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벧전 2:1-3
1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2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3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벧전 2:1-3 / [산 돌과 거룩한 백성] 여러분은 남을 미워하지 마십시오. 착한 사람인 체하지 마십시오. 부정직하거나 남을 질투하거나 남을 뒤에서 흉보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2-3) 여러분은 주님의 은혜를 이미 경험하여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모든 악의와 기만과 시기와 비방을 버리십시오. 마치 ㄷ) 갓난아이가 젖을 찾듯이, 자신의 구원이 완성되도록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의 젖을 사모하십시오. (ㄷ. 시34:8)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삶은 무엇입니까? 베드로는 악한 것을 벗어버리고 마치 어린 아이가 어머니의 젖을 사모하듯이 순수한 진리의 말씀을 사모하여 완전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야 한다고 권고합니다.
모든 악을 버리고(1) 신자들은 하나님의 생명에 참예한 자가 되었으므로 다음과 같은 덕스럽지 못한 행동들을 버려야 합니다. 악독은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려고 악한 감정을 품는 것입니다. 어떤 비극적인 일이나 손해가 다른 사람에게 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기만은 의도적으로 속이거나 거짓말로 호도하는 것입니다.
외식은 말과 행동이 다른 것을 말합니다. 시기는 다른 사람이 소유하고 있는 것을 갖고 싶어 하는 욕망을 말합니다. 비방하는 말은 다른 사람을 깎아 내림으로써 상대적으로 자기 자신을 더 높은 사람으로 보이게 하려는 시도입니다. 본 단락에서 "모든"이라는 말이 반복해서 나타납니다. 철저하게 하나도 빼놓지 말고 악을 청산할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고(2-3) "갓난 아기들"같이 라는 표현은 베드로의 편지를 읽는 독자들이 모두 새신자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들은 구원받은 지 오래된 신자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믿음의 연륜의 정도와 관계없이 그들은 어린아이들이 젖을 찾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갓난 아기가 육체적으로 자라야 하듯이,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영적으로 자라야 합니다.
말씀으로 거듭난 생명이 제대로 성장하려면 순전하고 신령한 젖,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주님의 인자하심을 맛본 사람은 신령한 젖을 더욱 사모하게 되며 결국 거룩과 성숙한 삶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젖을 먹고 싶어 울어 대는 아이처럼 말씀을 사모하며 살고 계십니까?
적용: 죄는 당신의 영적 성장을 막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영적 성장에 자양분을 공급합니다. 얼마나 정기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접하고 있습니까?
미술계에 갓 등단한 젊은 화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실력 있는 화가였지만, 자신의 그림이 잘 팔리지 않자 하루는 스승을 찾아가 고민을 토로했습니다. “선생님, 어떻게 하면 성공할 수 있습니까? 저는 3일 동안 하나의 작품을 완성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팔리기까지 3년은 걸리는 것 같습니다.” 그러자 스승은 제자의 어깨를 두드리며 미소지었습니다. “앞으로는 한 폭의 그림을 2, 3년에 걸쳐 정성껏 그려 보게나. 그러면 그 그림은 2, 3일 안에 팔릴 수 있을 걸세.”
< 설 교 >
신령한 말씀을 사모하라
벧전 2:1-3 / 조정의 목시
오디오 재생오디오 재생 오디오 내려받기MP3 내려받기
생명의 탄생은 참 신기하고 놀랍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아주 작은 세포에서 시작되어 호흡하고 걷고 뛰는 인격체가 만들어진다는 것은 참 신기합니다. 영적인 눈으로 보면 새생명을 얻은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씨앗이 심겨졌을 때 영원히 살 수 있는 생명이 생긴 것입니다. 불순종의 자녀이고 영원히 멸망 받을 자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로 새생명을 얻게 한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벧전 1장의 말씀이었습니다.
이제 2장에서 “그러므로”라고 말하면서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2절)고 말합니다. 지금까지 영적인 출생에 대해 말했다면 이제는 자라나는 것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아이가 태어나서 1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나도 전혀 자라지 않고 그대로라면 그 아이는 살아 있는 아이가 아닙니다. 처음에는 말도 못하고 누워 있기만 하던 아이가 어느 순간 말을 시작하고, 서고 걷고 뛰기도 합니다. 바보 같다고 생각할 정도의 지적 수준이었던 아이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똑똑해집니다. 태어나면 당연히 자라야 합니다. 베드로는 영적으로 거듭난 사람들도 자라야 한다고 말합니다. 구원받고 나서 영적인 상태가 전혀 자라지 않는다면 그것은 비정상입니다.
성경은 구원받은 사람에 대해 ‘이제 끝났다’, ‘천국에 갈 수 있으니 됐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구원받은 것에 대해 “믿음의 경주”라고 표현하고, “싸움”, “길”이라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완료된 것이 아니라 계속 진행되는 것입니다. 특정한 목표가 있고 그것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구원입니다. 벧전 1:4에서는 우리의 구원이 하늘에 간직되어 있다고 말하고, 5절에서는 그 구원이 말세에 나타나기로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 구원을 향해 달려가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성장입니다. 또한 1장 13절에서는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라고 했는데, 이것 역시 장차 올 구원을 바라보면서 은혜를 온전히 바라는 것, 바로 그리스도인의 성장입니다. 모두 그리스도인들이 구원받은 이후에 자라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그리스도인이 자라야 한다는 것에 대한 말씀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엡 4:15), “너희의 믿음이 더욱 자라고…”(살후 1:3), “하나님을 아는 것에서 자라가게 하시고”(골 1:10),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벧후 3:18). 그리스도인이라면 영적으로 자라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벧전 2:2을 보면 “자란다”는 표현을 “자라게 하려 한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내가 스스로 노력해서 자라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나를 자라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노력해서 키를 자라게 하는 것이 아니듯이 누군가 우리를 자라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라나게 하실 때 사용하시는 도구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어떤 수단이 아니라 이것을 통해 자라게 하십니다(“그로 말미암아”). 이것에 대해 우리가 가져야 하는 자세가 있습니다.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2절). 우리를 영적으로 자라게 하는 도구는 신령한 젖인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1장 23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새생명을 주는 씨앗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구원을 얻게 할 뿐만 아니라, 구원받은 후에 자라고 성장하는데도 꼭 필요한 것입니다.
갓난아기들은 이제 막 태어난 아기입니다. 갓난아기, 즉 생후 1개월 미만의 아기는 하루에 10-12번 젖을 먹어야 합니다. 아기는 계속해서 젖을 달라고 요구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말씀을 사모해 본 적이 있으십니까? 성경에는 그런 사람이 나옵니다. “내 눈이 주의 구원과 주의 의로운 말씀을 사모하기에 피곤하니이다”(시 119:123), “내가 주의 계명들을 사모하므로 내가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시 119:131).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너무 사모해서 밤늦도록 자지 않고 새벽에 깨었다고 말합니다. 이와 같은 갈급함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왜 우리는 이런 갈급함이 없을까요? 말씀을 읽어야 한다는 부담감만 존재할 뿐입니다. 그것은 마음 깊숙한 곳에서 말씀 없이도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굳이 말씀이 없더라도 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성실히 그리스도인답게 살면 된다고, 남한테 피해 안 주고 성도들과 좋은 교제 가운데 있으면 그저 잘 자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살아가면서 여러 경험들을 하면 자연스럽게 신앙이 자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말씀을 대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 자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지금 죽어도 하늘나라에 갈 수 있으니 특별히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말씀이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이 왜 잘못되었을까요? 그리스도인이 자란다는 것, 성장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자란다는 것은 ‘지식이 생긴다’는 것이 아닙니다. 또 다른 사람이 볼 때 ‘도덕적으로 좋은 사람이 된다’는 것도 아닙니다. 영적으로 자란다는 것은 다름 아닌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의 어떠하심을 알고 그것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성장은 ‘거룩함’입니다. 우리 아버지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우리도 거룩함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벧 2:1에서는 먼저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라고 말합니다. 말씀을 사모하라고 말하기 전에 이것들을 버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악독”은 모든 악을 포함한 것이고, “기만”은 남을 속이는 것, 거짓된 것을 말합니다. “외식”은 마치 내안에 좋은 것이 있는 것처럼 체면을 차리는 것, “시기”는 남의 좋은 것을 원하는 욕심입니다. 그리고 “비방하는 말”은 입술로 짓는 죄입니다. 이 구절에는 “모든”이라는 말이 자주 나옵니다. 여기서는 어떤 특별한 죄를 지목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악한 것들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성장은 거룩함입니다.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벧전 1:14). 그리스도인의 성장은, 악한 것에서 거룩함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악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으로 나아가려면 악이 조금도 없는 순결한 진리가 필요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순전하다”라고 말합니다. 거짓과 결점이 전혀 없는 순수한 것입니다. 영적으로 자랄 필요 없이 그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살면 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런 사람은 세상에도 참 많습니다. 그리스도인들보다 더 충성스럽게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형제 자매와 교제하면서 자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잘못된 생각입니다. 세상 사람들도 자기들끼리 모여 유익을 얻습니다. 개인적인 삶의 경험들을 통해 자랄 수 있다는 생각은 어떻습니까? 믿지 않는 사람들도 그들 삶의 희로애락을 통해 많은 것들을 배웁니다. 그러나 믿는 자로서 악에서 벗어나서 거룩하신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은, 순전한 하나님의 말씀밖에 없습니다. 어둔 세상에서 절대 줄 수 없는 것, 절대 맛볼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존재합니다.
부모들은 아이를 키우면서 유해한 것들을 피하게 하려고 노력합니다. 세상의 많은 지식, 학문, 이론들은 우리에게 도움을 줄 것 같지만 진정으로 믿는 자를 영적으로 자라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제대로 가리키고 있는 나침반이며, 길이고 진리고 생명입니다. 나는 특별히 자라지 않아도 좋다, 그냥 이대로도 좋다는 자세는 어두운 악독을 벗어버리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성장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곧 자신의 악독을 벗어버리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적당히 어둠과 함께 살 것이라는 말입니다. 새생명을 얻은 자라면 조금이라도 더 어둠을 버리고 거룩함으로 나아가려고 할 것입니다. ‘나는 책 읽는 타입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발의 등이고 빛이며 영생의 양식입니다. 우리로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는 유일한 진리인데 그것을 거절한다면 어떻게 자랄 수 있겠습니까? 읽기 힘들다면 들을 수도 있고 다른 방법으로 접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정말 책을 싫어하는 사람이었는데 구원받은 이후에 성경을 읽는 모습을 보고 가족들이 놀랐다고 합니다. 참 진리를 맛본 사람, 진리로 나아가기 원하는 사람은 그가 책을 읽는 타입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그 말씀을 찾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이는 거룩해질 수 없습니다. 우리를 온전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6,17). 베드로는 말씀을 ‘읽어라’, ‘묵상하라’고 말하지 않고 “사모하라”고 말합니다. 어떤 의무감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그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3절)고 말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사모하는 이유는 우리를 사랑하신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너희가 예수를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벧전 1:8). 우리는 예수님을 본 적도 없지만 사랑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분의 인자하심을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구원받고 새생명을 얻었을 때 주님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습니다. 이 말씀은 시편 34:8에서 인용한 말씀입니다. 다윗이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 척을 하다가 쫓겨나서 지은 시입니다. 다윗은 사울을 피해 도망가다가 자신의 적인 아비멜렉을 만납니다. 그 때 다윗은 미친 척을 하여 가까스로 죽음의 위기에서 살아납니다.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온 다윗이 노래한 시입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34:8). 베드로는 이 말씀을 가지고 와서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다면 그리하라고 말합니다. 우리 역시 다윗처럼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주님이 없었다면 모든 악독과 기만, 외식, 시기, 비방 가운데 살아갔을 것입니다. 모든 악을 행하는 중에 그것이 당연한 것처럼 살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저주하며 멸망 중에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고, 주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하여 돌아가셨습니다. 이 구원은 금이나 은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라 흠 없고 점 없는 그리스도의 피로 된 것입니다. 우리는 그 인자하심 때문에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하늘의 기업, 소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영광을 누리는 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기다리는 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그것을 맛보았다면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닮아갈 수 있는 말씀을 사모하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사모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사모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자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제대로 깨닫지 못한 증거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신다면 말씀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인자하신 주님을 더욱 알기 원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을 더 알기 원한다면, 주님이 기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원한다면, 참된 길과 진리와 생명이 무엇인지 알기 원한다면, 거짓이 가득한 세상에서 참 기쁨과 사랑과 화평이 무엇인지 알기 원한다면, 죽도록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을 닮아가기 원한다면, 형제 자매를 거짓 없이 사랑하고 싶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만이 여러분을 자라게 할 도구입니다.
