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도에서
방학이면 대학 동기들이 1박2일로 모인다. 총각시절 모임을 시작해 신혼 이후 자녀들을 대동했다가 이제 내외만 참석한다. 그간 나는 그럴 사정으로 몇 해 동안 혼자 나가 회원들에게 면목이 없었다. 지난해 여름은 밀양댐 아래 펜션에서 하룻밤 묵으면서 천렵도 하고 이튿날은 표충사 경내를 둘러보고 얼음골로 이동해 케이블카를 타고 창밖으로 운무가 짙은 영남알프스를 보았다.
올 겨울은 경북 청도에 숙소를 정했다. 현 시국과 정서가 맞지 않긴 하다만 새마을운동 발상지 기념관이 있는 마을이었다. 그곳의 시대별 가옥 체험관에서 우리들이 한겨울 추위 속에 하룻밤을 지내기로 예약되었다. 참석 회원은 울산 셋, 통영 하나, 함양, 하나, 대구 하나, 창원 둘이다. 나는 시내 초등학교 관리자로 재직하는 동기와 함께 두 가족이 같은 차에 동승해 길을 나섰다.
밀양을 지나다가 엊그제 일어난 안타까운 화재 참사 현장 부근을 둘러 북으로 올라갔다. 경남과 경북 경계 유천을 거치니 새마을운동 발상지인 청도 신기였다. 경부선 철로와 국도가 나란히 지나는 협곡이었다. 근래는 대구부산 고속도로까지 생겼다. 주변 산천은 내가 젊은 날 밀양에서 초등교사로 재직하면서 경산의 야간강좌 대학을 다닐 때 열차나 버스로 오르내려 익숙한 풍광이다.
신기마을 뒤 볕바른 산기슭에 마련된 숙소에 여장을 풀었다. 초가동, 슬레이트동, 기와동 가운데 기와동 두 곳을 예약하였다. 울산에서 온 한 가족과 함께 마을 입구 새마을 식당에서 미나리전과 버섯전으로 곡차를 들며 나머지 친구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이어 울산에서 두 가족이 합류하고 함양과 대구에서도 속속 도착했다. 통영의 친구는 사정이 있어 불참이라고 미리 연락이 왔다.
날이 저물기 전 기념관을 둘러보았다. 안내 도우미 얘기로는 외국인들도 가끔 찾는다고 했다. 새마을운동은 내 초등학교 고학년 때 점화되었다. 재임 중 치적에 논란이 있지만 노인층들에게 콘크리트 지지를 받는 박정희 대통령이다. 박 대통령이 칠십 년대 초 부산을 내려왔다가 경부선 철로변 신기마을 주민들이 수해 복구 사업을 펼치는 모습에 감동해 전용열차를 세워 격려했단다.
이층까지 전시관을 살펴보고 마을 앞에 있는 경부선 폐역 신거역으로 갔다. 폐선 곁으로 새로운 선로가 깔렸다. 간이역 신거역은 세월 따라 폐역이 되었다. 폐역에는 대통령 전용열차 모형에다가 봉황 무늬가 새겨진 의자와 회의실도 꾸며져 있었다. 일곱 기족은 차량에 분승해 숙소에서 멀지 않은 한재마을로 이동했다. 겨울철 비닐하우스에 미나리를 길러 삼겹살구이로 알려진 곳이다.
다른 밑반찬 없이 새파랗고 보드라운 미나리와 삼겹살만 나오는 전문식당이었다. 여성과 운전자를 제외한 친구들은 맑은 술이 여러 순배 오갔다. 한 친구만 맥주를 비웠다. 한겨울에 파릇한 미나리를 시식한 식도락을 즐겼다. 저녁 식후 용암 온천과 가까운 프로방스 빛 축제를 둘러보았다. 추위 속에도 주말을 맞아 찾아온 입장객들이 많았다. 한적한 시골이 이국적인 풍경으로 보였다.
숙소로 복귀하면서 청도읍에서 야식과 이튿날 아침거리 시장을 보았다. 숙소로 돌아와 회무 인수인계와 오는 여름 모임 일자와 장소를 정했다. 여성들이 머무는 숙소에서 나와 이웃한 남성 숙소에서 야간 전투를 벌였다. 나는 청도 막걸리로, 한 친구는 맥주로, 나머지는 소주를 들면서 주제가 뒤섞인 난상토론을 펼쳤다. 한 둘씩 떨어져 나가 잠들고 내가 마지막으로 뒷정리를 끝냈다.
새벽잠을 깬 나는 밥솥에 전원을 넣고 숙소 뒤 산마루까지 산책을 다녀왔다. 콩나물굴국을 끓여 속을 풀고 전유성 코미디극장으로 이동했다. 지방에서 드문 무대와 객석을 갖춘 한 시간 넘게 진행된 웃음 건강 센터 철가방 극장이었다. 일행 가운데 한 친구는 즉석에서 지명되어 무대로 올라 연기자보다 더 웃겨 관객과 출연진을 웃겼다. 상수월마을 향토식당에서 점심을 들고 헤어졌다. 18.0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