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시교
나 이제
그대에게로 가는 길
지워버렸다
반추하지 않으려고
생각까지도
지워버린다
그런데
잊는다 하면서도
힘겨운 건 왜일까
우리 모두 죄인이다 · 2
꽃다운 젊은 나이에 목숨 앗긴 우리의 아들
스물네 살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 군
혼자서 열악한 일터 지키다가 쓰러졌다
구의역 김군 사고 때도 어른들은 말했지
사람이 먼저고 청년이 희망이라고
그 약속 지키지 못한 우리 모두 죄인이다
비정규직 없는 일터 사람대접 받는 사회
컵라면 한 끼니라도 편히 먹는 밝은 하루
그런 삶 누리게 해줄 몫 지키지 못한 죄인이다
ㅡ『서정과 현실』 (2019, 하반기호)
동행同行
내가 누군가의 기댈 언덕이
될 수 있다면
그의 상처 쓰다듬는 손길이
될 수 있다면
험난한 세상의 다리까지도
되어 줄 수가 있다면…
큰산
낙승落僧, 스스로를 꾸짖어 낮춘 삶이었다
누구 없이 배곯던 일제강점기 말 어린 시절 이 동네 저 동네 떠돌며 밥 얻어 배불리 먹는 문둥이들이 부러워서 허기 면하려고 그 무리들 따라 나섰던 이 절간 소머슴으로 들어가서 '나이는 열두 살 이름은 행자 한나절은 디딜방아 찧고 반나절은 장작 패고'* 적籍 없이 절간 살이 한참 동안 했던 이 그 몇 성상星霜 고작 시조 몇 편 소설 한두 편 쓰다가 늦게야 승적 올리고 가사 고쳐 입은 뒤에 소위 등단이라는 관문을 거쳐 승려시인이 된 이 늦게 설악雪嶽에 들어 그 산주山主가 되고 때로 '눈보라 몰아칠 때는 혼자 울기도 하는 큰 산'**이던 이
그 낙승 세수歲壽 여든일곱 산문山門 밖 먼 길 나서다
* 조오현 시조 '일색과후(一色過後)' 부문
** 홍사성 시조 '설악산' 부문
ㅡ『창작 21』(2019, 겨울호)
사람이 있어 세상이다
사람이 있어야 비로소 풍경이다
길이며
들판이며
산이고
강물 들이
그렇다
사람이 있어 온전한 세상이다
그리운 사람 1
어려운 때일수록 생각나는 사람 있다
독립된 우리나라에서 정부청사 문지기를 원했던 사람 아들에게 나라를 위해 떳떳이 죽으라고 권했던 사람 외국 출장을 마치고 남은 경비를 모두 되돌린 사람 평생 키워온 사업과 전재산을 사회에 환원한 사람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을 기린 사람 기꺼이 자신을 세상에서 가장 바보라고 자청하였던 사람
살만한 세상 만들려 한 그 사람들 그립다
ㅡ열린시학회 동인지『모서리를 걷다』(2019, 제8집)
박시교 : 1970년 《현대시학》등단. 시집 《겨울강》 《독작獨酌》 《아나키스트에게》 《13월》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