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악산 산행기(2004. 3. 12.)
3월 12일, 전 대우건설 사장 남모씨의 한강투신으로 대통령 탄핵 열기가 더욱 뜨거워졌다는 둥 뒤숭숭한 시국에도 불구하고 15명의 17악우들은 예정대로 아침 7시 정각 압구정동을 출발, 모악산 산행 길에 나섰다.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오더라도 우리는 오늘 사과나무를 심는다?'
대양주를 섭렵하느라 몇 달만에 나타난 임종수동문 내외와 반가운 재회를 하자 갑자기 분위기가 달라진다. '손큰' 김경자 여사가 줄줄이 먹을 것을 돌리니 입이 즐겁고, '못 말리는 입' 임종수 동문이 슬슬 웃기기 시작하니 귀가 즐겁지 아니한가. 그 동안 입이 근지러워 어떻게 참았는지 모르겠다. 시국은 시국이고 버스 안은 어느새 老童들의 농담 따먹기로 시끌벅적.
임종수: 한국에 오니 영 볼 게 없어.
박정수: 호주가 경치가 좋던 모양이지?
임종수: 응, 여자들이 전부 젖가슴은 3분의 2 쯤 내놓고 엉덩이는 3분의 1쯤 내놓고 다니더라구. 눈이 호강했지.
임동문은 호주 내륙에 있는 에어즈록이란 바위산에 갔을 때 4인 1실 텐트에서 잔 일이 있었단다. 가이드가 룸메이트를 정하라기에 나이가 좀 들어 보이는 캐나다 부부를 찍어 한 텐트를 쓰겠느냐고 물어보려는 참인데 영어로 어떻게 물어야 할지 고민.
임종수: 한참 뇌를 굴려 생각해낸 게 'Can we sleep together?'였지. 그런데 어쩐지 좀 이상하잖아. 그때 상대쪽 부인이 마치 우리 의중을 알아챈 듯이 다가와서는 'Would you mind if we share the tent?' 그러더라구. 바로 그거였지. 망신할뻔 했어. 미리 말하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이었냐 말이야.
김숭자: 그때 'Yes.' 하면 안 되는 거 알지요? 'Never, of course not.' 그래야 된다구요.
(김여사의 유창한 본토발음에 모두 경탄.)
현해수 : 중학교(경북사대 부중)동창회 갔다가 여학생동창들을 만났는데 모두 할머니들 같더라구. 거기 비하면 숭자동문은 소녀야 소녀.
(숭자여사께 하는 아첨인지 장변호사님 들으라고 한 소린지..)
김숭자: 아빠, 들었죠? 우리 동창들이 모두 할머니같이 보였대요.
구총무는 4백만 화소 짜리 디카를 50만원 주고 새로 장만했다며 자랑. 일제 Konica인데 얼마나 튼튼한지 탱크 같단다. 바위에 집어던져도 안 깨진다며 버스에서 벌써 시험 셔터를 눌러댄다. 김명용 동문, 그리고 또 다른 동문 한명과 같이 샀다는데 세명이 가게 주인 얼을 빼 값을 후려쳤다고 의기양양이다. 뒷자리에서 들리는 소리. '순진하기는... 가게 주인이 너희들 가고 난 뒤 오늘 어찌 이리 재수가 좋으냐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을 거다.'
10시 금산사 도착. 오늘 산행은 금산사에서 시작해 전주 쪽으로 하산한다. 모악산은 계룡산 신도안 다음으로 유사종교가 많은 곳으로 증산교 시조인 강증산, 동학교주인 전봉준 장군 등이 다 모악산이 키워낸 인물이라는 회장님의 설명이 있었다. 또 사람 키보다 큰 산죽(일명 조릿대)이 있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금산사는 국보인 미륵전을 포함, 보물도 10점이나 있는 대찰로 후백제의 견훤이 아들 신검에 의해 석달동안 유폐 당했던 슬픈 역사를 지닌 곳이기도 하다. 보물들을 구경하고 기념사진을 찍느라 10시 30분에야 금산사를 출발했다.
