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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여여수를 탈환하는 진압군
진압군에게 생포된 반란군
여수 순천 반란 사건
1. 개요
여수, 순천 10·19 사건
또는 여순사건은
1948년 10월 19일에
여수에 주둔 중이었던
14연대 소속 좌익계열 군인들이
제주도에 출동하여
자국민을 진압하라는
이승만 정부의 명령 거부를
명분으로 일으킨 군사 반란 사건이다.
반란군측이 내세운 명분은
앞서 서술했듯이
'동족상잔 명령거부'였지만
사실 이를 주도한 김지회 지창수와
참여 병사들은
'병사 소비에트'라는
남로당 소속 세포 조직의
조직원들이었고,
이들이 반란 이후
순천, 여수 지역에서 벌인
수많은 민간인 학살만 봐도
'동족상잔 명령거부'라는
이들의 명분이 얼마나 거짓이었는지
알 수 있다.
이 사건은 최종적으로
9일만인 10월 27일에
진압되었고
사건 과정에서
반란군과 진압군 양측에서 저지른
민간인 학살로 논란을 빚었다.
2. 명칭
한때는 '여수, 순천 반란사건'으로
불리기도 했지만
여수와 순천의 주민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단지 두 도시에 주둔하고 있던
군대가 일으킨 사건이라고 해서
공식 명칭에서 반란이라는
단어가 삭제되었다.
다른 명칭으로는
'여순 14연대 반란사건',
또는 '여순군란'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북한에서는
'려수군인폭동'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2013년 기준
우리민족끼리에 적혀 있던 내용이다.
마찬가지로
여수와 순천에서 반란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주둔 군부대의 사병이
주축이 되어 일어난 반란이니까
남부군을 쓴 이태가
신동아에 기고한
실록의 제목도 이것이다.
3. 전개 과정
3.1. 배경과 원인
사건의 직접적인 발단은
제주 4.3 사건 일부 진압 임무를
14연대의 좌익 군인들이
"동족상잔"이라며
지휘관을 사살하고
장병들을 선동한 것에서
시작되었지만,
공산세력의 침투 및
미군이 그 침투를 통제하지 못한 점
역시 문제점으로 지적되기도 한다.
창군 과정에서 지켜본
미군의 특징은
'선서'를 무척 중시하는 것과
구타행위를 극도로 싫어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지금까지도
선서를 단순한 요식행위로 여기는
경향이지만 그들은 달랐다.
경비대에 입대하는 장병은
미 군정당국 및
곧 수립될 정부에
충성할 것을 빠짐없이 선서했다.
미군은 이 선서를 의심없이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다.
좌익이든 우익이든
전력을 불문하고
선서라는 의식을 거치면
일단 충성스런 군인으로 간주됐다.
이 때문에
경찰에 쫓기던 좌익 성향의 세력들이
상당수 군에 입대해
도피처로 삼는 결과를 빚고 말았다.
(중략)
여순반란 사건은
신생 대한민국에
엄청난 충격을 던져 주었다.
선서 한 번으로 군에 들어와
터를 잡은 좌익 세력이
정부수립 2개월 만에
폭동을 일으켜
그 실체를 드러낸 사건이었다.
백선엽, 2009, 군과 나, 시대정신, 400-402
한편, 한국군의 반란은
충분히 예상 가능한 것이었다.
미군철수와 한국정부 수립이 구체화되자,
주한미군은 1948년 초부터
한국군의 병력을 급격하게 증강시켰다.
그리하여 병력자원에 대한
면밀한 검열히 불가능해,
좌익 세력이 대거 군대에
유입되었던 것이다.
(중략)
반란은 공산주의자들의
조직적 침투와 공작, 선동에
기초한 것이지만,
급격한 병력의 확충이 초래한
허점에서 자연스레 비롯한 면도 있다.
정병준, 2006, 한국전쟁, 돌베개, 233쪽
국방경비대 창설 당시
미 군정청 군사국의
한국인 고문 이응준이
국방경비대원 모집대상자들에 대해
신원조사를 실시하라고 제안했음에도
불구하고
군내에 파벌이 형성될까봐 우려한
군정당국은 그에 대해
향후 정보기구를 활용하겠다면서
반대했다.
그 결과 국방경비대의
각 연대별로 진행된
모병과정에서
좌익계열 군사단체에서
활동하던 자들이 대거 입대하게 됐다.
게다가 미 군정청은 ‘
불편부당, 정치적 중립’이라는
입장을 내세워
국방경비대원들의 정치참여를
제한하는 수준에서
단지 그들에게 국내 치안확보에
전력하라고만 당부했을 뿐이다.
그러나 당초 미군정의 생각과 달리
국방경비대에 발을 들여 놓은
좌익의 세포들은
여러 가지 군 위해사건을 일으켰다.
이에 일찍부터 조선로동당의
국방경비대 침투를 감시해왔던
미 군정청 방첩대는
1947년 9월
미, 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후
국방경비대 내의
공산주의자들을 제거하기 위한
숙군을 계획했다.
미 군정청 방첩대는
사전에 각 지역지부에
담당국방경비대와
남로당과의 관계를
감시할 뿐만 아니라
국방경비대 내의
좌익성향의 세포수를
파악하라는 명령을 내린 바 있다.
서상문, 2005,
(알아봅시다!) 6·25전쟁사.
제1권 , 배경과 원인, 서울 :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5, 117쪽
3.1.1. 14연대 창설
해방정국 당시 군에는
크게 3개의 좌익 조직이 있었다.
하나는 남로당 중앙당에서
직접 관할하는 장교들의 조직인
‘콤 서클’,
남로당 지방 도당에서 관할하는
병사들의 조직인 ‘병사 소비에트’,
마지막으로 남로당을 견제하기 위해(...)
북로당(북한 조선로동당의 전신)이
경상남도 일대에 조직한
‘인민혁명군’이다.
남로당에서 군 안에 두 가지 서로
다른 조직을 만든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장교들의 인사행정은
모두 서울에서 하며
인사이동이 심하기 때문에
남로당 중앙당에서 직접 관할한다.
그러나 사병들의 경우
지방에서 모집하고
인사이동이 거의 없기 때문에
지방당에서 관할한다.
2. 서로 선을 다르게 하면
보안상 유리하다.
이 때문에 남로당은
장교 조직과 병사 조직을
별도로 조직, 관리했으며,
콤 서클과 병사 소비에트는
같은 부대 소속임에도
서로의 존재를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세 번째 조직인 인민혁명군은
무려 1593명에 달하는 지하세력으로
콤 서클, 병사 소비에트와 달리
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민중 깊숙이 침투해 있었다.
그런데 일선 행동대가
상부의 지령도 받지 않은 채 임의로
‘대구 10.1 사건’에 편승하였다가
일망타진 되어
47년 초 붕괴되었다.
북로당의 침투에 반발한
남로당 측에서 인민혁명군 조직을
미군정청의 경무부(警務部)에
제보했다는 설도 있다.
인민혁명군이 붕괴되자
북로당 조직부와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내무국 정보처에서는
강진을 대표책임자,
정보처 요원 김일광을
실질적 총책으로 한
제2차 인민혁명군을 조직하려고 한다.
이들은 주로 국방경비대,
해안경비대,
경찰 관계 세포조직을
내선으로 하고
남로당에 포섭되어 있지 않은
사회주의자와
그밖에 청년단체 계통 조직선을
외선으로 한다.
여순사건의 두 주역인
4연대 정보과 선임하사관
지창수 상사는
‘병사 소비에트’에 소속되어 있었고,
김지회 중위는
북한의 평양학원 대남반 출신 공작원으로,
지령을 받고 남파되어
국방경비사관학교 3기에 입교한
북측 공작원이다.
김지회가 ‘콤 서클’에 침투 할 때
는 좌익장교들은
그를 남로당으로 알았고,
병사 소비에트는
김지회를 우익 장교로 알았을 정도로
보안이 철저하였다.
김지회는 국방경비사관학교 시절부터
교육생들을 콤 서클로 포섭 하였고,
1연대 2대대장 부관을 거쳐서
전남 광주에 창설된
제4연대로 전속되었다.
그리고 여기서
제2차 인민혁명군의 실질적인 총책인
김일광에게서,
김지회 중위가 이끄는 콤 서클을
인민혁명군과 합작하라는
지시가 내려온다.
여기에 부록으로
평양학원 항공중대를 졸업한
공작원 최일주 일병이
김지회의 당번병 명목으로
항상 그를 따라다닌다.
김지회의 연락책 겸 감시역이였는데,
여순사건 초기 때는
김지회는 배후에서 지휘하고
최일주가 대신
‘병사 소비에트’를 지휘했다.
정리하자면 지창수 상사가 이끄는
‘병사 소비에트’는 남로당 계열이었고,
적색 장교들의 조직인 ‘콤 서클’도
자신들을 남로당 중앙당 소속으로
알고 있었으나
북한 공작원인 지휘관 김지회 중위에 의해
‘인민혁명군’으로 소속이 변경되게 된다.
뭔가 베트콩을 보는 것 같다
김지회와 지창수가 소속된
제 4연대는
영암사건( 1947년 6월 2일,
조선경비대 4연대와
경찰 사이에 교전이 벌어진 사건.
국가기관, 그 중에서도
두 무력집단이 주먹다짐도 아니고
화기가 동원된 전투를 벌였으니
해방정국의 정치적 혼란이
어느 정도였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사건이었다)이
발생했던 그 부대이지만
사건에는 크게 휘말리지 않았고
각자 ‘콤 서클’과 ‘병사 소비에트를
순조롭게 확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각자의 상부 조직을 통해
새로 여수에서 창설되는
14연대로 이동하여
혁명군 조직으로 만들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런데 4연대에서는
1개 대대 병력을 차출하여
14연대 기간병으로 보냈는데,
이에 이미 김지회와 지창수가
포함되어 있었다.
연대 지휘부에서는
불온사상 때문에
평소에 골치를 앓아온 터라,
평상시에 불온했던 다수의 병사들을
14연대로 보낸 것이었다.
그리하여 48년 5월 초,
14연대가 창설되고
김지회는 신설 14연대
작전참모 보좌관,
지창수는
연대 본부 선임하사관격인
연대 인사과 선임하사관,
‘병사 소비에트’ 부책인 정낙현은
연대본부 정보과 선임하사관이라는
요직을 죄다 차지하였다.
그리고 14연대는
신병을 대대적으로 모집하였는데
주로 전남 동부
곡성군, 구례군, 순천군, 광양군,
보성군, 여수군, 고흥군 등에서
모집했다.
이때 지원자가 부족한 탓에,
불온사상 여부를 가리지 않고
지원자는 무조건 입대시켰다.
이 때문에 각 지방에서
좌익운동을 열렬히 하던 청년들이
경찰의 수배를 받게 되면
14연대에 입대하기 일쑤였다.
남로당 전남도당 군사부에서도
예하 군당에 비밀 지시를 내려
좌경청소년들을
14연대에 되도록 많이 입대시키도록
독려하였다.
또한 각종 범죄자들도
군에 가면 무사하다는 소문을 듣고
경찰들을 피해 입대할 정도였다.
사실 국방경비대는 건군 초기부터
군인이 정치적 견해를 표명하는 것에
대해서도
미군정이 전혀 제제를 가하지 않았으며,
완전한 사상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었다.
이때 4연대에서는
군인들에게 VS(VS는 versus의 준말)
놀이형
설문조사를 했는데,
이승만과 박헌영 중
누가 더 나은지에 대한 설문이었다.
여기에서 박헌영을 택한 군인들만
추려내서
그들로만 14연대를 창설한 것이다.
백선엽은
국방경비대 입대에 있어서도
사상검열 등은 전혀 없었고
충성서약과 신체검사,
구두시험만으로 선발하였다며
입대 절차가 너무나 허술했던 것으로
회고하였다.
여순 사건 직전
김지회의 14 연대 ‘콤 서클’에는
김지회, 홍순석, 배명종, 정영길,
김남근, 신일수 중위 등
주로 경비사관학교 3기들이
소속되었고
4연대 역시 비슷한 규모였다.
지창수 상사가 이끄는
‘병사 소비에트’에는
약 80명의 하사관과 병이 소속되었다.
3.2. 군 내부의 반란
3.2.1. 배경
사건의 발단은
제주 4.3 사건으로,
여수에 주둔하면서
제주도의 소요를 진압하러 가라는
명령을 받은
대한민국 육군의 제14연대
병영에서
남로당 계열이 침투한
1개 대대의 장병들이
명령을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킨 것에서 시작한다.
14연대는 이미 9월 중순부터
제주도 출동을 예정하고 있어서
10월 초부터
다른 부대로부터
박격포와 기관총 등을 차출하여
공급받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신식무기인
개런드 소총과 M1 카빈,
자동소총, 기관단총을 비롯
각종 통신장비 등이
다른 부대에 앞서 우
선적으로 100% 공급되었다.
그리고 종래 가지고 있던
일제 38식 소총과 99식 소총은
아직 반납하고 있지 않았다.