자라나라
벧전 2:1-3 / 홍요셉 목사
[1] 신분에 걸맞는 삶을 살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건강 관리를 무섭게 합니다. 건강하게 살려고 노력을 합니다. 하지만 자기 몸을 아무리 잘 보살피고 아무리 잘 관리해도 그 몸은 반드시 죽게 되어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 24절에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풀이 말라죽듯이 사람의 몸은 다 죽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영광, 사람의 명예도 귀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면 신분이 변하고 존재가 변하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섬기는 이 신앙 행위는 교리를 배워서 따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순간에 즉시로 하나님의 신이 우리 안에 쑥 들어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이론적으로 그냥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이 우리에게 들어오는 것입니다. 말씀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풀과 같고 풀의 꽃과 같은 존재인 우리가 하나님과 똑같이 영생하는 존재가 됩니다. 굉장한 신분의 변화, 존재의 변화가 온 것입니다. 더구나 얼마나 귀한 신분이 되었습니까?
그런데 구원을 받으면 우리의 신분이 천사가 부러워하는 존재로 바뀌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왜입니까?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받아들이면 우리의 신분이 천사 이상의 신분, 하나님의 자녀로 승격이 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 말씀하십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법칙입니다.
이것이 놀라워서 천사들이 '저 죄인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나?'하고 우리를 살펴봅니다. 베드로전서 1장 12절에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천사도 부러워하는 신분, 존재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천사도 부러워하는 신분이 된 우리는 이제 여기에 걸맞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본문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2] 하나님의 자녀로 자라나라
하나님 자녀의 신분에 걸맞는 생활은 무엇입니까?
1. 먼저 영적 쓰레기들을 벗어 버리라
먼저 벗어버리고 입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1) 모든 악독을 벗어 버리라
이태리에 아주 무서운 독거미가 있는데, 이 독거미가 사람을 물지 않고 지나가기만 해도 사람이 죽는답니다. 독거미가 지나간 음식만 먹어도 죽는답니다.
그래서 이태리 사람들은 독거미가 지나간 흔적이 있는 음식은 무서울 정도로 재빨리 버린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악독을 무섭게 버려야 한다고 본문의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악독이 무엇입니까?
악한 의도로 형제를, 이웃을 해치려는, 파괴하려는 악한 생각, 악한 행위를 말합니다. 이 모든 악을 다 벗어버려야 합니다.
왜입니까? 악은 마귀 자식의 신분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악은 마귀가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인 우리는 그것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우리 아버지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께는 선함이 가득합니다.
오늘 본문 3절에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 인자하심, 용서하심, 거룩하심을 다 맛보았습니다.
하나님께는 선함이 가득합니다. 진실함, 용서함이 가득합니다.
그러니 우리에게도 선함과 용서함, 의로움이 가득해야 합니다. 그래서 내 아내가 날마다 나에게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야 합니다. 내 남편이 매일 나에게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야 합니다. 내 자녀가, 내 이웃이 나에게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야 합니다. 여러분을 만나는 모든 사람이 여러분에게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악독을 벗어버리고 선함으로 옷을 갈아입어야 합니다.
(2) 모든 궤휼을 벗어 버리라
다음으로는 '모든 궤휼을 벗어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궤휼이 영어로 deceit인데, deceit는 사기 치고, 거짓말하고, 속이는 것을 말합니다. 거짓의 아비는 마귀입니다. 그러므로 거짓말하고 속이는 것은 마귀의 자녀가 되는 길로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속여서도 안 되고 거짓말해서도 안 되고 진실해야 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진실해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 혹 때때로 진실하지 못하게, 거짓 되게 사신 분이 계시면, 성령께서 오늘 이 시간에 그 거짓을 끊어주시기를 바랍니다.
거짓을 끊어버리고 진실하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에게 걸맞는 생활입니다.
(3) 외식을 버리라
외식은 연극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영화 배우가 연출하는 것이 외식입니다. 영화 배우는 의과대학을 나오지 않았어도 마치 의사처럼 나타납니다. 왕도 아닌 사람이 상감마마가 되어서 나타납니다. 가정 주부가 배우가 되면 어느 날 "김상궁!"하며 중전마마가 되어서 나타납니다. 연기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연극하는 것을 외식, 위선이라고 합니다.
마귀는 천사의 탈을 씁니다.
이리가 양의 옷을 입고 나타나는 것, 외식하는 것, 그것이 마귀의 일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인 우리는 있는 그대로 아기처럼 살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18장 2절, 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한 어린아이를 불러 세우시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권사님이 되고, 장로님이 되고, 목사님이 되고, 팔십 세가 되어도 아기처럼 순진한 마음, 천진난만한 마음으로 생활하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우리 모두의 마땅한 삶의 길인 것입니다. 신앙 생활은 아기같이 해야 됩니다.
기도도 아기같이 하시기를 바랍니다. 교회에서 기도하시든, 집에서 기도하시든 아기처럼 순진한 마음으로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서 아기처럼 순진하게 기도해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며 응답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외식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갓난아기처럼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4) 시기를 벗어 버리라
또 하나님 자녀에 걸맞는 생활을 하려면 '시기를 벗어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시기를 버려야 합니다.
독거미가 지나간 음식을 버리듯이, 피 묻은 옷을 벗어버리듯이, 시기와 질투는 벗어버려야 합니다.
시기는 우리를 서로 파괴하도록 마귀가 주는 것입니다.
미리암과 아론은 모세의 친누나와 친형인데, 모세를 시기합니다. 모세가 카리스마로 민족 앞에 서니 그것을 시기합니다. 그래서 "아니! 구스 여자를 취한 주제에…. 너만 하나님과 이야기 하냐? 우리도 하나님과 대화한다." 하면서 모세에게 대듭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적 질서를 파괴하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는 하나님의 지도자로서의 직분을 주셨고, 아론에게는 대 제사장의 직분을 그리고 미리암에게는 선지자의 직분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질서를 무시하고 시기하고 대든 것입니다.
모세가 괴로워합니다. 다른 사람이 그래도 마음이 아플 텐데, 친형과 친누나가 그러니까 그 마음이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그때 하나님께서 미리암을 나병환자가 되게 하십니다.
시기는 마귀의 일이니 하나님께서 벌을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시기하면 서로 망합니다.
랍스터라는 바닷게는 아주 커서 닭만큼 큰 것도 있습니다. 가격이 비싸서 미국이나 호주에서도 출세한 사람들이나 먹을 수 있는 고급 음식입니다.
랍스터는 잘 기어오를 수 있어서 통에 넣어 놓아도 얼마든지 통 밖으로 기어나와 바다로 들어갈 수 있답니다. 그런데 바다에서 랍스터를 잡는 사람들은 그것을 잡아 놓은 다음에는 돌아보지도 않고 계속 잡는 일만 한답니다.
왜입니까? 랍스터가 도망가지 못하는 이유가 있기 때문이랍니다.
랍스터는 한 마리가 기어올라가면 다른 것이 반드시 물고늘어지는 습성이 있답니다. 이것이 기어올라가면 저것이 물고늘어지고, 저것이 올라가면 이것이 물고늘어지고…. 올라가면 끌어당기고, 올라가면 끌어당기니 결국 통에 넣어 놓은 랍스터는 한 마리도 올라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랍스터를 잡는 사람들이 통 안에 든 랍스터는 걱정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시기는 랍스터와 같습니다. 서로 파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귀는 우리에게 시기의 무기를 주어서 교회 안에서도 시기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교회마다 시기하게 만들어서 하나님의 교회를 아주 어렵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마귀의 궤계인 시기를 벗어버려야 합니다.
시기하게 만드는 것은 마귀입니다.
만일 사울 왕이 골리앗을 죽이고 나라를 회복시킨 자기 사위 다윗을 격려하고 함께 기뻐했으면 사울 왕국이 얼마나 든든히 섰겠습니까? 장인은 왕이고, 사위는 사령관이니 누가 그 나라를 엿보겠습니까? 다윗 같은 의로운 장군이 장인을 밀어내고 왕이 되겠습니까? 그런데 사울 왕에게 시기가 들어가니, 사위인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러니 사위도 십 년 간 아팠고, 자신은 아들과 함께 죽음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시기를 다 벗어버려야 합니다. 오히려 잘 된 사람을 보면, 격려해 주고 기뻐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자녀의 심성인 것입니다.
(5) 비방을 벗어 버리라
또 '비방을 벗어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비방은 남이 실수할 때 험담하는 것을 말합니다.
다른 사람을 험담할 수 있는 분은 주님뿐이십니다. 남을 비판할 수 있는 분은 예수님뿐이십니다. 정죄권은 주님만이 갖고 계십니다.
노아도 술에 취해 옷을 벗기도 했고, 아브라함도 거짓말을 했고, 모세도 화를 내어 사람을 죽이기도 했고 구스 여자를 취했습니다. 다윗 같은 성군도 잠시 정욕에 눈이 어두워 자기 부하 장군의 아내를 빼앗아 취했습니다.
허물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끌려온 여자를 돌로 치려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있으면 먼저 이 여자를 치라."고 말씀하시니, 모두 부끄러워 돌을 두고 집으로 갔습니다.
왜입니까? 죄가 다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중에 남을 비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남을 비판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뿐이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무슨 권한으로 남을 비판합니까?
비방하고 험담하는 것은 마귀의 일입니다. 그것은 남을 아프게 하는 일입니다.
허물을 덮어 주는 것이 하나님 자녀의 길인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합니다. 그러니 남의 말을 이러쿵 저러쿵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누가 실수하면 빨리 덮어주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4장 8절에 말씀하십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할렐루야!
사랑하면 아내가 실수해도 덮어주고, 남편이 실수해도 덮어줍니다.
그래서 저는 누가 실수를 하면 사랑하는 마음과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그냥 딱 덮어버립니다. 사랑과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기도해 주고, 그 처리를 하나님과 성령께 맡겨 버립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하나님의 뜻에 맞게 반드시 처리하십니다.