며칠전 중부지방을 뒤덮은 1백년만의 폭설 뉴스에 스패츠까지 준비했는데 눈은 눈을 씻고 봐도 안 보인다. 등산로 입구에서부터 고글을 쓰신 장변호사님께 눈도 없는데 웬 고글이냐고 물으니 '폼 한번 잡아봤다'고 한다.
완연한 봄날씨에 산수유가 노란 안개 같은 꽃을 피우고 발치에는 온갖 풀들이 파릇파릇, 나물이라도 캐고싶은 충동에 자꾸 걸음이 느려진다.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벌써 땀이 난다. 대원들이 길가에 멈춰서서 줄줄이 웃도리를 벗기 시작하니,
현해수: 여기가 여관이냐, 왜 옷들을 벗냐?
김명용: 여관가면 옷 벗냐?
어쨌거나 옷을 벗고 가뿐해진 일행은 키 큰 산죽사이로 난 가파른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김회장이 후미를 임대장에게 맡기고 모처럼 선두에 섰다. 누구도 절대로 회장을 앞지르면 안 된다고 하자 김숭자여사, '위반하면 오프사이드!'라고 해서 모두를 웃겼다.
오르막길이 가파른데도 김여사와 장변호사님 오늘 성적이 좋으시다. 장변호사님이 꿈에 산에 간 얘기를 하신다. 김여사도 산에 가는 꿈을 꾸었는데 혼자 뒤쳐져 낭패했다는 얘기를 버스 안에서 했었다. 사이좋은 부부는 꿈도 같은 시간에 같은 주제로 꾸시나보다. 부럽다.
장변호사: 꿈에 산을 오르는데 뒤에서 큰 해일이 밀려오는 기라요. 정신없이 산 위로 도망을 가는데 발이 물에 빠져 철벅철벅했어요.
임종수: 그건 오줌싸는 꿈인데요. (선배님한테 무엄하게도---)
임한석: 임종수 해몽의 진위를 숭자씨가 밝혀야지.
김여사: 아침에 시간이 없어서 확인 못했어요.
임한석: 그걸 꼭 눈으로 확인해야 아나?
이렇게 웃기는 데다 김경자여사가 또 맛있는 곶감을 한 개씩 돌리니 힘든 줄도 모르고 어느새 정상이 눈앞이다. 12시 20분, 정상 직전에서 하산하던 다른 등산객들이 놀라운 뉴스를 전한다. 국회에서 노대통령 탄핵안이 가결됐다는 것이다. 결국...그렇게 되고 말았구나. 이후의 산행은 그야말로 탄핵 산행이었다. 탄핵 동조파와 비판파로 나뉘어 설왕설래했지만 모두들 침울한 기색이었다.
12시 30분, 763m 정상에 올랐다. 멀리 드넓은 징게맹기(김제만경)평야와 전주시가가 눈앞에 펼쳐진다. 그러나 군부대 시설과 KBS송신탑으로 뒤덮여 있는 어수선한 정상의 모습은 우리의 기분과 비슷했다. 금산사에 걸려있던 현수막 생각이 난다. 'KBS는 모악산 정상을 등산객에게 돌려주라!'
오랜만에 임종수동문댁에서 클램차우더를 내놓으셨다. 차우더를 맛있게 끓인 김경자여사의 솜씨와 정성, 그리고 그 무거운 것을 산꼭대기까지 지고 온 임동문의 노고에 감사하면서 일행은 점심을 맛있게 먹었다. 자원봉사 품목은 클램차우더에 그치지 않았다. 김숭자동문댁에서는 항상 그래왔듯이 맛있는 된장국과 독특한 향기를 자랑하는 커피를 갖고 오셨다. 두분의 김여사께 일행은 무한히 감사할 따름이다.
