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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바지
이 홍사
무슨 일이든 서두르는 것은, 나에게 최고로 빛나는 장점이고, 일단 마음을 먹으면 급하다는 것이 나의 최상의 약점이자 단점이다. 추진력이 있다는 말을 듣는, 반면에 성급하다는 핀잔을 피하기 어렵다. 상황에 따라서 그렇게 급하면 항상 손해를 보는 법인데 그게 잘 고쳐지지 않는다.
아내는 늘 그 점을 못마땅하게 여긴다,
급하게 설치면 장점보다는 단점이 부각하는 줄을 알면서도 결과는 늘 이 모양이다. 순전히 성격 탓이다.
새로 산 백바지가 허리는 맞는데 아랫도리가 쫄쫄이바지다.
사면서, 미처 그것까지 챙기지 못했다. 집에 와서 바짓단을 얼마나 잘라서 수선을 해야 하나? 그걸 파악하려고 입어보니 이 모양이다. 허벅지가 겨우 들어가는 쫄쫄이바지에 미지가 겨우 골반에 걸리는 골반바지였다. 아내가 보지 않을 때 빨리 숨기는 방법밖에는 없다.
치과에서 나오다가 할인한다는 현수막이 보이기에 잠을 잘 때 입을 반바지 하나를 사러 갔는데, 오늘은 꼭 필요한 것만 사야지, 하고 마음을 도사렸지만, 기어이 충동구매를 하고 말았다. 소유욕이 유독 강한 내가 가장 취약한 점이고 경계해야 할 사항이다. 매장에 들어서니 반바지보다 하얀, 백바지가 눈에 들어왔다. 오토바이를 타면서 입으며 어울릴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토바이는 패션이 중요하다. 그냥 중국집의 배달용이나 퀵서비스용 오토바이가 아니라, 라이딩을 즐기는 할리데이비슨이라 패션이 엄청 중요한 것인데, 백바지를 산 건 결과적으로 낭패였다.
충동구매가 강한 나는 무엇을 살 적에 항상 자신에게 묻는다. 내가 자신을 잘 알기 때문에 던지는 질문이다.
정말 살까?
진짜로 사?
확실해?
후회는 안 하겠지?
싸든 비싸든, 구매할 물건을 들고 이 질문을 자신에게 서너 번 던지고, 확실하다는 답이 생기면 사는 것이다. 오늘도 그랬다.
그렇게 자신에게 묻고 확실한 답이 생겨서 샀는데 매장에서 입어보지 않은 게 실수라면 실수다. 허리만 맞은 치수를 찾아서 집에 와서 입어보니 쫄쫄이바지에 미지가 짧은 골반바지였다. 할인매장에서 샀고 신용카드 영수증도 구겨서 버렸으니 무를 수도 없는 이치다.
아무리 보아도 도저히 입을 수가 없는 바지였다.
맞는 건 허리의 치수뿐이었다. 나는 지퍼를 올려보지도 않고 바지를 다시 벗었다. 너무 쫄쫄이바지라 벗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바지를 방바닥에 펴놓고 생각에 잠겼다. 팬티 바람으로 앉아서 생각하니 또 손해나는 짓거리를 했다.
학창 시절에 유행을 따라 당꼬바지(?)를 입을 버릇을 해서 그런지 나는 허리가 배꼽까지 올라오는 바지가 편하다. 아랫배가 적당히 나온 지금은 그 정도가 더 심하다.
입으면 배꼽 위에까지 올라가는 바지가 편한데 이건 미지가 아주 짧은 골반바지라 오토바이에 앉으면 금세 티셔츠가 빠지고 허리가 드러날 지경이다. 나이에 걸맞게 지금은 아랫배가 조금 나와서 미지가 긴 바지가 편한데 새로 산 백바지는 아니었다. 미지도 그렇고, 쫄쫄이바지를 입을 수가 없는 노릇이다. 아내에게 들키지 않은 게 다행이다.
당장은 버리지 못하고 또 옷걸이에 한동안 걸어주었다가 버려야 할 옷가지로 분류되는 게 자명한 일이다.
방바닥에 바지를 펴놓고 팬티 바람으로 앉아 생각했다.