어떤 장로님이 실수를 했을 때, 그것을 여러분 자녀에게 말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자녀가 파괴당합니다. 그 장로님이 강단에 나오셔서 대표 기도할 때 여러분의 자녀가 절대로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만일 제가 어떤 실수를 했을 때 그것을 여러분의 자녀에게 알려 주면 여러분의 자녀를 죽이는 일이 됩니다. 제가 아무리 천사처럼 말하고 설교해도 여러분 자녀의 귀에는 그것이 들리지 않습니다. 제 실수만 생각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험담을 하지 않는 것은 상대방을 위한 것일 뿐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험담, 비방을 벗어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독거미가 먹었던 음식처럼 벗어 던져버리라는 것입니다.
2.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라
그리고 이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것을 오해하면 안 됩니다.
이 말씀을 받고, '아, 아직 구원이 부족하구나. 구원받게 노력해야지.'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따라합시다. "영적 구원은 일회적이다."
벌써, 예수님을 믿은 첫날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갓난아기, 엄마가 금방 낳은 그 핏덩이 같은 아기가 짐승입니까? 사람입니까?
사람입니다. 그러나 사람 노릇을 하지 못합니다. 말도 못하고 자기 몸도 가누지 못하고 옷도 입지 못합니다. 자라야, 젖을 먹고 자라야 사람 노릇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새 신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원은 받았지만 구원받은 사람답게 구원 역사를 이루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라야 합니다. 예배 드리고, 전도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야 하는 것입니다.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기 위해서는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고 말씀하시는데,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는 말씀은 무슨 말씀입니까?
아주 건강한 아이가 배가 고파서 엄마 젖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갈망하라는 뜻입니다. 목이 말라서 죽어가는 사슴이 헐떡이며 물을 찾듯이, 건강한 아기가 배가 고파서 젖을 찾듯이 갈망하라는 것입니다.
갈망해서 신령한 젖, 하나님 말씀을 먹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럴 때 우리가 장성한 백성, 예수님의 분량에 이르는 구원받은 백성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젖 안에 모든 것이 다 있습니다.
성경 안에 모든 것이 다 있습니다. 할렐루야!
성경 한 권에 모든 것이 다 있습니다. 성경만, 말씀만 먹으면 쑥쑥쑥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3] 결 론
미국의 카버박사는 흑인 노예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가 태어난 날짜는 아무도 모릅니다. 1942년에 죽은 날짜만 알려진 사람입니다. 그에게는 단 한가지 재산이 있었습니다. 바로 살아계신 하나님이 자기를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확고한 신앙심이었습니다. 그는 확고한 어린 아이같은 순전한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는 온갖 시련을 극복하며 농과대학을 졸업하고 계속 공부하여 농학박사가 되었습니다. 그의 모교인 아이오와 주립농대에서 그에게 교수로 남으라 하였으나 그는 가난한 농민들의 친구가 되겠다고 알라바마주의 초라한 농업학교에 교사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평생을 살면서 농민들을 돕는 일에 자신의 학문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는 농민들이 경작하는 목화가 바구미 벌레의 피해로 폐농하는 것을 보고 목화에 대한 대체작물로 땅콩을 개발하여 농민들에게 권장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말을 듣고 땅콩을 심었던 농가들이 과잉 생산으로 빚더미에 앉게 되었습니다.
온갖 비난에 상심한 그는 땅콩 한 주먹을 들고 숲 속으로 들어가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이 땅콩을 왜 만들었습니까?“ 하나님께서 땅콩을 들고 기도하는 그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이르시기를 ”땅콩을 들고 연구실로 들어라가“ 하셨습니다. 그는 연구실에서 땅콩 하나만으로 300여 가지가 넘는 제품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리고 공장을 세워 그 지역이 부촌이 되게 하였습니다.
땅콩 하나에서도 이런 가능성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가 한 말에 “땅콩은 모든 사람에게 복을 갖다 줄 것이며 그 장래성은 땅콩 농민들의 상상력과 노력에 달려 있다”고 하였습니다. 땅콩이 그러하거늘 하물며 사람에게서야 얼마나 엄청난 가능성이 숨겨져 있겠습니까? 우리 각자가 노력과 상상력으로 그리고 어린 아이같은 순전한 믿음으로 자신을 발전시켜 나가야 합니다.
항상 하나님의 신령한 젖을 사모하며 갈망하십시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영적 쓰레기 같은 것들을 버리십시오, 당신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오직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 본대로 다른 이들에게 나타내십시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신앙 성장의 비결!
벧전 2:1-3 / 송수천 목사
'톨스토이'는 그의 작품 '이반의 죽음'에서 '죽음에 관한 심각한 한편의 드라마'를 남겼습니다. 주인공인 이반은 젊은 검사로 비교적 순탄한 생활을 하는 가운데 도시로 영전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이반은 젊은이로써의 누릴 수 있는 이 자랑스러운 모든 행복은 그가 의사에게 진찰을 받는 순간부터 다 무너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의사는 그가 고칠 수 없는 병에 걸려 얼마 못 가서 죽게 될 것이라는 진단을 내렸습니다.
그의 놀라움과 두려움과 절망은 비결 때가 없습니다. 이반은 이 충격적인 비극을 안고 침대에 누워 깊은 생각에 잠겼습니다.
대학시절에 배운 논리학의 삼단논법인 '카이우스는 인생이다. 인간은 죽는다. 그런고로 카이우스는 죽는다.'는 논리학의 명제가 옳다고 믿어왔던 이반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카이우스에게 관한 것이며 다른 사람의 일이지 자신이 죽어야 한다는 생각은 추호도 생각해 본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죽음의 문제가 바로 자신의 문제라고 생각할 때 이 젊은 검사는 견딜 수 없는 고독과 비참함과 그리고 신의 무정함을 생각하며 슬프게 또 슬프게 울었답니다.
여러분, 인생은 요람에서 무덤까지 먼 길을 가는 나그네랍니다. 누구나 매일 매일 길을 갑니다. 오늘도 가고 내일도 갑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인생 길을 걸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과연 어떤 길을 가고 있는가? 이것이 문제입니다.
성경 렘21:8절에 '보라 내가 너희 앞에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두었노라'고 하십니다. 또 신30:19절에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자신을 가리켜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요14:6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은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이 있고, 행복의 길과 저주의 길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길을 선택하는 선택권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길이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통행수단의 길'이 있습니다. 사람이 다니고 자동차가 다니고 기차가 다니는 통행로를 다 길이라고 합니다. 또 하나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 지켜야 할 도리를 길'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사람은 도덕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지켜야 할 도리가 있고 윤리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윤리적인 도리가 있습니다. 그것을 가리켜 길이라고 하고 도리라고도 합니다. 짐승과 사람이 다른 점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만은 하는 짓과 걷는 길이 다르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길을 가는 데는 다음 몇 가지가 필요합니다.
⑴목적지가 분명해야 합니다. 우리 인생은 나온 것이 있는가 하면 가는 곳이 있습니다. 출발점이 있는가 하면 종착점이 있습니다.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인간을 흙으로 만들었다'고 했으며 그 '인간은 결국 하나님께로 돌아간다.'고 했습니다. 실업자들의 하루에는 목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하루에 일과가 있고 시간이 정해져 있습니다.
뉴욕 행 비행기는 기상 조건으로 두세 시간 연착할 수는 있어도 반듯이 뉴욕 카네기 공항에 도착해야 합니다. 뉴욕 행 비행기가 만약 모스크바로 간다든지 평양으로 간다면 그것은 큰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로 가야 할 인간들이 항로를 바꾸어 다른 곳으로 가고 있다면 이것은 비행기가 항로를 바뀐 것과는 비교가 할 수 없습니다.
우리 앞에 두 가지의 길이 있다고 했습니다.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 행복의 길과 저주의 길, 또 성경은 이 길을 좁은 길과 넓은 길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좁은 길은 좁기 때문에 가기가 힘들고 그래서 가는 사람이 별로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길은 가면 갈수록 편하고 좋아집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주님과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믿/
그런데 또 넓은 길은 넓고 평탄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가고 있으나 그 길은 가면 갈수록 좁아지고 어려워집니다. 여기서 말하는 '좁은 길'은 '천국 가는 길'이요, '넓은 길'은 '지옥 가는 길'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좁은 길을 택한 사람들입니다. 그 길은 가는 길이 힘이 들고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 길이 생명의 길이요, 축복의 길입니다. /믿어지면 아멘!/
⑵길을 가는데 안내자가 필요합니다. 먼 여행을 떠나는 사람일수록 안내자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지금 미지의 세계, 그 미래를 향하여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안내자는 그 지리가 밝은 자라야 합니다. 주님은 마15:14절에서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시며 인간을 만드신 분이기에 내 인생 길에 안내자로써는 최고입니다. /믿/ 주님은 배고픔도 겪으셨고 슬픔도 겪으셨고 억울함도 겪으셨고 죄 없이 매도 맞으셨고 까닭 없이 버림도 받아보신 분이시기 때문에 내 인생 길에 동행자로써 제일입니다.
그 분은 친히 '내가 곧 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길이 생명의 길이요 축복의 길이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영원한 인생의 안내자로 삼고 신앙의 성공 자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할/
⑶먼 길을 가는 나그네에게 보호자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은 여행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납니다. 그래서 우리에겐 절대 보호자가 필요합니다.
성경은 그 보호자를 하나님이라고 가르쳐 줍니다. 시121:7절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케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이 보다 서 큰 선언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맞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길이 되십니다. /믿/
여러분 잘 사는 사람이 더 잘 살고 행복한 사람이 그 행복을 지켜 나가는 길이 있습니다. 외롭고 쓸쓸한 사람들과 버림받고 밀려난 사람들이 위로 받고, 사랑 받는 길이 있습니다. 왜 사는가? 어디로 가는가? 어떻게 사는 것이 사람답게 사는 것인가를 모르는 사람들이 올바르게 사는 길이 있습니다. 가난하고 병들고 그래서 나날을 고통과 싸우며 살아가는 불행한 사람들이 고침 받고 새롭게 태어나는 멋진 길이 있습니다.
갈등과 증오와 불평이 사라지고 화해와 사랑이 넘치는 세상을 만드는 길이 있습니다. 그 길이 곧 '내가 곧 길'이라고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사는 것입니다. /믿/ 만약 길을 잃고 헤매던 사람이 길을 찾았다면 더 이상 헤맬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옛날 어떤 사람이 광산에서 등불을 들고 갱 속에 들어갔다가 등불이 꺼졌습니다. 출구가 어디인지 동서남북이 어디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꼭 죽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때 지혜가 떠올랐습니다. 석탄을 실어 나르는 철길이 생각나서 신발을 벗어들고 발을 철길에 대고 나갔더니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밖으로 무사히 나갈 수가 있었다고 합니다. 길을 찾아야 합니다. /아멘!/
사람들은 끊임없이 길을 가면서 사람을 만납니다. 어떤 성인은 우리 인생 길에 네 가지를 잘 만나야 된다고 합니다.
첫 번째는 '부모'를 잘 만나야 합니다. 부모를 잘못 만나면 평생 고생합니다. 학교 공부를 못합니다. 가정교육이 제대로 되지 않습니다. 또 삶의 환경이 나빠집니다. 부모를 잘 만난다는 것은 그 만큼 중요합니다.
그러나 부모를 잘못 만난다고 할지라도 두 번째로 잘 만나야 되는 것은 '스승'입니다. 스승을 잘 만나면 모든 조건을 감수 할 수 있는 비결을 배웁니다. 그러나 스승을 잘못 만나면 그 생활이나 삶이 달라질 수가 없습니다.
