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국지 [列國誌] 756
■ 3부 일통 천하 (79)
제12권 사라지는 영웅들
제 10장 가는 사람 오는 사람 (1)
연역왕(燕易王)의 총애를 한몸에 받은 소진(蘇秦)은 도덕적인 면에서 문제가 없지 않았다.
연역왕의 어머니, 즉 연문공의 미망인인 문부인(文夫人)과 간통하기에 이른 것이다.
문부인이 먼저 인물이 잘난 소진(蘇秦)을 유혹한 것인지, 아니면 말재간이 좋은 소진 쪽에서
문부인을 유혹한 것인지는 사서(史書)에 정확히 나와 있지 않다.
하지만 간통 자체는 확실한 것 같다.
사마천은 <사기(史記)>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소진(蘇秦), 연문공의 부인과 남몰래 간통(姦通)하다.또 이런 구절도 있다.
연역왕(燕易王), 이 사실을 알고도 소진을 계속 우대하였다.
소진(蘇秦)이 연역왕으로부터 얼마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었는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소진(蘇秦)은 그것만으로는 불안했을 것이다.
언제 문부인과의 일로 탄핵을 받을지 몰랐다.
그는 연(燕)나라에서의 지위를 더욱 확고히 하기 위해 또 다른 술수를 펼쳤다.
당시 연나라 재상은 자지(子之)라는 사람이었는데, 소진(蘇秦)은 자신의 딸을 자지에게
시집보낸 것이었다.이로써 소진(蘇秦)은 연역왕으로부터는 두터운 신임을, 그 어머니인
문부인과는 정부(情夫)관계를, 재상인 자지(子之)와는 장인 사위의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그런데도 소진(蘇秦)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이번에는 낙양에 있는 자신의 동생인
소대(蘇代)와 소여(蘇厲)를 연나라로 불러들여 재상 자지(子之)와 결의형제를 맺게 했다.
그때서야 소진은 어느 정도 마음이 놓였다.
그러나 사람이 행하는 일에 완전함이란 없는 것인가 보다.
연(燕)나라 조정에는 언제부터인지 소진(蘇秦)을 반대하는 세력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들은 당연히 소진과 문부인과의 간통 문제를 거론했다.
- 지금 항간에서는 한결같이 우리나라 왕실을 손가락질하며 조롱하고 있습니다.
- 소진(蘇秦)은 원래 미천한 출신으로서 오른쪽과 왼쪽을 수시로 왔다갔다 하는 반복무상
(反覆無常)한 자입니다. 이대로 내버려두면 연(燕)나라는 소진의 세상이 되고 말 것입니다.
하루에도 여러 차례씩 이런 상소가 올라왔다.이것을 소진(蘇秦)이 모를 리 없었다.
더욱이 그는 겁이 많고 조심스러운 성격이었다.'지금은 비록 왕이 그러한 상소를 모두
물리치고 있기는 하나 언제 마음이 바뀌어 하루아침에 나를 내칠지 장담할 수 없다.'
그는 차후의 일을 궁리하기 시작했다.또 한 가지 묘책을 짜내었다.'제(齊)나라로 가자.'
어느 날, 그는 연역왕(燕易王)을 찾아가 아뢰었다.
"지리상으로 보건대 연(燕)나라와 제(齊)나라는 결코 공존할 수 없습니다.
지금부터라도 제나라를 억압하는 계책을 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연역왕(燕易王)으로서는 느닷없는 말이었다.
"제(齊)나라는 크고 강한데, 우리가 계책을 쓴들 어찌 그들을 억압할 수 있겠소?"
"반간지계(反間之計)를 쓰면 제나라를 제압할 수 있습니다.""좀더 상세히 말해보시오."
"우선 신이 연(燕)나라에서 큰 죄를 지은 것처럼 가장하고 제나라로 망명합니다.
그러면 제왕(齊王)은 신을 환영하고 중책을 맡길 것입니다."
"그때부터 신은 제나라가 발전하지 못하도록 정책을 펴 제나라의 국력을 소모하겠습니다.
이렇게만 되면 어찌 제(齊)나라 땅이 연(燕)나라에 흡수되지 않겠습니까?"
"선생께서 과인을 위해 직접 간자(間者)가 되겠다는 뜻이오?""그러합니다. 지난날 월왕 구천은
서시(西施)를 오나라에 간자로 넣어 오(吳)나라를 멸망시킨 바 있습니다.