당꼬바지라고 불렀다. 스텝이 많은 탱고를 출 적에 바짓가랑이가 발에 걸리지 않도록 입는 바지를 말하는데 이 바지의 유행이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들어오는 바람에, 발음이, 탱고에서 당꼬바지라는 이름으로 둔갑을 해서 건너온 것이지 싶다. 발목 부분은 나팔바지와 반대로 좁다. 발뒤꿈치가 겨우 들어갈 정도로 협소한데, 반해 허벅지는 상당히 넓어 소련군의 군복처럼 생겨 먹는 바지인데 우리가 학창 시절에 유행했다.
바지의 유행은 돌고 돈다.
언젠가는 또 당꼬바지가 유행할 날이 올 것이다.
치마로 변하지 않는 이상 바지의 유행은 변하는 데 한계가 있다. 요즘 아이들은 쫄쫄이바지에 발목이 다 드러날 정도로 짧게 만들어서 입는다. 그게 요즘 유행인 모양이다. 당꼬바지이거나 나팔바지 아니면 일자바지, 쫄쫄이바지. 바지의 유행은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미지에 대해서 더 세부적으로 말하면 골반바지에서 배꼽까지 올라오는 바지까지가 한계다.
내가 태어나기 이전에 아버지께서 만주에서 입었다는 바지 중에서 당꼬바지가 있었다. 할아버지께 받은 것이라고 했는데 거의 사십 년 전의 바지인데 모양이 당꼬바지였다. 그게 우리 학창 시절에 다시 유행했다. 오래전에 찍은 외국영화 중에서 흑백영화를 보면 당꼬바지를 입은 배우가 가끔 보이는데 그게 우리 세대 이전에 당꼬바지가 유행했던 세대다.
요즘은 쫄쫄이바지가 유행하는 모양이다.
가끔 결혼식장에 가서 보면 예복을 입은 신랑이 절을 할 적에 바지가 찢어지지 않을까 겁이 날 정도로 꽉 끼이는 바지를 입고 있다.
고등학교 다니던 시절에 친구들은, 당꼬바지를 입었다. 당시에는, 너 나 할 것 없이 패션에 민감했다. 그럴 나이였다. 군에 가기 전, 칠십 년대 후반이었으니 지금처럼 기성복은 거의 없고 전부가 맞춤집에서 맞추어서 입었던 시절이다. 우리는 맞춤집이라고 불렀다. 양복점은 비싸고 맞춤집이 가격이 만만했고 다들 단골로 가는 집이 있었던 시절이었다. 단골집에 가면 그 인간의 옷 입는 취향과 색깔을 골라서 권하곤 하던 시절이었고 외상에 할부로 갚는 것까지 가능한 단골들도 있었다. 지금처럼 신용카드라는 게 없으니 당연히 그랬다. 학창 시절에는 교복도 학교 앞에 맞춤집이 있어서 다 맞추어 입었던 시절이었으니 맞춤의 전성기였다.
무슨 테일러, 이런 간판을 심심찮게 볼 수가 있었다.
테일러는 재단사를 말하는데 양복점에 왜 테일러라고 간판을 붙였는지 모르겠다.
중학을 다닐 때까지는 유행에 민감하지 않았다.
중학생 교복은 기성복으로 파는 게 있었다. 다른 학교와 교복의 모양새가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등학교는 학교마다 교복의 모양새가 달랐다. 그래서 학교 앞에는 맞춤집이 있었는데 거기서 맞추어 입곤 했다. 요즘은 형편이 나아져서 모르겠지만 당시에는 교복을 삼 년 입도록 만들었다. 한번 맞추어 입으면 삼 년을 입도록 알아서 맞추어 주었다. 지금 생각난 것인데 교복의 옷감으로는 두 종류가 있었다, 엘리트와 스마트였다. 스마트는 약간 빛이 나고 엘리트 옷감은 빛이 나지 않는 대신에 재질이 부드러웠다.
