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기의 한중일 삼국지] 청일전쟁 때 참패한 중국, "해군력 키워라" 총력전
중앙일보 2021. 2. 26
일본 전함에 무너진 청 북양함대
출발은 앞섰지만 일본에 따라잡혀
옛 치욕 삼키며 해양 패권 승부수
우리는 또 구경꾼으로 남을 건가
백령도 앞까지 출몰한 중국 함정
1894년 9월 압록강 부근에서 일어난 서해해전 장면. 청나라 북양함대가 일본 함대에 크게 패했다. [사진 『도설 만주제국』(도쿄·1996)]
1886년 8월 9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방문을 마친 청나라 북양함대(北洋艦隊) 소속 함정 4척이 일본의 나가사키(長崎)항에 입항했다. 함정들을 수리하기 위해서였다. 제독 정여창(丁汝昌)이 이끄는 함대에는 청나라가 자랑하는 대형 순양함 정원(定遠)과 진원(鎭遠)도 포함돼 있었다.
그런데 8월 13일, 나가사키 거리 구경에 나섰던 청 수병들과 일본 경찰 사이에 충돌이 벌어진다. 일본 측은 술 취한 청 수병들이 폭력을 휘둘러서 체포했다고 적었고, 청 측은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아 마찰이 빚어졌다고 기록했다. 15일에도 청 수병들과 일본 군중, 경찰이 충돌하여 유혈 사태가 빚어진다.
일본인 중에는 무술인과 부랑자도 섞여 있었다. 난투극의 와중에 청 수병 8명이 죽고 45명이 부상했다. 일본인도 2명이 죽고 27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중국 측은 청 수병들이 수적으로 밀렸던 데다 비무장 상태에서 일본인들로부터 칼이나 곤봉 등으로 공격을 받아 피해가 훨씬 컸다고 분석했다.
당시 청과 일본의 관계는 긴장된 상태였다. 조선에서 일어난 임오군란(1882)과 갑신정변(1884)을 계기로 이미 충돌했었기 때문이다. ‘나가사키 사건’이라 불리는 이 돌발 사태를 처리하기 위해 양국은 수차례 교섭을 벌였지만 입장 차이를 좁히지 못했다. 이듬해 2월에야 관련자들을 각각의 법률에 따라 처리하고 사상자들에게 위로금을 지급하기로 합의했다.
프랑스 전문가 초빙해 전력 키운 일본
1895년 2월 중국 산둥성 류궁다오(劉公島) 함락 이후 일본군에게 전리품으로 넘어간 북양함대 순양함 진원이다. [사진 『정해징강』(타이베이·2009)]
여하튼 북양함대의 방문을 계기로 일본 조야는 큰 충격을 받았다. 무엇보다 당시 아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전함이었던 정원과 진원을 눈앞에서 직접 확인했기 때문이다. 1882년 독일에서 건조된 두 전함은 모두 배수량 7220톤의 철갑함으로 30.5㎝의 강력한 주포 4문을 장착하고 있었다. 당시 일본도 해군력 증강을 추진하고 있었지만 두 전함의 덩치와 화력에 맞설 만한 함정은 아직 보유하지 못한 상태였다. 자연히 정원과 진원에 대한 공포심, 시기심이 고조될 수밖에 없었다. 그 같은 분위기에서 ‘나가사키 사건’이 터졌던 것이다.
청의 입장에서는 정원과 진원 앞에서 주눅 드는 일본인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싫지 않았다. ‘멀리 있는 오랑캐를 평정하고(定遠)’ ‘진압한다(鎭遠)’는 이름에 걸맞게 자국의 해군력을 과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청의 우쭐했던 기분은 잠시뿐이었다. 나가사키 사건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커다란 비극과 치욕이 정원과 진원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루이 에밀 베르텡
나가사키 사건이 일어나기 전부터 일본은 정원과 진원을 상대할 수 있는 전함을 확보하기 위해 부심했다. 1885년 8월, 일본 정부는 프랑스인 루이 에밀 베르텡(1840~1924)을 해군 고문으로 초빙하기로 결정한다. 베르텡은 당시 프랑스 최고의 전함 전문가였다. 초빙 조건은 그야말로 파격적이었다. 보통의 초빙 외국인에게 주는 급여의 20배를 지급하되 해군성 고문, 해군 공창(工廠) 총감독, 함정본부 특임 소장(少將) 등의 직함까지 부여한다는 것이었다.
대신 일본 정부는 정원과 진원에 맞설 수 있는 전함의 설계와 건조를 주문했다. 흥분한 베르텡은 1886년 2월 가족들을 이끌고 일본에 입국했다. 그는 일본에 4년간 머물면서 송도(松島)·엄도(嚴島)·교립(橋立) 등의 전함을 설계했다. 송도와 엄도는 1892년, 교립은 1894년에 취역했다. 일본 해군의 주력함으로 떠오른 세 척은 모두 4200톤 규모로 정원과 진원에 비해 덩치는 작았지만 화력은 훨씬 강력했다. 정원과 진원의 30.5㎝ 주포보다 큰 32㎝ 주포를 달고, 12㎝ 속사포 12문씩을 장착했다.
중국 류궁다오에 있는 갑오전쟁(청일전쟁)박물관. [사진 한명기]
베르텡의 초빙, 북양함대의 입항과 나가사키 사건 발생을 계기로 일본의 해군력 증강 열기는 한층 고조됐다. 1887년 1월 메이지 천황은 전함 건조에 보태라고 내탕금 30만 엔을 내놓았고, 건함 비용 마련을 위해 발행한 공채 판매도 탄력이 붙었다. 이 같은 분위기에서 1885년 입안된 해군 확장 10개년 계획은 1892년에 이미 달성됐다.
