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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예종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최규진
복된 종의 자세(눅12:35-40)-2017.1.15
제가 지금 말씀드리는 것이 무엇인지 상상해 보십시오. 다른 주인이나 상인들로부터 쉽게 돈을 주고 구입할 수 있습니다(창17:12). 해외에서 수입해 올 수 있습니다(레25:44). 상태와 성별, 연령과 조건에 따라서 다른 상품들처럼 가격이 다양합니다. 부모에 따라서 자녀도 승계됩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들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동물이나 가축이 아닙니다. 사람입니다. 그런데 종입니다. 어떤 사람도 종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에서는 종이라는 말을 아주 흔하게 사용하지만 큰 거부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오히려 종이라는 단어를 영광스럽게 여깁니다. 심지어 목회자들을 주의 종이라 호칭하는데 이는 하대하는 말이 아니라 존경스러운 의미를 내포합니다. 나 같은 죄인이 하나님의 종이 되었다는 것이 보통의 은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종은 아주 기분 나쁘게 들리지만, 주안에서 종이 되었다는 것은 대단한 기쁨이요 자랑인 것입니다. 종은 주인이 누구냐에 따라서 신분이 달라집니다. 사람의 종이 되고, 사물의 종이 되며, 사단의 종이 되면 사망의 종노릇을 하게 되지만, 그리스도의 종이 되면 생명의 전령이 되어지기 때문입니다.
종은 우리의 정서에 맞는 말로 하면 일군이요, 머슴이요, 사환이며 심부름꾼입니다. 듣기 싫은 소리로 하면 노예요, 고상한 단어로 하면 청지기입니다(42절).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어법상의 문제일 뿐 우리 모두는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종은 종의 원리가 있고, 종의 모습이 있으며, 종의 자세와 의무가 있습니다. 종이 무엇하는 사람인가하면 주인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입니다. 종은 자기를 위해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직 주인의 편의를 위해서 존재하는 사람이요, 주인을 기쁘게 섬기기 위해 사는 사람입니다.
오늘날 이곳저곳에 종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국가를 위해 백성을 섬기는 종이 필요하고, 가정이나 교회를 위해 섬기고 봉사하며 충성하고 헌신하는 종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종은 없고 주인만 있습니다. 다들 주인처럼 행세하고 섬김만 받으려고 합니다. 그것은 어디든지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도 예외는 아닙니다. 예수 정신이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복음의 핵심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종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빌립보서2:7절에 보면,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라고 말씀하십니다. 근본 하나님과 본체이신 주님께서 사람의 형상을 입으신 것이 종의 형체입니다.
예수님은 종의 모델이셨습니다. 이보다 더 완전한 종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시다니요. 그분은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하나님께 복종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을 이사야 선지자는 53장 2-9절 말씀에서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는 연한 순같고 마른땅에서 나온 줄기 같았으며, 고운 모양이나 풍채도 없고,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전혀 보이지 않는 모습이라고 말입니다. 전혀 자신을 내세우거나 드러내지도 아니하시고 멸시천대를 다 받으시고, 질고와 고난을 당하시며, 찔리고 상하고 맞으며 말없이 순종하시는 모습이었다고 말입니다. 한마디로 완전한 종이셨습니다. 그것도 철저하게 버림당하신 하나님의 종이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종의 모습은 아주 간결합니다. 하지만 가장 완벽한 종의 스타일을 알려주고 계십니다. 35절을 보십시다. 3가지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허리에 띠를 띠고 있는 모습이요, 등불을 켜고 있는 모습이며, 서서 있는 모습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할 때 모습을 연상해 주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 당장이라도 누군가를 섬겨주어야 할 모습으로 보이지 않습니까? 금방이라도 내게 달려와서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할 것 같은 자세는 아닙니까? 혹은 고급 레스토랑에서 서비스를 제공하는 웨이터의 모습은 아닙니까? 고급 호텔 정문에서 짐을 받아주고 문을 열어주는 도어맨의 모습은 아닌지요?
바로 이 모습이 이 땅에 우리를 섬기러 오신 주님의 모습이었습니다. 우리를 대신하여 제사를 드려주던 구약 제사장의 모습입니다. 초조하게 신랑을 기다리던 지혜로운 다섯 처녀의 모습입니다. 타국을 떠나는 주인으로부터 장사하라는 명령을 받고 두 달란트와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의 모습입니다. 교회의 순결함을 파괴하는 악한 세력들로부터 예루살렘 성문을 주야로 지키는 파숫군의 모습입니다. 오늘날도 묵묵히 맡은 바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몸부림을 치며 기도하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이들은 모두 자기 주인을 기쁘게 하는 종의 모습들입니다. 모든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 된 사람들입니다.