'좋은 선생은 훌륭한 제자를 만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스승보다 더 중요한 만남이 있는데 그 세 번째 만남이 '친구'입니다. 참으로 친구를 잘 만나면 그 친구를 통해서 어려운 세상을 같이 이길 수가 있습니다. 친구를 잘 만나면 어려운 일, 힘든 일, 괴로운 일이 있을 때, 도움을 주고받으면서 또 고통을 당할 때, 그 고통을 같이 나눌 수가 있습니다.
그래요, 친구도 중요합니다. 어떤 친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삶의 운명도 인격도 바뀔 수가 있습니다. 부모에게 의논 못할 일도 친구에게는 할 수 있고, 남편에게, 아내에게, 말못할 형편도 친구에게 도움을 청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 좋은 친구를 만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할/ 그런데 그 보다 더 중요한 만남이 있습니다. 누구인가? 그 네 번째 만남은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는 일입니다. /믿/
생명을 조정하시고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뱃속에서부터 인생의 마지막 죽음에 이르기까지 우리 인생 전부를 책임져 주시는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복중에 제일 큰복입니다. 여러분 부모를 좀 잘못 만난다 할지라도 스승을 잘못 만난다 할지라도, 또 친구를 잘못 만난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바로 만나면 인생을 바로 살수가 있습니다. /동의하시면 아멘!/
오늘도 하나님만 만나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여러분 오늘날도 하나님을 만나면 우리의 삶 속에 알지 못하던 크고 비밀한 일이 깨닫게 됩니다. 사람을 변화시키고, 환경을 변화시키는 분이 누군지 아십니까? 바로 우리의 길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남태평양의 어느 섬에서 있었던 일이랍니다. 시원한 야자수 그늘에서 토인 한 사람이 성경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때 마침 그곳을 하나님을 믿지 않는 어떤 서양인이 지나가면서 '서양에서는 웬만큼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이 아니면 그런 책도 읽지 않는다.'고 하면서 비아냥거립니다.
그런데 그 토인은 얼굴을 들어 하얀 이를 드러내 보이면서 '그러나 내가 이 책을 읽지 않았더라면 당신은 여기서 무사히 지나갈 수 없었을 거요! 나는 왕년에 사람을 잡아먹는 식인종이었지만 예수를 믿은 후 옛날에 악습을 버리고 딴 사람이 되었소! 만약 내가 하나님의 가르침을 몰랐더라면 지금쯤 당신은 나의 뱃속에 있었을 것이요!' 이 소리를 들은 서양 사람이 사시나무 떨듯 총총히 사라져 버렸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삶의 안내자로, 보호자로, 동반자로 모시기를 바랍니다. 요3: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1:12절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할/ ◀제목소개!▶
오늘 본문을 보십시다. 1-3절까지 우리는 두 가지를 찾아 볼 수 있는데 하나는 '믿음의 성장을 방해하는 요소'들이 나오고, 다른 하나는 '신앙의 성장의 비결'을 계시해 주고 있습니다.
먼저 2절을 보자! '갓난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신앙이 자라기를 원하십니다. 저와 여러분의 신앙이 쭉쭉 성장하기를 원하십니다. /믿/
오늘 본문을 기록한 베드로는 아마도 신앙 성장의 중요성을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 가운데 가장 뼈저리게 체험했던 사람입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베드로처럼 자주 넘어지고 베드로처럼 자주 실패하고, 자주 침체 속에 빠졌던 제자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우리의 신앙 성장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누구보다 더 잘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전 후서를 끝마치는 마지막 절인 벧후3:18절에서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베드로가 우리에게 마지막 부탁한 것은 '우리의 신앙이 자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라가야 합니다. 신앙은 성장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한 사람의 인격이 성장함에 따라 많은 변화가 옵니다. 어린아이가 자라지 아니하면 보통 비극이 아닙니다. 자라야 힘을 씁니다. 내 인격 속에 지식이 자라면 세상에서 대우를 받습니다. 내 사업체가 커지면 모든 사람이 척사 대접을 합니다. 국력이 커져야 세계무대에서도 무시당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모든 것이 성장해야 합니다. /믿/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앙이 성장하지 못하면 늘 마귀의 밥이 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합니다.
성도는 어디까지 성장해야 합니까? 엡4:15절의 말씀처럼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나야' 합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의 분량 따라 축복을 주십니다. '내 믿음대로 될지어다.' /아멘!/
그런데 신앙 성장을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본문 1절을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1-2절에서 보면 신앙 성장의 비결 세 가지를 제시해 주고 있는데 '버리라! 사모하라! 그리고 자라나라!'입니다.
우리가 자라나기 위해서는, 그리고 신앙 성장을 위해서는 우선 버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무엇인가? '악독, 궤휼, 외식, 시기, 그리고 비방하는 말'입니다. 이것들을 버려야 우리의 믿음과 인격이 자랄 수가 있습니다. /할/
그런데 본문 1절은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앞장에 있는 말씀, 특별히 1:23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너희가 거듭난 것이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다'고 하신 말씀과 연결되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이 '그러므로'라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영양분을 섭취하려면 '먼저 우리 속에 있는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려야 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언급된 다섯 가지의 죄악들은 거듭난 자에게 합당치 않은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난 성도는 마땅히 이것들을 버려야 합니다.
여기 '버리고'는 마치 낡고 더러운 옷을 벗어버리듯이 벗어버리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벗어야 새 옷을 입을 수 있습니다. 옛 사람을 벗어야 새 사람으로 덧입게 됩니다. /믿/
1. 그러면 우리가 벗어버려야 할 죄악들은 무엇입니까?
①악독을 버려야 합니다. 악독은 부당한 방법에 근거한 성취 욕구를 가리킵니다. 남을 해치려는 심사, 그리고 자기만이 차지하려는 심사를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여기 악독은 '악의, 악덕, 악한 행위'를 뜻하는데 남을 해하려는 마음의 악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죄악은 미움과 살인의 행동을 유발시키는 출발점입니다.
▶유람선에 원인 모를 구멍이 나서 배가 침몰하는 바람에 사람들이 다 죽고 그 중에 처녀, 총각 두 사람만이 간신히 살아서 무인도에 도착을 했습니다.
남자가 말합니다. '저 단둘만이 있으니 예긴 데요 나랑 결혼 안 할 레요' 그러자 여자가 말하기를 '단 둘이 있다고 날 우습게 보는 군요, 난 머리 좋은 남자 아니면 결혼 안 해요' 그러자 남자가 하는 말이 '아! 그래요, 그럼 잘 됐네! 네가 얼마나 머리가 좋은데요, 사실 배에 구멍을 낸 게 나걸랑요'
여러분, 단 둘이 살려고 배에 구멍 낸 사나이! 남들 다 죽어도 나만 잘되면 된다는 생각! 부동산 투기도 그렇고, 폐수 흘러 보내는 것도 그렇고, 바로 이런 사람이 오늘 본문이 말하는 악독한 사람입니다.
②궤휼을 버려야 합니다. 궤휼이란 말의 본래의 뜻은 낚시를 할 때 낚시 바늘이 보이지 않게 미끼를 끼워서 물고기를 잡는 것처럼 '미끼로 잡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거짓되고 간사한 말로 남을 속이는 마음입니다. 한마디로 '교활하고 음흉한 마음'입니다.
더 깊이 들어가면 사기할 목적으로 남을 꾀거나 부추겨서 나쁜 짓을 하게 하고, 남을 선동하여 못된 일을 하게 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니까 궤휼은 남을 속여서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궤휼은 순전의 반대입니다. 세상은 온통 궤휼한 자로 가득 차 있습니다. 속임수가 난무하는 세상입니다.
여러분, 남을 속이는 모든 행위는 갈수록 더욱 심각해질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말세의 징조들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말세의 징조를 보여주는 딤후3:12절에서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에서 사람들을 잘 만나야 됩니다. 사람을 잘못 만나면 자기 것 다 빼앗기고 병신이 되기 쉽습니다. 사기꾼들은 얼마나 말이 그럴듯한지 모릅니다. 세상에 살면서 한두 번씩은 이런 사기꾼들에게 넘어가 보지 않은 사람 없는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 좋은 사람, 형통한 사람을 만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믿/
③외식을 버려야 합니다. 한마디로 것과 속이 다르고 말과 행동이 다른 것을 외식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을 아주 싫어하시고 질색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특별히 싫어하셨던 것도 그들이 외식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마23:25절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도다.' 또 27절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다.'고 하셨습니다.
악으로 가득한 사람이 겉으로는 미소작전으로 선을 가장하는 사람, 마음은 엉뚱한데 있으면서 생각해 주는 것같이 행동하는 사람,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을 잘 보이기 위해 환심을 사고나서 어느 결정적인 순간 자기의 유익을 챙기는 그런 고등사기꾼입니다.
궤휼과 외식은 남을 속인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궤휼은 남을 이용해 먹으려고 속이는 것이고, 외식은 남에게 잘 보이고, 또 자신을 과시하려고 속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진실하시므로 외식을 미워하시고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세인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외식'이라는 말은 본래 '가면'이란 말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가면을 쓴 배우들의 연기를 가리킬 때 외식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④시기를 버려야 합니다. 시기는 내가 가지기를 원하지만 가지지 못한 것을 남이 가지고 있을 때 그것을 부러워하며 미워하는 것입니다. 옛말에 '사돈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고 했고, 지금은 '사촌이 자가용을 사면 자기는 교통순경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시기심은 무섭습니다. 가인은 자기 동생 아벨을 시기해서 결국은 죽이고 말았습니다. 사울 왕은 여인들이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라는 말 때문에 강한 시기심에 사로 잡혔고, 그 시기하는 마음 때문에 결국 악령에 사로잡혀서 비참하게 살다가 갔습니다.
이 시기심은 남을 괴롭힐 뿐 아니라 자기 자신을 악하게 하기 때문에 신앙성장에는 아주 큰 걸림돌이 됩니다. '크리소스톰'은 '좀이 옷을 갉아먹듯이, 시기심은 사람의 영혼을 갉아먹는다'고 했습니다.
잠14:30절 '마음의 화평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의 썩음이니라' 여러분,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잘 될 때 기뻐해 주고 그 사람을 본받아 자기도 잘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할/ 갈5:15절에서 바울은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망한다.'고 했습니다.
⑤비방하는 말을 버려야 합니다. 비방은 '대항해서'와 '말하다'라는 합성어입니다. 그러므로 비방은 '악담, 중상'을 의미합니다. 다른 사람을 헐뜯고, 명예를 훼손시키며, 무고히 중상 모략하는 것입니다. 대권주자들의 정치 현실을 보십시오. 참으로 암담한 정치 현실입니다.
또 비방은 남의 허물이나 약점을 들추어내고 거짓으로 남을 비난하며 악평하는 죄입니다. 민12:1절 이하에 미리암이 그의 오라비인 모세를 비방하다가 하나님 앞에 벌을 받아 문둥병이 발했습니다.
잠18:8절에 보면 '남의 말 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배속 깊은 데로 내려간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게 비방의 죄를 지으면서도 그것을 별미처럼 즐길 수 있습니다.