그 때문에 평상시보다 2배에 달하는
6천여정의 소총을 보유하고 있어서
남아도는 소총으로
반란 후 민간인 좌익폭도들을
무장시킬 수 있었다.
여기에 여순사건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당시 국군과 경찰 사이의 알력이다.
국군과 경찰의 앙금은
해방 직후부터 거슬러 올라간다.
일제강점기 민중을 가까이에서
억압한 것은 일본제국 경찰이었다.
당연히 마주치기도 어려운
높으신 분들보다,
일선에서 직접 수탈하는
순사들에 대한 국민들의 공포와 증오는
굉장한 것이었다.
오죽하면 "순사 온다"는 말이면
우는 애가 울음을 그친다는
소리까지 있었으니...
문제는 해방과 함께
미군정이 들어서며,
내부 실정을 아는 경력자인 순사들이
미군정 경찰로
고스란히 채용된 것이다.
즉, 왕년의 일본 순사가
그대로 경찰이 되어버린 셈이다.
어제의 일본 순사들이
경찰 제복을 입고 거들먹대는 꼴에
복장이 터진 이들은
모조리 국군(과 그 전신인 국방경비대)에
입대했다.
물론 국군에도
일본군, 만주군 경력자들이 즐비했지만,
이들은 하급장교나
하사관에 불과했으므로
대민마찰을 일으킬 일은
사실상 없었기 때문에
그러한 것으로 짐작된다.
당장 경찰 놈들이
부대로 쳐들어온다는 헛소문으로
부대원을 선동하며 벌어졌던
바로 이 여순사건의 주역,
남로당 김지회조차
왕년의 일본군 소위였다.
일본군 출신자를 제외하고는
군 경력자를 찾기 매우 어려웠다.
군을 재건하는 일은
군 경력자의 조언 내지는
직접적인 활약 없이는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어서
필연적으로 일본군 출신자들이
군을 구성할 수밖에 없었고,
광복군 출신자는
그 수가 매우 적어서
본격적인 군사조직을
구성하기는 무리가 많았다는 것이다.
이후 경찰과 육군은
총격전(!)을 주고받을 만큼
험악한 사이로 발전한다.
이런 분위기 속에
좌익분자들도 속속 국방경비대
국군에 입대했고,
신병 모집에 어려움을 겪는데다
미군정에서도 별 말이 없으니
특별한 신원조회 없이
군에서도 무작정 받아들였다.
이는 여순사건이 발발하게 된
하나의 원인이자 도화선으로 작용하게 된다.
이러한 군과 경찰 사이의 갈등은
제1공화국 내내 지속되었다.
이때 이승만이 상대적으로
경찰을 싸고 돌고
군부를 찬밥 다루듯 하자
군사지도자였던 이범석이
정변까지 모의할 정도였다.
그런데 14연대의 기간병은
군경의 무장충돌인
영암사건을 일으킨
제 4연대 출신이니...
48년 9월 24일에는
구례경찰서 직원 1명과
14연대 사병 9명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는데,
몰려든 구례경찰서 경찰관들에게
사병들이 구타당한 뒤
구금되었다.
그래서 14연대 헌병들이
구례까지 가서
이 병사들을 인수받아 왔는데,
연대 인사계인 지창수 등은
이 사건에 대해 분개하면서
언제 한번 보복하려고
벼르고 있었다고 한다.
3.2.2. 김지회 배후설(소수설)
소수설에 따르면
반란 직전 몇가지 사건이
동시에 돌아가는데,
첫째로 48년 10월 12~3일경,
김지회 중위와 최일주 일병은
남로당 수장인 박헌영의 오른팔이자
‘지리산 유격전구’ 사령관인
이현상에게서
제주도 4.3 사건에 파견을 거부하고
봉기를 일으키라는 지시를 받는다.
이현상은 남로당원이기 때문에
김지회의 상급선이 아니지만
소련군정과 북로당 대표라는
신분을 겸하고 있어
김지회에게 명령을 내릴 자격은 있었다.
다만 이현상이
직접 김지회에게 지시했는지,
북로당, 즉 김일성의 지시에 의해
반란이 일어난 것인지가
불분명해 추가 검증이 필요하다.
둘째로 전라도 내의
4연대와 14연대를 관할하는
광주 제5여단 정보참모 김창선 소령은
군내 좌익 계보를 파악하여
우선 4연대 50여명을 구속하고
이어 48년 10월 16일
14연대 사병 40여명을
연대 내 영창에 색출하고
주모자급 3명은
광주의 여단 본부로 압송하였다.
이어 좌익성향 때문에
연대 대전차포중대장으로 좌천된
김지회 중위와
9중대장 홍순석 중위도
즉각 체포하려고 하였지만,
막 부임한 박승훈 신임 연대장이 반대하자,
김창선 소령은
일단 여단으로 복귀 후
다음 날인 17일
김지회와 홍순석에게
광주 여단 본부로 출장 명령을 내렸다.
광주에 도착하면
구금할 목적이었다.
김지회와 홍순석에게는
똥줄 타는 상황.
셋째로 우연히도 같은 날인 17일
고향에 휴가 갔던 병사들이
구례경찰서 형사들과 충돌,
빨갱이 혐의를 받고
경찰서에 끌려가
뭇매를 맞고 풀려나 귀대하였다.
그러자 연대에서
구례경찰서를 습격하자며
아우성이 일어났다.
연대장 박승훈은
여단본부로 부임인사를 하러 가서
공석이였고
부연대장 이희권 소령이
대신 여단으로 보고하면서,
장병들을 진정시키고
사기앙양을 위해
일부 병력을 구례에 보내
사건을 수습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건의하는 지경이었다.
그 바람에 김지회와 홍순석의
여단본부 출장 명령은 흐지부지되었다.
넷째로 18일 육군본부로부터
14연대에서 1개 대대를 차출,
제주도 폭동을 진압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제주도 출동명령을 받은 대대는
제1대대였고,
김지회의 연대대전차포 중대도
제1대대로 배속되었다.
출동 날짜는 19일이었다.
즉, 군내 좌익세력에게는
상급선에서는
무장봉기를 일으키라고 하고,
군내 상부기관에서는
그들의 혐의를 파악하여
체포 직전까지 이르렀고,
부하들은 경찰들과 충돌했지,
그와중에 제주도로 출동 명령이 떨어진
아비규환의 상황이었다.
그리고 운명의 19일.
연대에 대형 트럭이 4대 밖에 없어,
이것으로 1개 대대의 장비를
여수항까지 운반하려면
한세월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날 밤이 되도록
병력 이동이 이뤄지지 않았다.
밤 10시경 1대대는
완전 무장한 채
내무반에서 대기중이었고
2, 3대대는 취침 중이었다.
연대장과 부연대장은
장비 선적을 위해
여수항으로 나가 있었다.
이때 연대 본부 옆에 위치한
연대 근무중대에서
갑자기 총성 1발이 울리고,
거의 동시에 연대 정문의 위병소에서
비상나팔 소리가 일어났다.
그러자 비상소집으로 인지한
각 중대는 완전무장을 하고
중대 본부 앞으로
일반 집합한 이후
연대 종합연병장으로 집결하였다.
1대대 부관 김정덕 소위가
연대 근무중대 앞을 지나는데
사병들이 그를 무조건 구타하였다.
마침 그 옆을 지나가던
조병모 소위가
“왜 장교를 구타하느냐?”고 꾸짖자
구타하던 사병들은
총검으로 조 소위를 찔러 쓰러뜨렸다
(첫번째 희생자).
조병모 소위는
반란 사병의 총에 팔을 맞으며
필사적으로 도망가
대대본부 앞에 있던
전용인 소위에게 까지 가서 쓰러졌다.
조병모 소위를 쫒아오던
4~5명의 반란 사병은
조병모 소위를 그냥 지나쳐서
무기고와 탄약고를 지키던
보초를 쏴 죽이고
문에 잠겨있는 열쇠를
총으로 부수어 연 뒤 점거하였다.
제5중대 주번사관인 박윤민 소위는
주번사령에게 비상문의를 하러 가다가
탄약고쪽에서 쏘는
반란병 총을 맞고 사망하였다.
한편 규정대로
연대 전 장병들이
연대연병장에 집결했는데
여기저기서 총성이 울리고,
뒷산에서 신호탄이 날았다.
또한 사복 차림의 민간인들도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이 와중에 지창수가
사복차림의 민간인들과 함께
연병장 사열대로 뛰어올라가
"경찰이 우리를 죽이기 위해 쳐들어온다"고
선동하면서
진압파병 거부,
제주 빨치산에 호응하여
본토에 제2전선을 구축,
남북통일을 위한 인민군으로
행동할 것을 선동하였다.
지창수의 ‘병사 소비에트’ 소속 병사들이
연대 장병 곳곳에서
“옳소! 옳소!”하면서 동조하였다.
그때 3명의 하사관이 앞으로 나서며
“지창수, 너 어쩌자고 이러는 거냐!”,
“여러분! 우리는 엄연한 국군입니다.
불순분자들의 선전에 넘어가선 안 됩니다”라며
군인 정신을 발휘하였다.
그러자 반란병들이
그 자리에서 그들을 모두 사살하였다.
이어 ‘병사 소비에트’의 특수공작책
심재호 상사의 지휘로
반란병들은 전 부대를 뒤지며
모든 장교를 "미제의 앞잡이"라 하여
발견하는대로 사살하기 시작했다.
이날 사살된 장교들은
1대대장 김일영 대위,
2대대장 김순철 대위,
3대대장 이봉규 대위 등
대대장 전원과
연대 작전주임 장교 강성윤,
정보주임 장교 김래수 중위,
진도연, 김녹영, 맹택호,
박경술, 민병여, 김진역,
이상술, 장세종, 이병순,
노영우, 이상기 소위 등
20여명에 달했다.
동년 5월에야 창설된 14연대는
장교 충원율이 낮아
경비사관학교 5기생인
10여명의 소위들이
모두 중대장을 맡고 있었고,
각 소대장직은
고참 하사관들이 맡고 있었다.
14연대 내 장교들이
대부분 살해되었을 때에야
여수항으로
수송장교 윤중위를 통해
반란 소식이 알려졌고,
이에 상황을 살피러
부연대장이
정보주임 김제주 중위를 대동하고
연대로 돌아갔다.
김제주 중위는
연대 탄약고에서 수화하다가
사살되었고,
부연대장은 연대본부까지
포복으로 기어가
확성기 마이크를 잡고
"불순분자들의 명령에 넘어가지 말고
대한민국에 충성할 군인들은
연대본부 앞으로 집결하라"고
절규하였지만 돌아오는 것은
총알 세례뿐이었다.
결국 부연대장은 차를 타고
빠져나와
여수읍 헌병 파견대로 향해
그곳에서 순천에 파견된
14연대 2개 중대를 이끄는
홍순석 중위에게 전화하여
반란 진압 출동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홍순석은 상술했다시피
‘콤 서클’의 핵심 멤버로
연대내 반란이 성공했다는 것을
알려준 꼴에 지나지 않았다.
그제서야 김지회 중위는
연락병 겸 북측 감시원인
최일주 일병을 대동하고
연대 대전차포 중대장실에서 나와
반란군을 직접 지도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이후 김지회는
아직은 자신이 노출될 때가
아니라고 판단하여,
최일주 일병을 시켜서
간접적으로 반란군을 지휘한다.
이상이 김지회가 주도했다는 배후설이다.
3.2.3. 지창수 단독범행설(다수설)
10월 15일,
육군 총사령부로부터
제주도로 출동하라는 명령이 전달되었다.
그런데 사령부 명령이
군 통신망이 아닌,
일반 우체국 전보로 오는 바람에
일반사병에게도
금방 소문이 퍼진다.
출동 날짜는 10월 19일로
매우 촉박했다.
중앙당에 소속된 김지회 중위 등
장교 당원들은
남로당의 기본 방침이
아직은 무장봉기를
할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고,
중앙당으로 연락하기에도
시간이 촉박하여
일단 출동 명령에 응하기로 한다.
그에 반해 지창수 상사 등
하사관들은
자신들의 상급기관인
전남도당에 문의하려 했으나,
연락이 닿지 않자
자체적으로 병사위원회를 열어
토론에 들어갔다.
결국 병사위원회는
출동을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키기로 결정했다.
선전 해설반을 편성해
대대별로 파병 반대 선동을 하는 한편,
위병사령부 장악조,
통신망 차단조,
장교 처단조,
무기고 점령조 등으로
병력을 나누어
먼저 연대를 장악한 후
지창수가 비상나팔을 불어
전체 부대원을
연병장으로 집합시키기로 하였다.
1948년 10월 19일 밤,
연대장 박승훈 중령은
제주도 출동을 위해
무기와 장비의 선적을 지휘하고 있었고,
장교들은 출동 장교 환송회식 중이었다.
홍순석 중위의 2개 중대는
순천에 주둔하고 있어,
여수 주둔지인 신월동에는
총 2,700여명의 병력이 있었다.
밤 10시 10분경,
이미 연대 무기고와 상황실이
장악된 상태에서
비상나팔이 울렸다.
