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시아 길 / 앨런 알렉산더 밀른
물론 교외 생활에 불편은 있다. 연극의 제4막 째에 가서 빗나간 가정주부의 운명이 어디로 기울어질까 하는 아슬아슬한 순간, 이런 사정도 모르고, 막차는 빅토리아역을 11시 15분에 출발한다. 이런 위기에 그녀를 뒤에 남기고 극장을 떠나야 하니 원통한 일이다. 또 연극 구경에 앞서 고깃국을 마시는 즐거움도 도중에서 중단해야 하고 서둘러야 하니 이것도 곤란한 일이다.
그러나 결국 인생을, 연극 구경의 편리함과 불편을 두고 판단할 수는 없는 일이다. 11시 15분의 기차 시간 때문에 교외를 비난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런던에서 8마일 떨어진 곳에 길이 하나 있는데, 나는 골프 치러 가는 길에 가끔 걸어가 본 일이 있다. 그 길을 '아카시아 길'이라고 하던가, 그런 아름다운 이름의 길이다. 아카시아 길에 비도 뿌리겠지만, 내가 지나갈 때는 비는 오지 않았다. 붉은색 산사나무 꽃이 핀 '노란 등나무 집', 두 그루 보리수가 있는 ‘삼나무의 집’ 위에 햇빛은 다사롭고, ‘감탕나무 집’ 담장에 그림자를 던지고, 도로 전면에 기분 좋은 오후의 적막이 깔려 있다.
나는 ‘아카시아 길’을 걸을 때, 여기에 살면 행복하리라는 생각을 하지 않은 적이 없다 —— 해가 쪼이고 있을 때 말이다. 예를 들어 붉은 산사나무 꽃이 핀 ‘노란 등나무집’에서 산다는 것은 즐거운 일임에 틀림없다. 나는 때때로 교외의 집이야말로 정말 집이라 생각한다.
'노란 등나무 집'을 지날 대면 남편이 ‘다녀올게’ 하며, 아침마다 정거장으로 소풍 삼아 걸어가는 모습을 생각하게 된다. 기차가 만원이면 어떤가. 신문이 무난히 ‘시티’ 까지 데려다 줄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생기는 일 하나하나가 얼마나 재미있겠는가. 집에 돌아가면 이야기를 해 줄 그녀가 있기 때문이다. 흔히 있는 거리의 사고도 살을 붙여 이야기하면 흥미진진하게 된다. 작은 사건도 하나하나 “기억해 두었다가 그녀에게 이야기해주어야지”하고 생각하는 남자는 행복하다 하겠다. 사람이 ‘귀가(歸嫁)’한다는 것은 교외 살 때의 말이다. 도심의 그로우브너 스퀘어에서는 ‘귀가’가 아니고 단지 집 안에 있느냐, 밖에 있느냐의 차이다
그러나 ‘노란 등나무 집’ 주인은 도망친 말 이야기 말고도 재미있는 이야기 선물을 들고 올 수도 있을 것이다. 점심 때 재미있는 화제를 들었을지도 모르니까. 그 우스갯 소문이 장안에 파다해도 교외에 있는 그의 아내는 들었을 리가 없을 것이다. 누군가를 위해서 우스갯소리를 고이 싸둘 수 있다는 것은 결혼의 덕이라 치부해 두라. 또 그녀 편에서도 그 사람에게 할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때늦은 화초가 갑자기 꽃을 피웠다든지 하는, 최소한 그 사람도 혹시나 그런 일이 있을까 하여, ‘아카시아 길’을 힘차게 걸어오기도 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날의 가지가지의 흥겨운 일이 끝나고, 두 사람이 무사히 ‘노란 등나무 집’ 붉은 산사나무 꽃 밑에서 다시 만날 때는 행복하기도 할 것이다. 사실 둘이서 저녁노을이 아직 밝은 동안에 정원 가꾸기도 할 것이다.
만일 인생이 이 이상의 것을 준다면 '감탕나무 집'에 가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집에는 아기가 있기 때문이다. 아기가 있기 때문에 주인의 귀가는 더욱 가슴 설레이게 된다. 왜냐하면 아빠가 나가 있는 사이에 아기들에게 어떤 일이고 생겼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도로시에게 새로 이가 나고, 앤은 빵 배달꾼에게 깜찍하게도 똑똑한 이야기를 했을지도 모른다. 아침에도 앤은 아빠 따라 길가까지 갈 것이다. '아카시아 길'은 불행한 일이 일어날 리 없으니, 아주 안전하다. 개들도 조용히 사람을 따르기 때문이다. ‘감탕나무 집’ 주인이 길가에서 앤에게 빠이빠이를 하고, 저녁에 돌아올 때도 씩씩하게 맞아 줄 것이라고 생각하면 즐겁다. 그런 생각을 하면 그날 하는 일이 신속히 진척될 것이다.