▶비방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시키게 됩니다. 잠16:28절 '패려한 자는 다툼을 일으키고 말쟁이는 친한 벗을 이간하느니라.' 잠17:9절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
또 비방이 왜 나쁜가하면 비방은 '하나님의 재판권을 찬탈하는 무서운 죄악'이기 때문입니다. 약4:11-12절 '형제들아 피차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 자가 아니요 재판자로다 입법자나 재판 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관데 이웃을 판단하느냐?'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악독과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비방하는 말'은 옛 사람에게 속한 것들입니다. 거듭난 성도의 영적 성장에 이런 것들은 암적 존재입니다. 그래서 1절에 '모든'이라는 말을 세 번씩이나 반복하고 있는데 이것은 이런 것들을 일체 깨끗이 버리라는 뜻이요, 흔적도 남기지 말고 청산하라는 뜻입니다.
엡4:22-24절에도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베드로를 통하여 우리 신앙의 성숙을 방해하는 것들을 다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믿/아멘!/
2. 신앙의 성장을 위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2절에 '갓난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니라' 했습니다. 또 빌2:12절에 보면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했습니다.
여기 신령하고 순전한 젖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성경 66권의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신앙성장의 비결이 됩니다.
▶2절과 5절에서 나오는 '신령'이라는 말이 무엇인가? 이 말은 '영적인 또는 성령의'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신령한 젖을 먹어야 되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말씀대로 살아야 됨을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①'갓난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젖을 먹으면 아이들이 자라납니다. 여기 '순전하다'는 말은 '한가지 밖에 모른다.'는 말입니다. 갓난아이들이 바라는 것은 한가지 밖에 없습니다. 엄마 품과 젖 밖에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너희도 갓난아이들 같이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고 합니다. 신령한 젖은 하나님 말씀입니다. 성도가 신앙이 성숙해 지는 데는 말씀 밖에 없습니다.
시19:10절에서 말씀을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요 꿀과 송이 꿀보다 더 달도다.'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이 '돈 보다 더 좋고 먹는 것보다 더 즐겁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시119:131절에 '내가 주의 계명을 사모하므로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성숙하느냐? 안 하느냐?는 바로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느냐? 아니하느냐? 와 정비례합니다.
여기 '사모하다'는 말은 '간구하다, 갈망하다, 욕망하다'라는 의미로써 사막에서 물을 찾는 사람처럼, 사슴이 헐떡거리며 시냇물을 갈망하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먹으려는 태도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②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지 않습니까? 신령한 젖인 하나님의 말씀의 맛을 체험해보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3절을 보세요!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어린아이가 엄마의 젖을 처음 한번 맛보면 그 다음부터는 정신 없이 빱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시34:8절에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믿음의 참 맛은 힘들지만 말씀을 순종할 때 보게 해 주십니다. 벧전2:8절에서 '말씀에 순종하지 아니하면 넘어지게 정해 놓으셨다'고 했습니다. 순종하면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체험하게 되지만, 순종하지 아니하면 넘어지게 된다는 것을 꼭 명심해야 합니다. /할/
▶아이들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어린 아이들의 대표적인 특징은 이기심입니다. 사실 어린아이들처럼 이기적인 존재는 없습니다. 얼마나 자기만 압니까? 어머니가 바쁜지, 아픈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배가 고프면 울고불고 매달립니다. 체면도 없습니다.
여러분 모든 것이 이기심 때문에 베드로가 지적한 죄들이 유발됩니다. '악독, 궤휼, 시기, 외식, 비방' 이것들이 다 이기심에서 유래됩니다. 이런 것들을 극복하고 이겨내기 위해서는 성장하면 됩니다.
어린아이가 자라 장성하면 부모의 사정, 형편을 알고 자기 이기심을 죽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앙이 성장하면 이런 악들이 제거됩니다. /믿/
그런데 우리의 신앙성장의 비결은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롬10:17절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할/
③하나님의 말씀을 가리켜서 '순전하고 신령한 젖'이라고 했습니다. 순전하고 거짓이 없는 섞인 것이 없는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젖에 다른 것을 섞어 놓으면 맛은 더 있고, 보기에는 먹음직스러울지 몰라도 본래 젖이 지닌 본질은 변질되기 마련입니다. 마찬가지로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에 철학을 가미하고 과학이나 기타 인간적인 방편이 섞이게 되면 말씀의 생명력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잘 알았기에 철학도 율법도 다 팽개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전하기로 작정했다고 했습니다.
▶조용기 목사님이 철학적인 설교를 했다가 마침 철학교수가 갈급한 마음으로 교회에 갔었는데 설교에 실망하고 목사님에게 충고를 했다고 합니다. 조용기 목사님의 예와 집에 보면 그 교수님이 '철학 강의는 철학교수에게 맡기고 목사님은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하라'고 충고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씨앗과 같습니다. 그래서 말씀 그대로 우리 마음 밭에 뿌려야 싹이 나고 움이 돋고 자라나 30, 60, 100배의 열매를 냅니다. 그런데 종자의 모양을 아름답게 하느라고 자르고 깎고 형체를 다르게 만들면 그 씨앗은 생명을 잃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철학이나 과학이나 인간 지식에 맞지 않는다고 잘라내고 높이게 되면 그 말씀은 이미 생명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66권만 전하고 배우고 받으십시다. /아멘!/할/
신령한 젖은 하나님의 말씀의 신령한 젖을 의미합니다. 시19:10절에서 그 말씀을 '꿀과 송이 꿀보다 더 달도다'로 표현했고, 하나님의 말씀을 떡으로도 비유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성숙을 위해서 우리 모두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어린아이를 봅시다. 건강한 어린아이들은 젖을 무척 사모합니다. 엄마의 젖을 얼마나 찾습니까? 건강한 아이입니다.
④만약 어린아이가 식욕이 없다면 두 가지 이유일 것입니다.
⑴병들었기 때문입니다. 질병이 오면 식욕을 잃어버립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으로 영적으로 병들어 있으면 말씀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죽은 나무는 성장이 없듯이 우리의 영이 죽으면 성장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모하시기를 바랍니다. 여기서 사모하라는 말은 '심히 사랑함으로 동경한다.'는 말입니다. 사슴이 갈증이 나서 시냇물을 찾듯이 그렇게 갈급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라는 것입니다.
⑵식욕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린 아이가 식욕이 없을 때는 대부분 다른 간식을 많이 먹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군것질을 많이 하면 식욕이 없어집니다. 여기서 영적으로 다른 것을 대하는 것은 세상에 빠지는 것이요, 죄악에 빠지는 경우로 비교할 수 있습니다.
죄를 짓게 되면 말씀은 떠나가 버리고 은혜를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축복은 떠나가고 마귀의 종이 되어 이리 터지고, 저리 터질 수밖에 없습니다.
⑤갓난아이처럼 말씀을 사모하는 태도는 어떤 것인가?
⑴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상고하는 것입니다. 행17:11절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 했다고 했습니다. 깊이 묵상하고 적용해 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⑵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 것입니다. 중요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설교'로만 들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야 합니다. 살전2:13절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아멘!/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을 때 내 심령 속에서 역사가 일어납니다. '깨닫는 역사! 뉘우치는 역사! 회개하는 역사! 결심, 결단의 역사'가 일어날줄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건강하게 잘 자라려면 음식을 잘 먹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영혼의 건강을 위해서는 영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잘 먹어야 신앙 성숙의 지름길이 됩니다. /아멘!/
⑶사모하는 마음으로 신령한 젖을 먹고살면, 우리가 복을 받게 됩니다. ▶첫째 우리의 영혼이 잘됩니다. 사랑의 사도 요한은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되면, ▶두 번째로 '우리의 범사에 하나님의 축복이 차고 넘치게 되어 형통의 복'이 임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잘 기며 신령한 삶을 살 때 하나님은 그의 범사에 복을 주셔서 큰복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다시 말해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하나님이 복을 주신 것입니다. /할/
▶그 다음에 신령한 은혜 속에 사는 자에게 우리 하나님은 '육신의 건강'도 허락해 주실 줄 믿습니다. /아멘!/
⑷우리가 육신 적으로도 잘 먹고 건강하려면 운동을 해야 하듯이 우리의 영혼의 건강도 운동이 절대 필요합니다. 특별히 운동 중에 '기도 운동! 봉사 운동! 전도 운동'이 있습니다. 전도 운동은 예수를 자랑하는 운동입니다. 성도는 이 운동을 잘 해야 성숙하고 교회도 성숙하게 됩니다. /아멘!/
3. 베드로는 우리에게 말씀을 사모하라고 했는데 그 말씀은 어떤 것입니까?
⑴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말씀입니다. 딤후3:16절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합니다.
⑵성도들을 올바르게 살도록 해줍니다. 시119:11절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⑶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해줍니다. 시119:105절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⑷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들의 마음과 생각과 뜻을 감찰하십니다. 히4:12절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죄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십니다.
⑸말씀 속에 복이 들어 있습니다. 계1:3절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신앙은 결심과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버릴 것은 버리는 결단과 취할 것은 취하는 노력의 결단이 절대 필요합니다.
▶철학자 '키일케골'의 글입니다. 어느 날, 겨울이 되자 철새들이 남쪽으로 날아가다 배가 고팠습니다. 그때 철새 대장이 말했습니다. '얘들아! 저 밑의 옥수수를 뜯어먹고 가자.' 그래서 옥수수를 배불리 먹은 후에 다시 날아가는데 그때 철새 한 마리가 '이 맛있는 옥수수를 두고 어떻게 떠나랴? 내일 떠나자!'고 하면서 계속 옥수수 밭에 남았습니다.
다음 날, 그 철새는 떠나야 된다는 것을 알았지만 또 중얼거렸습니다. '이 맛있는 음식을 두고 어떻게 떠나나? 내일 떠나자!' 그렇게 밤낮 내일 떠난다고 결심만 했습니다. 얼마 후, 첫 눈이 내리자 철새는 진짜 결심했습니다. '이제 떠나자!' 그런데 그 동안 옥수수를 너무 많이 먹어 날갯죽지에 살이 붙어 날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그 철새는 첫 눈에 파묻혀 죽고 말았답니다. /슬픈 이야기입니다./
▶히말라야 산 속에 가면 '야맹조'란 새가 있습니다. 이 새는 낮에는 열심히 놀다가 밤이 되면 남의 새 둥지에 들어갑니다. 그러면 그 둥지의 주인 새가 불청객인 야맹조를 막 쪼면서 한참 구박합니다. 그러면 야맹조는 너무 서러워서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결심합니다. '정말 서러워서 못살겠다. 내일은 꼭 내 둥지를 짓겠다.'