영문 모르는 사병들이
연병장에 집결할 때
장교들은 환송식에서 만취하여
잠들었거나
여전히 술을 마시는 중이었다.
열 받는 상황이기는 하지만
이들 장교 대부분은
남로당 중앙당원이었으니
동정은 금물.
먼저 지창수가 연단에 나가
"애국병사 여러분!
우리는 동족 살상의 제주도 출동을
결사반대합니다"라는
일장 연설을 하였고
상당수의 병사들이
어리둥절한 상태에서
좌익사병들이
"미제와 이승만 매국도당을 타도하자!"라고
고함치며 바람을 잡았다.
이 상황에서 누군가
"지금 경찰 놈들이
부대에 쳐들어오고 있다!"라고 외치자
우왕좌왕 하던 사병들까지
"무기를 들어라! 경찰과 싸우자!"라며
단결하게 되었다.
다만 일부 사병들은 겁먹고
총을 든 채 달아나 버렸다.
이때, 하사관을 포함한 장교 3명이
연단으로 뛰어나가
"안 돼! 뭐하는 건가?
지금은 때가 아니다!"라며
아직은 반란은 시기가 아니라고 만류하였다.
장교가 남로당 중앙당원인 것을
모르는 사병들은,
말할 기회도 주지 않고
연단에 오르는 이들을 사살해 버렸다.
이어 반란군은
이미 개방된 무기고에서
무기를 들고
반란에 가담하지 않은 장교와
하사관들을 찾아 죽이며
군의관 등 이용 가치가 있는
몇 명만 빼고
20여명의 장교를 살해했는데,
그중 15명이
남로당 중앙당원이었다.
지창수는 스스로 연대장에 취임하고
병사위원회 소속 하사관들을
즉석에서 지휘관으로 임명했다.
빨치산 종군기자 출신의 이태가 쓴
남부군 비극의 사령관 이현상에 의하면,
여순사건은
완전히 지창수 상사에 의해
일어난 것이며
14연대 장교 16명 중
대부분이 좌익장교였지만
극심한 팀킬로 이중 15명이 사살되었고,
사상이 불분명한 김지회만
살려두었다고 한다.
이후 지창수 상사는
순천으로 이동한
반란군 주력을 이끌고 가다가,
이현상이 22일 오후에
순천에 나타나 반란군을 격려하고
“여수에서부터 회색분자 혹은
반동장교 혐의를 받고
열차에 감금당해 온
김지회의 신원을
이현상이 보증하여 풀어줌으로써
그 시각부터 비로소
김지회가
반란군의 총지휘를 맡게 되었으며,
그 동안 당에서 애써 부식해 놓은
14연대의 수많은 장교 프락치들을
신원도 확인하지 않고
마구 살해해 버린
지창수 일파의 경거망동을
개탄하여 마지 않았다”고 되어 있다.
이어 각고의 노력 끝에 포섭한
좌익장교들이 죄다 팀킬당한 사실을 안
이현상은 김지회와 함께 엉엉 운다.
정지아의 빨치산의 딸에 의하면
14연대가 제주도 파견이 결정나자
지창수 상사는 당황하였고,
전남도당과
대책 마련에 대해서 상의하였다.
그러나 사태가 너무 급박해지자
일단 반란을 일으켰고,
반란 이후에야
전남도당도 그 사실을 알았다고 나온다.
22일, 여수 14연대의 봉기소식을 듣고
중앙당 노동부장 이현상이
봉기 지휘를 위해 순천에 도착했다.
이현상은 지창수를 만나자
먼저 중앙당에서 심어놓은
좌익계 장교 16명의 안부를 물었다.
그때야 평소 모병할 때
박헌영을 존경한다는 사람들만
입대시키는 등
평소 좌경적인 언동을 자주 해
순천역 화물차에 감금되어 있던
김지회를 만나게 되었고,
이현상은 물론 지창수까지
회한의 눈물을 터뜨렸다.
이후 이현상의 지도 아래
홍순석 중위를 총지휘관으로,
김지회를 부지휘관으로 임명하여
14연대의 지휘체계를 개편하였다.
김남식의 실록 남로당에서는
“당시 반란 사병들에게 체포, 감금되어
총살 직전에 있던
후일의 반란군의 지휘자 김지회 중위가
지리산에 가면
나를 증명해 줄 사람이 있다.
내가 반란부대를 지휘토록 해 달라고
사병들에게 요구”하였다고 되어 있다.
안재성의 이현상 평전에 의하면
대전차포 중대장 김지회 중위가
"나는 여러분의 편입니다.
내가 반란군을 지휘하게 해주시오.
아니면 나를 지리산으로 데려가주시오.
지리산에 가면
나의 신분을 확인해줄 사람이 있습니다."라고
하며 살아 남았다.
반란의 중심지인 전남 전역을 관할하던
전남도당이나 여수, 순천 군당들은
모두 산악에 숨어 있는 상태로
14연대 반란군과
사전에 모의할 시간도 공간도 없었다.
뒤늦게 소식을 들은 전남 도당이
순천군당에게 상황을 보고하라고 했으나,
이들은 올려 보낼 어떤 정보도 갖고 있지 않았다.
북한은 가장 늦게 반란 소식을 알았고,
뒤늦게 라디오로 사실을 들은
서울의 남로당 중앙당에서
긴급히 간부 두 사람을 파견하여
기차로 광주까지 갔으나,
계엄군들에게 차단되어
돌아가야만 했다.
그러던 와중
덕유산과 지리산 일대를 돌아다니며
야산대들의 현황을 점검하던
이현상이 제일 먼저 나타났다.
그는 경남 서부지구당 위원장
김상홍을 만나 상의한 후,
경남 도당 연락원의 안내에 따라
22일 순천역에 도착하였다.
홍순석과 지창수는
그 자리에서 총지휘권을
이현상에게 넘겨 주었다.
이현상은 제일 먼저
"그런데 장교들은 다 어디 갔습니까?"라고
물었지만... 미리 저승에 갔어요!
24일에는 마산에서 진압하러 온
15연대장 최남근이
반란군에 합류하고 싶어 문의하지만,
이현상은
"이승만 정권을 무력으로 무너뜨리려면
산발적인 봉기가 아닌
전면적이고 직격적인 봉기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시기가 아닙니다."라며
돌려 보낸다.
이후에도 이현상은 산중에서
여러번 이 사건을
반란사건이라고 규정지으며,
남로당의 전력을 노출시킨
잘못된 행위라고 비판하였다.
이와 같이 각종 빨치산 문학에서도
대부분 북한의 개입설을 부인하고,
지창수 상사의 단독 범행을 주장한다.
또한 백선엽의 토벌기록인
실록 지리산에서도
남로당은 이 사건을 전혀 몰랐으며
지창수 상사의 단독범행이라고 하는 등
좌우를 통틀어 학계에서도 정설로 인정된다.
여기에 김지회 배후설처럼
이현상이 사전에 여수에 도착하여
김지회와 지창수를 만나
반란을 지시하지 않고,
사건 이후에야 순천에 도착하여
반란을 지도하게 되었다.
또한 이를 도와
북한에서 강동정치학원 출신
유격대 180명을 남파한 것은
사건 1달이 지난
11월 17일이었기 때문에,
북측에는 여순사건의 사전 정보가
없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결정적으로 남로당 여수시당과
주변의 군당들은
긴급회의를 열었으나
이 갑작스런 사태의 대처법을 두고
우왕좌왕했다.
서울의 중앙당은
며칠후 라디오를 통해서나
사태를 파악했기 때문에
아무런 지시도 내릴 수 없었다.
여수시당은
모조건 호응해 나서야 한다는 측과,
지시가 없는 가운데
지하 조직을 전부 노출시킬 수는 없다는
주장이 맞섰는데,
격론 끝에 이익주 등의 강력한 주장으로
반란에 동참하기로 결정했다.
결과적으로 치밀한 사전계획 없이
사병 중심의 돌발적인 상황이라
급속히 진압되어
산속으로 들어가
유격전에 전념하게 된다.
평양에서는 처음부터
이 사건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았으며,
이후 '미국의 사주를 받아
군내 좌익 세포를 노출시키기 위해
일으킨 사건'으로 조작하여
박헌영과 남로당을
숙청하는 계기가 된다.
3.3. 14연대 반란의 진행
애국 인민에게 호소함
(제주도출동거부병사위원회)
우리는 조선 인민의 아들들이다.
우리는 노동자와 농민의 아들들이다.
우리의 사명은
외국 제국주의의 침략으로부터
조국을 지키고
인민의 이익과 권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다.
그럼에도 미국에 굴종하는
이승만 괴뢰,
김성수, 이범석과 도당들은
미제국주의에 빌붙기 위해
우리 조국을 팔아먹으려 하고
드디어는 조국을 파는 것과 마찬가지인
분단정권을 만들었다.
그들은 미국인을 위해
우리 조국을 분단시키고
남조선을 식민지화하려 하고 있으며,
미국 노예처럼
우리 인민과 조국을
미국에 팔아먹고 있다.
이런 식으로 한일협정보다
더 수치스러운 소위
한미협정을 맺었다.
친애하는 동포들이여!
만약 당신이 진정 조선인이라면,
어떻게 이런 반동분자들이 저지른
이런 행동에 대한 분노를
참을 수 있겠는가?
모든 조선인은 일어나
이런 행동에 대해 싸워야 한다.
제주도 인민은 4월에
이런 행위에 대해 싸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국과 붙어 있는
이승만, 이범석 같은
인민의 적들은
우리를 제주도로 보내어,
조국 독립을 위해 싸우고
또한 미국인과 모든 애국인민들을
죽이려는 사악한 집단과
싸우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애국적 인민과 싸우도록
우리에게 강요했다.
모든 동포들이여!
조선 인민의 아들인 우리는
우리 형제를 죽이는 것을 거부하고
제주도 출병을 거부한다.
우리는 조선 인민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 싸우는
인민의 진정한 군대가
되려고 봉기했다.
친애하는 동포여!
우리는 조선 인민의 복리와
진정한 독립을 위해 싸울 것을 약속한다.
애국자들이여!
진실과 정의를 얻기 위한
애국적 봉기에 동참하라.
그리고 우리 인민과 독립을 위해
끝까지 싸우자.
다음이 우리의 두 가지 강령이다.
1. 동족상잔 결사반대
2. 미군 즉시 철퇴
위대한 인민군의 영웅적 투쟁에
최고의 영광을!
애국인민에게 호소함
병사위원회,
여수인민보 1948년 10월 24일자
① 인민위원회의 여수행정기구 접수를
인정한다.
②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한
수호와 충성을 맹세한다.
③ 대한민국 분쇄를 맹세한다.
④ 남한 정부의 모든 법령은
무효로 선언한다.
⑤ 친일파, 민족반역자, 경찰관 등을
철저히 소탕한다.
⑥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토지개혁을 실시한다.
여수인민위원회의 결정서 6개 항
14연대 반란정보를 입수한
여수경찰서(서장 고인수)는
비상소집을 걸어
150명의 본서와 지서 근무
경찰관이 집합하였다.
여기에 부연대장의 연락을 받은
헌병대 40여명과
합동 작전으로
봉산지서 부근에서
1차 저지선을 형성하였다.
광주 경찰청의 명령은
“경찰서 절대사수”였다.
그러나 병력차는 압도적이었으며,
경찰-헌병 연합부대는
순식간에 격파당하고
반란군은 경찰서 안으로 진입하였다.
경찰서를 빼앗은 반란군은
즉시 유치장을 열어
각종 범죄 피의자 50명을
석방하고 무기를 지급하였다.
10월 20일
여수읍의 주요 공공 건물과
요소요소에는 일제히
대형 인민공화국의 깃발이 게양되었고
오후 1시부터 중앙동 광장에는
여수인민대회(군중대회)가 열렸다.
또한 반란군은
‘제주도 출동거부병사위원회’ 이름으로
“우리들은 제주도의 애국 인민들을
무차별 학살하기 위하여,
우리들을 제주도에 출동시키려는
민족반역 정권의 명령에 대하여
조선인민의 아들로서의 사명하에
이를 거부하고
사랑하는 동포를 위하여 일어섰다.”라는
성명서를 발표 하였다.
식사는 남로당 여수지구위원장
이용기였고,
격려사는 보안서장으로 내정된
유목윤,
세 번째로 인사말은
일본군 지원병 출신이자
14연대 ‘병사 소비에트’ 총책으로
반란의 주역이였던 지창수 상사였다.
남로당 수장인 박헌영의 오른팔이자
‘지리산유격전구’ 사령관인
이현상이 내린,
봉기군은 지리산으로 입산하라는
지시에 의해
이미 20일 오전 8시경
김지회의 지휘로
반란군 주력 2개대대(1천4백명)은
기차와 화물 트럭으로
순천으로 향했고,
일부는 지역방어를 해야 한다는
지창수 상사의 주장에 의해
2개 중대만 여수에 남았다.
그 탓에 이후 여수에 진압군이 왔을 때는
이미 반란군 주력은 없었고,
그때까지 날뛰고 있던
좌익세력이 조직한
‘인민의용군’ 정도였다.