일학년 때는 교복이 좀 크다. 헐렁한 교복을 일 년 입고 이학년이 되면 교복이 몸에 거의 맞다. 삼학년이 되면 교복이 몸에 꽉 끼인다. 그것도 당시의 멋이었다. 몸에 꽉 끼이는 교복을 입고 헐렁한 교복을 입은 일학년을 호통치는 모습을 학교나 울타리밖에서 심심찮게 볼 수가 있었다. 당시에는 고등학교에 들어가면 교련복이라는 게 있었다. 여학생이 치마가 아닌 바지로 통일된 얼룩무늬 복장이었는데 그것도 유행에 따랐다. 교련복을 나팔바지로 만들어서 입는 여학생도 있었다. 그런 여학생들은 껌을 좀 씹던 여학생이었다.
나는 껌을 좀 씹는 여학생을 선호했다.
공부만 하는 여학생들은 유행에 민감하지도 않고 좀 맹하다. 유머나 위트가 없고 곧이곧대로 말하는 게 재미가 없는 반면, 껌을 좀 씹는 여학생은 껄렁하게 말이 통했다.
나는 고등학교를 후기로 원서만 내면 들어가는 학교에 다녔고 남녀 공학이었다. 남학생 비율과 여학생 비율이 맞지는 않았지만, 면 단위에 하나밖에 없는 고등학교였다. 여학생이 훨씬 적었다. 당시에 농촌에서 교련복을 입은 여학생들은 선택받은 아이들이었다. 중학을 졸업하고 많은 여학생은 가까운 구미 공단으로 가서 당시의 속어로 공순이가 되었다. 나도 여자로 태어났다면 분명히 공단으로 가서 여공이 되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늘 말씀 하셨다.
네가 여자로 태어났으면 구미 공단에 가서 돈을 벌면 네 형 공부시키기가 수월했을 건데,
작은 집 애숙이가 월급을 받아올 때마다 그런 뉘앙스가 풍기는 소리를 하셨다. 그때는 어머니에게 남아로 태어난 것이 미안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왜 내가 번 돈으로 형이 공부해? 무슨 권리로? 형이 여자로 태어나서 공순이가 되어 나를 공부시킨다는 생각은 왜 못하셨을까?
당시에 농촌에는 돈이 귀했다. 작은 집 애숙이가 받는 월급은 그 모자라던 시절에 갈증을 해소하기에 딱 좋을 현금이었다. 애숙이가 받은 월급은 오빠인 진석을 고등학교부터 대구로 유학을 보내고 고작 전문대학을 다니는데 다 들어갔다. 작은 집 애숙이가 받아서 아주머니에게 주는 돈은 진석이 형에게 들어간다? 부모의 입장에 서서 보면 같은 자식이고 주머닛돈이 쌈짓돈이지만 자식들 입장에 서서 객관적으로 바라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출가하면 딴 살림이고 남인데, 하나는 희생되고 하나는 혜택을 누리는 것이다, 그 사실을 애숙이가 시집을 가고 나서 들었다. 작은 집 아저씨가 죽었을 때 빈소에서 애숙이가 소주병을 놓고 신세타령을 하는 말을 듣고 무릎을 쳤다.
“그렇게 번 돈을, 오빠, 그까짓 전문대학 다니는 데 탕진을 했어. 그게 우리 엄마야. 내가 오빠한테 받은 게 뭐가 있어?”
엄마인 작은 집 아주머니에게 불만이 희석된 말이었다.
애숙이는 나와 동갑으로 학교를 같이 다녔는데 생일이 석 달 빨라 누나이지만 나는 누라, 라고 한 번도 부르지 않았다.
그 말을 들으니 내가 아들로 태난 것이 어머니에게 미안하지 않았다. 나도 여아로 태어났으면 애숙이의 궤적을 밟았을 것이고 나중에 어머니에게 불만을 토로하는 애숙이 처지가 되었을 거다.
애숙이는 공순이가 되어서 산업체 위탁 야간 고등학교를 나온 게 고작이다. 그것도 애숙이가 열정이 있어서 그렇지. 다른 아이들은 거의 중졸이다. 내가 중학을 졸업하던 해에 우리 마을에서 여학생 일곱이 같은 날 졸업을 했다. 그중에서 무남독녀 외동딸로 태어난 경숙이만 바로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애숙이를 비롯하여 나머지는 모두 공단으로 가서 여공이 되었다.
