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나에 결정된 역사
미국은 중공이 진먼에 상륙(上陸)한다면 본토(本土)에 핵(核) 공격도 불사(不辭)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고 대만에게는 상호방위조약(相互防衛條約)을 체결(締結)해 주겠다는 당근을 제시(提示)해 응전(應戰)을 자제(自制)시켰습니다.
여담(餘談)으로 한국전쟁 때부터 수시(守視)로 가해지던 미국의 핵 공격 위협(核攻擊威脅)은 중공에게 가히 노이로제(神經症, Neurosis)였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하겠다는 의미(意味)가 아니라 일종의 심리적 공세(心理的攻勢)였는데,
이는 역설적(逆說的)으로 중공의 핵 무장(核武裝)을 촉진(促進)시킨 원동력(原動力)이 되었습니다.
↑진먼섬에 구축된 방어용 지하 터널
그러던 1958년 이집트(Egypt) 주도(主導)로 반서방 성향(反西方性向)의 통일아랍공화국(統一共化國, United Arab Republic(U. A. R.)이 성립(成立)되고 이라크(Iraq)에서도 혁명(革命)으로 왕정(王政)이 물러났습니다.
이틈을 노려 중동(中東)으로 진출(進出)을 모색(摸索)하던 소련의 움직임이 활발해지자 미국의 관심(觀心)은 중동에 집중(集中)되었습니다.
마침 그해 북한 주둔(駐屯) 중공군도 철군(撤軍)을 완료(完了)한 상황(狀況)이어서 마오쩌둥은 진먼을 정복(征服)할 기회(幾回)가 되었다고 판단(判斷)했습니다.
한국전쟁에서 그랬던 것처럼 막상 미국이 핵 공격은 하지 못할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마지막 중공군 철군 부대의 압록강 통과 전 모습
중공군은 대대적인 포격(砲擊)으로 대만의 방어선(防禦線)을 무력화(無力化) 한 후 속전속결(速戰速決)로 상륙(上陸)을 감행(敢行)해 섬을 점령(占領)할 생각이었습니다.
마침내 1958년 8월 23일 오후 6시, 포성(砲聲)이 울리며 제2차 해협 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개전 당일(開戰當日)에만 5만 발을 사격(射擊)했을 만큼 중공군의 공격(攻擊)은 거셌지만, 대만군도 1만 2천여 발의 포탄(砲彈)을 응사(應射)하며 격렬(激烈)히 저항(抵抗)하고 나섰습니다.
이번에도 미국은 참전(參戰)하지 않았으나 외곽(外廓)에서 엄호(嚴護)에 나섰습니다.
↑벙커에서 중공군 진지를 향해 포격중인 대만군
결국 대만의 끈질긴 저항(抵抗)과 미국의 지원(支援)으로 중공은 바다를 건널 수 없었습니다.
샤먼(Xiamen)과 진먼(Kinmen)의 거리는 4km에 불과(不過)했어도 미국이 바다를 장악(掌握)한 이상 중공군에게는 커다란 대양(大洋)과 마찬가지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자존심(自尊心) 때문이라도 공격을 멈출 수 없었기에 지루한 포격전(砲擊戰)만 계속되었습니다.
이런 고착(固着)된 상황(狀況)을 타개(打開)하려고 9월 24일,
중공은 100여 기의 J-5 전투기를 출격(出擊)시켰고 대만도 32기의 F-86 전투기를 날려 대응(對應)했습니다.
↑MiG-17을 면허 생산한 중공군의 J-5
한국전쟁 참전을 통해 제공권(制空權)의 중요성(重要性)을 절감(節減)한 중공은 1957년부터 소련도 한창 배치(配置) 중이던 최신예 전투기(最新銳戰鬪機)인 MiG-17을 J-5라는 이름으로 면허 생산(免許生産)하면서 공군력 확충(空軍力擴充)에 나섰습니다.
J-5의 성능이 F-86보다 좋았던 데다 수적(數的)으로도 앞섰고 실전 경험(實戰經驗)도 풍부(豐富)했기에 제2차 해협 전투 개시 당시에 중공은 자신감(自信感)에 충만(充滿)했습니다.
하지만 대만의 F-86은 미국으로부터 공급(供給)받은 AIM-9 공대공(空對空)미사일을 무장(武裝)하고 있었습니다.
↑AIM-9 공대공미사일 장착하고 임무 수행 중인 대만의 F-86 전투기
J-5들은 멀리서 날아온 AIM-9에 차례차례 가격(加擊)당했습니다.
공대공(空對空)미사일 자체(自體)를 몰랐던 중공 조종사(操縱士)들은 경악(驚愕)했습니다.
결국 공중전(空中戰)에서 중공은 17기의 J-5를 포함해 20여 기가 격추(擊墜)된 반면 대만은 3기만 상실(喪失)한 일방적(一方的)인 대승(大勝)을 거두었습니다.
이후 마땅한 대응책(對應策)이 없던 중공은 결국 출격(出擊)을 포기(抛棄)했습니다.
전투(戰鬪)의 여파(餘波)는 실로 상당(相當)했습니다.
풍전등화(風前燈火)의 진먼은 물론 대만까지 살린 결정타(決定打)가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해협 상공에서 벌어진 공중전에서 대만군은 일방적인 완승을 거두었습니다
중공은 기대했던 공군이 넘기 힘든 벽(壁)에 부딪히면서 더 이상 진먼을 목표(目標)로 전투를 지속(持續)할 수 없었습니다.
한달 동안 47만 4천발의 포탄(砲彈)을 날렸음에도 전과(戰果)가 확대(擴大)되지 않자 10월 5일 포격(砲擊)까지 중단(中斷)했습니다.
이후 20년이 넘게 간헐적(間歇的)인 포격이 있었어도 의미(意味)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양측 합쳐 130여 기의 전투기들이 벌인 그날의 공중전(空中戰)은 찰나(刹那)였지만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양안 관계(兩岸關係)를 고착화(固着化)시킨 결정적(決定的)인 사건(事件)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베트남전쟁을 통해 기관포가 여전히 중요한 무기 임이 입증되었습니다
무기사(武器史)에도 영향(影向)을 주었습니다.
미사일 만능주의(萬能主義)가 팽배(彭排)해지면서 공대공(空對空)미사일로만 무장(武裝)한 F-4 팬텀이 탄생(誕生)했습니다.
그러나 맹신(盲信)은 곧바로 만용(蠻勇)으로 밝혀졌습니다.
베트남전쟁에서 MiG-17, MiG-21과 선회전(旋回戰)을 펼치자 공대공미사일을 사용(使用)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구시대(舊時代)의 유물(唯物)로 여기던 기관포(機關砲)를 다시 장착(裝着)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렇게 해협(海峽)에서 벌어진 공중전(空中戰)은 항공무기 역사(航空武器歷史)에도 커다란 흔적(痕迹)을 남겼습니다● [ august 의 軍史世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