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아름다워(754) - 101년의 한국영화, 새로운 역사를 쓰다
며칠간 기승을 부리던 추위가 풀려 봄기운이 완연하다. 기세등등한 코로나바이러스에 밀려 외부활동을 삼간 체 빼앗긴 들에도 봄이 오는가의 시구가 적절한 들판을 휘돌며 새봄맞이에 나선다. 지난주까지 0도를 살짝 넘던 체육시설의 수은주가 10도를 가리키네.

추위 풀리고 포근한 오후, 산책길의 체육시설에서 몸을 푸는 주민들
인공지능 등 격변하는 4차 산업혁명에 대응하느라 골몰하는 때에 느닷없이 공격해온 바이러스 공포가 세상을 짓누른다. 전문가들은 21세기를 뒤흔든 바이러스의 침투를 기후변화, 세계화, 도시화가 원인이라고 꼽기도 한다. 국제민간항공기구에 의하면 2018년에 비행기로 이동한 세계인은 43억 명이고 계속 증가추세다. 인구 천만 명 넘는 도시가 수두룩한데 위생 상태가 낙후한 곳이 많고 고속교통망은 사통팔달이다. 14세기의 페스트 창궐, 1918년의 스페인 독감 등의 대유행병에 앞서서 여러 해 동안 냉해 등 기상이변이 발생하였는데 지금은 지구온난화 등의 이상기후가 새로운 위험요소로 등장하고 있다. 이들 변수는 바이러스에게는 호재이고 인간사회로는 악재, 변종바이러스는 앞으로도 계속 출현할 개연성이 있다. 나름의 분석,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의 본산인 중국의 감염자와 사망자의 급증추세(11일 현재 감염자 42,600명, 사망자 1,016명)는 멈추지 않는데 국내의 감염자 증가추세가 꺾이고 사망자가 없는 것은 한국사회 전반의 대처능력을 신뢰하여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어쩌면 우리가 모르는 사회 전반의 내공 덕분일지도. 이를 토대로 슬기롭게 위기를 극복하자.
여러모로 어수선한 때에 한국사회의 내공을 확인하는 낭보가 연이어 날아든다. 지난주 호주에서 열린 LPGA투어 ISPS 한다 빅 오픈 골프대회에서 한국의 낭자들 3명이 최종라운드에서 공동선두에 올라 연장접전 끝에 박희영(32세) 선수가 7년 무관의 부진을 털고 우승의 영예를 안았다. 3명 중 누가 우승하든지 한국여성골프선수의 저력을 확인하는 것이지만 오랜 슬럼프를 스스로 이겨낸 박희영 선수의 투지와 끈기가 장하다. 같은 장소에서 벌어진 유러피언투어 ISPS 한다 빅오픈에서는 호주 교포 이민우(22세) 선수가 생애 첫 우승을 차지하는 겹경사.

박희영이 9일 호주 빅토리아주 서틴스 비치 골프 링크스의 비치 코스에서 열린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 ISPS 한다 빅오픈에서 우승한 뒤 동료 선수들로부터 샴페인 세례를 받고 있다. 박희영은 2013년 이후 7년 만에 LPGA 우승을 맛봤다.
이어진 월요일(2월 10일), 미국의 할리우드(LA 돌비극장)에서는 제92회 아카데미(오스카) 시상식이 열렸다. 칸 영화제와 골든글러브에서 수상의 영예를 안은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작품상 등 6개 부문의 수상 후보로 지명되어 한껏 기대에 부푼 상황, 종편방송이 독점중계를 예고하여 오전 10시부터 생중계로 지켜보았다. 시상분야는 24개, 초반에 기대를 모은 각본상에 기생충이 호명되어 기세를 올리더니 잠시 후 국제장편영화상에서 다시 수상의 영예를 안아 흐뭇하였다. 문외한인 나로서는 2개의 영예로운 수상만으로도 대만족인데 수상행렬은 아직 끝이 아니다. 후보로 지명된 편집상, 미술상을 건너뛰더니 명장들이 즐비한 감독상에 봉준호 감독이 호명되어 축제분위기, 대망의 작품상에 다시 기생충이 뽑히니 완전히 흥분의 도가니다. 101년 역사의 한국영화, 큰 빛을 발하다.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받고 환호하는 봉준호 감독과 멤버들
상업영화를 대표하는 최고권위의 아카데미상은 92회째, 한국영화는 1962년 신상옥 감독의 사랑방손님과 어머니를 시작으로 꾸준히 아카데미상에 도전했지만 후보에 지명된 것도, 수상에 성공한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그것도 비영어권에서 처음 받은 작품상을 비롯하여 감독상, 각본상 국제장편영화상 등 비중이 큰 4개 부문을 휩쓰는 쾌거가 경이롭다. 봉준호 감독의 겸손하면서도 재치 있는 수상 소감,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라는 신조로 임했다.(시상식에 동석한 노장감독 마틴 스코세이지의 어록을 인용하여 경의를 표하면서) 영감을 준 아내, 대사를 멋지게 화면에 옮겨준 배우, 호흡을 맞춘 제작진 모두에게 감사드린다. 함께 후보에 오른 감독들과 이 상을 나누고 싶다.’ 공동 프로듀서로 참여한 곽신애 대표는 작품상을 받은 후 '지금 이 순간 상상도 못한 역사가 이루이진 기분이다. 아카데미 회원분들에게 경의와 감사를 드린다.'는 소감을 피력하였고. 시상식 자체가 한 편의 드라마다.