칠십 년대 중반의 농촌 실정은 그랬다. 분명히 그런 시절이었다.
시인 기형도와 내가 동갑이다. 다른 점이라면 기형도는 죽었고 나는 살아서 그의 시를 읽는다는 점이다. 기형도의 안개 마지막 구절에,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 모두 공장으로 간다고 했다.
모두.
유독 그 모두에 힘이 실린다.
산업화 초기에는 그랬다.
그것도 면 단위에 중학이 있었으니 중학이라도 마친 것이지 더 척박한 산촌에서는 초등학교를 분교에서 졸업하면 여학생들은 연줄을 통해서 도회의 가정부로 가거나 집에서 살림이나 농사일을 거들며 놀다가 나이가 되면 공단으로 갔다.
남자아이들은 어떻게라도 가르치려고 면 소재지, 학교 부근에 방을 구해 자취를 시키거나 친척이 있는 만만한 도회로 유학을 보냈다. 당시에 그런 시절이었다. 부모님 없이 할머니 슬하에서 자란 아내도 그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진 못했다. 그래도 지금은 대학을 나온 년들보다 더 세상 물정에 밝다. 아내가 공부를 더 했다면 세상 물정과 이치에 더 밝을까? 그 물음에는 고개를 젓는다. 최소한 고등학교 졸업하는 학생보다 대학 정원이 더 많은 지금과는 판이한 시절이었다.
세상은 정말 많이 변했다.
산업화 사회를 거치면서 이렇게 바뀌기라곤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당시에 구미 공단에서는 삼천궁녀라는 말도 있었다. 지금은 노조의 극성에 문을 닫았지만 오리온 전자는 그런 여공이 삼천 명이라고 했다. 내가 군에 있을 때 들은 말이 있다. 구미에서 왔다고 하니, 한 선임이 말했다.
“야! 구미에서는 껌 하나만 있으면 공순이 둘을 꼬신다며?”
나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비굴하게 웃었다. 그 정도로 구미 공단에는 처녀가 많다는 말이다. 큰 공장에는 보통 천 명 단위였고 그 외 작은 공장에도 몇백 명은 있었던 시절이다. 고등학교 시절 구미 공단에 가면 늘린 게 그런 처녀들이었고 우리는 그런 처녀들의 자취방을 기웃거렸다.
아무튼, 나도 여아로 태어났으면 분명히 공장으로 갔을 것이다. 남자로 태어난 것이 어머니에게 미안했는데 애숙이의 말을 듣고 보니 전혀 미안하지 않았다. 그래서 남아로 태어나서 고등학교에 다녔고 좋은 대학에 갔느냐? 그 말에는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다. 고등학교에 다닐 적에 껌을 좀 씹는 계집애들과 노닥거리느라 대학은 근방에도 못 갔다. 그래서 대학을 다닌 놈들보다 삶의 질이 떨어지느냐? 철이 들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공부로 출세하기는 상당히 힘들었다. 고만고만하게 공부해서는 도토리 키재기다. 월등히 공부를 잘해서 무슨 고시에 통과했으면 모르겠지만 대학을 나온 놈이나 중학을 졸업한 놈이나 오십이 넘기고 보니 거기서 거기다.
공부는 뭐 하려고?
가끔 아이들에게 묻는 말이다. 그러면 주위에서 이상한 시선으로 본다. 항상 나는 아이들에게 공부하지 말라는 쪽에 서서 말한다.
우리가 자랄 당시에는 공부란 배를 곯지 않고 육체노동에서 피하는 방법으로 여겨졌다. 지금은 굶는 놈도 없을뿐더러 육체노동을 하는 놈이 없는 세상이 되었다. 천편일률적으로 공부를 시키는 우리나라의 교육제도가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짚는 사람이 없다. 오로지 시험을 치기 위해서 공부한다. 수학이 골치가 아프며 자질이 없어도 수학을 공부해야 한다. 그게 우리나라 교육이다. 내가 여태 살아오면서 학창 시절에 배운 미분이나 적분을 단 한 번도 써먹은 적이 없다. 학교에서 전혀 배우지 않은 유압기기로 밥을 먹고 산다. 당시에 미적분에 왜 그렇게 목을 매었는지 모르겠다.
