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24일 [연중 제3주간 수요일]
마르코 4,1-20
성공하는 사람이 반드시 가진 세 가지는?
오늘은 연중 제3주간 수요일입니다.
오늘 복음 무엇인지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입니다.
씨는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은총과 진리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우리 안에 은총과 진리가 떨어지면 믿음의 씨앗이 자라나서 그 믿는 대로 우리 삶이 이루어지게 되겠죠. 열매를 맺게 되겠죠.
씨가 뿌려지는데 땅에서 똑같은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 씨는 같지만, 땅의 종류에 따라 열매를 맺지 못하기도 하고, 또 열매를 맺더라도 차이가 30배 60배 100배도 나기도 합니다.
이런 차이는 씨를 받아들이는 우리 마음의 자세, 곧 의지의 문제일 것입니다.
길가는 교만을, 돌밭은 육욕을, 가시밭은 탐욕을 상징합니다.
삼구를 이기지 못한 밭에 떨어진 하느님의 말씀은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를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중국의 마윈이라고 하는 알리바바 창업자 마윈이 이 포레스트 검프 보고 정신을 차렸습니다. 마윈은 뭐를 해도 항상 떨어졌는데, 인생은 알 수 없습니다.
영화에서 포레스트 검프도 IQ가 70밖에 안 되는데 엄마가 “초콜릿을 먹을 때 무슨 맛이 안에 들어있을지는 안 보인다.
그러니까 뭐라도 끝까지 해봐라.
한 번 할 때는 최선을 다해라.”하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하든 성공했습니다.
말씀의 씨앗이 많은 열매를 맺는 좋은 땅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씨앗이 마윈에게도 떨어졌고 그도 열매를 맺었습니다.
우리가 자녀들을 교육할 때 자녀들에게 말을 많이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마음에서 세속, 육신, 마귀를 없애서 내가 하는 말이 단 한 톨이라도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마음을 바꾸어 놓는 게 제일 중요합니다.
먼저 길과 같은 마음을 없애버려야 합니다.
길은 사탄이고 교만입니다.
모든 인간의 선택은 행복을 기준으로 하기에 사탄은 행복의 방향만 틀어놓습니다.
아무리 말씀의 씨가 뿌려져도 자기 연민에 빠진 이들은 그 씨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나부터 행복하여지려 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연민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세상에 유익한 존재가 되려는 마음을 갖게 해야 합니다.
연예인이 관객에게 행복을 주어야 자신도 행복해질 수 있음을 아는 것과 같습니다.
그다음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간 단식하며 당신 자신과 싸우신 것처럼 자기를 이길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돌밭처럼 쉽게 포기하는 일이 없습니다.
철봉을 잡으면서 고운 손바닥을 바라면 안 됩니다.
마지막으로 가시밭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탐욕에 깃든 사람은 두려움 때문에 투자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크게 성공할 수 없습니다. 먼저 자기에 대한 투자를 아끼면 안 됩니다.
예를 들면, 양팔 없는 파일럿 제시카 콕스가 있죠. 이 사람은 양 팔이 없이 태어났지만, 20대 때에 이미 경비행기를 조종사가 됐습니다.
물론 자동차 운전하고 요리하고 글씨를 쓰고 책을 읽고 수영하고 피아노를 치고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하는 것을 넘어서서 엄마가 뿌린 “할 수 있다.”라는 씨앗을 잘 키웠습니다.
자이온 클락이라는 허리 밑부분이 없이 태어난 사람도 카일 메이나드라는 손발이 없이 태어났지만, 엄청난 성취를 이룬 사람의 책 ‘변명은 없다’를 읽고는 크게 변했습니다.
처음엔 자기 연민에 쌓여 살았지만, 자신도 메이나드처럼 남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음을 믿었습니다.
벌써 길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그다음은 육체와의 싸움이 기다립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두세 배는 더 고생해야 했습니다.
그는 돌밭도 아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재물에 집착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계발을 위해 많은 투자를 하였습니다. 가시밭도 극복했습니다.
그렇게 세상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워런 버핏도 자기 자신에게 투자하라 그러면 누구도 그거 빼앗아 가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세상에서 성공하는 모든 사람도 1. 이웃 사랑이 행복임을 알고, 2. 자기를 죽여야 함을 알며,
3. 탐욕에서 자유로워야 함을 압니다.