이제, 증명사진 찍을 차례. 사진사(일명 찍새) 구총무의 지시에 따라 일행은 바위 위에 여기저기 걸터앉았는데, 셔터를 눌리기 직전 맨 가장자리에 앉은 최영철 동문이 자리가 불안정해 기우뚱했던지 '어이쿠, 떨어질 뻔했다' 하자 김영길동문, 구총무한테 '떨어질 때 찍어라' 한다. 양처럼 순한 김동문이 그런 말하는 걸 보면 탄핵 충격이 크긴 컸던 모양이다.
하산 길은 평탄했지만 봄기운에 녹은 땅이 질척거려 등산화가 모두 엉망이 됐다. 개울가에서 잠시 쉬는데 김명용동문이 열심히 등산화를 물에 씻는다. 등산화 지저분하게 해 갖고 집에 가면 어부인한테 혼나는 모양이다. 인격은 정말 겉모습만 보고는 모를 일이다.
2시 30분 하산완료. 목욕을 하고 전주의 40년 전통 비빔밥집 성미당으로 갔다. 주류파는 육회 안주로 이종범동문이 갖고 온 산송이를 마시고 비주류파는 이종범동문의 또 다른 하사품인 고급 포도주를 마셨다. 역시 술이 들어가니 기분이 좀 풀렸는지 다시 농담이 오간다. 식성이 좋아 보이는 몇몇 동문들이 의외로 육회를 열심히 안 먹자 김회장이 '전주에서 육회를 안 먹으면 큰 결례'라며 육회예찬론을 폈다. 회장님은 처가가 광주인데 처가에 갈 때마다 장모님이 육회를 한 접시씩 안겨주셨단다. 회장님이 육회를 워낙 좋아해서이기도 하지만 더욱 깊은 뜻이 있지 않았겠느냐는 것이 주변의 해석. 거기에 관해서는 다음 기회에 차여사한테 물어보기로 하자.
식탁에 오른 호남지방 특유의 묵은 김치를 맛보면서, 김명용 동문이 미국에 있는 시집간 딸한테 김치를 보내는데 자꾸 부풀어 터질까봐 고민이라고 하니, 종갓집 김치개발의 주역인 이종범 동문이 포장김치의 공중폭발을 예방하는 수산화칼슘(CACO3?)의 비밀을 공개하며 김치강연이 이어졌다.
출발담당 현해수 동문, 오늘은 진짜 출발독촉을 안 한다. 탄핵장세에도 불구하고 삼성전자가 9천원밖에 안 떨어져 기분 좋다고 목욕탕에서 산수유 한 팩씩 돌렸다더니 집에 안 가실 모양이다.
5시 30분, 기다리다 못한 대원들이 모두 자진해서 자리에서 일어나 버스에 올랐다. 우리부부는 다음날 아침 서울에서 내려올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전주에서 묵기로 하고 일행과 아쉬운 작별을 했다. 해남의 보해양조 매실농장에 매화를 보러가기로 돼 있었다. 귀경 차안에서 벌어질 흥미율율한 2막 3장이 궁금하기도 하고 종산 임무를 끝까지 완수하지 못함이 죄송스럽기도 하나 어지러운 세상 다 잊고 매향에나 취해볼 일이다. (노순옥 기)
참가자 (15명): 구명회, 김명용, 김숭자부부, 김영길, 김종남, 노창송, 박정수부부, 이종범, 임종수부부, 임한석, 최영철, 현해수.
첫댓글 맥박이 135이상으로 올라감을 느끼는 즐거움,정상에 오른 쾌감,하산후의 목욕,그리고 회식의 즐거움 마지막으로 산행기를 기다리다 읽는 기쁨. 산행 五樂입니다.
동감입니다. 그런데 예쁜 노여사님, 혹시 outdoor jacket 에서 모자가 없어지지는 않으셨는지요? 그러시다면 그 모자는 제가 보관하고 있읍니다.
현선생님, 김여사님, 과분한 칭찬에 늘 감사합니다. 그런데 김여사님, 모자는 제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아마 다른 분이 잃어버리신 것 같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