정부 당국에서는
19일 야간에 일어난 반란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가
21일에 이르러서야
국무총리의 공식적인 담화발표가 나왔고,
22일에야 중앙일간지에
첫 사건보도가 나왔다.
김지회가
반란군을 총지휘한다는 보도는
26일자 국제신문이 처음이었다.
그러나 평양방송에서는
이미 20일 아침 6시에
제 1보로 반란의 진전 사항을
수시로 보도하며
여수, 순천 지역의 좌익세력을 격려하고
남조선의 모든 애국적 인민과
국방군 장병은
여기에 호응 봉기하라고 선동했다.
같은 날자 ‘로동신문’, ‘민주조선’등에서도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하였다.
그런데 소련의 정부기관지
‘이즈베스챠’와 ‘타스’ 통신은
북한쪽과 쿵짝이 안 맞았는지
반란 이틀 전인 10월 17일에
이미 남조선의 ‘대구’지역에
반란이 발생했다고 보도하였다(···)
그러다 21일에야
다시 평양방송 인용으로,
남조선 여수지역에서
군대의 반란과 인민폭동이
발생하였다고 보도하였다.
사전에 북한측에게
사전 보고 받고
봉기날짜와 대구와 여수라는
지명을 헷갈렸나?
서울의 남로당 중앙당은
라디오 방송을 듣고
처음으로 여순사건의 발생을 알았다.
정부측에서는
여수에서만 관민 1,200명이 학살당하고
1,150여명이 중경상을 입었다고
발표하였다.
다소 과장은 있겠지만
학살 자체가 발생했던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이 시기에 목숨을 잃은
손양원 목사에 대한 기록에 따르면
단지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학살을 당하는 여수의 시민들도 존재했고
좌익청년들은
인민재판을 통해
자신과 의견이 다른 자들을 학살했다.
물론 깡패, 양아치, 부랑아들이 가세해
평상시 감정 있던 사람들을 죽이거나
부자들 죽이기도 해서
민간인의 피해가 커진 측면도 있었다.
반란군의 주력부대는
김지회의 인도로
20일 오전 순천으로 이동하였고,
여기에서 홍순석이 이끄는
14연대 2개 중대와 합류한다.
홍순석은 반란에 주저하는 사병 8명을
총살해 놓은 상태였다.
20일 오후 경
순천을 장악하였고,
21일에는 구례, 광양 방면으로 진출하였다.
그런데 이때 약 2백명의 병력이
서쪽인 보성군 방면으로 무단 이탈하였다.
이들은 거의 전부
벌교, 보성, 고흥, 화순,
광주 출신이었는데,
벌교읍과 그 주변 지역에서
한풀이식 무차별 살육을 벌였다.
그러나 주력에서 무단이탈한
소규모 부대인지라
광주 방면에서 달려온
진압군의 토벌작전에 걸려
전멸당한다.
20일 새벽 광주의 4연대가
진압을 위해
1개중대의 병력을 급파하였지만,
4연대는 위에서 이미 언급듯이
영암사건으로 경찰들과
전투를 벌였던 부대이며,
4연대 출신인 김지회와 지창수가
이미 붉은 조직들을 만들어 놓은 곳이었다.
4연대는 순천에 도착하자마자
오전 10시경
부대 안에 있던 좌익 부사관
이진범 일등상사의 인솔로,
끝까지 투항을 거부한
이명은 소위, 장인호 소위등
장교 2명과 사병 28명을
학살한 후
잔여병력을 이끌고
반란군으로 넘어가 버렸다.
22일에는
15연대장 최남근이
자신의 반란 동참 여부를 상의하기 위해
포로가 된 것으로 위장하여
지리산으로 따라 들어갔다가,
군내 조직을 유지하라는 지시를 받고
27일 다시 탈출을 가장하여
15연대로 귀환하였다.
이후 정체가 탄로나 총살형.
3.4. 정부의 진압
진압 작전 도중 불타는 여수 시내
불에 타 폐허가 된 여수
이에 정부는 10월 21일에
반란군이 점거한 지역 일대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진압군을 파견한다.
하지만 위에서 보았듯
일부 진압군이
반란군으로 돌아서기도 하는 등
꼴이 말이 아니었다.
심지어 남로당계 중대장이
자신의 대대장에게
기관총을 갈겨대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고립된 반란군의 세력은
차츰 약화될 수 밖에 없었다.
육군총사령관 송호성 장군을
지휘관으로 하는
‘반란군토벌전투사령부’가 창설되었고,
진압군은 대전 제2연대,
전주 제3연대,
광주 제4연대,
부산 제5연대,
대구 제6연대,
군산 제12연대,
마산 제15연대의 전 병력
또는 일부 차출병력,
육군비행대 L-4 10대,
육군 기갑연대 소속 장갑차 20대,
해군 경비정 7척,
서울 및 각도 혼성 경찰병력
약 2개대대로
거의 1개 사단 규모였다.
그에 반해 반란군은 김지회의
14연대 주력 2대 대대 1400명에
홍순석의 2개중대,
4연대 1개 중대 등
1600명 중대였다.
진압군 중 4연대는
21일 새벽
구례방면으로 북상하던
홍순석의 부대를
순천 북방 약 8킬로 지점
서면 학구리에서 격파하였다.
진압군의 첫 승리였다.
그 바람에 홍순석 부대는
이미 광양방면으로 이동하던
김지회와 합류할 수 밖에 없었다.
오후부터 순천탈환 작전에 들어가
22일 오전
순천을 완전히 수복하였다.
한편 광양방면으로 이동중인
김지회는 22일 오후
광양군 옥곡면 백운산 기슭에서
마산에서 출동한 15연대와 대치 중
연대장 최남근과 만나는데
그는 이현상과 만나
자신의 행동 지침을 듣기 위해
포로로 가장하여 입산한다.
이때 군내 지하세력을 유지하라는
지령을 받고 탈출을 가장하여
하산한 최남근은
이후 이 사실이 발각되어 총살당한다.
이때 진압군은
여수, 순천을 회복하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현상-김지회의 반란군 주력의
목표는 지리산 입산이었고,
이에 전투를 회피하며 빠져나갔다.
사실 원래 진압군의 작전은
지리산 입산 차단이었다.
당시 이승만은
맥아더의 초청으로
19일에 일본으로 갔고,
20일 새벽
기타 주요인사가 모인 회의에서
국무총리 이범석이 지도를 보면서
반란군은 진압군에게 몰리면
지리산으로 들어갈 것이라며
처음부터 이를 염두에 두고
진압 작전을 펼쳐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순천시가지 수복작전은
21일 오후 10시부터 시작되었다.
장갑 수색중대를 선봉에 내세우고
L-4정찰기들을 상공에 띄우고
제3연대, 제12연대 등이
공격의 주역을 담당하였다.
반란군의 저항은 미미하였다.
여수와 마찬가지로
순천에 도착한 반란군들은
순천을 장악한 즉시 빠져나갔다.
순천에 남은 반란군의 숫자는 미상이지만,
벌교출신 한모 상사의 지휘하에
150명이 벌교로 후퇴하여
벌교를 피바다로 만들어 놓았다는 것으로 봐서
여수에 남은 2개 중대와
비슷한 규모로 추측된다.
순천의 완전 수복은
10월 23일 오전 중에 이루어졌다.
계엄군 사령부는
11월 13~14일
순천현지에서 군법회의를 열어
검거된 폭도 피의자 458명 중
101명을 무죄석방,
79명을 징역 20년,
79명을 징역 5년,
102명을 사형에 처했다.
또한 전남 학무당국은
이에 관련된 순천지방 초등학교
불순교사 61명을 파면하였다.
23일 오전 9시 40분
함포 사격을 지원받아
5연대가 여수 수복작전을 개시하였지만
반란군의 저항이 거세 실패한다.
24일 두번째 공격은
송호성 장군이 직접 지휘를 맡아
여수 인구부(연등동 일대)에서 펼쳐지나
이번엔 매복에 걸려
송 장군이 부상을 당하고
그렇게 후퇴하게 된다.
25일부터
박격포로 화력 지원을 받는
12연대가 주공을 맡게 되고
결국 27일 여수를 탈환한다.
하지만 이때 이미 대다수는
지리산이나 벌교 등으로
도주한 이후였다.
3.4.1. 온건파의 실패[편집]
하루 쉬고 24일 아침
여수 수복작전이 개시되었다.
육군총사령관이자
진압군 사령관인 송호성은
이승만, 이범석과 다르게
온건한 진압을 주장했다.
당시 부산일보에서는
25일 직접 교전 중의
여수읍내까지 출동하여
상황을 시찰한 육군 총참모장
宋虎聲장군은
동 시가전투가
반군진압작전으로부터
완전한 봉기시민 소탕으로
변하였음을 솔직히 인정하였는데,
동 장군은 시민의 그 같은 저항의식을
의외로 생각하고
동시에 금반 전투의 막대한 물적 손실을
개탄하였다.
동 장군은 공격에 앞서
3차나 삐라를 뿌리는 등
반군측과 양민을 분리시키려고
갖은 노력을 다하였으나,
이는 반도측 보안대의 방해로 말미암아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한다.
그리하여 25일의
제1일 공격에서
장갑차를 중심으로 한 전투부대가
시가에 돌입하였을 때
건물 안으로부터의 사격이
여전히 맹렬하였음
부산신문 1948년 10월 31일
1960년대 일본 역사학자는
국방경비대를 기른
아버지 송호성 등은
가능하면 희생을 작게 하여
은밀하게 사태를 수습하려고 했다.
송호성은 확성기를 가지고
반란군의 총탄이 쏟아지는
최전선에 나가
"나의 사랑하는 조국의 청년애국장병들이여
총을 버려라.
국방군끼리 싸울 때는 아니다.
지금이라도 늦지않았다.
나의 생명을 걸고
제군의 죄는 묻지 않겠다라고
울면서 반란장병들에게 호소했다.
하야시 히데키(林英樹),
內側 見 朝鮮戰爭
民族問題硏究會 編
朝鮮戰爭史 評論社 , 1967, pp.16 ~ 17
이명박 정부 시기의 진실화해에서는
반란에 대한 책임으로
토벌사령관에 임명된
송호성은 광복군 출신으로
평소 군내에서 비주류였다.
반군에 대한 만주군 출신 지휘관들의
강경 진압방침과 달리
송호성은 온정적인 입장을 취했다.
당시 강경한 진압작전을 주장하고
실행한 인물들은
이승만, 채병덕, 김백일, 백선엽,
백인엽, 송석하로 이어지는 세력이었다.
사 초기, 진압작전의 주도권은
이미 송호성에서
김백일, 백선엽으로 넘어갔다.
훗날 송호성이 부정적으로 평가된 것은
이 같은 태도와
그의 납북사실 때문이었다.
진실화해 2010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437쪽
등으로 평가했다.
그러나 온건파의 시도는 실패하고만다.
반란군측은 김지회, 홍순석이
곳곳에 남겨놓은 안내원을 따라
지리산으로 입산한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반란의 주력부대가
여수에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된 것이고
이에 차단선을 풀고
여수만 노리게 되어
반란군들은 큰 피해 없이
지리산으로 입산한다.
여수의 무장 폭도 분자들도
지창수를 따라 지리산으로 입산하였고
정작 여수에는
북한군이 남진하여
오고 있는 줄로만 알고 있던
여수인민위원장 이용기 등
일부 좌익분자들만 남게 된다.
3.4.2. 강경파로 교체
뒤늦게 진압군사령관을
송호성에서 김백일로 교체하고
25일, 근처에 차단선을 펼치고 있던
군부대까지 싹싹 긁어와
여수를 향해 진격한다.
물론 여수에 14연대의
주력부대는 없었다.
전날 매복당했던 미평리를
무혈 점령하고
여기에서 신중하게 하룻밤을 보낸 후
26일 아침
여수 시가지에 대한 박격포 사격과 함께
장갑차들이 돌진했고,
여수에서는 약간의 무장폭도들이
남아 있었지만 큰 피해는 없었다.
하지만 해상의 LST 선상에서
여수로 상륙하는
5연대 1대대의 박격포가
12연대 수색대를 강타해
중대장과 하사관 1명이 사망하는
참사가 벌어졌다.
이후 지루한 시가전이 지속되었지만
진압군은 시내 중심부를
속속 탈환해 나갔다.
시가전 끝에 27일 오전,
여수 남국민학교에
진압군사령부가 설치되며
완전 수복이 이뤄진다.
그리고 2진으로 도착한 경찰부대는
동료 경찰과 그 가족들이
처참하게 학살당한 것을 보고
눈이 뒤집어졌고,
1차 진압군경의 피해 규모를
10배 이상 상회하는
대규모 보복 학살이 시작되었다.
이 사건 이후에
12월에
화순, 나주 민간인 학살사건도
벌어지게 되며,
2016년 12월에 돼서야
국가의 책임, 배상을 인정하였다.
3.5. 지리산 유격대
48년 11월 중순
지창수가 이백여명의 잔여 병력을 이끌고
백운산으로 들어오면서
총 6백명의 병력이 집결하였다.