본문에서 주인은 ‘그 종들에게 복이 있으리로다’(37,38,43절)라고 연이어 축복합니다. 때문에 종의 복은 주인에게 달려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종은 자기의 행실에 따라 자기의 주인으로부터 복을 받을 수도 있고, 저주를 받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요. 그렇다면 복을 받을 수 있는 종은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까요? 35절을 근거로 말씀드리겠습니다.
(1) 허리에 띠를 띠고 있어야 합니다(충성)
종은 허리에 띠를 띠고 있어야 합니다. 이는 자기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입니다. 충성을 다하는 모습입니다. 대개 중근동지방 사람들이 입는 옷은 길고 통이 넓습니다. 그래서 띠를 띠지 않고는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옛날 우리네 선비들의 모습은 도포자락을 휘날리며 신선노름이나 하던 복장이지 일하는 자세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종은 허리에 띠를 띠어야 합니다. 일을 하려면 바지춤을 치켜세우고, 허리춤을 움켜잡고 허리끈을 동여야 합니다. 때문에 일상복을 입고 일하려면 반드시 허리에 띠를 띠어야 합니다.
사람의 힘은 허리에서 나옵니다. 허리에 띠를 띠라고 하는 말씀은 일할 준비를 하라는 것입니다. 분명히 성경에도 성막에 조각목의 띠를 만들어 두르고(출26:26), 제사장 의복에도 에봇 위에 가는 베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로 수를 놓아 띠를 만들어 띠라고 말씀하십니다(출28:8). 당시에 군인들이 띠를 띠었습니다(삼상18:4). 구약의 엘리야는 가죽 띠를 띠었고(왕하1:8), 신약의 세례요한도 허리에 가죽 띠를 띠었습니다(막1:6). 예레미야 선지자는 말씀의 띠와 베띠를 허리에 띠었으며(렘13:1-2), 여호와는 능력의 띠를 띠셨습니다(시93:1).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세마포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셨습니다(계15:6). 또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의로운 종 엘리아김을 불러서 “네 옷을 그에게 입히며 네 띠를 그에게 띠워 힘있게 하고 네 정권을 그의 손에 맡기리니 그가 예루살렘 거민과 유다집의 아비가 될 것이며”(사22:21). 그리고 에베소서6장13절은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에 흉배를 붙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우리도 허리띠를 졸라매야 합니다. 허리띠를 졸라매는 것은 각오를 단단히 하고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허리띠가 풀리는 것은 긴장감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허리띠를 졸라매되 진리의 허리띠를 띠어야 합니다. 진리의 허리띠는 예수 그리스도의 띠입니다.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절대적으로 믿는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띠를 띠어야 합니다. 성도는 이 띠가 끊어지거나 풀어지면 아무런 능력이 없습니다. 마치 씨름선수가 샅바가 풀리면 힘을 쓰지 못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들릴라의 유혹에 힘을 잃어버린 삼손처럼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정주부가 주방에서 음식을 만들기 위해 앞치마를 두르고 사랑의 띠를 띠어야 합니다. 공부하는 학생이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지혜의 띠를 띠어야 합니다. 자기를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기 위해 군인은 군장의 띠를 띠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종 된 우리도 믿음의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한 사명의 띠를 띠어야 합니다. 혹시 우리 가운데 이 띠가 준비되지 않았다면 지금이라도 띠를 준비해야 합니다. 혹시 이 띠가 끊어진 자가 있다면 수리해야 합니다. 이 띠가 너무 오래되어 썩은 동아줄같이 힘이 없다면 새것으로 교체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 그동안 잃어버린 띠, 풀려진 띠, 끊어진 띠를 다시한번 회복해야 합니다. 허리에 띠를 단단히 동여 매야 합니다. 성경에 주어진 믿음의 띠(엡6:16), 진리의 띠(엡6:14), 마음의 띠(벧전1:13)를 튼튼히 고정하여 매시기 바랍니다. 허리에 단단히 동여매시기 바랍니다. 혹시 교회와 가정에서 사랑의 띠가 풀렸다면 다시 동여매시기 바랍니다. 혹시 내 영혼의 기도 띠가 끊어졌거나, 느슨해졌다면 다시한번 동여매시기 바랍니다. 일하는 종에게 허리띠는 생명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종의 마땅한 본분이요 자세이기 때문입니다. 주인은 그런 종을 축복합니다.
