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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29일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사도행전 12,1-11 2티모테오 4,6-8.17-18 마태오 16,13-19
외롭든지, 불편하든지!
이번 코로나 사태 이후, 앞으로는 ‘비대면 사회’가 될 것이라는 전망을 많이 내놓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비대면으로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인간이 본성상 사회적 동물임을 간과한 채 쏟아내는 예측입니다.
지금 코로나가 장기화하는 이유 중 하나는 이제 사람들이 집에서 버티는 것이 한계에 다다랐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사람과 대면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한 자매님이 상담을 원해 들어주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상처받아 직장을 그만두고 집에만 있다 보니 우울증에 걸리게 된 것입니다.
우울증 증세 안에는 세상에 나 혼자라는 외로움도 들어있습니다.
사람은 관계를 맺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혼자 있어도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더 심해지면 귀신도 볼 수 있고 환청도 들을 수 있습니다.
인간의 본성은 관계를 맺고 싶어 하는데 사람과의 관계를 단절해버리면 저절로 마귀와도 관계를 맺게 됩니다.
제가 보좌 신부로 어떤 본당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그날은 비가 억수같이 왔습니다.
오전 10시 미사를 마치고 신자분들과 인사를 하고 성당 로비에는 저 혼자만 있었습니다.
사제관으로 들어가려 하는데 한 자매님이 비를 홀딱 맞고 머리를 귀신처럼 늘어뜨리고 성당으로 들어왔습니다.
제 앞으로 오더니 뜬금없이 상담하자고 하였습니다.
자신 안에 마귀가 있는데 그 마귀가 지금 성당에 들어가면 보좌 신부 혼자 있을 것인데 상담을 하고 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서울 사는 사람이고 신자도 아니고 그냥 지나는 길이였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집무실로 들어가 문을 열어놓고 상담을 하였습니다.
그냥 상태만 보아도 노처녀에 경쟁심이 클 것으로 보였습니다.
예쁘기는 했지만 무서운 사감 선생님처럼 생겼습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분은 보험설계사로 나름 잘 나가고 있었습니다.
남에게 지는 것을 싫어하였고, 특별히 남자들에게 지는 것을 싫어하였습니다.
다른 것은 부족함이 없는데 ‘외로움’ 때문에 마귀를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합니다.
종교는 없지만, 그 존재가 마귀인 것은 안다고 하였습니다.
그 마귀와 심지어 잠자리까지 함께한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갑자기 서울 어디 사는지가 궁금하여, “아까, 잠실에 사신다고 하셨나요?”라고 물으니, 남자의 거친 목소리로 바뀌며 눈을 매섭게 뜨고 소리치듯 말했습니다.
“제가 언제 잠실이라고 했어요, 목동이라고 했지.”
자신이 한 말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해 화가 난 것입니다.
저는 좀 무서웠지만 위축되면 안 되기에, “아니, 그럼 자매님은 한 번 들으면 다 기억해요?”라고 따졌습니다.
그랬더니 “아뇨.”라고 하며 인정하였습니다.
저는 이럴 때마다 말해줍니다.
마귀는 자신이 끌어들이는 것이라고.
외로워서 스스로 마귀와 친구가 되는 것이라고.
우리 선택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외롭든가, 불편하든가.”
분명 사람을 만나는 일은 불편합니다.
혼자 있으면 편합니다.
세상은 경쟁의 시대이고 그렇게 사람을 경쟁자로 보게 만듭니다.
그렇게 혼자가 되고 몸은 편합니다.
그러나 마귀와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마귀와 친구가 되는데 어떻게 외롭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분이 보이기 시작하면 엄청 불편합니다.
혼자 있을 때도 혼자가 아니게 됩니다.
그분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그 불편의 정도가 달라집니다.
오늘은 베드로 사도와 바오로 사도 대축일입니다.
그분들은 매 순간 하느님과 함께 머무는 삶을 살았습니다.
베드로만이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알아보았고, 바오로만이 눈에서 비늘이 떨어지며 항상 주님께서 자신과 함께 계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불편한 일입니까?
그러나 그 불편을 감수하지 않으면 영원히 외롭게 살아야 합니다.
어린이들을 받아들이던 수도회가 있었습니다.
스승은 그 작은 수사님들 중 한 아이만 특별히 사랑하였습니다.
이에 다른 아이들의 불만이 컸습니다.
그래서 스승은 각자에게 참새 한 마리씩 주며
아무도 안 보는 곳에서 죽여 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야 수도원에 머물게 해 주겠다고 합니다.
다들 으슥한 곳을 찾아 참새를 죽여왔습니다.
그 작은 아이만 못 죽이고 참새를 살려서 가져왔습니다.
왜 죽이지 못 했느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무리 아무도 없는 으슥한 곳을 찾아도 주님께서 보고 계셔서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다른 모든 수사는 왜 원장이 그 아이만 사랑하는지를 그제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전쟁터에서 참호에 수류탄이 떨어지면 군인들은 분명 어떠한 행동을 하게 될 것입니다.
