 증오의 말들이 흡사 원수들같습니다. 조그만 건드려도 폭발할 것 같은 분위기입니다. 참으로 믿는 이들만이라도 여유로움에 정제된 품위있고 부드러운 언행을 보였으면 좋겠습니다. 참으로 믿는 이들은 물론이요 국민 모두가 거룩한 사순시기를 맞이하여 거족적 회개를 실천했으면 좋겠습니다.
세상 모든 것이 하느님 섭리의 손길 안에 있습니다. 참으로 전무후무한 신종 바이러스 19 사태가 거룩한 사순시기와 더불어 시작됬다는 사실에서 이 신종 전염병이 재앙이자 축복이요 회개의 표징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그 회개의 모범적 표징이 오늘 제1독서의 니느베 죄인들의 거족적 회개입니다. 예수님의 예표와도 같은 예언자 요나가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이들에게 회개를 선포합니다.
“이제 사십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
사순시기 40일이 지나서가 아니라 지금 여기 사순시기가 시작되면서 코로나 19 사태로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는 듯한 우리의 국내현실입니다. 좌절이나 절망은 금물입니다. 심기일전心機一轉 회개의 기회로 삼아 다시 각자 삶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한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니느베 백성들의 거족적인 회개의 실천을 통해 악한 길에서 돌아서는 모습을 보시고, 마음을 돌리시어 이들에게 내리겠다고 말씀하신 그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말그대로 전화위복轉禍爲福, 재앙이 축복으로 바뀌었음을 보여줍니다.
엄밀히 들여다보면 코로나 19 사태는 천재지변이 아니라 인재입니다. 책임 소재의 규명보다 우선 치유와 수습에 최선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인류의 종말을 위협하는 기후변화의 위기 역시 우리의 거족적 생태적 회개의 실천을 촉구합니다. 다음 복음의 예수님 말씀은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 모두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이 세대는 악하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
그렇습니다. 요나는 파스카 예수님의 예표입니다. 요나의 모습에서 예수님을 보는 우리들입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의 예수님이야말로 영원한 회개의 표징, 희망의 표징, 구원의 표징입니다. 파스카의 예수님 표징 하나만으로 충분합니다. 코로나 19 사태의 중심에 바로 회개의 표징, 치유와 위로의 파스카 예수님께서 자리 하고 계십니다.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끝에서 온 남방 여왕이나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한 니네베 백성들 또한 우리에게 빛나는 회개의 표징들입니다. 솔로몬이, 또 요나 예언자가 가리키는 바, 우리의 영원한 회개의 표징, 희망의 표징, 구원의 표징이신 파스카 예수님이십니다. 파스카 예수님의 확신에 넘친 다음 말씀이 우리에겐 위로와 격려가 되고 힘이 됩니다.
“그러나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언제나 늘 오늘 지금 여기 이 자리에 빛나는 회개의 표징, 희망의 표징, 구원의 표징으로 현존하시는 파스카의 예수님이십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시간 회개한 우리 모두에게 위로와 치유의 축복을 선사하십니다. 우리 모두 주님께 자비를 청합시다.
“하느님, 당신 자애로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느님, 저희 마음을 깨끗이 만드시고, 저희 안에 굳건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하느님께 드리는 제물은 부서진 영, 부서지고 뉘우치는 마음을, 주님, 당신은 업신여기지 않으시나이다.”(시편51,3.12.1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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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더 큰 것을 요구하기에>
누구나 소망을 가지고 있고 그 간절한 바람이 이루어지기까지는 온갖 정성을 다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얻으면 여한이 없을 것처럼 행동합니다. 그러나 정작 이루고 나면 언제 그랬는가 싶게 잊어버리고 맙니다. 한번 깨우침을 얻었다든지 소망을 이루었으면 그 감사함을 오래도록 지켜야 하는데 마음 같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화장실 갈 때 마음과 나올 때의 마음”이 다릅니다.” 한결같은 마음을 지킬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녔는데 그들이 예수님의 진면목을 알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흘러야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른 것이 아니라 기적을 따랐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 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루카11,29) 하고 말씀하시며 기적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사실 귀를 막고 있는 사람에게는 천둥치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 법입니다. 아무리 표징을 보여줘도 마음을 닫아건 사람에게는 쓸모가 없습니다. 그야말로 쇠귀에 경 읽기입니다.