신 또한 연(燕)나라의 패업을 위해 스스로 간자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간자(間者)는 세작(細作)과는 다르다.정보 수집이 주임무인 것이 세작이라면,
내부에 침투하여 적을 교란시키는 임무를 맡은 것이 간자다. 요즘으로 치면 스파이다.
소진의 속마음을 알 리 없는 연역왕(燕易王)은 몸을 일으켜 절을 올릴 정도로 감격했다.
"선생께서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우리 연(燕)나라가 천하 패업을 이루는 것은 시간 문제이겠지요."
- 합종가에서 간자(間者)로!소진(蘇秦)은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여러 차례 변신을 꾀해 왔는데,
이때 또 한 번 획기적인 변신을 꾀한 것이다.소진의 죄를 만들기는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 반역(反逆).연역왕은 소진에게 이런 죄목으로 수배령을 내렸다.
물론 그 전에 소진(蘇秦)은 국경 밖으로 탈출하여 제(齊)나라로 들어갔다.
임치성에 당도한 소진(蘇秦)은 그 길로 제선왕을 찾아가 망명을 신청했다.
제선왕(齊宣王)은 소진에게 호감을 품고 있었다. 그의 망명을 환영하고 그에게 객경(客卿)의
지위를 내렸다.그런데 제(齊)나라에 와서의 소진의 행동에 다소 납득할 수 없는 점이 있다.
애초 그는 연(燕)나라에서의 불안한 처지 때문에 연역왕을 속이고 거짓으로 반간지계를
상언(上言)했었다.
한데 제(齊)나라로 망명해와서는 진짜로 연나라를 위해 간자(間者)의 임무를 수행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냥 제(齊)나라 망명으로 만족해도 될 소진(蘇秦)이 어째서 위험을 무릅쓰고
정말로 간자의 임무를 수행한 것일까?정확한 것은 알 수 없으나 아마도 소진은
언젠가는 연(燕)나라로 돌아가려고 마음먹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 제(齊)나라 망명은 일시적일 뿐이다. 내가 뿌리를 내릴 곳은 연(燕)나라다.
처음으로 자신을 알아준 연나라에 대해 애정이 깊었을 것은 당연하다.
동생인 소대(蘇代)와 소여(蘇厲)를 불러들인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다.
그런데 반대파에 의한 공격을 받자 일단 그들의 예봉(銳鋒)을 피하고 아울러 더 큰 공을 세워
연(燕)나라에서의 확고한 지위를 확보하려 했던 것이 소진의 본심이었다고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다.
어쨌거나 제나라 객경(客卿)이 된 소진은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제(齊)나라를 피폐케 하는 정책만
골라 진언(眞言)하기 시작했다.
757편에 계속
열국지 [列國誌] 757
■ 3부 일통 천하 (80)
제12권 사라지는 영웅들
제 10장 가는 사람 오는 사람 (2)
제(齊)나라를 피폐케 하는 정책만 골라 진언하기 시작한 소진(蘇秦)은 제선왕(齊宣王)의
신임을 확보한 뒤에 매일 사냥과 음악만 권했다.
아울러 나라 재정을 튼튼히 해야 한다면서 백성들로부터 거두어들이는 세금을 대폭 올렸다.
또한 아름다운 미녀들을 뽑아 늘 궁실에서 춤을 추게 하기도 했다.- 제(齊)나라는 태평성대입니다.
이런 달콤한 말에 제선왕(齊宣王)은 마냥 흐뭇해했다.앞서 얘기했듯이 제선왕은 문사(文士)들을
무척 좋아했다. 이름난 학자들을 대거 초빙해 직문(稷門) 근처에 머물게 함으로써
'직하학사(稷下學士)'라는 말을 탄생시켰을 정도다.부국강병책만을 요구하는 위혜왕(魏惠王)에게
실망하여 위나라를 떠난 맹자(孟子)가 제나라로 온 것은 바로 이 무렵이었다.
제선왕(齊宣王)은 맹자를 정책 고문역에 올렸다. 맹자(孟子)는 공자를 계승하는 유학의 대가로서
자긍심이 강한 사람이었다.세 치 혀로 출세하려는 유세가(游說家)를 천성적으로 싫어했다.
그래서 틈만 나면 간언을 했다.- 인(仁)을 해치는 자를 적(賊)이라 하고, 의(義)를 해치는 자를
잔(殘)이라 하며, 잔적(殘賊)한 자를 '일부(一夫)'라 합니다. 소진(蘇秦)은 인과 의를 해치는 자입니다.