학교에서 배운 건 지식이고 사람들은 지혜를 스스로 익혀서 그것으로 먹고산다고 했다. 학교를 어디까지 나왔나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공부해서 먹고사는 사람은 이 할이 채 되지 않는다. 그 성공하는 이 할을 빛내주기 위해서 팔 할의 엑스트라가 필요한 것이 공부다.
왜 남의 엑스트라가 되어야 하느냐?
공부를 때려치우고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하면 되지. 이 나이가 되면 공부를 한 년이나 배우지 않은 년이나 사는 게 거기서 거기다.
바지에 관해서 얘기하다가 너무 멀리 나갔다.
새로 산 백바지를 펴놓고 팬티 바람으로 앉아 교육 문제까지 들먹였으니 정말이지 인간의 생각은 어느 틈으로 파고들어 이야기가 전개되는지 모르겠다. 이야기의 발달 과정을 역으로 추측해서 파고들면 본래의 이야기 진원지가 나올까? 결국 교육 문제를 구체적으로 파고 들어가면 백바지의 이야기가 나올까? 그럴 확률은 지극히 묽다.
아무튼, 새로 산 백바지는 도저히 입을 수가 없다. 아내 몰래 숨겨야 했다. 아내가 알면 또 뭐라고 핀잔이 날아올 것이 분명하다. 아내 보지 않는 내 방에서 입어 본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입을 수가 없는 바지라는 데 결론을 지었다.
아니다.
아랫도리, 허벅지 부분을 를 가위로 잘라서 아랫도리는 버리고 반바지를 만들어 입으면 어떨까? 한 번도 입지 않고 그냥 버리기에는 너무 아깝다. 그렇게 만들어두었다가 혹시 물놀이나 갈 일이 생기면 허벅지 부분이 꽉 끼어 오히려 펀할 수도 있겠다.
가위는 주방의 서랍에 있다.
너무 짤막하게 자르지 말고 무릎 위에까지만 잘라야지.
팬티 바람으로 주방에 가위를 찾으러 나갔다. 아내는 거실에서 텔레비전에 눈길을 주고 있었다. 뉴스도 아니고 토크쇼를 시청하고 있었다. 집에서 텔레비전은 아내의 전유물이다. 나는 내 방에서 유튜브를 보고 아들 녀석은 제 방에서 게임을 하니 텔레비전은 아내의 몫이다. 다른 집에서는 채널 쟁탈전도 한다는데 우리집은 예외다.
팬티 바람으로 나가서 주방 서랍의 가위를 꺼내 아내 몰래 숨기고 방으로 들어섰다. 아내는 이럴 땐 불편한 존재다. 새 바지를 자르다니, 아내가 알면 곤란한 사태가 발생한다. 방으로 들어가서 바지를 방바닥에 펴놓고 얼마나 잘라야 하나 눈대중으로 재단을 하고 있을 때 방문이 벌컥 열렸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가슴이 철렁했다. 아내는 매의 눈을 지녔다. 분명히 텔레비전에 눈길을 주고 있었는데 그걸 언제 눈치챘는지 모르겠다.
“바지를 샀는데 잘못 사서 쫄쫄이바지라 반바지로 만들려고.”
좀 더듬거렸던가? 아내는 성큼 들어와 펼쳐놓은 백바지를 낚아챘다.
“그렇게 자르면 언젠가는 다리가 잘려!”
어디서 들은 말인지 모르겠다. 아내는 금기사항이 많다. 아내와 살려면 그 많은 금기사항을 다 지켜야 한다. 밥은 먹을 적에 첫 숟가락부터 물에 말면 안 되고, 자고 나서 새벽에 엎드리면 복이 나가고, 아침부터 까마귀가 울면 재수가 없다면서 기어이 집 앞 전봇대 위에 앉은 까마귀를 쫓아내는가 하면, 심지어 내가 골동품 경매장에서 사 오는 물건은 잡귀가 묻어서 온다면서 소금을 뿌리는 지경이다.