조계산 방면에도
2백 명이 가 있기는 했지만,
최초 14연대 반란군과
4연대 일부 병력,
이에 동조하는 좌익세력까지 합쳐
4천명에 달하는 수의 병력이 작살나,
열흘 남짓만에 겨우 1/5 밖에 남지 않았다.
나머지 병력 중 4백명은
진압군과 싸우다 죽고,
2천8백명은 생포되어
재판에 넘겨져 있었다.
49년 1월 10일까지 진행된
군사재판에서 410명에게
사형이 선고된 뒤 바로 집행되었으며,
568명은 종신형으로
대전교도소 등지에 분산 수감된다.
기타 병사들은 10년 이상 중형을 받고
수감되다가 6.25가 터지면서
전부 총살당한다.
지리산 입산 이후
반란군은 빨치산화하였다.
기존의 14연대 반란군 출신들만이 아니라
남로당 중앙에서 보낸
이현상이 사령관이었으며,
구례군당(위원장 최규복) 등
지방 좌익 세력이
대거 합류했기 때문이다.
또한 최규복과 박종하가
지리산에서
14연대 반란군에게
사상 교육을 하기도 하는 등,
당이 군을 지휘하는 모습을 보였다.
2년 후의 일이지만
이현상이 이들 부대를
남부군이라는 이름으로 이끌고
남하할 때 편제를 보면,
사령관 이현상,
총참모장 박종하(전 구례군당 유격대장),
정치위원 여운철(전 충남도당 위원장)
승리사단장 이진범
(14연대 하사관 출신)으로 구성된다.
즉 반란군 14연대 색깔이 많이 약해진다.
소설 남부군의 저자 이태가
전북도당에서 전속된 부대가
승리사단 서울부대
(부대장 14연대 사병 출신 김금일)였는데
다른 빨치산 부대와 달리
승리사단은 일본군한테서 배운
국군 특유의 악습이 남아 있어
구타와 폭행이 잦았다고 한다.
용어도 빨치산식 어투가 아닌
국군식 용어를 많이 사용했다고 한다.
또한 지방 유격대와 달리
여성이 적었다고 한다.
여담으로 정지아의 소설
빨치산의 딸에 의하면,
정지아의 부친이자 주인공인
유혁운(본명 정운창)은
곡성군당 소속이며
여순사건 시 14연대 반란군이
인민군이 곧 내려와서
해방시켜 준다는 말을 믿고 기뻐한다.
그러나 며칠만에
14연대가 지리산으로 도망가자,
조직이 전부 노출된 상태라
할 수 없이 대거 입산하여
도당, 군당, 면당 별로
빨치산화하여 투쟁한다.
당시 지방 조직원들이
어떻게 빨치산이 되었는지 잘 보여준다.
주의 할 것은
이들이 전부 14연대에 합류해서
남부군이 된 것이 아니라,
여수, 순천지역에 있다가
14연대를 따라가거나
지리산이 있는 구례군당 정도가 아니라면
대부분의 군당, 면당원들은
해당 군, 면 지역 안에서만 활동하는
빨치산이 되었다.
명령 계통도 전남도당의 지휘를 받았을 뿐,
이현상 부대와는 별개였다.
그러나 상호 협조 관계가 되어
구례군당 유격대장
지리산 호랑이 박종하,
또는 빨치산의 딸의 저자
정지아의 엄마이자
구례군당 소속 이옥자(본명 이옥남)처럼
소환 형식으로 이현상 부대로 넘어가기도 했다.
3.6. 14연대 반란 수괴들의 최후
여수군에서 활동한 남로당
여수 지구 위원장 이용기는
반란 일주일 후
여수 근교 석천사 뒤 마래산에서
소나무에 목을 맨 시체로 발견되었다.
반란군을 따라 지리산으로 들어가지 않고
자살한 것이 의문인데,
아마 14연대가 반란을 일으키면
각지에서 다른 국방군도 호응하고
38선에서 인민군이 내려오기로
굳은 약속이 되었다는 말만 믿고 있었지만
결국 아무일도 안 일어나자
비로소 기만당한 것을 알고
참담한 심정에
자살한 것으로 추정된다.
다른 여수지구 위원들은
체포되어 사형당한다.
48년 10월 중순에서
11월 초순 사이에
14연대 반란군 600여명에
여순지역의 좌익폭도들을 합쳐
대략 1천명 정도가
광양 백운산, 지리산에 입산하는
나름 성공을 거두었다.
그런데 이후 국군의 적극적인 진압작전과
민심 이반,
약속된 북의 지원군 부재 등으로
이들 세력은 급격히 약체화되었고,
결정적으로 이현상이
반란군을 정규전처럼 운용하는 실책으로
그 해 말에는 350명,
사건 겨우 반년만인 49년 4월,
고작 2백명 정도만이 남아
지리산 일대에 분산 고립되었다.
이후 지리산에서
유격활동을 펼치던 반란군은
진압군의 승전으로 열세에 몰리면서
그 잔당이 한국전쟁 때까지
빨치산으로 활동하였다.
반란의 주역 지창수는
반란군을 이끌고 지리산으로 입산하라는
이현상의 명령을 어기고
2개 중대를 여수에 잔류시켜
지역 방어에 매달리다가,
48년 11월 이후
지리산에서 이현상에게
'금싸라기 같은 봉기군 주력의 분산과
무모한 지역점령으로 인한
희생의 책임'을 물어
호된 비판을 받고
모든 지위가 박탈되었다.
이후 의기소침한 상태로
대열 후미를 따라다니다가
49년 2월 지리산 기슭
경남 하동군 화개면에서
국군 토벌대에 의해
발목에 총상을 입고 생포되었다.
교전 중에 생포되면
그자리에서 총살되는 게 보통이었지만
반란의 주모자라
정식 군법회의에 가게 된다.
그러나 지씨 가문은
광주의 이름난 부호로,
막대한 재력을 동원해
사형을 면하고 무기징역을 받게 된다.
하지만 6.25가 발발하고
낙동강 전선이 위태로운
50년 8월 중순
처형당하였다.
그러나 그가 숙청된 것은
표면적인 이유가 아니라
소식 없는 북의 지원군,
혹독한 추위와 굶주림,
대규모 군경토벌군의 압박으로 인해
반란군이 전의를 상실하자
그 책임을 전가하기 위한
희생양으로 선택되었다는 설이 있다.
1949년 4월 9일 새벽 2시 30분쯤,
김지회, 홍순석 일당 29명은
산내면 반선리 선술집 금판정에서
술집 주인의 신고로
출동한 군경과 맞닥뜨려,
홍순석을 비롯한 정치부장,
후방부장 등 17명이 사살되었고,
7명은 포로로 잡혔다.
생포된 공비들이
김지회와 그의 처 조경순도
같이 있었다고 진술하였지만
이들 부부의 시체는 발견하지 못했다.
4월 13일,
김갑순 일등상사는
조경순을 비롯한 일당을 생포하였고
조경순을 심문하여
김지회의 행방을 추궁,
600m 정도 떨어진 야산에서
까마귀에게 심하게 훼손된
시체 1구를 찾아냈다.
김지회는 반선리 전투에서
입은 총상으로
창자가 밖으로 나오는 등
그 시체가 너무 훼손이 심하여
신원확인이 불가능할 정도여서,
처 조경순에게 직접 확인케 했다.
빨간 스웨터의 여대장으로 알려진
김지회의 처 조경순도
생포 후 사형에서 무기로 감형되었다가,
한국전쟁 직후 형무소에서 처형된다.
이때 공을 세운 3연대 3대대는
전원 1계급 특진되었고,
김갑순 상사는
상금 1백만원과 훈장을 탔다.
6.25 직전에는
이현상 휘하의 제2병단
(일명 지리산인민유격대)은
겨우 70~80명이 남았고,
이후 구대원으로 불리며
남부군의 주력이 된다.
이때의 14연대 반란군 출신은
이영희(남부군 부사령관),
이진범(남부군 승리사단장),
김흥복(2대 승리사단장,
이후 81사단으로 개편),
송관일(승리사단 관일부대장),
김금일(승리사단 서울부대장)
등으로 지휘관이 된다.
공식 기록에는 반란군은
392명이 사살되고
2,298명이 투항하였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
지리산유격전구 사령관
이현상 역시 토사구팽당한다.
이현상은 5년간 지리산 일대에서
빨치산 총사령관으로 행세하다가
남로당 출신의 김일성 절대지지파로부터
출당 및 모든 지위를 박탈당하고
산중고아가 되어
홀로 지리산을 배회하다가
1953년 9월
군경토벌대에 의해 사살당한다.
당시 북에서는
박헌영과 남로당이 숙청될 때라서,
대한민국 내 박헌영의 오른팔인
이현상은 김일성에게
눈의 가시일 수 밖에 없었다.
이태의 이현상
(남부군 비극의 사령관)을 보면
북한에서 내려와
그를 암살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김지회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기던
이현상은 51년말
군경의 1차대공세로
남부군이 다 작살나자
1백명 밖에 안남은 병력으로
'김지회 부대'와
'박종하 부대'로 부대를 재편한다.
이후 김지회 부대만은
이현상의 직속으로
끝까지 그를 지켰지만,
남로당 숙청으로
이현상이 숙청될 때
김태규를 부대장으로 하고
이름도 995 부대로 바꾸어
전남도당 구례군당 산하로
소속을 변경해 버린다.
995부대는 53년말
군경의 2차대공세 때
김태규가 투항하면서 끝난다.
14연대 반란군과 남부군도
이로써 완전히 역사속에서
자취를 감춘다.
자세한 것은
빨치산(조선인민유격대) 항목 참조.
4. 사건 이후
이 사건을 계기로
이승만 정부는 반공노선을
더욱 강화하였다.
진압이 완료된 그해 12월,
국가보안법이 통과되기에 이르렀다.
뿐만 아니라 이듬해에는
군부의 숙군이 본격화되었다.
현역군인의 약 5%가 갈려나갔는데,
억울하게 붙들려간 사람도
한 두 명이 아니었다.
나중에 석방되어
고위장성을 역임한 사람도 여럿 있지만,
무고하게 목숨을 잃거나
고문을 받아
장애를 입은 사람도 숱하다.
신원조회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엉망이던 군부를
다잡는 계기가 되었지만,
반대로 억울한 희생을 당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이 사건이 북한의 지령이나
남로당 지도부의 지시로
일어났다는 얘기도 있으나,
남로당에서도 북한에서도
전혀 원하지 않았던 사건이었다.
남로당은
지상파 라디오 뉴스를 듣고
비로소 사건 발생을
알았다고 할 정도.
우발적으로,
게다가 사병 위주로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에
이후의 어떠한 계획도 없었고
결국 순식간에 와해되고 말았다.
군 내부에 세포조직을 키워
세력화하려고 했던 남로당은
이 사건 이후로
군 내부의 좌익계열들이
모조리 색출되어
군 내부에서 남로당의 기반이
뿌리째 뽑혔기 때문에
타격이 매우 컸다.
한국전쟁 종전 후
북한에서
패전에 대한 책임공방이 일었을 때
만주파를 제외한
연안파, 남로당파, 소련파는
이 사건의 귀결을
매우 아쉬워했다는 후문도 있다.
박헌영의 입버릇이던
"인민군이 남진하면
20만 명의 남로당원이 호응할 것"
이라는 게 사실이 되었을테니...
하지만 나중에는 되려
남로당계를 숙청할 때
빌미 중 하나가 되었다.
남로당 거두 박헌영의 재판에서
박헌영은 "여순사건은
내가 미군과 짜고
대한민국 군 내의 세포조직을
노출시키기 위해
일부러 일으킨 것이다.
그 이유는 내 사상적 기반이
나빴기 때문이다."라고
자아비판식 진술이 기록돼 있다.
헌데 당시 박헌영은
1946년에 홀로 월북해
북한 내에서 입지가 약했기에
정치 기반인 남로당을 통해
입지를 강화할 속셈은 있었어도
미군과 내통하고
섣부른 반란 유도를 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수령 아바이는
정치 경쟁자들을 어떻게든
숙청하려고 했기에
자의든, 타의든 이러한 진술을
이끌어낸 것이다.
여순사건으로
군내 좌익세력이 색출되지 않았다면
한국전쟁의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여순사건 이후 숙군작업을 통해
숙청된 군인은
전체 군인의 5% 정도이다.
이 숙군작업을 통해
반공성향의 군문화가 정착되었다.
한편으론 당시 군의 파벌 가운데
만주군 출신들이
대거 중요 보직에 포진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도 한다.
한편 숙군작업은
반공 이데올로기 확립과
좌익세력을 척결한다는
대의명분도 있었지만
이승만 정부의 확고한
군 장악 목적도 있었다.
그 결과 반국가 세력들도
좌익들과 같이 대거 숙청되었다.
그러나 여순사건은
이후 불어오는 어마어마한
대학살의 전주곡이었을 뿐이니.
사건이 일어난 여수 지역도 아니고
근처인 순천지역도 아니고
저 멀리 있던 지역의
좌익세력들까지
여순사건과 관련있다고
학살당한다.