(2) 등불을 켜고 있어야 합니다(성실)
등불을 켜고 있다는 말씀은 항상 깨어 있는 자세를 말합니다. 이는 성실함의 척도가 됩니다. 종은 자기 주인이 혼인집에서 언제 돌아올지 모르기 때문에 항상 등불을 켜고 기다려야 합니다. 팔레스틴의 결혼 풍속은 우리와는 다릅니다. 그들은 주로 밤에 연회를 엽니다. 그리고 어지간한 가정은 축하연을 일주일 정도합니다. 그러므로 초대받은 하객이 언제 돌아올지 모릅니다. 때문에 종은 주인이 돌아올 때까지 등불을 켜고 기다려야 합니다. 마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처럼 말입니다. 혹은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처럼 말입니다. 주인이 돌아올 시간이 이경일는지 삼경일는지 모르지만 기다려야 합니다.
밤을 나누는 방식은 로마식과 유대식이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로마식은 밤을 4경으로 나눕니다. 1경은 6-9시, 2경은 9-12시, 3경은 12-3시, 4경은 3-6시로 말입니다. 그러나 유대는 3경으로 나눕니다. 1경은 6-10시, 2경은 10-2시, 3경은 2-4시로 말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이경과 삼경은 로마식인지 유대식인지 명확하지 않습니다. 어떤 방식이든지 이경과 삼경은 깊은 밤인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종은 주인이 돌아올 때까지 등불을 켜고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종의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경과 삼경의 시간이 인간에게 가장 피곤한 시간이요, 졸리는 시간입니다. 한밤중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인이 언제 와서 문을 열어 달라고 할지 모릅니다. 주인이 와서 문을 두드리면 금방 열어주기 위해 종은 졸거나 자지 말고 기다려야 합니다. 등불을 켜고 말입니다. 항상 긴장을 늦추지 말고 깨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군대의 생명은 보초에 있습니다. 보초가 얼마나 중요한지 맥아더 장군의 말을 들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전쟁에서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해도 경계에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전쟁의 실패는 능력에 달려 있지만, 경계는 마음에 달려 있다는 말일 것입니다.
군대식 용어로 말하면 종은 경계병이요, 초병입니다. 성경은 파숫군이라고 말합니다. 파숫군의 중요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려주는 말씀이 에스겔서입니다. 에스겔서33장 6절을 보면, 만일에 파숫군이 칼이 임함을 보고도 나팔을 불지 아니하여 그중에 한 사람이 칼에 제함을 당하면 파숫군에게서 죄의 값을 찾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만큼 중요한 것이 파숫군이요, 경계병이며, 보초병입니다. 이들은 모두 자기를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해야 할 종들입니다. 종은 주인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존재합니다.
낮에는 곤고하게 일하던 종이 밤을 세우며 주인을 기다린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복을 받을 종은 인내하면서 자기 주인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는 졸음을 이겨내야 합니다. 언제 올지 모르는 주인을 등불을 켜고 기다려야 합니다. ‘낮에나 밤에나 눈물 머금고 오 주님 언제나 오시렵니까?’는 가사처럼 말입니다. 주인은 종의 스케줄에 매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종은 주인이 언제 올는지 전혀 모릅니다. 그런데 요즘 이상하게도 주인의 시간표를 안다고 큰 소리를 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른바 시한부 종말론 자들 말입니다.
복을 받을 종은 아무리 힘들어도 인내할 줄 압니다. 그래서 종은 시계를 보지 않습니다. 종은 퇴근시간이 정해지지 않습니다. 종은 하루 일과가 시작도 없고 끝도 없습니다. 주인이 잠을 드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잠자리에 듭니다. 그리고 주인보다 먼저 일어나 하루를 시작합니다. 지혜롭고 복을 받을 종은 손에 등불을 켜고 기름이 떨어지지 않았는지 수시로 간검을 합니다. 이것이 종의 성실함입니다. 오늘날은 어디에서도 종의 신실함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회사에서도 종의 역할은 하지 않고 주인행세만 합니다.
교회에서도 개성과 평등만 주장하며 주인행세만 하려듭니다. 어디서나 주장과 권리는 있는데 의무가 없습니다. 한마디로 주인은 있는데 종이 없다는 말입니다. 눈에 보이는 곳에서는 잘하는 척하는데,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엉망진창입니다. 성실함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성실함은 보든지 안보든지 한결같습니다. 낮이나 밤이나 동일합니다. 성실은 종의 생명과 같은 것입니다. 성실하지 못한 종은 잔머리를 굴립니다. 요령꾼이 됩니다. 요즘 직장이나 사업장이나 성실한 종의 모습을 찾기가 힘듭니다. 교회에서도 성실한 종이 그립습니다.