다음 날이 되자 야맹조는 어제 눈물로 했던 결심을 잊어버리고 또 여기저기 놀러 다닙니다. 결국 밤이 되어 남의 둥지 신세를 질 수밖에 없어서 또 남의 둥지에 들어가면 또 한참 쪼이고 구박을 받습니다. 그때도 또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다짐합니다. '정말 아니꼽고 더럽고 메스껍고 치사해서 못 참겠다. 내일은 반드시 내 둥지를 짓겠다.' 그렇게 내일, 내일 하다가 아직까지도 둥지를 못 짓고 지금도 히말라야 산 속에서 구박받고 살고 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대개 자신이 무엇을 버려야 하고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지 압니다. 그런데 '내일 하자!'고 결심만 하다가 소중한 시간을 다 버리고 뒤늦게 후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내일 하자!'고 마루는 습관을 단호히 끊어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 이 시간이 결심과 결단의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이 은혜 받을만한 때요 지금의 구원에 날'이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운 선택
벧전 2:1-3 / 이동원 목사
지난 이웃 사랑 축제 기간에 가수 이 상우 형제가 와서 간증하며 발달 장애로 고생하는 아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어 우리 모두의 마음에 안타까움의 공감을 남겼습니다. 이 상우 부부는 자신의 아들 승훈이가 30개월이 지날 무렵부터 다른 아이들과 다르다는 것을 인지했다고 합니다. 이 아이는 ‘아빠’라는 말도 제대로 발음을 못하고 갑자기 소리를 지르고 길로 뛰어나가는 등의 감정 조절을 못하는 현상을 보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혼자 옷 갈아입는데 만 만 6개월, 신발 갈아 신는 것을 배우는데 만 5개월이 걸렸다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발달 장애’(development disability)란 정신이나 신체가 <나이만큼> 발달하지 않은 미숙한 상태를 일컫는 장애를 칭하는 표현입니다. 이런 아이들로 인하여 그 부모들이 겪는 아픔은 헤아리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영적 성숙의 과정에도 발달 장애가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영적으로 성장해야 할 나이가 되었는데도 성장하지 못하는 이들로 인하여 하나님이 그리고 영적 지도자들이 아파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시나요? 오늘 날의 교회 내에는 교회 생활의 이력서와 상관없이 발달 장애를 겪는 수많은 영적 미숙아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직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한국 교회가 많은 문제를 직면하고 있지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이 두 가지에서 파생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하나는 소위 ‘명목상의 기독교인’(nominal Christian)들의 문제즉 이름만 교인이지 거듭남의 확신도, 구원의 확신도 없이 교회만 출석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는 것, 그리고 둘째는 구원은 받았지만 전혀 영적으로 자라지 못한 ‘미성숙한 교인들’(immature Christians)혹은 ‘육신적 크리스쳔들’(carnal Christians)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한국 교회의 건강을 위협하는 요인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우리가 참으로 영적으로 자라가기 위해서 해야 할일은 무엇이겠습니까? 누구보다 영적 기복이 심한 믿음의 여정을 지나왔던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의 말씀으로 권면을 받고자 합니다. 그리고 지난 두 주간 이웃 사랑 축제를 통해 예수님에 대한 믿음의 반응을 보인 분들에게도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제부터 믿음이 자라 가야 한다는 ‘성숙의 과제’가 앞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주십시오. 자, 그러면 영적 발달 장애를 극복하고 영적 성숙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가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아보고자 합니다.
1.‘영적 아이 됨’의 상태를 인지해야 합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자라가기 위해서는 우리는 아직 자라지 못한 자라가야 할 아이이구나 하는 인식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벧전2:2의 본문 말씀을 다시 읽겠습니다. “갓난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사도 베드로는 우리가 먼저 영적으로는 젖을 먹고 자라가야 할 갓난아기임을 인식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바울의 교훈을 살펴볼까요? 고전3:1-2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2)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바울도 베드로와 동일하게 ‘그리스도안에 아이들’(babes,in Christ)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런데 이런 영적 아이들의 특성은 무엇일까요? 성경의 기자들은 두 가지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아직 말씀을 잘 먹지 못하고 소화하지 못하고 있다는 영적인 영양의 결핍(말씀의 무지)을 지적하고 또 하나는 삶의 관점에서 접근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아직도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고 늘 시기하고 미워하고 싸우며 산다면 그는 교회 생활의 햇수나 직책과 상관없이 아직도 영적인 미숙아라는 것입니다. 고전3:3을 보십시오.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본문 벧전2:1의 말씀으로 돌아와 보십시오. “그러므로(너희가 거듭났다면벧전1:23)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그러므로 우리 안에 아직 이런 불신자로 살던 시절의 삶의 관행이었던 미움과 거짓, 시기와 질투가 남아 있다면 나는 영적인 아이임을 알고 영적 성숙의 필요를 절감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런 필요의 각성이야 말로 바로 영적 성숙의 출발점이 된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2.‘영적인 은혜’를 사모해야 합니다.
은혜는 기독교 신앙의 가장 놀라운 특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얼마 전에 우리 교회를 다녀간 오늘의 기독교를 대변하는 세계적 작가인 필립 얀시는 그의 책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에서 <은혜>는 성육신이나 부활보다 더 중요한 기독교 신앙의 특성이라고 주장합니다. 은혜를 가르치는 종교는 아무데도 없다고 말합니다.(불교의 고행, 힌두교의 카르마-업보, 유대교의 언약, 이슬람교의 법전등-모두 인간의 합당한 노력으로 신의 호의를 입는 것) ‘은혜’의 뜻이 무엇입니까?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도 일방적으로 조건 없이 베풀어지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이 사랑, 이 은혜로 구원받아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엡2:8-9의 말씀을 기억하시지요?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라” 그렇습니다. 우리 중에 행위로 구원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종교 개혁자들은 이것을 ‘오직 은혜’(sola gratia, only grace)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사도 베드로는 우리가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처럼 우리의 영적 성숙도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가르칩니다.
벧후3:18은 사도 베드로의 마지막 유훈 같은 그의 마지막 당부의 말씀입니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 그래서 구원받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은혜를 사모해야 합니다. 구원은 가장 근본적이고도 중요한 은혜이지만 구원이 은혜의 전부는 아닙니다. 그리스도안에는 온갖 은혜가 충만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은혜를 사모해야 합니다. 건강한 그리스도인에게는 이런 은혜의 목마름과 배고픔이 있습니다. <나는 더 이상 은혜를 사모하지 않는다>-이것은 우리가 병든 증거입니다. 마치 병든 사람이 식욕을 상실하듯 영적 건강을 상실하면 은혜를 사모함이 없어집니다. 그의 영혼은 메마른 사막이 되는 것입니다. 은혜는 다시 사막에 생명의 강이 흐르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 은혜의 유일한 통로가 기도라고 가르칩니다. 히4:16의 말씀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우리는 늘 주님 앞에 서기에 부족한 존재이지만 이 기도로 우리를 도우시는 은혜를 체험하고 이 은혜를 체험하면서 영적으로 자라가는 것입니다.
3.‘영적인 지식’을 학습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도 베드로는 이 은혜와 함께 우리의 영적 성숙의 절대적인 요소로 지식을 강조합니다. 물론 이 지식은 ‘영적 지식’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다시 벧후3:18을 읽어 보십시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영적 성숙의 본질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의 삶의 주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가를 알아가며 그를 닮아가는 과정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지식을 알려주는 책은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인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것을 순전하고 신령한 젖이라고 합니다. 어린 아기가 좋은 젖을 먹고 자라는 것-그것은 필수적인 성장의 조건입니다. 다시 벧전2:2을 읽어 보십시오.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도록(구원의 완성)자라게 하려 함이라”
건강한 아기는 엄마에게 젖을 달라고 보챕니다. 엄마의 젖은 아기의 생명 줄이요 건강 줄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직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목마름과 배고픔을 갖고 있습니까? 우리 교회는 영적 아기들의 성숙을 도울 목적으로 체계적인 성경 공부반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번에 이웃 사랑축제에서 믿음의 여정을 시작하기로 결심하신 분들이 새 생명반에서 시작하여 체계적으로 영적 지식을 섭취하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우리 교회 예배에만 참석하고 성경 공부 반에 참석 못한 분들에게 더 이상 늦추지 마시고 이제라도 시작하시기를 권면 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성경 공부 없이 예배에만 참석하는 교회 생활 40년보다 성경연구를 통한 체계적인 배움의 4개월이 믿음 생활에 차라리 더 실제적인 도움이 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에서 성경 공부를 우리 교회 일군세우기와 연관시키다 보니 이런 의외의 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봅니다. 제직이 되기 위한 목적으로 소위 필수적인 성경 공부 반은 이수하는데 이것이 끝나고 나면 더 이상의 성경 공부를 졸업해 버리는 분들이 일부 있습니다. 불행하고도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예수 믿고 지난 45년간 성경공부를 해오고 있고 신학공부만 10년을 했지만 저에게 성경은 여전히 신비로운 책이고 여전히 저의 영적 갈증의 대상입니다. 저에게 성경은 퍼내고 또 퍼내도 마르지 않는 생수의 우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QT하며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일입니다. 나는 이 가을 우리 교회 모든 성도들이 다시 하나님의 은혜에 목말라하며 다시 기도의 무릎을 꿇고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지나간 역사에서 모든 위대한 부흥은 성도들이 진실로 기도의 무릎을 꿇기 시작하고 성경 연구를 위해 말씀에 대한 진지한 탐구를 시작할 때 일어났습니다. 그럴 때 가정이 새로워졌습니다. 교회가 새로워졌습니다. 사회가 새로워졌습니다. 한 민족이 새로워지고 다른 민족 다른 나라에도 영향을 끼칩니다.
여러분은 혹시 에반 로버츠(Evan Roberts)라는 이름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는 20세기 초 영국 웨일즈에서 일어난 거대한 부흥운동의 주역이었던 사람입니다. 그는 20대 청년 시절 주일 학교 부장으로 봉사하며 한 집회에 참석했다가 “나를 굴복하게 하소서”라는 주제에 깊은 감동을 받고 말씀과 기도하는 일에 온전히 굴복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는 많이 배우지도 못한 광부의 아들이었지만 기도하는 중에 너를 통해 10만 명의 불신자들이 주께 돌아올 것이라는 환상을 받습니다. 그가 섬기던 작은 교회에서 17명과 더불어 시작한 기도회의 불길은 웨일즈 전역에 영적 부흥의 불길을 퍼트리며 그가 본 환상 그대로 웨일즈에서만 10만 명의 불신자들이 주께 돌아오게 되었고 이 영적 각성의 소식과 부흥의 불길은 전 세계로 퍼지게 됩니다. 1904년에 일어 난 일입니다. 이 웨일즈 부흥 운동의 현장을 방문하여 목격한 이 중에 하워드 존스톤(Howard A. Johnston,NY)박사라는 분이 있었는데 1906년 9월 한국을 찾아와 선교사 모임에서 웨일즈 부흥의 소식을 전하게 됩니다. 이어서 그는 10월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말씀을 전하며 에반 로버츠를 이야기하며 에반 로버츠처럼 부흥의 도구로 쓰임 받을 한국인은 손을 들어보라고 말합니다. 이 때 손을 든 사람이 길선주 장로(다음해 목사가 됨)였고 그가 다음에 1907년 평양 대 부흥 운동의 주역이 된 것입니다.
이 위대한 20세기 초의 세계적 부흥 운동의 단초는 26살 먹은 한 청년의 단순한 기도와 결심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주님, 제가 온전히 주님께 굴복된 삶을 살게 하소서”라는 기도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우리가 말씀과 기도에 온전히 순복하는 삶을 살기로 결심하고 성경을 공부하고 참으로 주 앞에 엎드려 기도하기로 결심한 다면 우리는 다시 한번 우리가 그토록 목마르게 고대하는 영적 부흥과 영적 성숙을 경험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신령한 성도로 성장하려면
벧전 2:1-5 / 박순오 목사
오직 예수!
이 세상의 살아 있는 모든 유기체는 자라게 되어 있습니다. 성장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우주 만물의 법칙입니다. 이것은 영적인 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살아 있는 성도는 날마다 성장해야 합니다.