아내는 바지를 살피더니, 여름 바지가 이렇게 하늘하늘하면 속옷이 다 비친다면서 물건을 보는 눈이 그렇게 없느냐고 핀잔을 주고, 어디서 얼마에 샀는지 물으면서 자신이 다른 바지로 바꾸어 오겠노라고 했다.
“송아지 물 건너갔어. 카드 영수증은 이미 버렸어.”
아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한숨을 옹골차게 내쉬더니 바지를 다시 입어보라고 했다. 무슨 대책이 있으려나? 나는 팬티 바람으로 일어서서 다시 바지를 꿰었다. 일어서니, 유리창 너머로 앞 골목의 전광판이 보였다. 법원 가까이 살아서 좋은 점은 없고, 보고도 싶지 않은 글귀를 눈에 거슬리지만 계속 보아야 했다. 앞 골목의 법무사 사무실 앞에 걸린 전광판에서는 파산, 이혼, 이런 문구들이 번갈아 나타난다. 삼 층인 내 방에서 보면 직선으로 보여 스트레스로 작용하는지라 항상 커튼을 드리우고 있는데 아내가 청소하면서 커튼을 걷은 모양이다.
앉아 있을 때는 몰랐는데 바지를 입으려고 일어서니 그게 보였다. 그걸 보면 군상들이 지닌 삶의 음부를 보는 것 같아 낯짝이 후끈거린다. 파산 이혼 파산 이혼 전광판의 글씨는 금세 금세 바뀐다. 혀에 착 감기는 질 좋은 언어가 아니다. 전자는 음산하고 후자는 스산하다.
“파산, 이혼.”
바지에 다리를 꿰면서 전광판에 나타나는 언어를 따라 읽었다.
“그게 무슨 소리요?”
“백바지를 잘못 사서 파산을 하고 그것 때문에 이혼을 했다? 저기, 그렇게 씌어 있네.”
아내는 앉은 자리에서 고개를 쳐들고 전광판을 보더니 그런 소리 하지 말라며 손바닥으로 종아리를 쳤다. 말이 씨가 된다는 말이다. 그러고는 난폭하게 커튼을 젖혔다. 금기사항이 또 하나 늘었다. 농담 덕분인지 아내는 크게 타박하지 않았다.
“당신 나이에 못 입는 바지야. 작은 집 선규에게 주면 되겠네.”
바지를 걸치자 돌아서 보라고 하고는 허벅지를 당겨보고는 엉덩이를 툭, 치며 아내는 대수롭잖게 말했다.
역시 매의 눈이다.
그 생각을 왜 못했을까?
정확한 답이 나왔다. 자를 게 아니라 작은 집 조카에게 주면 그 아이는 허리가 굵어 잘 맞겠다. 잘라서 반바지를 만들더라도 언제 입을지 모르는 바지다. 아내는 바지를 둘둘 말아서 가위와 함께 들고 나갔다.
숙제가 끝난 기분이었다.
“너는 옷을 벗어 옷걸이에 걸어두었는데 옷이 혼자서 까부냐?”
형이 군에 있을 적이었다. 나는 아직 입대하기 전이었는데 형이 휴가를 나와 군복을 벗어 벽에 걸면서 벽에 걸린 내 옷을 보고 한 말이었다.
옷이 혼자서 까분다?
군인이었던 형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던 모양이다. 당시 다 맞춤집에서 맞춘 옷인데 유행에 민감했던 나는 유행을 따라 맞춘 발목까지 오는 코트와 당꼬바지였다. 물론, 단골 맞춤집에서 외상에 할부로 취향대로 맞춘 옷이었다. 가끔은 친구들과 바꾸어 입기도 했다. 말년 휴가를 나온 형의 눈에는 그게 생소하게 보였던가, 옷이 혼자서 까분다고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에 갈 때까지 그런 옷을 입었다. 군복만 보았던 형의 눈에는 생소한지 몰라도 친구들은 다 그런 옷을 입고 다녔다.
나는 당시에 입었던 옷이 아직도 눈에 삼삼하게 떠오른다. 발목까지 오는 코트와 당꼬바지를 입고 백구두를 신었다. 옷을 입고 다니는 게 아니라 멋을 걸치고 다녔다. 그런 복장을 하고 친구들과 구미 공단에 나가면 삼 교대 통근 버스를 타고 지나가던 간덩이가 살짝 부은 계집애들은 차창을 열고 소리쳤다.