이 세상은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이기에 이 세상을 지배하는 법칙이나 우리 안에서 이뤄지는 법칙이나 같습니다.
우리 마음을 좋은 땅으로 만듭시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부터 하늘 나라를 살게 될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월24일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복음: 마르 4,1-20
지난 20년 동안 힘들게 이룬 절제의 덕을 단 15분 만에 포기하기를 진정으로 바라십니까?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1567~1622)는 프랑스 남동쪽과 스위스 서쪽에 위치한 사부아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영재였습니다.
아들에 대한 기대가 대단했던 아버지의 뒷받침도 제대로 받았습니다.
12살부터 파리로 유학을 떠났으며, 소르본 대학, 파도바 대학에서 수학을 했습니다.
불과 25세 나이에 민법과 교회법 박사 학위를 따냈습니다.
그 젊은 나이에 변호사 자격도 취득했으며 상원의원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이렇게 앞날이 창창하던 살레시오는 아버지의 큰 반대를 무릅쓰고 26세의 나이에 사제가 되었습니다.
뜻밖의 상황에 너무나 당혹스러웠던 아버지였지만, 아들 살레시오의 뜻을 굽힐 수 없음을 알게 되었기에 차선책을 찾았습니다.
이왕 사제가 되었으니, 고위층 성직자가 될 수 있도록 밀어주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살레시오는 그런 아버지의 뜻을 철저히 무시합니다.
아무도 가기 싫어하는 칼뱅교도가 득세한 샤블레 지역으로 파견됩니다.
2만 5천명이나 되는 주민들 거의 모두가 칼뱅교로 넘어가고 가톨릭 신자 수는 백 명도 채 남지 않았습니다.
정치적, 종교적 적대감정이 가득한 샤블레 지역에서 살레시오가 보여준 선교 방식은 오늘 우리가 눈여겨 볼만 합니다.
살레시오는 가톨릭 교회에 대한 적개심과 반발심으로 가득한 주민들에게 개별적으로 접근합니다.
지역 주민에게 친근감을 주려고 어려운 사투리를 힘겹게 배웠습니다.
선교 효과가 미미하자 작은 전단지를 만들어 일일이 대문 밑으로 밀어 넣거나 거리의 기둥이나 벽에 붙였습니다.
결국 살레시오가 샤블레 지역 선교를 성공하게 된 비결은 한 명 한 명과의 성실한 대화, 무엇보다도 진지한 경청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들, 특히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 안에 선함을 존중했습니다.
살레시오가 지닌 무한한 인내심과 온유함은 그가 만나는 모든 사람을 무장해제시켰으며, 그의 편으로 만들었습니다.
살레시오와 함께 방문 수녀회를 창립한 프란치스코 요안나 드 샹탈의 증언은 수시로 분노하는 우리에게 큰 성찰거리를 건네주고 있습니다.
저는 어느 누구에게서도 살레시오 주교님이 화를 내는 것을 보았다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
어느 날 저는 그분에게 방문 수녀회에서 겪고 있는 어떤 난관에 대해 왜 분노하지 않으셨는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분은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지난 20년 동안 힘들게 이룬 절제의 덕을 단 15분 만에 포기하기를 진정으로 바라십니까?”
“진정으로 인내하는 사람은 자신의 고된 운명에 대해 불평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동정을 받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고통에 대해 자연스럽고, 진실하게 받아들입니다.
절대로 중얼거리거나 불평하거나 확대해석해서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3주간 수요일 강론>
(2024. 1. 24. 수)(마르 4,1-20)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말씀이 길에 뿌려지는 것은 이러한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들이 말씀을 들으면 곧바로 사탄이 와서 그들 안에 뿌려진 말씀을 앗아 가버린다.
그리고 말씀이 돌밭에 뿌려지는 것은 이러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말씀을 들으면 곧 기쁘게 받는다.
그러나 그들에게 뿌리가 없어서 오래가지 못한다.
그래서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곧 걸려 넘어지고 만다.
말씀이 가시덤불 속에 뿌려지는 것은 또 다른 사람들이다.