가까이 하지 마십시오.당시 제(齊)나라 재상은 전영이었다.
전영(田嬰)은 제위왕의 막내아들이자 제선왕의 이복동생이다.
그는 후일 전국시대 사군(四君) 중 하나인 맹상군(孟嘗君)의 아버지이기도 한다.
전영(田嬰) 또한 소진이 간자인 것을 눈치채지는 못했지만 그의 행동에서 수상쩍은 점을 자주 보았다.
수시로 제선왕을 찾아가 간(諫)했다.- 소진(蘇秦)은 제나라를 망치려고 하는 듯합니다.
잡아서 연(燕)나라로 돌려보내십시오.하지만 소진에게 반해 있는 제선왕(齊宣王)은 두 사람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먼저 포기한 것은 맹자였다.
군주에게 잘못이 있으면 간(諫)하고, 이를 반복해도 듣지 않으면 떠난다.
민본정치를 주창하는 맹자에게 한 군주에 대한 충성심은 그다지 의미가 없었다.
자신의 정치 사상이 반영되지 않는 나라에서는 굳이 머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끝내 맹자(孟子)는 제나라를 포기하고 임치성을 떠났다.
소진(蘇秦)으로서는 강력한 경쟁자 하나가 없어진 셈이었다.그는 더욱 제선왕의 총애를 받았다.
그런 중에 제위왕과 더불어 제나라를 전국시대 강대국 중 하나로 끌어올린 명군 제선왕(齊宣王)이
세상을 떠났다.재위 19년, BC 324년(진혜문왕 14년)의 일이었다.
제선왕의 뒤를 이어 아들 지(地)가 왕위에 올랐다.그가 제민왕(齊湣王)이다.
소진(蘇秦)은 뛰어난 언변과 술책으로 새 왕인 제민왕의 마음도 사로잡았다.
그는 제민왕(齊湣王)을 찾아가 말했다.- 효(孝)를 행하여 백성들을 다스리는 근본으로 삼으십시오.
소진(蘇秦)이 새삼스레 효를 강조하는 까닭은 다름이 아니었다.
제선왕의 장례를 사치스럽게 치름으로써 제(齊)나라 왕실의 재정을 바닥나게 하려는 의도에서 였다.
제민왕(齊湣王)은 소진의 진언을 그대로 수용했다.제선왕에 대한 장례식은 어마어마했다.
산을 깎고 묘를 닦는 데만도 수만 명이 동원되었다.장례가 끝나자 이번에는 궁실을 높게 지었다.
정원도 넓혀서 제(齊)나라 왕실은 하루도 공사가 그칠 날이 없었다.
그러나 그동안 이 모든 게 소진의 치밀한 반간지계(反間之計)라는 것을 눈치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이제 되었다."진나라의 객경 장의(張儀)는 소진이 제나라를 나와 연(燕)나라를 향해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는 쾌재를 불렀다.그는 즉각 다음 행동으로 옮겼다.진혜문왕을 찾아가 아뢰었다.
"육국의 합종(合縱) 동맹이 바야흐로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 위(魏)나라에 일곱 고을을
돌려줄 필요가 없습니다.""종약(縱約)이 무너지기 시작했으니 오히려 땅을 돌려주어
위(魏)나라를 확실하게 우리 편으로 끌어들여야 하지 않겠소?"
"신이 이미 생각해놓은 바가 있습니다. 왕께서는 조금도 염려하지 마십시오."
진혜문왕(秦惠文王)은 영문도 알지 못하면서 장의(張儀)가 시키는 대로 위(魏)나라에 사람을 보내어
땅을 돌려주겠다는 약속을 일방적으로 파기했다.
위양왕(魏襄王)은 진나라의 이 같은 처사에 대해 크게 분노했다.- 어찌하여 이럴 수가 있는가?
사자를 보내어 따졌다.그러나 진혜문왕(秦惠文王)은 이미 장의로부터 다음 수순을 귀띔받았다.
대답 대신 공자 화(華)를 대장으로 삼고 장의(張儀)를 부장으로 임명하여 군사를 일으켰다.
진군(秦軍)은 물밀듯 국경을 넘어 위(魏)나라로 쳐들어갔다.진나라 군대는 과연 강했다.
단숨에 위나라 포양(蒲陽) 땅을 포위하여 함락시켰다.포양은 지금의 산서성 습현 일대다.
758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