‘염불에는 관심이 없고 잿밥에만 마음이 있다’는 옛 말을 생각해 봅니다. 자기가 마땅히 해야 할 일에는 정성을 들이지 않고 딴 곳에만 마음을 둔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많은 군중들이 그랬습니다. 참된 신앙과 회개에는 무관심한 채 표징에만 관심을 두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표징을 통하여 말씀이 참되다는 것을 증명해 주시고, 당신의 권능을 일깨워 주심으로써 새 삶으로 인도하려 했지만 사람들은 그것에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다만 육체적인 치유와 기적이 최고였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표징을 일으킬 수가 없으셨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 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미사참례를 하여 성체를 모시면서도 주님의 삶을 살기를 다짐하기보다는 이상한 현상이나 신비로운 표징에 더 많은 관심을 보입니다. 우리를 위한 생명의 양식으로 다가오시는 주님을 모실 수 있다는 것이 표징중의 표징이요, 기적중의 기적이지만 그렇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모두를 주시지만 우리는 그저 밀떡하나 받아먹는 것으로 만족하니 주님의 역사하심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믿음으로 준비하지 않은 나를 보지 못하고 더 큰 것을 요구하기에 급급해 하니 안타까울 뿐입니다.
이번 사순절에는 더 큰 것을 바라기에 앞서 지금 내가 주님 앞에 서 있음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사실 기적은 내가 지금 살아있음이 기적입니다. 많은 실수와 잘못, 허물에도 불구하고 심판을 이기는 자비에 힘입어 이렇게 살아있음이 사랑이신 주님을 드러내는 표징입니다. 그러므로 기적을 쫓기보다 내 삶의 자리를 표징의 자리로 만들어야하겠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어 오신 주님을 영성체를 통해 모실 수 있음을 기뻐하며 우리도 주님처럼 이웃을 위한 빵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빵을 먹을 때마다 생명의 양식이 되신 주님을 기억하며 감사하는 날 되시기 바랍니다. '코로나19'로 말미암아 미사참례를 하지 못하고 영성체를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어떤 감사함을 지녀야하지요?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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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독서와 복음에는 요나 예언자가 등장합니다. 요나가 큰 물고기 배 속에서 보낸 사흘은,예수님께서 돌아가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신 사건의 표징입니다.
"요나는 주님의 말씀대로 일어나 니네베로 갔다."(요나 3,3)
오늘 듣는 대목 이전에 이미 엄청난 사건이 한바탕 펼쳐졌지요. 주님의 부르심에 요나는 도망쳤고 폭풍을 만나 바다에 빠져 큰 물고기 배 속에 갇혔다가 다시 육지로 토해진 뒤의 일입니다. 요나는 죽음의 시간을 지나 이제 순명의 인간으로 변했습니다.
"그러자 니네베 사람들이 하느님을 믿었다."(요나 3,5)
이방신을 섬기는 이방 도시의 사람들이 어디서 온지도 모르는 히브리 예언자의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사흘이나 걸리는 아주 큰 성읍"(요나 3,3)을 고작 하룻길밖에 걷지 않았는데 온 도시가 그의 말을 믿고 참회의 태도를 보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진노를 ... 거두실지 누가 아느냐? 그러면 우리가 멸망하지 않을 수도 있다."(요나 3,9)
니네베 임금이 백성에게 함께 회개하자고 촉구합니다. 그런데 그의 말에서 불확실성을 숨길 수 없습니다. 그가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모르는 이방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불확실성 중에서 단 몇 퍼센트의 가능성이라도 부여잡고자 엎드린 니네베 사람들의 모습은 믿음 앞에 갈팡질팡하는 이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믿음은 결국 모험이니까요. 백 퍼센트 확실성의 결과는 믿음이 아니라 지식일 뿐입니다.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루카 11,32)
복음에서 예수님이 니네베 사람들을 칭찬하십니다. 그들이 요나라는 한 인간을 보지 않고 그가 전하는 주님의 말씀에 귀기울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백성으로 선택받았음에도 "요나보다 더 큰"(루카 11,32) 예수님의 존재와 말씀을 외면하는 이스라엘은 자기들이 업신여기는 이방인들의 단죄를 받을 것입니다.