등불을 켜고 있는 종의 모습은 성실함을 상징합니다. 옛날 한국의 여인들은 이런 모습으로 살았습니다. 바깥에 나가서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남편을 기다리면서 졸리는 눈을 비벼가며 호롱불 밑에서 바느질을 하곤 했습니다. 아마도 성경적인 모습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러나 시대가 많이 바뀌었습니다. 늦은 밤 늦게까지 일하고 돌아오는 남편은 마치 고양이처럼 사뿐이 들어오고, 아내는 집에 없거나 당당하게 잠을 자는 일이 우리 사회의 현실인 것도 사실입니다. 그리 바람직한 모습은 아닙니다. 물론 지금 우리에게 종의 모습을 강요하는 것은 아닙니다. 최소한 종에게는 그런 성실한 자세가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성도는 예수님을 기다리는 신부처럼 믿음의 등불이 켜졌는지 항상 간검해야 합니다. 내 믿음의 등잔에 불을 켜놓아야 합니다. 혹시 성령의 등불이 꺼져 있지는 않은지요? 기도의 등불이 꺼져 있는 것은 아닌지요? 예배의 등불이 자꾸만 꺼져가는 것은 아닌지요? 제단에 불이 꺼지면 안되는 것처럼 믿음의 성전에 불이 꺼지면 안되는 것입니다. 지금 점검해 보십시오. 지금 내 믿음의 등불이 꺼졌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깨닫지 못하는 것은 내 영혼이 병들거나 죽었다는 증거입니다. 지금 내 심령의 성전에 불이 붙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인이 돌아와서 등불이 켜져 있는 종의 모습을 보시고 반드시 복을 주실 것입니다.
(3) 서 있어야 합니다(섬김)
서 있는 모습은 힘듭니다. 하지만 서 있는 모습은 부지런히 섬기는 종의 모습을 상징합니다. 낮에는 골몰하게 일하고 밤에는 피곤하여 눕고 싶지만 서 있으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러나 피곤해도 참아야 합니다. 주인은 피곤한 종의 모습을 누구보다 잘 아십니다. 사람이 게으르기 시작하면 한이 없습니다. “게으른 자는 부리는 사람에게 마치 이에 초같고 눈에 연기 같으니라”(잠10:26). “부지런한 자의 손은 사람을 다스리게 되어도 게으른 자는 부림을 받느니라”(잠12:24). 이른바 게으른 종은 주인의 책망과 저주를 받으나, 부지런한 종은 칭찬과 사랑과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일하는 사람이 누워서 일하지 않습니다. 주로 서서 일합니다. 서라는 말은 일하는 자세를 의미합니다. 즉, 부지런히 섬기는 자세입니다. 특히 주님의 종은 서서 일해야 합니다. 항상 앉아서 섬김을 받으려고 하지 말고, 서서 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복된 종의 자세입니다. 히브리서 10장 11절을 보면, “제사장이 매일 서서 섬기며....”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사장은 주님의 종입니다. 그러기에 제사를 드릴 때에 매일 서서 드려야 합니다. 그들이 서서 일하기 때문에 성소나 지성소, 성막 안에는 의자가 없습니다. 앉을 수가 없습니다. 늘 서서 일해야 합니다. 진설병도 서서 먹어야 합니다.
어찌 게으르게 앉아서 축복을 기대하십니까? 어찌 교만하게 앉아서 섬김을 받으려고 하십니까? 종은 이런 자세를 가지면 안됩니다. 서 있는 종은 부지런히 섬기는 모습입니다. 이런 종은 주인으로부터 복을 받습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한마디로 복된 종입니다. 영광스러운 종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종은 두 종류가 있습니다. 임시종과 종신종입니다. 임시종은 잠간 쓰임 받다가 버림을 당하는 종입니다. 그들은 악하고 게으르고 무익하다고 책망과 저주를 받습니다. 하지만 종신종은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주님으로부터 쓰임을 받고 칭찬과 상급을 받습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뜻은 예수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종은 먼저 예수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은 그분을 구주로 모셔드리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지만(롬10:10) 천국복음을 분명히 믿어야 천국백성이 되고, 천국백성이 되어야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천국복음은 예수님을 내 심령 성전의 주인으로 모셔드리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의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성전의 머리가 되시고 나는 그분의 몸이 되어, 그분이 주시는 마음과 생각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른바 예수님을 머리로 하여 주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모셔드리며, 왕이신 주님의 통치를 받고 주님이 내 인생의 전부임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복된 종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으로부터 한 시대에 부름 받은 종들이 되어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리시고, 상급을 받는 복된 종들이 되시기를 주님으로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