위로 올라가는 보고의 상당수는
여순 세력들이 출몰했다고.
5. 여수군, 순천군민들의 반응
"반란사건이 6.25사건보다 더 무서웠어..."
여순사건 당시 순천농업학교 교사였던
김관수의 증언.
시간이 흐른 지금,
아직도 해당 지역은
당시의 사건을 기억하거나
이를 전해들은 사람들이 많은 편이다.
그래서 군인들이
훈련 등의 이유로 무장하고 돌아다니면
꼭 한마디씩 뭐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심지어 술을 마시고
행패를 부리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위 사건을 언급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다시 말해 전체적으로
군인에 대한 인식을 망쳐놓은 셈이다.
순천시 구도심 지역을 다니다 보면
여순사건유족회관이 있다.
그 정도로 상흔이 가시지 않은 지역이
대부분이며,
특히 벌교로 넘어가는 길목이었던
낙안면, 상사면 일대 주민들은
지금도 여순사건에 대해 말하면
치를 떨 정도다.
6. 정부의 반응
이 사건은 이승만 정부가
6.25 전쟁 이전부터
치안유지법을
국가보안법으로 개정하고
강경한 반공주의 성향의 국가를
구축하는 근거로 사용되었으며,
또한 박정희 정권과
이후 군사정권 기간 내내
철저한 반공주의 국가를
유지하는 근거로
오랜기간 동안 사용되었다.
정부 측의 학살이
훨씬 더 많았다는 사실을
역사학계에서 공공연하게
밝히기 시작한 것은
거의 60년이 지난 후였으며,
그 전까지 교과서는 물론
모든 매체에서
일방적으로 반란군의 탓으로
돌려왔다.
이범석은
이게 극우와 극좌의 합작이라고
발표했다.
그래서 당시 국회 속기록에도 나온다.
이걸 가지고 김구가
여순사건에 관련이 있다는 둥
루머가 퍼져나갔다.
김구 암살 관련
미 정보문건을 보면
김구, 염동진은
우익 반대파 장교들과 함께
쿠데타를 일으키기로 했다고 한다.
역사편찬위에서는
염동진과 몇몇 장교들의
발언만 가지고 하는 거라서
신뢰성이 떨어진다고 했다.
심지어 5.10 제헌국회의원 선거 때
이승만에게 대항하여 출마한
최능진 전 미군정청 경무부
수사국장과
백범 김구 선생 계열로
48년 9월 29일 해임된
오동기 전 14연대장(광복군 출신)을
이른바 ‘혁명의용군 사건’으로
조작하여 구속했는데,
이 사건과 뒤섞어서
여순반란 사건의 총책은
최능진과 오동기라는
괴랄한 결론을 내린다.
이에 최능진은 사형,
오동기는 징역 10년을 받았다.
상술했다시피
김지회는 적색장교로 분류되어
연대 작전주임 보좌관이라는
요직에서
대전차포중대장으로
좌천되었는데
이를 지시한 사람이
당시 14연대장 오동기 소령이었다.
오동기 소령은 직접 상경하여
군 고위층에
김지회의 구속 건의까지 하였지만
증거가 없는데
어떻게 장교를 함부로
구속하느냐고 하여
허위로 몰아간 적이 있다.
이런 그에게
반란의 주모자라고 하니
본인은 환장할 노릇.
결국 여순 반란이
북로당+소련의 지시라고도 하고 싶고,
정치적으로 눈에 가시인
김구의 지시라고도 하고 싶으니
결국 이걸 짬뽕하여
극좌와 극우가 함께
머리를 맞대고 일으킨 사건이라는 결론.
이 사건이 북로당+소련의 지시인지,
자신의 세력 약화에 조급해 했던
박헌영이 독단적으로 일으킨
남로당 이현상을 통해
일으킨 사건인지,
친일경찰과의 불화와
제주도로 출동을 거부한
14연대가
우발적으로 일으킨 사건인지 등
이견이 있었다.
다만 확실한 건
김구가 북측과 짜고 일으킨
우익 쿠데타라는 것이나,
북한측에서 주장하듯
박헌영이 미군과 짜고
군내 세포조직을 소멸하기 위해
일으킨 사건이라는 것은
신빙성이 부족하다.
어째 극우든 극좌든 생각하는 것은
비슷한 것 같다.
어떤 사건이 일어나든
실체와 관계 없이
잘되면 내 공로이고
안되면 정적에게 뒤집어 씌우기.
그러나 김구 안티세력에서는
이를 실제 있었던 일이라고 주장하면서
반란에 진압하러 갔다가
반란군이 된 제4연대장의 이름을
최남석이라고 주장하는데
저건 당시 기록이 잘못된 것이다.
여기에 대해 다룬 오마이뉴스도 있다.
실제로 여순사건이 일어나기 전
오동기 제14연대장에서,
제4연대장이었던 박승훈이
후임 연대장으로 임명되었다(...)
그 후임 제4연대장은 이정일이다.
훗날 이성가로 개명한다.
중국 국민혁명군 장교로
국민당정부의 정보조직인
남의사에서 활동했으며,
해방전후에는
한국 광복군의 북평 잠편지대
소속이었다.
저 극우 부분은
박정희 시대 때 삭제되는데,
박정희에게 있어서도 흑역사였다.
당연히 박정희에 대한 부분도 삭제된다.
박정희 본인이
여순사건으로 발발한
숙군의 대상이었을 뿐더러,
극우=김구를 지칭하는 만큼
박정희로서
그냥 놔둘 일은 없었다.
자세한 것은 김구 항목의
김구의 복권 부분을 참조.
7. 학살과 희생
여수서초등학교 교정에 모여
사상검증을 받고 있는 여수군민들
학살되어 가마니에 싸여진 시신
"남녀 아동까지라도 일일히 조사해서
불순분자는 다 제거하고
조직을 엄밀히 해서
반역적 사상이 만연되지 못하게 하리니
앞으로 어떠한 법령이
혹 발포되드래도
전 민중이 절대 복종해서
이런 속행이 다시는 없도록
방위해야 될 것이다.
만일 우리가 등한히 하다가는
자상 잔멸로 사망의 화를 피할 자가
몇이 아니될 위험성을
막기 어려울 것이다."
이승만의 담화,
동아일보1948년 11월 5일자
하우스먼은 비공개를 전제로
한국인들은
"잔인한 개자식"이고
"일본인보다도 더 나쁘다"고 말했으며,
한국인들에게 이를테면
처형한 시신을
가솔린으로 제거하여
처형 방법을 숨기고
그 책임을 공산주의자에게
돌리는 방법을 보여줌으로써
그들의 잔인성을 더 효과적으로
만들려고 했다고 말했다.
브루스 커밍스, 2017,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 196 페이지
죄 있는 사람은 살았고,
죄 없는 사람은 무조건 총살시켜 죽였다.
당시 구례 대한청년단
단원이었던 김대홍(75)의 증언
여수 점령 후
반란군은
남로당 여수군당과 합동으로
경찰관과 우익진영 인사
검거작업에 착수하였다.
또한 여수군의 행정기관을 장악하고
우익인사, 경찰, 그들의 가족들을 죽였다.
교전이나 즉결처분으로 죽은
경찰은 74명,
공식적인 인민재판으로 죽은
민간인은 수십명 가량이었다.
진압군에 밀려 후퇴할 때까지
3일동안 비공식적인 학살을 제외하고,
기록으로 남은
공식적인 즉결처분과
인민재판으로
도합 150명 가량이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20일 순천으로 향한 반란군은
홍순석 중위가 이끌던
14연대 2개 중대와 합류한다.
여기서는 여수보다
학살의 규모가 컸는데
경찰관 칠십명은
경찰서 앞마당에서
집단 학살당하는 등
우익들과 그 가족을 합쳐
총 9백명이 죽었다.
그 외에도 남원, 광양, 보성,
벌교, 고흥 등
전남과 경남의
여러 군소도시를 다니며
인민위원회를 세우고
우익들을 살해했다.
군별로 10여명씩 죽어
약 2백명 가량이 살해당하였다.
이러한 차이는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여수는 전통적으로
우익이 우세한 지역으로,
좌익활동이 활발하지 않은 만큼
이에 대한 우익의 탄압도
극심하지 않았다.
그에 반해 수년 전부터
극단적으로 좌우익이 대립해
서로 보복 살상을 일삼던
순천에는
대규모 학살극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들 도시에서
반란군과 그 추종세력은
초반에 다른 도시로 진출하거나
지리산으로 들어갔는데,
이 과정에서 진압 임무에 나선
경찰관과 초강경 우익단체
'서북청년단'원
1천3백명 가량이
숨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서북청년단의 피해가 컸는데,
이들 조직이 성장하고 자리잡는
과정, 임무수행 과정 전반이
폭력도 불사할만큼
'강경일변도'였기 때문.
7.1. 봉선화와 바위고개
반란 당시,
평소 정부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좌익계열 시민과 학생들도
이들에게 협조한 정황이
외부에 왜곡된 정보로 퍼져나가며,
사건은 점점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되었다.
특히 학생들이 협조했던 사실은
이후에 '여학생들이
치마에 무기를 숨기고 접근해
진압군을 공격했다는
"카더라 통신"식의
크게 과장된 이야기로
발전하기도 했다.
당시 계엄령이 선포된 지역은
빨갱이 협조자 색출이 진행되었고,
그 과정에서 반란군에 의해 살해된
민간인의 수보다
많은 수의 민간인들이 처단되었다.
또다른 기록에 의하면
반란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은
500명 남짓인데 비해
진압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은
6,000명 이상이다.
그것도 정부 발간 공식기록이다.
어찌되었든 쌍방에 의해 희생된
민간인의 수는
반란 중 죽은 군인들의 수보다
결코 적지 않다는 것만큼은 사실이다.
살아 남은 경찰과
서북청년단원들이
복수에 눈이 뒤집혀
젊은 사람들은 일단 잡아가
죽이고 보는 학살을 자행한 것이다.
총살당한 민초들은
총살이 집행되기 전
가곡 봉선화와 바위고개를 불러
현장에 있는 많은 이들이
눈시울을 붉혔으며,
이 일이 세인들에게 알려져
각 노래들이 다시 주목받는 한편,
한동안 해당 지역에서는
암묵적인 금지곡이 되기도 하였다.
타지역 분들이
여수, 순천 등지에서 멋모르고
이 노래를 부르면,
이상하다는 시선을
받는 일이 있었다고.
여순 사건에서
반란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먼저 발생한 것은
기록, 목격담으로 확인된다.
또한, 진압군의 반란 진압 과정에서,
반란군에 동조한 사람들에 대해,
재판 과정 없이
보복성 학살이 자행된 것도 맞으며,
그 과정에서 관련 없던 사람이
많이 죽었다.
늘 그렇듯 양편이 다 총을 들고 있으면
양편에서 다 죽게 되어 있다.
참으로 이데올로기의 비극이라 하겠다.
일부 진압군들은
지리산에 진압차 들어가는 대신
전라남도 각 마을을 돌아다니며
반란군인척 하며
학교 운동장으로 모이라고 한 다음,
"반란군의 명령에 따라 모였으니
너희는 좌익빨갱이다!" 하는
낚시 작전으로
마을사람들을 집단 학살하였다.
사실 반란군들이 행군할 때
마을사람들이 진압군인지 알고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민국 만세! 이승만 만세!"를
외쳤다는 일화도 있다.
반대로 고흥반도에서는
국군이 진입하자,
마을 사람들이
"인민군 만세!"라고 외쳤다가
학살당하였다.
진압군인지 반란군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군인들이 와도
집안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면
어떻게 될까?
이럴 때는 마을사람은
전원 학교 운동장에 집합하라는
명령에 따르지 않은 죄로
좌익으로 분류되어,
집집 마다 군인들이 수색하며
사살했다.
심지어 각 섬에서 배타고
육지로 나와
학교 운동장에 집합해야 했다.
각 학교의 운동장 한켠에는
거대한 구덩이가 파였고,
20~40세의 모든 남성은
속옷만 입고 무릎 꿇고 앉은 채
경찰관 가족과 우익청년단의
심사를 받아야 했다.
그런데 이들은 자신들을 괴롭혔던 좌익과
그 부역자 외에도
평소 앙금이나 원한이 있었던 이들도
손가락으로 지목했으며
그 외에도 손바닥이 투박하거나
군용 팬티를 입었거나,
머리가 짧거나,
심지어 딱 보면 빨갱이의 기운이
느껴진다는 이유로도 지목되었다.
이렇게 지목된 사람들은
다섯명 씩 손이 철사에 묶인 채
총살되어 구덩이에 던져진 뒤
장작과 기름으로 불태워졌으며,
이 광경은
차례를 기다리던 사람들과
다른 쪽에 있던 여자와 노약자들에게
여지없이 보여졌다.
게다가 5연대 1대대를 지휘하는
김종원은
아예 일본 헌병대 시절부터
간직해 온 일본도로
참수하다 지치면
총을 꺼내 사격연습하듯
총살했으며,
급기야 어느 골목에서 마주한
청년들조차 모두 현장에서
일본도로 베는 등
마치 분풀이 하듯
사람들을 죽여댔다.