요나의 표징에는 예수님의 파스카 신비가 담겨 있습니다. 요나는 자기 자신에게 온전히 죽고 하느님의 목소리로 거듭 났지요. 물론 이 사건 이후에도 요나다운 고집과 불평이 싹 사라진 건 아니지만, 어쨌든 물고기 배 속의 사흘은 새로운 탄생을 가져왔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요나의 표징은 우리에게 죽음에서 삶으로 건너가는 파스카의 여정을 두려움 없이 마주하라고 초대합니다. 아울러 이러한 파스카의 여정을 거쳐 주님의 사람이 된 존재를 편견 없이 받아들이라고 촉구합니다. 그에 대한 선입견에 발목 잡히지 말고, 사람을 뛰어넘어 주님을 보고 들으라고 하시는 겁니다.
단순한 믿음과 겸손한 참회... 오늘은 니네베 사람들에게 한 수 배웁니다. 그들처럼 우리도 "이제 마음을 다하여 나에게 돌아오너라"(복음 환호송) 하시는 주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입시다. 설령 사랑이 아니라 두려움 때문에 회개한다 해도 괜찮습니다. 동기와 시작이 어떻든간에 "하느님께서는 마음을 돌리시는 분입니다."(요나 3,1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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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들의 말씀 묵상]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 사람들과 함께 되살아나 이 세대 사람들을 단죄할 것이다. 그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끝에서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루카 11,31)
<그리스도와 교회의 신비>
이 말씀은 교회의 신비를 분명하게 드러내 줍니다. 교회의 양 떼가 온 세상으로 흩어집니다. 회개를 통해서 니네베에 이르고(요나 3,5 참조) 지혜에 대한 갈망으로 남방 여왕에게까지 미칩니다. 그리하여 평회를 이루는 솔로몬의 지혜를 알게 됩니다(참조: 1 열왕 10,2; 2 역대 9,1). 여왕의 나라는 갈라지지 않고,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을 한 몸으로 만듭니다. 그 위대한 성사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연관된 것이며(에페 5,32 참조) 그 실제는 예시되었던 것보다 더 위대합니다. 이제 그 신비가 진리 안에서 완성됩니다. 그때는 솔로몬이라는 표상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리스도께서 당신 육신으로 여기 계십니다.
-암브로시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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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십자가를 만날 때마다 부활의 생기를 찾아야 한다.
세상 사람들은 십자가를 만나면 기가 죽지만 착한 신자들은 십자가를 만날 때마다 부활의 생기를 찾아야 합니다. 착한 신자들은 물고기가 물속에서 살아가듯이 십자가의 고통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성 요한 비안네
♣당신들이 십자가를 사랑한다면 반드시 십자가는 당신들을 사랑할 것이며,천상 하느님께로 당신들을 이끌어 줄 것입니다.