어느날 폴리카르푸스의 젊은 제자가 겨자나무에 기대어 슬픔에 젖어 있었습니다. 선생이 그에게 다가가 물었습니다. “왜 그렇게 슬퍼하는가?”
“하나님 나라 확장 속도가 너무나 느립니다. 모처럼 신앙생활 시작하는 자가 있다 싶으면 다시 신앙을 버리는 자도 많습니다. 이래서야 도대체 언제 하나님의 뜻이 땅 위에 이루어지겠습니까? 생각할수록 슬퍼집니다.“
선생은 제자가 기대고 있는 겨자나무를 가리키면서 이렇게 격려했습니다.
“근심하지 말게. 하나님 나라는 지금 자네가 기대고 있는 겨자나무와 같다네. 겨자씨는 매우 작지만 성장하여 구름을 찌를 정도의 거목이 된다네.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희망을 크게 갖고 날마다 자기 직분에 충실하며 하나님께 봉사하는 것이 좋겠네.”
우리 예수님은 성장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천국이 겨자씨와 같다고 하신 것이나, 가루 서말 속에 섞어 넣은 누룩과 같다고 하신 것 등은 바로 하나님 나라의 성장을 가리키신 것입니다.
사도행전에서 초대 교회의 왕성한 사역을 중점적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가시는 성령님의 사역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약 성경의 서신서에서는 주로 성도 개인의 영적 성장에 대하여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는데, 이것 또한 하나님 나라 성장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요소입니다. 특히 교회 일군들은 영적인 면에서 성장하는 것의 중요성을 더욱 잘 알아야 했습니다.
본문 2절에서 사도 베드로는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앞의 1장에서 거듭남에 대해 말하고 나서, 여기서는 새로이 태어난 생명이 끊임없이 자라나는 성장의 중요성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얻은 우리는 과연 얼마나 자랐습니까?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엡 4: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목표로 성장해야 합니다. 성도 개개인의 성장은 주님의 교회 성장의 토대라는 점에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1. 신령한 젖을 사모해야 함
2절, “갓난 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여기 ‘갓난 아이’는 새 생명을 받은 성도를 가리킵니다. 갓난 아이는 순전하고 아이에게 적합한 젖을 먹어야 자라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성도의 영성이 자라나기 위해서는 신령한 복음의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처음 예수님을 알고 그를 믿어 거듭나게 되면, 세상에 갓 태어난 갓난 아이처럼 무럭무럭 자라나기 시작합니다.
갓난 아이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매일 매시간 엄마의 품에서 젖을 빨아먹는 것입니다.
엊그제 뉴욕의 딸애하고 나눈 대화에서도, 태어난 지 보름밖에 안된 손녀가 두, 세 시간 간격으로 모유를 먹는데, 먹을 때마다 똥을 싸서 일이 많다는 것입니다. 행복한 고민입니다. 아이가 왕성하게 먹고 왕성하게 배설하는 것만큼 좋은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성도는 규칙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우리는 아무리 바빠도 하루에 세 번씩 일손을 멈추고 식사를 합니다. 그런데, 식사를 거르거나 라면 같은 것으로 간단히 때우고 일하기를 거듭한다면 건강이 나빠지는 것은 뻔한 이치입니다.
사람의 영혼도 정규적으로 말씀을 먹지 않고는 결코 자랄 수 없습니다. 말씀에 대한 배고픔을 느낄 줄 알아야 하고, 이 배고픔을 지속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것입니다.
미국 감리교의 알렌 목사는 자기 교회 교인들의 교회 생활을 조사해 보았습니다. 등록 교인 중 주일 예배에도 참석지 않는 교인이 20%, 기도하지 않는 교인이 25%, 교인 중 35%는 성경을 읽는 시간이 거의 없고, 십일조 하지 않는 교인이 40%에 달했습니다.
교인 중 75%는 봉사에 관심이 없었고, 85%의 교인이 한 사람도 전도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교인 100%가 천국 가는 것을 희망하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알렌 목사는 성도들에게서 영적 성장을 위한 열정을 찾아보기가 어려웠습니다. 영혼의 양식인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이 뜨겁지를 않았습니다. 목사의 눈에 비친 교인들은 천국 문턱에 이르기도 전에 영양실조에 걸리든지 심한 기갈로 쓰러질 것 같아보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사모하고 있습니까? 영적인 것보다 육신적인 것을 더 사모하고 있지 않습니까? 본문의 권면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갓난 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여러분, 갓난 아이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아이는 엄마의 젖이 없으면 건강을 잃게 되거나 죽게 되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입니다.
갓난 아이가 엄마의 젖에 모든 것을 의지하고 있듯이, 성도에게는 ‘나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면 죽는다’ 라는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것이 아닌 다른 것으로도 살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면 치명적인 피해를 입는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엄마의 젖 만으로 살아가는 갓난 아이의 심정으로, 버릴 것을 버리고 사모할 것을 사모해야 합니다. 다른 여지를 두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모두는 주님 없이는 죽을 수밖에 없다는 각오를 가지고 주님을 바라보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이러할 때 우리의 영혼은 먹는 말씀 하나 하나가 뼈가 되고 살이 되어 무럭 무럭 자라게 될 것입니다.
2. 신령한 집으로 세워져야 함
4, 5절,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여기 ‘산 돌’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데, 사도 베드로는 예수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산 돌’이라는 명칭을 붙였습니다. 이 산 돌로써 신령한 집, 곧 성전이 세워진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산 돌’이라는 표현이 예수 그리스도와 어떻게 연결되고, 나아가 어떻게 성도들과 연결될 수 있는 것입니까?
‘돌’(리도스)이란 단어는 공관복음서에서 무덤을 봉인하는 둥글고 커다란 돌을 가리킵니다. R. Kratz에 따르면, 그 커다란 돌은 무덤을 안전하게 봉인한 것과 부활의 날 무덤 문이 개봉된 것과 관계되며, 마침내 무덤과 죽음에서 구출된 예수님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결국 이 ‘산 돌’이라는 용어에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이미지가 담겨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들 역시 ‘산 돌’ 이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성도들은 이미 죄로 인해 죽었던 자들이지만,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해 그리스도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신 것처럼 새 생명을 얻었으며, 장차 부활할 자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본서의 저자 베드로는 새 생명을 얻은 성도들이 그 상태로 만족해서는 안 되며, ‘신령한 집’으로 세워져야 한다고 권고합니다.
‘신령한 집’은 본 절에서 그리스도인들을 제사장직에 연결시키는 것으로 미루어보건대 성전, 곧 교회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원문에서 ‘산 돌’은 복수형으로 되어 있고 ‘신령한 집’은 단수형으로 되어 있는 것은 여러 성도들이 합력하여 하나의 교회를 이루어야 함을 보여줍니다.
성도 여러분! 성도의 성장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은 여러 성도들이 하나의 신령한 집, 곧 교회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통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이 구원 받은 목적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지체로서 자신을 드리기 전에는 결코 바로 성장할 수 없습니다.
성도들이 성전(=교회)으로 세워져야 한다는 개념은 여기서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고전 3:16, 17,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고후 6:16,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엡 2: 20-22,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말씀입니다.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이 없지만, 기능적인 면에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받을 만하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표현한 ‘산 돌’은 단수로 표현되었지만 우리를 표현한 ‘산 돌’은 복수로 표현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는 홀로 그 신령한 집을 지을 수 없습니다. 성도 서로 서로가 연합하여 ‘우리’가 될 때에야 비로소 신령한 집을 지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세워지는 집은 홀로 지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함께 연합할 때, 교회도 성장하고 성도 개개인도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 교회의 모습을 살펴보면 답답한 생각을 하는 분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봉사를 많이 했다든지, 큰 일을 했다든지 했을 때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이고 다른 지체들에게 어려움을 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연합함이 없다면 신령한 집은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성도들이 자신에게 맡겨진 분량을 따라 최선을 다할 때에야 비로소 신령한 집은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는 운명을 함께할 공동체입니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과 자신과의 신앙이 가장 중요하고 유일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신 거룩한 공동체를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여깁니다.
어떤 이들은 인터넷이나 방송을 통해 예배하는 것으로 신앙의 도리를 다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그러나 우리는 공동체적인 신앙운명을 갖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구원은 개인적인 것이지만 성도의 삶은 결코 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와 성도, 사람과 사람이 모두 산 돌이 되어야 신령한 집, 즉 교회가 지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성도는 공동체의 삶을 통하여 더욱 영적인 성장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은혜가 성도 여러분에게 넘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신령한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이 되어야 함
5절,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본 절은 성도들을 거룩한 성전이라고 부르는 것에서 진일보하여 성전 안에서 드려지는 제사를 주도하는 제사장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유대인의 전통이 강한 당시로서는 참으로 혁명적인 개념의 전환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구약 시대에 제사는 아무나 드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레위 지파의 아론의 자손들만이 제사장의 직분을 감당했습니다.
그런데 신약의 성도들 모두가 거룩한 제사장의 사역, 즉 예배의 전담자 사역을 감당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 말씀은 신약 시대의 성도들이 누리는 특권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구약의 제사장이 하나님께 나아가 제사를 드렸듯이,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 거룩한 제사, 곧 예배를 집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려야 하는 자리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롬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성도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됩니다. 회피해서도 안 됩니다. 교회의 첫 번째 사명인 예배 사역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성도의 영적 성장은 교회 공동체의 신령한 예배 없이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오늘 제사장 된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제사장이 제사를 위해 있었던 것처럼 우리는 예배를 위해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참 많은 경우 모자란 자들인 것 같습니다.
주일학교에서 선생님이 물었습니다. “교회에서 예배시간에 왜 조용히 해야 하지요?” 그러자 한 아이가 자신 있게 대답했습니다.
“엄마가 그러셨는데요, 사람이 잘 땐 조용히 하는 거래요.”
여러분, 우리 가정의 가장 귀한 사역이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주중(週中)의 삶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중심으로 진행되어야 합니다.
온 성도가 함께 모여 하나님께 예배하는 주일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준비하고, 하나님께 드릴 예물도 정성껏 준비해야 합니다.
교회 공동체가 전체로 모이고, 소그룹으로 모이는 모든 집회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히 4:16,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성도 여러분, 과거 유대인들은 제사장을 찾아 먼 길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성령의 도움 없이도 절기를 지켜 행하고 금식하며 율법을 지키려고 온 힘을 다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런 유대인들보다 열정이 적은 것 같습니다.
새 생명을 받았고, 성령님의 도우심을 얼마든지 받을 수 있는 보혜사의 시대에 살고 있으면서도, 과거 율법에 매여 살던 자들보다 나태한 것 같습니다.
이래서는 영적 성장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하워드 장군은 신앙이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그가 서부 해안 지대로 파견 나가 있을 때 그의 친구들은 수요일 저녁에 그의 영예를 축하하는 환영 만찬회를 열기로 했습니다. 그들은 여러 곳에 초대장을 보냈고 미국 대통령까지 축하 전문을 보내왔습니다.
그들은 장군을 깜짝 놀라게 해주기 위하여 모든 준비를 마치고 제일 마지막에 그에게 알리기로 했습니다. 마침내 준비를 완벽히 끝내고 난 후 그들은 장군에게 이 소식을 알렸습니다. 그러자 하워드 장군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미안하게 되었네. 수요일 저녁에 다른 약속을 이미 해두었네."
"하지만 이 사람아, 이 날은 미국의 저명한 인사들이 많이 참석할 텐데... 선약을 취소하면 안되겠나?"