중계 도중 일본의 지인으로부터 메시지가 떴다. 답신에 덧붙인 내용, ‘지금 아카데미 시상식 생중계 중인데 기생충의 봉준호 감독이 각본상을 받았네요. 작품상 등은 아직 미발표.’, 돌아온 답, ‘잘 하였네요. 기생충은 일본에서도 개봉했는데 자랑스럽습니다.’ 중계 끝난 후 그에게 ‘기생충 작품상 까지 4관왕, 92년 오스카 역사를 새로 썼다’는 인터넷 기사를 송부해주었다. 아무래도 일본에서는 상세한 실황을 접하지 못할 듯하여. 오후에 아들과도 통화, ‘아카데미 시상식을 보는 3시간 반 동안 행복하였다. 내공을 기르며 맡은바 직무에 충실하라.’
기대를 뛰어넘은 아카데미의 환희를 접하며 1998년 외환위기 때 박세리 선수가 US 오픈 LPGA 대회에서 맨발의 투혼으로 우승하여 실의에 빠진 국민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어준 일, 2002 한일월드컵에서 꿈같은 4강에 올라 행복과 희열을 만끽한 옛 일이 떠오른다. 폐허에서 낙원으로, 빈곤에서 번영을 일군 저력으로 내외에 산적한 과제를 헤쳐나가자.
* 주말에 일본의 작가 겸 교육전문가로 활동하고 있는 사이토 다카시의 저서, ‘한 줄 내공’을 읽었다. ‘가슴에 품은 한 줄의 글이 나를 성장하게 한다’는 지론을 바탕으로 선현들의 이야기를 가슴에 담고 명언을 새기며 내공을 기른다는 내용, 그 중 한 문장이 마음에 닿아 아내에게 읽어주었다.
‘인간의 대지를 쓴 생텍쥐페리는 인간의 중요한 덕목으로 타인의 삶에 대한 책임감과 연대의식을 들었다. 생텍쥐페리의 절친한 친구로 알려진 앙리 기요메는 한겨울에 안데스산맥에서 조난을 당했다가 불굴의 의지로 살아 돌아왔다. 당시에 동료들은 그가 실종된 지 50시간이 지난 상태였고 겨울의 안데스산맥은 사람이 걸어 다닐 수 없을 만큼 험준했기 때문에 당연히 죽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그러한 판단은 잘못된 것이었다.
안데스산맥에 홀로 남겨진 기요메는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사력을 다했지만 결국 포기하고는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눈밭에 드러누웠다. 그 순간 섬광처럼 혼자 남겨질 아내가 생각났고, 자신의 보험증서로 아내의 삶을 지켜주기 위해 전방 50미터 앞에 솟아 있는 바위까지만 걸어가기로 마음먹고는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내딛었다.(당시에는 사람이 실종되면 공식적인 사망은 4년 뒤에 확정되며 그때까지는 보험금을 지급받을 수 없었다. 기요메는 자신의 시신이 쉽게 발견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바위 위에 누우려고 했다.)
그러한 발걸음이 그를 생명의 길로 이끌었고, 결국은 무사히 돌아오는 기적이 일어났다. 이러한 기요메의 일화를 통해 생텍쥐페리는 극한 상황에서 인간의 위대함이 발휘되는데 그러한 힘의 원천은 누군가를 향한 사랑과 책임감이라는 점을 이야기한다.’ 이 세상에 만만한 사람은 없다는 것이 아내의 지론, 우리 모두 누군가를 위한 사랑과 책임감의 자질을 지닌 인격체이어라.
첫댓글 이른 아침, 감동적인 글 감사합니다.
오늘 하루도 희망차게 시작할 수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