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봉지의 행복
“여보, 좀 와 봐요. 눈이 와요. 함박눈이!”
거실 커튼을 열던 아내가 나를 환하게 불렀다. 그러잖아도 원고 첫 문장을 놓고 썼다 지우기를 반복하던 참에 반가운 소리였다. “눈이 온다고?” 벌떡 일어나 창가로 달려갔다. 펑펑 눈이 쏟아지고 있었다. 이런 눈이 얼마만인가. 몇 년을 눈 없는 겨울을 보내면서 눈 한 번 흐벅지게 쏟아지는 걸 봤으면 하는 아쉬움이 늘 남곤 했었다. 눈발은 더 소담스러워졌고 세차 졌다. 순식간에 아파트 옥외 주차장 주차선을 덮더니 하얀 눈밭을 이루었다. 세상이 온통 하얘져 갔다. 활강하는 눈발 사이로 잊고 지낸 기억들이, 가슴 깊숙이 묻어 둔 추억들이, 너울너울 춤을 춘다.
인생은 ‘만남’과 ‘추억’이라고 했다. 함박눈이 쏟아지는 벌판 길을 걷던 젊은 날의 기억이 아련하게 피어나고, 서울 막내아들 집을 찾아오신 아버지 모습이 생시 같이 떠올랐다. 큰 눈이 예보된 날, 검은 모자와 코트 위로 하얗게 내린 눈을 이고 아버지가 웃으시며 들어오셨다. 놀란 아내가 옷솔을 들고 다가가자 아버지는 품 안에서 두툼한 종이 봉지를 꺼내셨다. “너 좋아하지? 식기 전에 먹어라.” 가슴에 품고 온 건 붕어빵. 열 마리가 들어있는 종이 봉지였다. “이 눈 속에 사 오셨어요? 어머, 따뜻해요.” 그날 붕어빵 맛이 유난히 맛있었다는 아내. 그 모습을 보신 아버지는 이후 집에 오실 때마다 며느리 간식으로 붕어빵 한 봉지를 사들고 오셨다.
우리 가족들은 겨울이 시작되면 붕어빵 가게를 곧잘 들락거렸다. 나도 아내도 아들도 딸도 밖에 나갔다 올 때는 곧잘 손에 붕어빵 봉지를 들고 왔다. 빈손으로 집에 들어오면 “붕어빵 장사 안 하나?” 섭섭한 표정을 지었다. 나 역시 버스 정거장 길목의 붕어빵 가게를 습관적으로 지나치질 못했다. 우리 집 성향을 아는 주인아주머니는 재고를 주지 않고 늘 새 붕어를 구워 주었다. 찬 바람에 몸을 웅크리고 서서 새 빵이 다 구워질 때까지 굽는 과정을 지켜보며 추위를 참았다. 주인아주머니는 두 개로 짝을 이룬 주물로 된 붕어의 배를 열고 익숙하게 밀가루 반죽을 찰랑하게 부었다. 반쯤 익혔다가 팥소를 짜넣는 손놀림이 비호같이 빨랐다. 까만 주물 붕어를 뱅뱅 뒤집을 때마다 붕어가 익어갔다. 마침내 철거덕 소리를 내며 붕어 틀이 배를 열면 노릇노릇 구워진 붕어빵이 한 마리식 튀어나왔다. 그 모습을 보는 입안에 군침이 돌았다.
천 원짜리 한두 장이면 따끈한 붕어빵 한 봉지를 살 수 있었고, 온 식구가 한두 개씩 나눠먹으며 행복해하던 때가 있었다. 겨울철 간식의 대명사로, 때로는 끼니로 때워지던 붕어빵. 그런데 요즘은 물가고에 덩달아 몸값이 뛰면서 붕어빵을 ‘제철 생선’으로 부르기도 한단다. 겨울철 생선인 도미, 명태가 울다 갈 일이다. 부풀 대로 부풀어 오른 물가와 팍팍해진 생활 형편 탓인지 거리에 흔했던 붕어빵 가게마저 귀해졌다. 그래서일까 붕어빵 파는 곳 일대를 ‘붕세권’이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졌다.