장군은 고개를 가로 저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크리스천이네. 나는 내가 처음 교회에 나가게 되었을 때 수요일 밤 기도회 시간에 꼭 주님을 만나 뵙겠다고 주님과 약속했다네. 어떤 것도 이 중요한 약속을 깨뜨릴 수 없다네."
장군의 친구들은 이 만찬회를 하루 연기하여 목요일 밤에 열었습니다. 예수님과의 약속을 먼저 생각한 장군의 모습은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신앙인의 얼굴이었다고 친구들은 입을 모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신령한 성도로 끊임없이 자라가기를 원하십니다.
신령한 성도들이 이루는 교회 공동체가 질적 양적으로 성장하기를 원하십니다.
먼저 우리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사모하는 성도들로 가득 차게 되어야겠습니다.
우리 교회는 자신의 은사대로 교회를 섬기는 지체의 사역에 충성하는 성도들로 가득 차게 되어야겠습니다.
그리고 주일마다 세상으로부터 구별된 삶을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하다가 나온 성도들로 붐비는 교회가 되어야겠습니다.
특히 우리 교회의 직분자들은 오직 하나님 중심으로, 오직 하나님의 말씀대로 헌신하는 신령한 성도들 가운데서 뽑혀지는 일꾼들이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모두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예배 전담자로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사는 서현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벧전 2:1-10 / 한인 그리스도의 교회
방금 봉독한 말씀을 가지고 오늘 말씀 강해를 준비하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영적인 깊은 교훈을 주고 있으나 말씀을 가르치는 자나 말씀을 받는 자가 영적인 교훈을 소화할 만큼 수준이 되지 못한다면 수박의 겉만 핥는 신앙 생활을 할 수도 있겠구나 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시대에서 수준이 있다고 하는 교회나 목사들, 즉 교인수가 수천명이 모인 교회이거나 박사 학위를 가진 목사가 시무하는 교회들이 생명이 없는 예배당 건물을 두고 성전이라고 부르고 성도들의 모임체인 교회를 천국이나 나라로 가르치지 않고 주님 재림시에 나타날 나라만을 천국으로 알고 믿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또 오늘의 본문에서는 제사장이라는 단어가 나오고 있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제사장이란 모든 성도들을 두고 말하고 있으나 일반 교회에서는 목사를 두고 성직자라 한다든가 목사가 제사장 같은 구별된 까운을 입고 직무를 감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시대 환경에서 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 성도들은 현시대에서 잘못 가르치고 있는 교훈을 오히려 정통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어떻게 하여 하나님이 바라시는 바른 신앙을 갖도록 할 것인지 두려운 마음으로 많은 책임감을 느끼게 됩니다. 말씀마다 다 중요한 말씀이지만 오늘의 말씀은 믿음의 본질이나 믿음의 목표를 가르치고 있으므로 말씀을 경청하는 성도님들께서 더욱 마음을 집중하셔서 듣는 말씀을 온전히 소화하여 순수한 신앙을 유지하는데 큰 도움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의 본문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본문의 뜻을 이해하고 본문이 주는 교훈을 찾으며 이 교훈을 우리들의 삶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는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신령한 몸(1-3) [2]신령한 집(4-8) [3]신령한 나라(9-10)입니다.
[1]제일 먼저 1절부터 3절까지의 신령한 몸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 편지를 받아 읽을 자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로 신령한 신분이 된 성도들을 세 가지의 비유를 들어 가르치면서 거룩한 자로서의 믿음을 지켜나가도록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첫 번째가 성도들을 사람의 몸으로 비유한 신령한 몸이 되겠습니다. 3절에 보면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고 전제하며 성도들이 개종하기 전 과거에 행했던 모든 악행을 버리도록 권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몸이 건강하게 성장해 나가려면 건강에 해로운 음식이나 모든 나쁜 습관을 버리고 순수한 음식만을 섭취해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신령한 몸이 건강하게 성장하여 구원에 이르도록 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고 했습니다. 모든 악독이란 상대방에게 해를 끼치는 모든 잔인한 마음과 행동을 말하는 것이며 모든 궤휼이란 남을 속이는 갖가지의 속임수를 말하는 것입니다. 외식이란 속마음과 겉이 다른 위선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며 시기란 남이 가진 것을 욕심을 내고 배아파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비방하는 말이란 남을 헐뜯는 모든 말을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성도의 삶에나 교회 안에 없어야 하는데 있기 때문에 이런 것들을 버리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었던 죄인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죄 사함 받아 구원을 얻었으면 그 은혜를 생각하여 과거 불신자 시절에 행했던 모든 죄의 그림자로 다시 돌아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남을 해치려고 하는 나쁜 마음이나 남을 속이는 일은 성도가 먹을 음식이 아니며 또 겉과 속이 다른 위선적인 행동이나 남을 시기하고 남을 헐뜯는 모든 비난은 성도가 먹을 음식이 더 이상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도가 구원에 이르도록 성장케 할 성도의 음식은 순전하고 신령한 젖 즉 오직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이라 했습니다.
[2]두 번째로 4절부터 8절까지의 신령한 집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성도들을 사람의 몸으로 비유한 사도 베드로는 이제 성도들을 건물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을 건물에 비유한 것은 벽돌이 모아져서 한 건물이 되듯 성도들이 모아져서 이루어진 성도들의 공동체에 초점을 맞추어 설명하려 한 것입니다. 신령한 집이란 살아있는 성도들로 연합되어 지어진 살아 있는 집이 되겠습니다. 우리들 눈에는 벽돌로 지어진 예배당 건물만이 집으로 보이는데 베드로는 지금 한 사람 한 사람이 연합되어 세워진 살아 있는 건물 즉 교회 공동체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집마다 기초를 튼튼히 하고 그 기초 위에 집을 세우는데 신령한 집인 신앙 공동체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의 기초 위에 자신을 세우고 그런 순수한 개체 하나 하나가 이어져서 세워진 살아있는 집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두고 산 돌, 모퉁이의 머릿돌로 표현되고 있는 데 산돌이신 예수님의 말씀 위에 살아 있는 돌들이 이어져 세워진 살아 숨쉬는 집이 바로 성전이요, 교회이며 하나님이 사시는 집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나의 구주로 받아드린 자들에게는 산돌이신 예수님께서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시지만, 예수를 불신하고 심지어 십자가에 못박은 자들에게는 건축자들이 쓸모 없다고 길가에 버린 돌이 되어 그 돌에 발이 부딪쳐서 넘어지게 하는 돌이 되는 것입니다. 이 말의 뜻은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은 내 뜻과 늘 반대가 되므로 무엇을 할 때마다 예수님의 말씀이 늘 마음에 걸려서 방해가 된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베도로의 권고는 성도 각자가 살아 있는 벽돌이 되고 그 벽돌을 산 돌이신 예수님의 말씀 위에 세우고 자기 벽돌을 자기 바로 옆의 벽돌에 이어서 세우므로 우주적인 공동체의 일원으로서의 신분을 바로 알고 자기의 위치를 지키라는 교훈인 것입니다.
[3]마지막으로 9절부터 10절까지의 신령한 나라 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성도의 신분을 나라에 비유하여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9절에 보니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라 했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육적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민족이었는데 성도들은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갈 택함 받은 새로운 영적 이스라엘 민족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에 의하면 레위 지파만 제사장이 될 수 있는데 이제는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나아갈 수 있는 제사장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제사장을 통해서만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렸던 불편을 생각해 본다면 이제는 언제 어디에서나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과 긴밀한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신분이 된 것은 엄청난 변화요 특권인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들을 거룩한 나라라 했습니다. 세례 받은 성도들은 죄 사함 받고 성령을 선물로 받아 성령님이 성도들의 마음에 살고 계시므로 성도들은 하나님이 살고 계시는 하나님의 집이요 그 집 을 나라로 비유하자면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성도들은 거룩한 나라 즉 살아 움직이는 나라인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그의 소유된 백성이라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인 것 같이 모든 성도들도 하나님께 속한 백성이 된 것입니다.
우리들은 지난 두 주 수요일에 공부했던 호세아서 1, 2장의 강해를 통해 암미와 로암미, 그리고 루하마와 로루하마 라는 단어를 배웠습니다. 암미란 내 백성이란 말이고 로암미는 내 백성이 아니라는 말이며, 루하마는 긍휼히 여김을 받는 자이며 로루하마는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는 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0절에 보니 같은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라 했습니다. 북쪽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겼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 그 이상 하나님의 백성이 되지 못할 것과 더 이상 긍휼을 얻지 못할 것을 선포한 바가 있었으나 메시야를 통해 영적 이스라엘은 다시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긍휼을 얻게 될 것이 예언되었던 것입니다. 그 예언대로 우리와 같은 성도들은 본래 이스라엘 민족으로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택한 백성도 아니었고 긍휼을 입을 만한 자가 아니었으나 주님의 십자가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인 암미가 되었으며 하나님의 긍휼을 받는 루하마가 된 것입니다.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오늘 주신 본문 말씀을 통해 어떤 교훈을 받았으며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들은 성도의 신분을 바로 이해하고 성도의 신분에 맞는 삶을 살아나가라는 교훈입니다. 성도는 거룩한 무리라는 뜻입니다. 거룩한 무리가 되려면 거룩하지 못한 것들을 우리들의 삶에서 추방하라는 것입니다. 모든 악한 일, 속임수, 위선, 남을 비방하는 일은 성도가 입고 살 옷도 아니요 먹고 살 음식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 옷을 아직도 입고 있다면 벗어버리라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입고 살 옷은 거룩한 흰옷이요 먹고 살 음식은 순전한 주님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접착제로 무엇을 붙이려면 더러운 것을 다 긁어내고 붙여야 단단히 붙는 것입니다. 성도들을 살아 있는 건물에 비유하여 살아 있는 집의 벽돌 하나 하나가 이어져서 우주적인 큰 성전이 되어야 하는데 모든 작은 벽돌마다 세상적인 더러운 모든 악을 굵어내지 않고는 옆의 벽돌과 단단하게 이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거룩한 공동체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는 각각의 개체가 세상 것을 버리고 순전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빚어진 벽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벽돌을 그리스도의 말씀 위에 또 세우고 다른 이웃 벽돌들과 계속 이어지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자들을 두고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요 거룩한 나라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자들에게는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을 만나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왕 같은 제사장이 되도록 허락한 것입니다. 모든 성도들에게 하나님을 언제 어디서나 직접 만나 제사를 드릴 수 있도록 허락하셨음에도 아직 목사 제사장을 통해서만 제사를 드릴 수 있다고 믿고 의지하고 있거나 목사와 평신도를 구별하여 목사를 성직자라고 따로 구분하여 목사가 구별된 까운을 입는 것은 하나님의 참 은혜가 무엇인지 맛보지 못하고 신앙 생활하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인 것입니다. 복음을 맛보지 못하고 아직 구약의 그림자 속에서 신앙 생활하고 있는 삶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모는 성도는 다 거룩한 무리입니다. 세상과 구별된 성직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선택받은 민족이며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며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 제사드릴 특권을 받은 제사장들입니다. 이런 신분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깊이 깨달아 자부심을 갖고 그 신분에 걸맞은 삶을 살아나가야 합니다. 또 제사장들로만 채워진 교회답게 사랑과 겸손과 섬김과 화평과 희락으로 풍성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성도의 삶을 살아나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