하나, 교외에 사는 행복의 비밀을 가르쳐주는 곳은 ‘삼나무 집’이다. ‘삼나무 집'은 보시다시피 거대한 저택이고, 뒤뜰에는 테니스장이 있다. 그리고 ‘삼나무 집'에 다 큰 아들 딸이 있다. '아카시아 길’가의 이런 집에서 지금 연애 사업이 한창이다. 교외에서는 결혼이라는 것이 '정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삼나무 집', '느릅나무 집’, ‘장미원 집' 사이의 즐거운 교제 속에서 자연스럽게 움터서 성장하게 마련이다. 톰이 라켓을 손에 들고, 뮤리엘 양과 테니스를 하기 위해 길을 건너가는 모습이 눈에 뜨인다. 그는 마음속에 저녁이라도 초대 받았으면 하고 바라는 바이고, 사실 초대를 받을 것이다. 하여간 그는 다음날 뮤리엘 양을 점심에 초대하려 하고 있다. 그의 어머니는 그녀에게 할 이야기가 많다는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 이야기는 톰이 하게 될 것이다.
'아카시아 길’에서 맺어지는 결혼은 행복하리라고 나는 확신하는 바이다. 그러기에 ‘감탕나무 집'과 '노란 등나무 집’ 부부 사이는 걱정할 것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물론 그들은 이 '아카시아 길'에서 사랑을 맺은 것은 아니다. 가족과 떨어져서 사는 편이 났다고 현명한 결심을 하고, 교외의 다른 곳의 '아카시아 길'에서 이사 온 사람들이다. 부부들이 서로 알게 된 것도 톰과 뮤리엘이 서로 교재하고 있는 방법이었다. 그는 그녀의 집에서, 또 그의 집에서, 그리고 테니스 클럽에서 ‘탑(塔) 정원', '황야(荒野)’3) 등 집의 젊은 버릇없는 놈들 (고약한 놈들!)에 둘러싸여 만났던 것이다. 그녀는 그가 자전거 타다 떨어진 일, 부친과 말다툼한 일을 소문으로 듣고 있는 터이다. 축복할 일이지, 그들은 서로 한 가지부터 열 가지를 알고 있는 사이다. 그래서 같이 살면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
그리고 생각해 보니, 그들이 연극을 좋아한다면, 연극 구경도 할 수 있는 시골 극장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10실링만 내면 특등 가족석에 앉아서, 온 극장 안에 호사하고 세련된 분위기를 펴놓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일반석 건너편의 ‘삼나무 집’ 식구들에게 너그러운 거동으로 끄덕거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뒷자리 깊숙한 곳엔 톰과 뮤리엘이 손을 맞쥐고 있음이 틀림없다.
[앨런 알렉산더 밀른 Alan Alexander Milne]
자유 기고가로 활동. 오랜 꿈이었던 【펀치】 잡지의 편집을 함. 해학적인 시와 기발한 평론을 썼다.
그의 수필은 경쾌한 유머가 일품이라는 평을 듣는다.
* 수필집《좋으시다면》
* 소설《곰돌이 푸 1,2》등
어제 안동을 가면서 차창으로 아카시 나무가 주저리주저리 꽃을 매달고 있어서 참으로 오월이구나 싶었습니다. 그래서 수필 <아카시아 길>을 옮겨봅니다.
‘아카시아’ 나무로 통용되더니, 이젠 ‘아카시 나무’로 불려 지던데요, 5월은 아카시아 꽃이 만발하는 계절이죠.
이 수필을 읽자니, 이국의 정취가 담뿍 느껴지는 5월의 풍경이네요. '아카시아 길’로 함께 걸어들어가 봅니다. ‘삼나무 집', '느릅나무 집’, ‘장미원 집' , ‘노란 등나무 집’, '감탕나무 집', 누구나 꿈꾸는 전원주택, ‘교외의 집’ 이야기가 일면은 공감이 되기도 합니다.
첫댓글 그래도 어릴 적에는 오디나무, 자두나무, 복숭아나무, 감나무가
있어서 계절마다 과일이 풍성했던 집이었습니다
향기나는 아카시아 길을 걸어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