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중압(籠中鴨)
새장 속 오리
김정(金淨,1486~1521)
주인의 사랑과 은혜가 결코 얕지 않거늘
타고난 야성을 스스로 없애지 못했나 보다
서리 낀 달밤 하늘에서 우는 기러기 소리에
새장 속에서 깨닫지 못한 채 날고만 싶다.
主人恩愛終非淺(주인은애종비천)
野性由來不自除(야성유래부자제)
霜月數聲雲外侶(상월수성운외려)
籠中不覺意飄如(농중불각의표여)
집오리와 야생의 기러기을 비교해 시인은 자신의 마음을 나타낸다. 주인은 임
금인 중종을, 집오리는 자신을 의미한다. 새장은 궁중 또는 벼슬 생활을 뜻한다.
새장 속에서 주인이 주는 모이에 길들여진 집오리는 나는 방법을 잊었다. 서리
내린 어느 날 밤, 구름 밖에서 울며 날아가는 기러기의 울음소리를 듣고 집오리
는 조금 남아 있던 야성이 되살아났다. 오리는 잠시 주인의 고마움을 잊고 기러
기처럼 하늘 높이 날아다니기를 꿈꾼다. 김정은 벼슬살이를 하는 동안 재산을
탐하지 않았고 뇌물을 받지 않았다. 녹봉을 받으면 어려운 친족에게 골고루 나누
어 주었다. 벼슬을 해도 백성을 위해서 했지 자신을 위해서 하지 않았다.
[작가소개]
김정(金淨) : 조선전기 이조정랑, 순창군수, 형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학자.
성격 : 문신, 학자
성별 : 남
출생일 : 1486년(성종 17) 사망일 : 1521년(중종 16)
본관 : 경주(慶州)
저작 : 충암집
경력 : 정언, 이조정랑, 순창군수, 형조판서
관련사건 : 기묘사화, 신사무옥
<정의>
조선전기 이조정랑, 순창군수, 형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학자.개설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원충(元冲), 호는 충암(冲菴)·고봉(孤峯). 보은 출신. 김호(金滸)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김처용(金處庸)이고, 아버지는 호조정랑 김효정(金孝貞)이며, 어머니는 김해허씨(金海許氏)로 판관(判官) 허윤공(許允恭)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07년 증광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해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에 보임되고, 수찬(修撰)·병조좌랑을 거쳐 정언(正言)으로 옮겨졌다. 이어 병조정랑·부교리(副校理)·헌납(獻納)·교리·이조정랑 등을 거쳐 1514년에 순창군수가 되었다. 이 때 왕의 구언(求言)주 01)에 응해 담양부사 박상(朴祥)과 함께 중종 때 억울하게 폐출된 왕후 신씨(愼氏)의 복위를 주장하고, 아울러 신씨 폐위의 주모자인 박원종(朴元宗) 등을 추죄(追罪)할 것을 상소했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보은에 유배되었다. 이 때 권민수(權敏手)·이행(李荇) 등은 이들을 엄중히 다스릴 것을 주장한 반면, 영의정 유순(柳洵) 등은 이에 반대했고, 조광조(趙光祖)도 치죄를 주장한 대간의 파직을 주청하였다. 이 문제를 둘러싸고 대간 사이에도 대립이 생겼고, 둘 다 옳다는 설까지 제기되었다.
1516년 석방되어 박상과 함께 다시 홍문관에 들고, 권민수와 이행의 파직으로 마무리되었다. 그것은 곧 중앙 정계에서의 사림파의 승리를 뜻하는 것이었다. 그 뒤 응교(應敎)·전한(典翰) 등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뒤에 사예(司藝)·부제학·동부승지·좌승지·이조참판·도승지·대사헌 등을 거쳐 형조판서에 임명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성장은 괄목할 정도였는데, 그것은 당시 사림파의 급속한 성장과 긴밀한 관계를 지닌 것이었다. 그 뒤 기묘사화 때 극형에 처해지게 되었으나, 영의정 정광필(鄭光弼) 등의 옹호로 금산(錦山)에 유배되었다가, 진도를 거쳐 다시 제주도로 옮겨졌다. 그 뒤 신사무옥에 연루되어 사림파의 주축인 생존자 6인과 함께 다시 중죄에 처해져 사사되었다. 1545년(인종 1) 복관되었고, 1646년(인조 24)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3세에 할머니 황씨에게 수학하기 시작했고 20세 이후에는 최수성(崔壽峸)·구수복(具壽福) 등과 성리학의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리하여 관료 생활을 하면서도 성리학에 대한 학문 정진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또한, 시문에도 능했으며 새·짐승 등의 그림도 잘 그렸다. 일찍이 사림 세력을 중앙 정계에 추천했고, 조광조의 정치적 성장을 뒤에서 도왔다. 그 뒤 조광조와 함께 사림파의 대표적인 존재로서, 그들의 세력 기반을 굳히기 위해 현량과(賢良科)의 설치를 적극 주장하기도 하였다.또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개혁 정치를 폈는데, 그 일환으로 미신 타파와 향약의 실시, 정국공신의 위훈삭제(僞勳削除) 등을 추진하였다. 제자로는 김봉상(金鳳祥)·김고(金顧)·최여주(崔汝舟) 외에 조카인 김천부(金天富)·김천우(金天宇) 등이 있다. 보은의 상현서원(象賢書院), 청주의 신항서원(莘巷書院), 제주의 귤림서원(橘林書院), 금산의 성곡서원(星谷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충암집(冲菴集)』이 있는데, 여기에 실린 「제주풍토록(濟州風土錄] )」은 기묘사화로 제주도에서 유배 생활을 하면서 견문한 제주도의 풍토기이다. 시호는 처음에는 문정(文貞)이고, 나중에 문간(文簡)으로 고쳐졌다.
<참고문헌>
중종실록(中宗實錄)국조방목(國朝榜目)충암집(冲菴集)월사집(月沙集)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기묘록보유(己卯錄補遺)해동잡록(海東雜錄)해동명신전(海東名臣傳)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동유사우록(東儒師友錄)기묘제현전(己卯諸賢傳)「현량과연구: 사류의 진퇴 및 그 배경과 관련하여」(이병휴,『계명사학』1,1967)「충암 김정의 생애와 사상」(김태영,『호서문화연구』13,1995)「己卯士禍の由來に關する―考察」(申奭鎬,『靑丘學叢』20,1935)「朝鮮黨爭の起源を論じて士禍との關係に及ぶ」(瀨野馬熊,『白鳥記念東洋史論叢』,1925; 『瀨野馬熊遺稿』,1936)The Literati Purges-Political Conflict in Early Yi Korea(Wagner,E. W.,Harvard University Press,1974)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김정(金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