야! 날라리, 누굴 꼬시러 다니냐?
당시에는 남의 이목을 끄는 게 짜릿하고 재미있었다.
당시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구미 공단에 취직한 친구들이 더러 있었다. 그들을 두고 우리는 공돌이라 불렀다. 그런 친구들을 찾아가 술을 얻어먹곤 했다. 구미 공단에 나가는 목적은 바로 그것이었다. 임도 보고 뽕도 따고.
그런데 군에 갔다가 제대를 하고 오니 입을 옷이 없었다. 눈높이가 달라졌는지 모두가 유치하기 짝이 없는 옷이었다. 이런 옷을 어떻게 입고 다녔나 싶었다. 제대하고 며칠간은 입을 옷이 없어서 군에서 받은 예비군복을 걸치고 다녔다.
여태 살면서 나는 아내가 사다 주는 옷을 입어본 적이 없다.
시대는 흘러 맞춤집이 기성복에 밀려 사라지고 나서도 속옷 이외의 바지와 티셔츠는 내 취향대로 내가 직접 사서 입는다. 지금은 양복점조차도 찾아보기 힘들다. 유명 브랜드에서 기성복이 너무 잘 나오기 때문이다.
옷을 까다롭게 입는다고 이죽거리며 불평을 하는 아내는 내 취향을 모른다. 내 취향도 시대에 따라 자꾸 변한다. 그게 나이를 먹는다는 증거일 것이다. 예전에는 청바지를 쳐다보지 않았는데 요즘은 청바지가 편하다. 꼭 청바지가 아니더라도 다림질할 필요가 없는 면바지를 입는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입을 정장을 제외하고는 청바지나 면바지에 티셔츠를 입고 재킷을 걸치면 가장 편하다. 현장에 나가도 눈에 띄지 않고 일을 하다가 급하게 관공서에 가도 역시나 눈에 거슬리지 않는 복장이다. 재킷을 걸치는 이유는 주머니에 든 것이 많기 때문이다. 한여름에도 나는 손가방을 들기가 싫어 재킷을 걸친다. 핸드폰과 지갑 그리고 필기구 거기다가 여분의 담배와 명함, 최근에 와서 한가지 늘어난 것은 돋보기다. 점퍼 주머니에 넣으면 잘 빠지는데 재킷은 깊은 속주머니가 있어 편하다. 청바지에 그렇게 차려입는 게 가장 편하고 안정적이다. 한데 오늘 산 백바지는 물세탁을 하고 다림질을 하지 않아도 괜찮은 재질이라 샀는데 그 자리에서 입어보지 않은 게 실수라면 실수였다.
팬티 차림으로 에어컨 앞에 앉아 있으니 백바지가 눈에 삼삼했다.
아깝다.
오토바이를 타려면 청바지만 입는 게 아니라 백바지도 입어보는 게 좋을 듯하다. 백바지를 입고 오토바이를 타고 나들이를 모습이 눈에 그려졌다.
거실에 있을 아내를 불렀다.
아내와 애틋한 ‘사랑’은 없다. 이젠 식었다. 오로지 ‘무관심’이다. 그게 편하다. 세상에 무관심만큼 편한 게 있을까? 아내에겐 무관심으로 편한데 백바지는 무관심할 수가 없었다. 무관심해서, 편해서 아내를 부른 것이다.
아내는 무슨 일인가 하고 방문을 열고 서서 뜨악한 눈길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거, 백바지를 하나 사고 싶은데, 어디 가면 마땅할까?”
“갑자기 웬 백바지 타령이오?”
“오토바이 탈 때 입으려고, 당신 내 성질 알지?”
“마음만 먹으면 금세 급하다는 거? 지금 또 급하지?”
“아시네! 백바지가 눈에 삼삼하다는 거.”