또한 이 광경은
외국인 기자들에 의해 기록되고
일부는 사진으로 남겨지기도 했으며,
라이프지의
칼 마이던스 기자는
"울 수조차 없는 상황"이라고
묘사하였다.
그리고 각 지방 면장들도
군경 앞에서
의무적으로 좌익세력을
지목해야만 했다.
그러니까 "면민중에서
좌익 30명만 추려내!" 하면
어떻게든 30명을 맞춰 지목해야 했다.
허나 이미 주요 좌익 세력은
반란군 14연대를 따라 입산하고
남은 것은
반란군이 군청창고를 깨서 나눠준
쌀 받아 먹은 사람밖에 없던 상황에서,
면장들은 할 수 없이
평소 고분고분하지 않던
사람 몇을 지목해야 했고,
그렇게 지목된 자들은
즉석에서 처형되었다.
백두산 호랑이 김종원 역시
이렇게 지목된 사람들을
일본도로 하나하나 목을 쳤는데,
얼마나 잔인한지
미군 보고서에서
'짐승같은 인간'이라고
특기할 정도였다.
일부 마을에서는
주민들 간에 도장을 빌려줄 정도로
친분이 쌓인 것이 화가 되어,
몰살에 가까운 피해를
입기도 하였다.
남로당 가입실적을 내려는 당원이
마을 이장 이름으로
도장을 빌려
주민분들 존함을
당원 가입신청서에 올렸기 때문.
그럼 여순 사건으로 죽은
전체 민간인은 몇명인가?
당시 방송과 신문은
반란군이 3천명 이상의
주민을 학살했다고 하였다.
하지만 당시 국방부는
7천명이라고 발표 하고,
이듬해 전남 보건후생부는
이재민 구호자료에서
여수 등 7개 지역에서
2,634명이 사망하고
4,325명이 행방불명되었다고 한다.
즉 7천명 가량이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좌익 세력이 죽인 사람은
1천 3백명.
그럼 나머지 5천7백명은?
단 이러한 주장은
좌익의 학살은
오직 공식적인 즉결처분과
인민재판만 인정한다는
편향적인 발상에 불과하다.
하지만 편향적이라고 해도
개연성은 존재한다.
초반에 반군의 주력이
학살에 가담하지 않아서
진압군의 경우보다
수치가 적을 수 있다는 것이다.
7.2. 유언비어와 그 진상
한편 앞에서
여학생이 총을 들고
군인을 공격했다는 식의
유언비어를 언급했었는데,
이는 완전히 조작된 이야기다.
이기봉의 빨치산의 진실에서는
“교복을 입은 여수수산학교와
여수여중생들에게까지
권총과 카빈이 지급되었다.
이들은 스승을 예사로 살해하였다.
좌익 이념을 지닌 70여명의
각급 학교 교사들도 가담하여
학생들을 충동질하였다.”고
기록되었지만
실제로는 일부 좌익 학생이
가담한 수준이었다.
고위간부들에게나 돌아가는 권총이
어린 학생들에게
지급되었다는 것부터
뭔가 수상하지 않은가?
또한 당시 여수여중의 교장이었던
송욱이 반란군에게 협조했다는 소문도
이러한 유언비어가 퍼지는 데
한 몫 했는데,
그는 반란군에 협조한 사실이 없었다.
그럼에도 이러한 악의적인 주장으로
송욱은 물론이고
여학생들까지 연행되거나
사살되는 비극이 일어났다.
당시 수많은 헛소문이 퍼졌는데
대표적으로,
이승만 대통령은
기자회견을 통해
어린 초등학생까지
반군에 가담해
총을 들고 저항했으며
좌익인 아들이
우익인 아버지를 쏘아 죽였다느니 하는,
그의 입 외에는
어디에서도 출처를 찾을 수 없는
괴담을 퍼뜨렸다.
또한 정부의 요청에 따라
취재를 나간 이들도
헛소문을 부추겼는데,
"여고생들이 '오빠' 하며
군인을 불러 다가
치마 속에서 권총을 꺼내 죽였다"라는
기사가 바로 이때 나왔다.
하지만 여수중학교에서
조사한 결과,
실제로 실종된 여고생은
단 1명뿐이었다.
이때 적어도 3명 이상의 여경이
강간 후 살해되었다는
이야기가 퍼졌다.
실명까지 공개되며
반란군 앞에서 발가벗겨진 채
음부에 총을 맞고 죽었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 주인공이었던
국막래 경사는
후일 무사히 살아 남아 인터뷰를 했다.
아마도 6.25 때의
인민재판 사례와 뒤섞여
왜곡된 것으로 추정.
국막래 경사가 무사히 살아 남아
인터뷰했다는 기록은 근거가 없다.
경찰청 공식 홈페이지의
'순직 경찰관 추모' 코너에는
국막래 경사가
1948년 9월 20일
여수에서 '반군'과 용전하다가
순직했다고 기록돼 있다.
또한 여수경찰서 고인수 서장
및 부하들을 모조리 사살했다는
이야기가 있었으나,
정작 지서장은
여수 시내로 진격하는
반란군을 만나기까지 했는데도
해를 입지 않고
지서로 돌아와서
무기들을 숨긴 뒤
살아서 몸을 피했다.
고인수 서장이 살아 남았다는 기록도
전혀 근거가 없다.
경찰청 공식 홈페이지에
고인수 총경은
1948년 9월 20일
여수에서 순직했다고 기록돼 있다.
즉, 반란군의 무차별 학살이
존재한 것은 사실이지만
세부적인 면에선
사실과 다른 점도 있다는 것.
물론 잊어선 안 될 것은 단지
"존재했다" 수준의 학살이 아닌,
국군의 무자비한 보복을 받을 정도로
큰 규모의 학살이 있었단 점이다.
그러나 우익의 보복 학살은
좌익들에 의한 학살의 규모를
훨씬 상회하였다.
8. 반란군에 대한 평가
여순사건 당시
반란군과 진압군이 저지른
민간인 학살이 존재했다는 점은
합의가 됐지만,
반란군의 반란 동기와
이들에 대한 평가는
여러가지 의견이 혼재하고 있다.
8.1. 대한민국
정병준 교수는 폭동이라 평가한다.
"이 반란은 자연 발생적이며 거의 무계획적이었다. 하사관과 사병 몇몇이 시작한 군사 반란은 몇 시간 만에 2000명 규모의 폭동으로 발전했다. 여수에서 시작된 반란은 인근 도시 순천으로 번졌고 곧 전라남도 전역을 휩쓸었다. 반란 세력은 지역 토착 공산주의자들과 결합해 군인 반란을 지역 폭동으로 전환시켰다.
(중략)
관공서와 경찰서 등 공공 기관이 습격을 당했고, 최소 2000여 명이 사망했다. 이 당시 발생한 여타의 많은 사건들과 같이, 이는 하나의 운동이라기보다는 폭동의 모습을 띠었다."
정병준, "한국전쟁" 233페이지
항쟁이라고 평가하는 여순 사건 박사 2호[57] 주철희 박사는 책에서 다음과 같은 요지의 주장을 하였다.
“여순 사건은 제주도 4.3 사건 진압을 거부한 군인들이 들고 일어난 '항쟁'이며, 이제는 이념 투쟁이 아니라 역사로 봐야 한다."
주철희, '동포의 학살을 거부한다', 디자인흐름, 2017
아래 폭동론에 소개된 황남준은 항쟁과 폭동을 동시에 사용한다.
해방전후사의 인식에 기고한 학자 황남준은 기고글에는[58] 여순사건이 쿠데타라기보다는 무장폭동에 가깝고 그 파급 과정에서 남로당이 가담해 반란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고 평가했으나, 동년(1987년)에 투고한 연세 제25호에는 '항쟁'이란 용어도 사용하였다.[59] 항쟁과 폭동이란 용어를 동시에 사용한 경우.
종군 기자 출신의 한국 전쟁 전문가 브루스 커밍스는 14연대 반란을 연대 하사관 그룹에 의해 "엉터리"로, "때이르게" 시작된 반란이며 이딴 걸 왜 비중 있게 다루냐고 의문시했다.[60]
1994년, 여수문화원은 '14연대 반란사건' '10 20 사건' '여수주둔 군인반란사건'중 하나로 고쳐줄 것을 정부에게 요청했다.[61] 14연대가 반란을 일으켰는데도 마치 여순 주민들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오해를 불러일으켜 지역 명예가 실추된다는 사유로, 14연대 반란으로 수정하기를 바란 것.
문재인 정권 들어서 여수순천 사건 특별법을 제정하려는 움직임과 함께 여수와 순천 지역에서는 이미 이 여순반란을 여순'항쟁'으로 갈아치우려는 움직임이 보이고 있다. 순천의 팔마종합운동장에 있던 기존의 '여순사건위령탑'은 '여순항쟁탑'으로 바뀌었고, 순천 버스터미널 인근에는 '여순항쟁 역사관'이 문을 열었으며, 순천대에서는 '여순항쟁 역사화전'을 개최했다.기사 학살당한 사람들과 그 후손들이 학살자들을 옹호하는 꼴이다.
8.2. 북한
"전라남도 려수 주둔 남조선 괴뢰군 제14련대 군인들이 미제의 식민지 파쑈 통치를 반대하고 민주주의와 조국의 통일 독립을 지향하여 일으킨 대중적 무장 폭동이다. 8. 15후 남조선 인민들은 날로 혹심해지는 미제침략자들의 식민지 파쑈 테로 통치와 야수적 학살 만행을 반대하여 줄기차게 투쟁하였다. 인민들의 이러한 애국 투쟁의 불길은 괴뢰군 장병들에게도 미치였다.
미제와 리승만 괴뢰 도당은 1948년 10월 19일 려수 주둔 괴뢰군 제14련대 군인들에게 제주도 인민들의 애국 투쟁을 진압하라는 《동원령》을 내리였다. 이에 격분한 려수 군인들은 원쑤들의 출동 명령을 단호히 거부하고 폭동을 일으켰다.
폭동 군인들은 10월 20일 악질 장교들을 처단한 후 무기고를 점령하고 무장을 강화하면서 순식간에 려수 시가를 점령하였다. 여기에 또한 려수 시민들과 대구 주둔 괴뢰군 제6련대와 라주 주둔 괴뢰군 제5련대의 병사들까지 합세함으로써 폭동은 대중적 규모로 확대되였다.
폭동 군인들과 인민들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만세!》, 《미군 나가라!》, 《남조선단독정부를 반대한다!》 등의 구호를 웨치면서 괴뢰 정부의 통치 기관들을 까부시고 려수, 순천을 비롯한 여러 지방을 해방하였다. 해방된 지역에서는 인민위원회가 복구되였으며 민주주의 단체들이 합법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인민위원회는 해방 지역의 치안을 유지하는 한편 민족반역자[62]들을 인민재판에 넘기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여 인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인민위원회는 또한 토지 개혁 준비사업을 하는 등 일련의 인민적 시책을 실시하면서 대중을 항쟁에로 조직 동원하였다. 이에 당황한 미제와 그 앞잡이들은 이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폭동 진압에 날뛰였다. 폭동 군인들과 무장한 인민들은 비행기, 포병, 장갑차 부대까지 동원하여 공격해오는 미군과 괴뢰군, 무장 경찰대들을 맞받아 용감히 싸웠다.
애국적 인민들과 군인들의 영웅적 항쟁에도 불구하고 폭동은 미제와 그 주구들의 야만적인 탄압과 박헌영 간첩 도당의 간악한 파괴, 와해 책동으로 말미암아 결정적인 승리를 이룩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폭동은 남조선 인민들이 미제의 식민지 예속화 정책과 국내 반동들의 매국 행위를 강력히 반대하며 민주주의 제도의 수립과 조국의 통일독립을 견결히 요구하고 있다는것을 보여주었으며 인민대중의 혁명성과 그 위력을 크게 시위하였다.
또한 폭동은 오직 전인민적인 항쟁으로써 미제국주의자들과 그 앞잡이들을 철저히 때려부실 때에만 비로소 자유와 해방을 쟁취할수 있다는 교훈을 남기였다."
- 우리민족끼리[63]에 쓰여진 글 中
정종균 려수군인폭동의 영향 밑에 일어난 남조선괴뢰군 내 애국적 군인들의 투쟁 력사과학 3호; 려수군인폭동 백과사전 쪽 박창옥 최근의 남북조선의 정치정세 근로자 제1호; 조선중앙연감 1950년판.
- 김득중, 麗順事件 李承晩 反共體制 과 의 구축, 7페이지 참고.
