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답 행선지
개학을 닷새 앞둔 일월 말이다. 나는 한 달 간 방학에 들면서 어디를 답사할 건지 미리 메모를 해 놓았다. 앞뒤 순서가 바뀌긴 했지만 행선지를 다녀오면 금을 그어 가면서 그날그날 일정을 소화했다. 중간에 겨울비가 부슬부슬 내려도 내가 걷는 발걸음은 멈출 수 없었다. 그런데 대한 이후 매서운 한파가 찾아와 발길이 주춤해졌다. 나는 길을 나서고 싶은데 누가 만류해서 그렇다.
주말엔 대학 동기들과 청도에서 1박 2일 일정이 잡혀 있고, 다음 주 초엔 부산 형님 문병을 다녀올 예정이다. 연이어 온천장 목욕을 한 차례 다녀오면 방학이 종료된다. 그러니 이번 주로 사실상 방학이 끝나는 셈이다. 내가 방학 들면서 적어둔 답사 예정지 가운데 못 들린 곳이 세 군데다. 이 세 곳은 갑자기 찾아온 한파로 발길을 미적대서였다. 설 이후 봄방학으로 넘기면 되려나.
미답의 행선지 가운데 조계산이 있다. 생활권과 제법 떨어진 순천에 있는 산으로 동쪽에는 선암사와 서쪽엔 송광사를 품은 산자락이다. 해발고도가 천 미터는 넘지 않지만 당일치기로 가능한 산행코스다. 창원중앙역에서 열차를 이용하면 시간이 빠듯하다. 마산 합성동 시외버스 터미널로 가 아침 이른 시각 출발하는 순천행 버스를 타면 두 시간 남짓 걸려 섬진강 건너 순천에 닿는다.
그곳 버스터미널에서 송광사로 버스를 타면 주암호를 돌아 산문 입구에 내려준다. 일주문을 지나 절간 경내를 둘러보고 조계산 등반에 나서면 된다. 계곡 물웅덩이엔 빙판이 져 있지도 모르겠다. 밋밋한 산등선을 따라 오르면 굴목재를 앞둔 보리밥집에서 소진된 열량을 보충해 선암사로 넘어간다. 선암사를 둘러보고 소나무길이 운치 있는 산문 입구로 나가 시내로 가는 버스를 탄다.
조계산 산행에 세 시간 남짓 걸릴 테고 두 절에서 순천 시내로 오가는 시간도 넉넉히 잡아야 한다. 귀로 역시 열차 운행 시각과 맞지 않기에 시외버스를 타야 한다. 아마도 아침 일찍 서둘면 선암사에서 순천 시내로 들면 해는 뉘엿뉘엿 저물어 어둠이 깔린 것이다.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마산행 표를 구해 놓고 간단한 저녁 요기를 하고 출발하면 저녁 아홉 시 전후 마산에 닿을 것이다.
나서지 못한 걸음으로 통영 미륵산이 있다. 이곳 역시 시외버스로 이동해야 한다. 합성동이 아닌 월영동 남부터미널로 가야 한다. 그곳서 통영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고성을 지난 통영에 닿는다. 케이블카나 루지는 관심 없다. 시내버스로 미륵도로 건너 용화산 앞에 내려 절간을 둘러보고 인적 드문 고개를 넘어 미래사로 간다. 효봉선사와 그의 제자 법정 스님도 한 때 머문 절간이다.
미래사에서 산등선을 넘어 박경리 선생 묘소와 기념관을 둘러본다. 다도해의 올망졸망한 여러 섬들이 손에 잡힐 듯 눈앞에 와 닿지 싶다. 양식장 하얀 부표가 뜬 바다는 얼마나 새파랄 것인가. 그 산등선에서 배낭에 넣어간 도시락을 비우고 박경리 선생 묘소로 내려가면 된다. 묘역 일대를 둘러보고 산양 읍내까지 걸어 통영 시내로 들어가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마산행 버스를 타면 된다.
마지막 한 곳은 창원에서 멀지 않은 함안 무릉산 장춘사다. 북면 무동에서 건너가도 될 만큼 가깝다. 자동차로 가면 절간 입구까지 바싹 다가가나 나는 그렇지 못하다. 마산 합성동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칠원 운곡으로 가는 농어촌버스를 타야한다. 하루 몇 차례 밖에 다니질 않는다. 운곡마을에서 인적 드믄 포장도로를 따라 장춘사에 닿는다. 절간과 속세를 경계는 대나무 사립문이다.
신라 하대 무염국사가 창건한 장춘사는 아주 조용하고 소박한 절이다. 대웅전 뒤 약사전 불상은 석불에다 금박을 입혀놓았다. 약사전 곁에 이름난 약수터는 가뭄에 말랐는지 추위에 얼었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절간을 나가 무릉산 정상 등반은 산길이 가팔라 마음을 접고 길고 긴 임도를 따라 소목마을로 향한다. 중간에 볕바른 자리에서 배낭의 도시락을 비우고 북면 무동으로 걸으면… 18.0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