이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과 그 밖의 여러 가지 욕심이 들어가,
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
그러나 말씀이 좋은 땅에 뿌려진 것은 이러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 어떤 이는 서른 배, 어떤 이는 예순 배, 어떤 이는 백배의 열매를 맺는다(마르 4,15-20).”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 ‘길’은 말씀을(예수님의 복음을) 믿지 않고,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사람들, 즉 신앙인이 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하느님 나라, 구원, 영원한 생명 등에 대해서 관심이 없거나 이미 다른 종교에 빠져 있어서 그럴 것입니다.
비유에는 사탄이 말씀을 빼앗아 가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믿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자유의지로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사탄의 유혹이 작용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나자렛 사람들’을 ‘길’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마르 6,1-6).
그들은 예수님의 출신과 직업에 대한 편견 때문에 그랬는데, 사탄이 그 편견을 부추긴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돌밭’은 복음을 믿고 받아들여서 세례는 받지만,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뿌리’가 없다는 말은, 믿는다고 주장하지만 ‘삶으로’ 실천하지는 않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돌밭’인 사람들은 박해 때에 금방 배교합니다.
말로만 믿고, 생각으로만 믿는 것은 믿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자는 모두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휘몰아치자 무너져 버렸다.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마태 7,26-27).”
옛날의 박해와 같은 고난이나 시련이 없는 오늘날에는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마치 취미생활처럼 하다가 어떤 위기를 만나면 금방 떨어져 나갑니다.
<실제로 신앙생활을 취미생활 하듯이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시간 여유가 있을 때만 하고, 마음이 내킬 때에만 하고......
간절함도 없고, 정성도 없고, 적극적이지도 않고...>
‘가시덤불’은 복음을 믿고 받아들여서 세례를 받고, 실제로 신앙생활을 하지만, 신앙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겪는 여러 가지 어려움들을 극복하지 못하는 사람들, 즉 먹고사는 문제나 세상일 때문에 힘들어 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믿음이 부족해서 그럴 수도 있고, 믿음으로 극복하기에는 걱정거리가 너무 커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사실 거의 대부분의 신앙인들은 조금씩이라도
‘가시덤불’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신앙인은 세속 사람들과는 다르게 살아야 하면서도 세상 안에서 살아가야 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편지에 ‘데마스’ 라는 사람이 나오는데, ‘가시덤불’의 예로 생각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대는 서둘러 나에게 빨리 오십시오. 데마스는
현세를 사랑한 나머지 나를 버리고 테살로니카로 가고, 크레스켄스는 갈라티아로, 티토는 달마티아로 갔습니다.
루카만 나와 함께 있습니다.
마르코는 내 직무에 요긴한 사람이니 함께 데리고 오십시오. 티키코스는 내가 에페소로 보냈습니다(2티모 4,9-12).”
여기에 언급된 사람들은 바오로 사도의 협력자들, 또는 동료들로서 바오로 사도와 함께 선교활동을 했던 사람들인데, ‘데마스’ 라는 사람은 너무 힘들어서 그랬는지, 믿음이 식어서 그랬는지, 바오로 사도를 ‘버리고’ 세속으로 돌아갔습니다.
‘현세를 사랑한 나머지’ 라는 말을 근거로 해서,
그의 마음이 세속 쪽으로 조금씩 기울어지다가
결국에는 완전히 꺾였을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좋은 땅’은 끝까지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해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좋은 땅’의 경우에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다.” 라는 말은, “믿고, 믿는 대로 실천하는 것”을 뜻합니다.
마태오복음에는 ‘깨닫는다.’ 라고 표현되어 있고(마태 13,23), 루카복음에는 ‘간직하다.’ 라고 표현되어 있는데(루카 8,15), ‘받아들이다.’ 라고 표현하든지, ‘깨닫는다.’ 라고 표현하든지, 또는 ‘간직하다.’ 라고 표현하든지 간에 이 말들은 모두
‘실천하는 믿음’을 뜻하는 말들입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나의 형제 여러분,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실천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한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이듯 실천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입니다(야고 2,14.17.26).”
받아들인다, 깨닫는다, 간직한다, 라는 말들을 표현 그대로만 생각하고 뜻을 생각하지 않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말씀을 듣고서 실천은 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다시 전해 주지도 않고, 그저 간직하기만 하는 것은, 등불을 켜서 함지 속에 감추는 것과 같습니다(마태 5,15).
감추어진 말씀은 생명력을 잃어서 아무런 힘도 없게 됩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