다시 집어던지던지, 피하든지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아이라면 수류탄이 떨어져도 그러한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심을 볼 줄 아는 눈을 가진 이도 이와 같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행동을 하지 않고는 살 수 없습니다.
그렇게 사신 분들이 성인들이시고, 오늘 특별히 공경하는 베드로 사도와 바오로 사도입니다.
외롭든지 불편하든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주님을 하느님으로 인정하며 온종일 불편한 삶을 산다면 외로움에 빠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6월29일 [성 베드로와 바울로 대축일]
복음: 마태 16,13-19
주님, 보십시오. 당신 없이는 참으로 비참한 제 인생입니다!
오늘 우리는 가톨릭교회라는 건물의 주춧돌이 되신 두 사도 베드로 바오로 사도의 축일을 경축하고 있습니다.
두 분은 살아생전 보여준 복음 선포를 향한 놀라운 헌신과 열정, 주님을 향한 극진한 사랑을 인정받아
이제는 하늘나라의 별 중에서도 가장 빛나는 별이 되시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천국 문의 열쇠를 지닌 관리인으로, 바오로 사도는 이방인의 사도요 탁월한 말씀 선포자로 역사에 길이 남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대단한 베드로 바오로 사도이지만, 한때 두분 다 스승님과의 관계 안에서 영원히 기억 속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흑역사, 잠잘때마다 ‘내가 그때 왜 그랬지?’하면서 이불킥을 계속해야만 하는, 아픈 기억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으로부터 게파, 즉 반석이란 말을 들을 정도로 신뢰받던 수제자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능동의 시기가 지나가고 수동의 때가 된 어느 날, 정말 잘 나가던 그분께서
한없이 나약한 한 인간 존재로 추락하는 그 날,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는 것을 파악한 베드로 사도는, 여지없이 스승님을 버렸습니다.
결정적인 순간, 세 번 씩이나 스승님을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베드로 사도 못지않았습니다.
회심 이전 그는 예수님과 신생 그리스도교 교회를 박해하는 데 있어서,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앞장섰던 사람이었습니다.
결정적인 회심을 하게 된 그 날도 사실 어딘가에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우글우글 모여있다는 첩보를 듣고, 싸그리 체포하려고 달려가던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배반한 사람, 자신을 박해하는 데 가장 앞장섰던 사람을
가장 가까운 제자로 부르시고, 그 배반, 그 박해에 대해 조금도 개의치 않으시고, 그럴수록 더 큰 사랑을 베푸시며, 지속적인 스승 제자 사이를 맺으시며, 가장 큰 직무를 맡기셨습니다.
두 핵심 사도의 흑역사는 초세기 교회 안에서 정말이지 감추고 싶었던 큰 오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특별한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일 한 가지는 이 두 사도의 흑역사에 대해 성경과 교회 전통은 전혀 감추지 않았습니다.
보통 세상의 조직이었으면, 벌써 두 분의 흑역사를 몇 번이고 세탁했을 것입니다.
성경에서도 싸그리 삭제해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 사가들을 비롯한 성경 저자들의 서술은 냉정하기만 합니다.
두 사도의 감추고 싶은 부끄러운 흑역사를 있는 그대로 기술했습니다.
교회의 초석이 된 두 위대한 인물의 얼굴에 먹칠하지 않기 위해, 우회적으로, 혹은 완곡한 표현으로 기술할 만도 한데, 성경 저자들은 전혀 그런 기색이 없습니다.
일체의 옹호나 왜곡 없이 있었던 사건을 그대로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저자들의 의도에 대해서 묵상해봅니다.
두 분의 흑역사 통해서 우리는 나름대로 한 가지 진리를 체득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하는 모든 일, 인간의 언약, 인간의 역사, 인생의 모든 각본은 한순간에 완전히 뒤바뀔 수 있다는 진리 말입니다.
가장 높은 지위에 올랐던 베드로였지만, 순식간에 가장 낮은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십시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저만은 결코 주님을 배반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지만, 단 몇 시간 만에 세 번씩이나 주님을 배반했습니다.
그토록 기고만장던 그가 단 몇 시간 만에 완전히 찌그러집니다.
금강석보다도 더 단단했던 그의 언약은 쥐도 새도 모르게 자취를 감추고, 철저한 배신에 따른 수치심과 죄책감, 부끄러움만이 그를 휘감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매일 필요한 자세는 ‘지속적인 겸손’ 입니다.
“주님, 이 연약한 인간을 보십시오.
천국을 살다가도 일순간에 지옥으로 떨어지는 이 가련한 인간을, 시시각각으로 배신을 거듭하는 이 불충실한 인간을….” 그래서 늘 우리에게 필요한 기도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라는 기도입니다.
“주님, 보십시오. 당신 없이는 참으로 비참한 제 인생입니다.