붕어빵의 원조는 풀빵이다. 밀가루 반죽을 주원료로 만들어낸 풀빵은 가난한 사람들의 끼니와 허기를 달래주던 서민들의 먹거리였다. TV에서 추운 겨울날의 고단한 서민의 삶을 전할 땐 풀빵 장수가 단골처럼 등장했다. 빵을 굽는 틀의 모양새에 따라 빵 모양이 바뀌면서 이름도 다양하게 진화되었다. 이름도 서러운 풀빵에서 국화빵이 되고, 붕어빵이 되고, 잉어빵이 되었다. 한때는 오방빵(왕풀빵)으로 불린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일본의 옛 화폐에서 따온 일본식 이름이라고 은근히 구박을 받기도 하다가 슬그머니 시장에서 사라졌다.
붕어빵을 팔아 아들 딸 공부시키고 시집 장가보냈다는 억척 인생이 소개되고, 붕어빵으로 부자가 되었다는 사람들 이야기가 심심찮게 전해질 때마다 그들의 인간 승리는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가로 들렸다. 그러면서 ‘붕어빵에는 붕어가 없다’던가. 변화무쌍한 것이 세상이다. 한때는 가난을 상징한 민초들의 거리 간식이었던 붕어빵이 이젠 찾아다녀야 할 정도로 귀하신 몸이 되었다. 그러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추억의 붕어빵’으로 간직되었다. 영동 무배추 밭에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쭉쭉빵빵 마천루가 들어서고, 온 나라의 온갖 먹을 것들이 지천에 깔려 있는 요즘, 입맛도 풍경도 모두가 달라졌다. 매콤 달콤 새콤한 맛들의 조합을 따지고 눈으로 보는 비주얼과 음식의 궁합까지 보는 미식의 세상에서 붕어빵이 설 자리는 점점 좁아지고 있다.
눈발은 여전히 소담스럽게 내리고 있다. 온 세상이 하얗게 흰옷을 입었다. 눈밭을 바라보던 아내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왜 눈을 보니까 붕어빵 생각이 나지?”
“붕어빵?”
“아버님이 살아계셨으면 사 오실 텐데. 그때 맛이 입에 감기네.”
우리는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버지 기일이 사흘 후라는 것까지. 그리고 붕어빵을 떠올린 것이다.
눈 내리는 광장을 보면서 아버지를 만나고 붕어빵을 만났다. 온 식구가 둘러앉아 아버지가 사 오신 붕어빵 봉지를 쭉 찢고 각자 한 마리씩 붕어를 물어뜯던 기억이 따듯하게 살아났다. 붕어빵을 반으로 척 갈랐을 때 팥소에서 모락모락 이는 김은 얼마나 오감을 자극했던가. 잊었던 붕어빵 식감이 제대로 살아났다. 나는 말없이 바지를 꿰고 오리털 점퍼를 걸쳤다.
“어디 가요?”
“붕어빵 사러. 갑자기 먹고 싶어 지네.”
“가게 어딨 는지 알아요?”
“엊그제 시장통에서 본 게 있어. 트럭에서 뭔가 굽더라고.”
그 이름이 무엇이든, 생김새가 어떻든, 눈 오는 겨울엔 붕어빵 만한 간식이 어디 있겠나. 그것이 호도과자라도 좋다. 속에 든 것이 팥이면 어떻고, 슈크림이면 어떻고, 바닐라, 초코면 어때? 붕어빵은 다 맛있을 테니까. 나는 붕어빵을 사려고 아파트에 쌓인 눈밭을 나섰다. 뽀드득뽀드득 눈 밟히는 소리가 청아하게 들렸다.
-소설가 / daumcafe 이관순의 손편지-
첫댓글 성남님
요즘 붕어빵 잉어빵이 인기랍니다
올해도 지나가다 줄서 있는 모습에
차를 세우고 싶었는데
줄을 설 자신이 없어 그냥 왔지만
친구가 사왔더라구요
따끈할때 먹으니
얼마나 맛있는지
추억의 맛이 살아 나더군요
아삭하게 씹히는 맛
최고였어요
옛날 국화빵은
말랑말랑 했는데
요즘 붕어빵은 아삭~ ㅎ
성남님 고맙습니다
행복하게 읽고 갑니다
잉어,붕어빵이 값이 많이 올랐네요
곡식값이 오르니 덩달아 오르니
우리동네 2개 천원 줄서서 기다려야
예전엔 계란빵이 반짝 유행하더니
요즘은 안보이네요
새해도 건강하세요
@김성남 님
두개 천원이라구요?
흐미ᆢ
진짜루 비싸요
그래도
줄서서 사먹으니
다행입니다
벌어 먹고 사는 기쁨이 넘치겠어요
@윤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