아내는 아울렛을 들먹였다. 김천으로 나가는 길목에 새로 생긴 대형 매장인데 한 번도 가보지 않았다. 그곳에 가면 골프웨어 전문점을 찾으면 거의 50%에서 많게는 70%까지 할인행사를 할 거라고 했다. 그런 곳에 가면 백바지는 아니더라도 옅은 미색의 바지들은 있을 거라고 했다.
“당신은 보지도 않고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같이 갈까?”
“잠깐만 내 성훈이 엄마에게 전화해보고. 갔다 와서 저녁 먹죠.”
아내는 내 성질을 안다. 마음을 먹었으니 사지 않으면 밥도 넘어가지 않을 거라는 것까지 안다.
아내는 거실로 나가 전화를 하는 모양새다.
성훈이 엄마는 아들 녀석의 친구 엄마다. 그 옛날 초등학교에 다닐 적에 학부모 모임에서 만난 모양인데 그녀가 그곳에서 새로 옷가게를 열었다는 언젠가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아내는 따라갈 모양새였다. 골프웨어 전문점에 가면 편한 바지가 있을 것이다. 아니다. 아내와 같이 가서 성훈이 엄마가 보는 앞에서 아내의 티셔츠나 하나를 골라서 계산대에 얹어 놓으면 거절할 수가 없고 예상치 못한 지출이 생긴다. 예상치 못한 지출이 아니라 배보다 배꼽이 클 수도 있는 문제다. 웬만한 물건은 아내의 눈에 차지 않는다. 그럴 수 있다. 보지 않아도 자명하다.
이거 큰일이다.
이 상황을 어떻게 극복한다?
난감해하고 있는데 침대에 던져둔 핸드폰에서 문자 메시지가 울렸다.
문자 메시지를 확인하는데 이렇게 반가울 수가.
번개?
번개!
고등학교 동기들 모임 중에서 산악회 회원들의 번개가 있단다. 이름하여 왜구 산악회다. 왜구를 쳐부수는 산악회가 아니라 왜관과 구미에 사는 동기들끼리 모은 산악회인데 총무 재량으로 가끔 번개 모임을 개최하는데 바로 한 시간 후란다. 이렇게 예고도 없이 문자 메시지를 날리는 게 관행이 되었다. 형편이 되는 친구들만 오라는 얘기다. 위치는 회원 중에서 한 친구가 운영하는 해물탕집이란다. 멀지 않은 곳이다. 걸어서 십오 분가량 걸리는 거리에 있다. 나는 항상 그 친구의 식당에 갈 적에는 운동 삼아 걸어서 간다. 주차장은 넓지만 한잔 걸치면, 돌아올 적에 대리운전을 부르기도 뭣하고, 차를 두고 걸어와서 다음날, 아침에 가지러 가는 형편이다.
백바지에 대한 미련이 싹 가시기에 충분한 모임이다.
친구는 곰삭을수록 좋다. 오래되어 서로를 너무나 잘 알기에 편하다. 이해타산 관계가 없으니 조심할 것이 없고 술이 잘 넘어간다. 그런 조건을 다 갖춘 자리다.
팬티 차림으로 거실에 나가니 아내는 성훈이 엄마와 전화로 수다를 떨고 있었다. 금방 만날 건데, 여자들의 수다는 제어가 되지 않는 모양이다. 앉아서 통화를 하는 아내의 엉덩이를 발로 툭툭 찼다. 돌아보는 아내에게 손목을 꼬아서 X자 표를 만들어 보였다.
“뭐라구요?”
전화를 끊지 않고 아내가 돌아보면 물었다.
“오늘 못가. 내일 간다고 해. 친구들 모임 있어. 번개야!”
“저녁은 먹고 들어올 거예요?”
“그럴 거야.”
아내는 무슨 말인지 알아들은 모양이다, 전화에 대고, 오늘은 못 간다네. 갑자기 모임이 생긴 모양이야, 그런 말을 하고도 수다는 계속되었다. 나는 방으로 들어와 청바지에 다리를 꿰면서 생각했다. 내일은 혼자서 오토바이를 타고 아울렛을 구경하겠노라고. 백바지가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하나 사고. 그런 생각을 하며 잠시 성찰했다.
내가 마음만 먹으면 너무 급한 거 아니냐고.
소유욕이 남보다 강해서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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