-성녀 줄리아 빌리아르
*구세주께서 고난과 십자가를 구원의 도구로 택하셨기에, 십자가 없는 구세주는 없으며 구세주 없는 십자가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신앙인도 십자가 없는 신앙생활이 없는 것이기에 십자가를 거부하면 안 됩니다. 십자가를 사랑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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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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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사순시기를 보내고 있는 우리에게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불신의 완고함을 벗고 회개하도록 촉구하십니다. 오늘 <독서>는 이방인 성읍인 니네베 사람들의 회개를 들려줍니다. 반면에 <복음>은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불리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불신을 들려줍니다. 오늘 <복음>은 앞 장면의 내용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앞 장면에서, 예수님께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셨습니다. 그러자 어떤 사람들은 놀라워하기도 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시험하느라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요구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저자는 마귀의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루카 11,15)고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시는 장면으로부터 오늘 <복음>은 시작됩니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시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그 어떤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루카 11,29)
여기서, “악한 세대”라는 말은 단지 마음이나 행실이 악할 뿐만 아니라, <마태오복음>의 병렬구문에 따르면,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마태 17,17)를 의미합니다. 곧 군중이 표징을 요청하는 것은 믿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모함할 구실을 찾기 위한 완악함과 비뚤어진 마음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곧 표징을 요구하며 시험하려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치 앞 장면에서, 하느님의 아들이 하신 일을 악마가 했다고 한 것이 성령을 모독하는 것이었듯이, 하느님의 아들에게 신성의 표징을 요구하는 것 또한 하느님 아들을 불신하고 모독하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루카 11,30)
그렇다면, 요나의 표징은 무엇인가? 그것은 마치 요나가 “이제 사십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요나 3,4)라고 외치며, 회개의 때가 왔음의 표징이 되었듯이, <루카복음>의 예수님의 공생활을 알리는 첫 발설에서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루카 4,18-19)하시면서 구원의 때가 왔다는 표징이 되셨습니다. 또한, 요나의 표징은 십자가와 부활의 표징이기도 합니다. 곧 요나가 바다에 빠져 고래 배속에서 사흘째 날에 다시 밖으로 나온 일은 사람의 아들이 고난을 받고 죽었다가 사흘째 되는 날에 다시 살아나는 것을 예표해 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드러내시며 말씀하십니다.
“보라, 솔로몬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루카 11,31.32.)
이는 결국, 요나의 설교만 들고도 회개한 이방인 니네베 사람들과 솔로몬의 지혜를 평판으로만 듣고도 찾아온 남방이방인 세바의 여왕은 믿음으로 하느님의 자비를 입었건만, 이스라엘 백성인 유대인들은 주님의 말씀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표징을 보고서도 태도를 고치기는커녕 오히려 불신하고 모욕하는 그들에게 회개를 촉구하고 계시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믿음의 눈으로 보면 모든 것이 다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는 표징일 것입니다. 단지 우리가 그 표징을 알아보지 못함은 우리의 불신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니 믿는 우리는 참으로 행복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을 되새겨 봅니다.
“유다인들은 표징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그렇지만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1코린 1,22-2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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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루카 11,29)
주님!
당신께서는 불가사의한 일로 놀라게 하시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자비를 선포하시려 오셨습니다.
제 눈이 기적을 보기보다, 당신의 자비를 보게 하소서.
제가 찾기도 전에 저를 찾으시고 제 안에서 구원을 이루시는,
먼저 베푸신 당신의 자비를 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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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봐주는 시간>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다."
권유를 하고 충고를 해도
듣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강경책을 써야 합니다.
니네베 사람들의 삶이
주님 보시기에 역겨워서 요나를 파견했더니 ~
고집 쌘 마음 내려놓고 기존 삶을 바꾸는 모습을
보면서 진노를 거두십니다.
지금의 자리에서 내가 사는 모습을 점검하여
개선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요나보다 더 큰
주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날 봐 주는 시간의 끝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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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루카 11, 32)
십자가에서
회개하고
십자가에서
말씀을 듣습니다.
우리 시대에
필요한 것은
참된 회개입니다.
회개의 표징보다
더 강력한 표징은
있을 수 없습니다.
회개와
십자가는
하나입니다.
회개는 겸손을
더욱 잘
알게 합니다.
겸손은 먼저
하느님 말씀을
우리가
듣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하느님의 뜻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이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참된
회개입니다.
참된 회개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회개로 이끕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회개의 삶으로
우리를
변화시키십니다.
예수님을 통해
회개의 기쁨을
알게 되었습니다.
회개하라고
십자가를
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더 큰 사랑을
만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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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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