그렇지만 아시다시피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제게는 이제 주님 당신밖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직 당신만이 제 삶의 의미입니다.
당신만을 신뢰합니다.”
예수님은 완전히 붕괴된 한 인격을 사랑으로 다시 일으켜 세우십니다.
평생 따라다니게 될 죄책감과 좌절감으로부터 한 인간을 사랑으로 다시 건져내십니다.
무너질 데로 무너진 폐허, 완전히 맛이 간 반석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 그 위에 다시금 새로운 교회를 건설하십니다.
때로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심연의 바닥으로 떨어트리십니다.
바닥에서 겪게 될 고통이 만만치 않겠지만, 그 바닥에서 우리는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정화의 과정을 거칩니다.
그 과정에서 사랑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헤매고 있는 그 바닥까지 내려오십니다.
우리에게 손을 내미십니다.
우리를 건져내십니다.
재창조하십니다.
그래서 때로 인생의 가장 밑바닥이야말로 하느님 자비를 확실히 인식하게 되는 은총의 꼭지점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강론>
(2024. 6. 29. 토)(마태 16,13-19)
<반석이 될 것인가? 걸림돌이 될 것인가?>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6,15-19)”
1)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일에 대해서, “교회의 반석으로 임명 받은 사도가 어찌 그럴 수가 있는가?” 라고 말할 수도 있고, “그렇게 위대한 사도가 그럴 정도였으니......” 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무엇에 초점을 맞추느냐에 따라서, 표현이 다르게 되고, 부각시키는 점이 다르게 되고, 그 일에 대한 판단이 다르게 됩니다.
“어찌 그럴 수가 있는가?”는, 베드로 사도의 잘못에 초점을 맞춘 말이고, 그의 부족했던 점만 부각시킨 말입니다.
만일에 그렇게만 말하고 그친다면, 그는 전체 교회를 다스릴 자격이 없다고 일방적으로 판단하는 데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위대한 사도가 그럴 정도였으니......” 라는 말은,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에 초점을 맞춘 말이고, 사도들이 맞서기에는 십자가 수난이 너무나도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었음을 부각시키는 말입니다.
그리고 베드로 사도가 당신을 세 번이나 부인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그를 교회의 반석으로 임명하신 일과 그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신 일을 취소하지 않으셨다는 것에 연결시키면, 베드로 사도의 잘못은, 그의 자격을
문제삼을만한 일은 아니었다고 해석할 수 있게 됩니다.
2) 따라서 베드로 사도가 교회의 반석으로 임명 받은 일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일에 연결할 일이 아니라, ‘걸림돌’이라고 혼난 일에 연결해서 생각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시어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 16,21-23)”
여기서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는, “주님, 그러시면 안 됩니다.” 라고 말리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사탄이라고 부르신 것은, 그의 행동이 사탄의 행동과 같다는 뜻입니다.
“내게서 물러가라.”는 “내 뒤로 가라.”,
즉 “제자의 본분을 지켜라.”입니다.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라는 말씀은, 그의 행동은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된다는 뜻입니다.
<제자로서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을 뒤따라가면 ‘반석’이 되고, 앞에서 가로막으면 ‘걸림돌’이 됩니다.>
베드로 사도가 무슨 사심을 품고 예수님을 가로막은 것은 아니고, 스승에 대한 사랑과 존경심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인데, 그것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구원사업은 생각하지 않고 인간적인 감정만으로 행동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일만 생각하면 반석이 되고, 인간적인 감정만 앞세우면 걸림돌이 됩니다.>
3) 바오로 사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하필이면 그런 박해자를 사도로
삼으셨을까?” 라고 말할 수도 있고, “예수님께서 그런 박해자를 위대한 사도로 변화시키다니, 놀라운 일이다.” 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박해자였다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면, 하느님의 섭리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외면하는 일이 되고, 그가 위대한 사도였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면, 하느님의 섭리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의 위대함을 부각시키게 됩니다.
4) 베드로 사도가 처음부터 완벽한 반석이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과 바오로 사도가 처음부터
위대한 사도였던 것은 아니라는 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이 되면서 동시에 큰 위안을 주는 일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반석이었는데, 잠깐 걸림돌이 되었다가, 다시 반석으로 회복되었습니다.
누구든지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지금 반석과 같이 단단하고 강하게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더라도, 언제 추락해서 걸림돌이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반대로 지금 걸림돌처럼 살고 있어도 회개해서 반석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래서 참으로 반석인지, 나쁜 걸림돌인지는
‘끝까지’ 가봐야 압니다.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 운명 같은 것은 없습니다.
운명은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부르심에 응답하는 일은, 한 번에 끝나는 일이 아니라, 날마다 끊임없이 해야 하는 일이고, 최선을 다해서 끝까지 해야 하는 일입니다.>
또 바오로 사도를 생각하면, 우리가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자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는(마태 5,44) 이유를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박해자도 회개하면 위대한 사도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