전쟁을 잊지 말자는 양계초의 글귀가 전시장 출구에 씌여 있다. [사진 한명기]
일본이 이렇게 정원과 진원 타도를 외치고 있던 1894년 7월, 청일전쟁이 터진다. 그리고 같은 해 9월 17월, 조선으로 육군 병력을 수송하고 뤼순(旅順)으로 돌아가던 북양함대와 일본 함대가 압록강 부근에서 맞붙으면서 서해해전이 벌어진다. 북양함대의 총 톤수는 3만5000톤, 일본 함대는 4만톤이었다. 20㎝ 이상의 대구경포는 청군이 우세했지만, 12㎝ 이상 중구경의 속사포는 일본 측이 절대적으로 우세했다. 전함의 평균 속도도 일본 쪽이 빨랐다. 정원과 진원의 주포 위력은 엄청났지만 시간당 두 발 밖에는 발사할 수 없는 약점이 있었다.
결과는 일본의 승리였다. 북양함대는 5척의 전함이 침몰하거나 대파됐다. 기함 정원과 진원은 수백 발의 탄환을 맞았지만 침몰은 겨우 면했다. 반면 일본 측은 침몰한 함정은 없었고, 기함 송도가 정원의 포탄에 맞아 1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피해를 보았다.
서태후
북양함대가 패전하게 된 원인은 여러 가지였지만 결정적인 문제는 청 내부의 권력 구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당시 청의 실권자는 만주족 섭정 서태후(西太后)였다. 1889년 광서제(光緖帝)가 18세 성년이 되자 서태후는 섭정에서 물러나겠다고 선언한다. 그는 그러면서 베이징(北京) 서쪽에 이화원(頤和園)이라는 장대한 별장을 짓기 시작했다. 별장 공사에 수천만 냥의 비용이 들어가면서 해군 예산도 건설 비용으로 전용됐다.
이홍장
재정 문제가 불거지면서 북양함대를 유지하는 것이 곤란해졌다. 새로운 전함 도입은 고사하고 1891년부터는 탄약 구입조차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1894년 7월, 북양함대의 실질적 수장이었던 이홍장(李鴻章)은 정원과 진원의 주포 포탄이 모두 합쳐 3발밖에 없다는 보고를 받고 아연실색했다. 하지만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북양함대는 스스로 무너지고 있었던 셈이다.
정여창
서해해전에서 패한 이후 뤼순에 머물던 북양함대는 1894년 11월, 산둥성(山東省) 웨이하이웨이(威海衛)의 류궁다오(劉公島)로 이동했다. 하지만 이미 제해권을 상실했던 상황에서 북양함대는 일본 함대를 당해내지 못했다. 1895년 2월 4일, 정원은 일본군의 어뢰 공격을 받아 대파되고, 두 척의 전함이 침몰했다. 완전히 기울어 버린 전세를 뒤집을 전망이 보이지 않자 제독 정여창은 자결한다. 이윽고 2월 14일 청군은 항복했고, 일본군은 류궁다오를 접수하고 진원 등 전함 10척을 전리품으로 획득했다. 북양함대가 궤멸하는 순간이었다.
서해를 자기들 바다로 만들려는 중국
일본 해군에 넘어간 진원은 수개월 동안 수리를 마친 뒤 1895년 7월 4일 일본에 도착한다. 일본 정부는 진원을 공개하는 행사를 대대적으로 열었고 몰려든 일본인들은 열광했다. 진원은 일본 함대의 일원이 되어 러일전쟁에 참전한다. 이후 진원이 노후화되자 1911년 11월, 일본 해군은 진원을 사격 연습의 표적으로 삼는다. 고철로 변해버린 진원은 매각됐고, 그 대금은 해군병학교(海軍兵學校) 강당을 건설하는 비용으로 충당됐다. 한때 동아시아를 호령했던 진원이 일본 해군의 사격 표적이 되고 끝내는 고철 덩어리로 전락했던 것이다.
양계초
1945년 일본의 패전 이후 국민당 정부는 닻과 사슬 등 진원의 잔존 유물을 중국으로 반출해 갔다. 그리고 중국 정부는 류궁다오에 갑오전쟁박물관을 건립한다. 박물관의 출구에는 “우리나라 천 년의 꿈을 깨운 것은 실로 갑오전쟁(청일전쟁)에서 시작됐다”는 양계초(梁啓超)의 글귀를 걸어 놓았다. 치욕을 잊지 않으려는 몸부림이 절절하다.
오늘은 어떤가. 요즘 중국은 해군 함정을 붕어빵 찍어내듯이 건조하고 있다. 전체 전함의 숫자는 이미 미국을 넘어섰을 정도로 해군력 증강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청과 일본 해군이 최초로 부딪히면서 청일전쟁이 시작됐던 곳은 아산만의 풍도 앞바다였다. 자국의 바다에서 청과 일본이 맞붙었을 때 조선은 그저 구경꾼일 뿐이었다. 자신을 지킬 능력이 없어 두 강대국의 승부를 숨죽인 채 지켜봐야만 했던 비참한 처지였다. 그리고 120여 년이 지난 오늘, 중국 전함들이 백령도 코앞까지 출몰하고 있다. 서해를 자신들의 내해(內海)로 만들려는 중국의 행보가 심상치 않다. 오늘의 우리는 중국보다 비참했던 과거사를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가.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