한편 북한에서는 이 사건이 미군정과 대한민국을 반대해서 일어난 폭동, 즉 인민 봉기 및 항쟁이었다고 선전한다. 그리고 이 와중에 반란이 실패한 것에 대한 책임을 박헌영에게 떠넘기고 있다. 정작 반란을 일으키고 그에 가담한 군인들은 남로당 당원이었는데도 말이다. 그러니까 지창수, 김지회를 비롯한 반란군의 공을 가로채면서도, 그 실패의 책임은 박헌영에게 떠넘기는 이중적 행태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9. 여담
이 사건 이후, 그렇잖아도 불길한 취급받는 숫자인 4는 대한민국 육군의 독립 부대명에는 절대로 들어가지 않게 되었다. 14연대는 당연히 없어졌고, 일부가 반란에 가담한 4연대는 20연대(현 제20기갑여단)로 재편되었다. 대한민국 해군 역시 함번 및 중대급 이상 육상 부대번호에 4를 넣지 않으나, 이는 여순 사건과 별개로 한국전쟁 당시 함번이 4인 함정들이 우연히 좋지 않은 사건을 겪거나 격침되는 일이 잦아, 미신에 민감한 뱃사람들의 특성상 사기에 영향을 크게 주기 때문에 생긴 방침이다.
이 사건의 여파로 6연대는 3차에 걸쳐서 일부 반란을 일으켰고 이들은 지리적인 영향상, 이현상과 14연대가 있는 지리산 대신 태백산맥이나 팔공산으로 들어가서 남도부 부대에 합류하게 된다. 결국 6연대도 없어졌다.
리영희 씨는 한국해양대학교 재학 시절에 이 사건을 목격한 적이 있다. 항해 실습을 하던 선박이 진압군 병력을 수송하던 선박이어서 여수항까지 따라가게 되었다고 한다.
여수에서 한센병 환자들을 위한 치료 시설인 애양원을 운영하던 손양원 목사의 두 아들도 이 사건때 좌익계열 학생들에 의해 살해되었다.[64] 손양원 목사는 자신의 두 아들을 살해한 학생인 안재선 씨를 용서하고 양자로 삼았다(!!) 이런 손양원 목사의 모습은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별명을 낳기도 했다. 하지만 한국전쟁이 터지고 손 목사는 피난하지 못한 한센병 환자들을 지키기 위해 교회에 남아 있다가 여수 지역으로 온 인민군에게 총살당하고 말았다.
사건이 처음 발생했을 당시 14연대의 주둔지는 현재의 여수시 신월동 일대로 한국화약 여수공장이 있다.
대한민국 해병대가 창설된 계기가 된 사건이다. 해상에 인접한 특성상, 진압에 조선해안경비대도 동원되었는데, 함 승조원을 해군 육전대처럼 차출하거나 국방경비대를 태워 상륙시켜 운용하는 등엔 행정 절차 등이 복잡하고 육해군간 연계력이 떨어져, 해군이 직접 운용할 수 있는 지상전 및 상륙전 병력의 필요성이 제기되자 손원일 제독이 이를 관철시켜 창설한 것이다. 해군 역시 진압 과정에서 기관총으로 화력지원하던 경비정 승조원 1명이 육상의 반란군이 쏜 총에 맞아 사망, 전사자를 냈다.
육군 간호장교단이 최초로 활약한 사건이다. 그래서 크림전쟁과 함께 간호사 면허 국가고시 단골출제로 간호학도들에게 익숙하다.
박정희도 이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다. 그는 집안 어른들이 정해 준 김호남과 결혼하여 박재옥이라는 딸도 있었지만, 그 사실을 숨기고 이현란과 결혼을 전제로 동거하고 있었다. 이현란은 함경남도 원산시 출신이지만 공산당이 싫어서 월남했는데, 이 사건으로 인해 박정희에게 실망하게 되었고, 결국 두 남녀는 결혼하지 못하고 끝내 헤어졌다. 이후 이현란은 한국전쟁 때 대구에서 아주 우연히 마주친 것을 제외하면 박정희와는 다시는 만나지 않았고, 일반인(고등학교 교사)과 결혼해서 평범한 가정을 이루며 살다가 사망했다. 한편 박정희는 여순사건 이후 대대적으로 벌어진 숙군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여 살아남는다.
2016년 4월 30일 여순 사건 당시 세계적인 종군 기자로 명성을 떨친 칼 마이던스가 남긴 사진이 재미사학자 유광언 씨의 기증으로 공개되었다. 보러 가기
2018년 사건 발생 70주년을 기념하여 여러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특히 사건의 진상규명과 희생자 명예회복을 주장하는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는 운동도 시작됐다. # 하지만 경찰 유족은 민간인 희생자 유족들의 초청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희생자 합동 추념식에 참여하지 않고 있다. # 다만 이는 해당 운동의 주체가 여순사건을 반란이라 부르길 거부하고 사건의 실상을 4.3 진압에 대한 거부로 한정하는 등 논란을 부를 만한 주장을 하고 있음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2019년에 71년만에 불법연행 등 관련해서 재심을 확정했다.재심결정 환영…피해자 유족 “특별법이 숙원”
그리고, 2020년 1월 20일 오후 2시 19분, 민간인 희생자에 대한 무죄가 72년 만에 확정되었다. ##
무죄판결을 내린 광주지법 순천지원 김정아 부장판사는 "사법부 구성원으로서 이번 판결의 집행이 위법한 공권력에 의한 것이었음을 밝히며 깊이 사과드립니다" 며 김 부장판사를 비롯한 배석 판사와 검사, 법원 직원들은 모두 일어나 장환봉씨 유가족에게 고개 숙여 사과했다. 또한 "그는 피해자의 명예회복을 위해 걸어야 하는 길이 아직도 멀고도 험난하다"며 "여순사건 희생자들과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이 사건과 같이 고단한 절차를 더는 밟지 않도록 특별법이 제정되어 구제받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바랐다.
순천의 각 오래된 초등학교들에는 국민학교 시절 학교 운동장에서 학살이 일어나 단체로 생매장했었다는 괴담이 존재한다.
10. 문화에서
소설 태백산맥 초반부에서는 무장봉기를 일으킨 14연대 군인들과 빨치산들이 벌교를 점령한다. 이들은 지주, 경찰, 우익인사 등을 살해하고 공산주의 정책을 실시하나 얼마 되지 않아 국군의 반격으로 산으로 돌아가게 된다. 소설을 기반으로 한 태백산맥(영화)에도 그런 장면들이 나온다.
드라마 영웅시대에서 정주영을 모티브로 한 캐릭터 천태산(차인표가 분함)이 이 사건 때문에 죽을 뻔한다. 앙심을 품은 누군가가 그를 부역자라며 고발한 것. 그 때문에 그는 총살대 앞에까지 서지만 겨우 신분이 확인되어 목숨을 건진다.
손양원 목사를 다룬 다큐멘터리와 영화에서도 이 사건이 나온다.
북한의 시인 조기천은 이 사건을 주제로 1948년 「항쟁의 려수」라는 서정시를 썼고, 민병균의 서사시 「분노의 서」에서도 이 사건을 언급한다. 물론 북한문학인만큼 대한민국에 대한 비난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한 찬양 일색이다. 하지만 사건 이후 거의 최초로 시도된 문학적 형상화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전라남도 구례군에는
산동애가라는 노래가 전해지고 있는데,
이 노래가 본 사건과 연관이 있다.
구례군 산동면에 살고 있는
19살 소녀 백순례는
둘째 오빠가 사건 관련자로 처형되고
셋째 오빠까지 처형될 위기에 처하자
스스로 자처하여
오빠 대신 경찰에 끌려가 살해됐다.
경찰에 의해 처형장으로 끌려가면서
그녀가 마지막으로 불렀던 노래가
이것이었다고 한다.
열아홉 꽃봉오리 피워보지 못하고
까마귀 우는 곳을 병든 다리 절어절어
다리머리 들어오는 원한의 넋이 되어
노고단 골짝에서 이름 없이 스러졌네
(살기 좋은 산동마을 인심도 좋아
열아홉 꽃봉오리 피워보지 못하고
까마귀 우는 곳에 나는 간다
노고단 화엄사 종소리야
너만은 너만은 영원토록 울어다오)
잘 있거라 산동아 산을 안고 나는 간다
산수유 꽃잎마다 설운정을 맺어놓고
회오리 찬바람에 부모 효성 다 못하고
갈 길마다 눈물 지며 꽃처럼 떨어져서
노고단 골짝에서 이름 없이 스러졌네
남인수 -여수야화1949년 [Nam In Soo.南仁樹.본명 강문수] - YouTube
당시 대표적인 유명가수 중 하나인
남인수는
사건이 일어난 지 1년도 되지 않은
1949년에
여수야화라는 곡을 발표하였다.
이 곡은 김초향 작사에 이봉룡 작곡으로
여순사건으로 인해
집과 가족을 잃은 한 가정의 모습을
구슬프게 담아내고 있다.
그러나 이승만 정부는
이를 용납하지 않고
곡이 발표된지 한달만에
이 곡을 금지곡으로 만들어버렸다.
사실상 대한민국 역사상
공식기록으로 확인되는
최초의 금지곡이라 한다.
다만 60년 이후 금지곡 목록에서는
확인되지 않아
제2공화국 출범이후에
금지곡에서 풀린 걸로 추정된다.
무너진 여수항에 우는 물새야
우리집 선돌아범 어데로 갔나요
창없는 빈집속에 달빛이 새여들면
철없는 새끼들은 웃고만 있네
가슴을 파고드는 저녁바람아
북청간 딸 소식을 전해주려므나
에미는 이모양이 되였다마는
우리 딸 살림살인 흐벅지드냐
왜놈이 물러갈땐 조용하드니
오늘에 식구끼리 싸움은 왜 하나요
의견이 안맞으면 따지고 살지
우리집 태운사람 얼골 좀 보자
노래 여수블루스도
여순사건의 아픔을 담고 있는 노래다.
하지만 이 노래는 당시 대놓고
불러지지 못하고
오로지 구전으로만 전해져 왔다.
여순사건 전후로 작곡된 건 분명하지만
그외 곡의 정보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작사가 강석오에
작곡가 임종하라는 설이 있지만
확실치는 않은 듯하다.
구전가요 여수블루스에 얽힌 일화
여수는 항구였다 아
철썩철썩 파도치는 꽃피는 항구
안개속의 기적소리 옛님을 싣고
어디로 흘러가나 어디로 흘러가나
재만 남은 이 거리에
부슬부슬 궂은 비만 내리네
여수는 항구였다 아
마도로스 꿈을 꾸는 남쪽의 항구
어-버이 혼이 우는 빈터에 서서
옛날을 불러 봐도 옛날을 불러 봐도
재만 남은 이 거리에
부슬부슬 궂은 비만 내리네
11. 참고 문헌
사건 당시 구례에 있어서 사건을 직접 목격하였고, 이후 6.25 때 첩보공작 요원으로 인민군에 침투하여 사건의 진실에 많이 접근한 이기봉이 쓴 책도 참조하면 좋다.
<실록 제14연대(독서신문사)>
여순 사건이 언급되는 책은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이책이 언급되어 있다.
<빨치산의 진실(도서출판 다나, 1992년)>
중반까지는 주로 역사와 이론이며, 후반부에는 빨치산의 기원인 14연대 사건을 다루고 있다. 하지만 작가 이기봉의 성향이 워낙 오른쪽에 치우쳐 있어 걸러 들을 필요가 있다. 박헌영이 김인회를 시켜 여순사건을 일으켰다는 점은 여러 설중 하나로 받아 들이면 되지만, 좌익세력의 양민학살을 과대포장하여 다루고 규모가 훨씬 컸던 우익에 의한 학살은 아예 빼버린 점이 아쉽다.
<여순병란(청산, 1994년)>
남부군의 작가 이태의 여수 14연대 반란 사건을 조명한 실록 소설. 작가가 남부군으로 편입했을 무렵, 반란의 지휘부들을 이현상, 박종하을 제외하고는 전사하여 보지 못했지만, 중간 지휘자였던 하사관들이나 말단 병사들이 많이 남아 있어 이들을 통해 반란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여러 사료와 이태가 반란군에게 직접 들은 증언을 취합하여 썼다. 위의 책인 빨치산의 진실에서는 전혀 안 나오는 우익에 의한 여수 주민들에 대한 학살을 자세히 다루고 있으며, 빨치산/반란군의 갖은 병크들도 잘 다루고 있다. 빨치산의 진실은 거의 군경쪽 자료만은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여순병란은 군경쪽 자료는 물론 반란군 당사자의 증언까지 합쳐져 있기 때문에 사건이 상당히 입체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얘를들어 15연대장 최남근이 김지회를 만나 반란을 모의했던 것을, 박종하가 생존해 있을 때 이태에게, "15연대 전체를 반란으로 이끌 수도 있었는데 당시 반란군이 김지회의 성화 때문에 급하게 이동중이라 김지회와 만나기 위해 이동에만 2일 걸려 타이밍이 안맞아 반란으로 연결되지 못해 안타까웠다"는 증언을 채록해 놨다. 군경쪽에서는 절대 알 수 없고, 반란의 당사자만 알 수 있던 비화.
12. 관련 동영상
[전국시대] 68년전 그날, 여순사건 (16/10/19/수) - YouTube
https://www.youtube.com/watch?v=AjCgRQJulv8&t=123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