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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30일 [연중 제13주일]
마르코 5,21-43
사랑받지 못하면 죽고 싶게 진화했다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12년 동안 하혈하는 여인과 열두 살 야이로의 딸을 살려주십니다.
‘12’라는 숫자는 ‘백성’이란 뜻입니다.
열두 지파의 이스라엘 백성과 12사도 위에 세워진
하느님 나라, 곧 교회의 상징입니다.
그 안에 들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로부터 생명을 받아야 합니다.
자녀들은 부모가 자신들의 생명의 샘임을 믿고 부모에게서 에너지를 받습니다.
정말 큰 문제는 부모의 사랑을 받지 않으면 죽고 싶은 마음이 생겨 자살 시도하면서도 창조자를 찾지 않고 자신은 진화한 존재라고 믿는 것입니다.
장동선 뇌과학자가 ‘세바시 15분’에 나와 ‘마음의 구조신호에 귀 기울여 주세요’란 제목으로
강연하였습니다.
그는 청소년 때 두 번, 어른이 되어서 한 번, 자살 시도를 세 번이나 하였다고 합니다.
어머니가 어렸을 때 “우리 함께 죽자!”란 소리를 많이 하였던 것이 상처가 되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마치 독이 든 캡슐을 삼켜서 그 독이 계속 퍼져나가는 느낌이라고 합니다.
아내도 우울증을 앓고 있었는데 그것도 모를 정도로 자신의 큰 아픔에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의 강의는 모두 ‘진화론’적입니다.
뇌를 진화론적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진화론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진화론의 목적은 ‘생존’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고등동물로 올라올수록 ‘의존’해야 하게 태어납니다.
인간은 인간답게 살려면 적어도 20년은 부모와 함께 삽니다.
이것이 없으면 죽고 싶은 마음에 사로잡힙니다. 고장이 나고 정말 죽습니다.
해리 할로우 박사는 사랑을 증명하고 싶어서 격리 원숭이 실험을 하였습니다.
격리 원숭이는 어미를 선택할 때 젖병이 있는 차가운 철사로 만든 어미 인형이 아니라 젖병이 없어도 따듯한 감촉이 있는 수건으로 감싸인 인형을 어미로 믿었습니다.
영장류는 생존하기 위해 먹어야 하는 젖보다 어미의 사랑을 더 그리워합니다.
반면 모기나 박테리아와 같은 것들은 부모의 사랑이 필요 없습니다.
관계 맺을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생존을 위해서는 독자적으로 관계 맺을 필요가 없는 동물들이 더 유리합니다.
인간은 사라져도 모기나 바퀴벌레는 남을 것입니다.
만약 인간이 무언가를 창조할 때면 그 창조에 에너지가 많이 들어간 만큼 그 창조된 것을 위해
더 큰 에너지를 소비합니다.
제가 컴퓨터가 고장 나 강론 원고를 날려버리면
조금 마음이 아플 것입니다.
그러나 박사 논문이 제출 직전에 다 날아가면 죽을 지경이 됩니다.
그것을 지키기 위해 목숨이라도 겁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박테리아보다는 인간이 더 만들기 어렵습니다. 하느님은 당신 모습을 닮은 인간을 위해 목숨이라도 내어놓으십니다.
이것을 아는 게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있다면 어린이처럼 자신을 창조한 이에게서 에너지를 얻습니다.
진화론자들은 삶의 에너지를 자기 스스로 생성할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그렇게 진화하는 게 이치에 맞기 때문입니다. 창조론자들은 창조자에게서 에너지를 얻습니다.
자동차나 스마트폰이 그것을 만든 인간에게서 ‘당연하게’ 에너지를 얻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야이로나 하혈병 걸렸던 여인이 예수님께 빠져나가는 생명을 청했던 이유가
이것입니다.
만든 이로부터 에너지를 청하지 않으면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기도로서 그리스도의 피를 받지 않는 이들은 이미 그분을 창조자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 됩니다.
배우 최강희 씨는 낮은 자존감으로 밥도 사람들과 함께 먹을 수 없었습니다.
외적으로 보이는 천사 이미지와 저녁에는 술과 담배를 사서 먹고 마시며 자신의 처지를 잊으려 하는 이중성에 죽을 것 같은 고통을 느꼈습니다.
모태 신앙인이었지만, 진정으로 기도한 적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살려주세요. 도와주세요!”라고 기도 드렸습니다.
이때 하느님께서 사랑하신다는 느낌을 받고는
술·담배를 끊게 되었습니다.
이 순간 비로소 참 신앙인이 된 것입니다. 하느님을 창조자로 인정함으로써.
저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동네에 살아서 압니다.
우리에게서는 에너지가 생성되지 않습니다. 에너지는 창조된 이에게서 받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코드를 꽂아야 합니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저는 매일 세 시간 정도는 성체조배를 하려고 합니다.
이것을 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것을 압니다. 방법은 없습니다.
애인 만날 때 방법이 중요한가요, 아니면 만나는 거 자체가 중요한가요?
오늘 복음의 두 의인처럼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라고 믿고 그분 옷자락을 쥐려고 하는 마음으로 그분 곁에 머물면 됩니다.
하느님께 의존하는 것이 구원에 이르는 믿음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6월30일 [연중 제13주일]
교황님께서 좀 더 우리 곁에 머무르시기를 간절히 기도해야겠습니다!
지난 주 제가 좀 바빴습니다.
이리 뛰고 저리 뛰고, 가기로 한 어떤 행사에는 일찌감치 출발했는데도, 극심한 교통 체증으로
시간이 늦어지고, 애를 태우고, 끼니도 제때 못 때운 관계로 밤늦게 집에 돌아와 컵라면에 물을 부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정말 미쳤구나, 미쳤어. 대체 내가 왜 이렇게 피곤하게 살고 있지?
내 또래 다른 영감님들은 저리 세상 편히 지내고 계시는데, 나는 대체 이게 뭔 꼴이람?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러고 있는지?
굳이 안 그래도 때 되면 삼시 세끼 딱딱 밥 나오는데...”
그런데 오늘 교황 주일을 맞아 프란치스코 교황님 말씀과 생애을 묵상하면서 그런 생각 더 이상 하지 말아야겠다는 각오를 하게 되었습니다.
어디 가서 나이 자랑 절대 하지 말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1936년 12월 17일생이시니, 새롭게 정한 우리나라 나이로 따지면 87세+6개월이십니다.
한쪽 폐도 온전치 않은 데다, 무릎까지 문제이니, 고생이 참 많으십니다.
지금 프란치스코 교황님 또래 분들은 안 그런 분들도 많지만, 많은 분들이 요양원에 계시거나,
오늘 내일 하시거나, 그래서 산에 누워 계시나 집에 누워 계시나 별반 차이 없는 분들도 많으십니다.
그런데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보십시오.
그 연세에도 하루 스케줄이 살인적입니다.
매일 수많은 사람들이 교황님을 알현하기 위해 기다립니다.
수많은 회의와 행사가 교황님을 시간대 별로 기다리고 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 마음 속에 들어가보지 않은 관계로 정확한 파악은 안 되지만, 아마도 이분도 여러 이유로 전임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처럼 살아생전 사임을 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 연세에 일어나기도 힘들고, 걷기도 힘들고, 숨쉬기도 힘든 상황이기에, 생각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사임서를 제출하고, 경치 좋고 공기 좋은 카스텔간돌프 교황 전용 별장에서 편히 쉬고 기도하며 여생을 보내고 싶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분위기로서는 그러지 않으실 듯 합니다. 그 이유가 있습니다.
당신께서 시작하신 교회 쇄신과 개혁을 위해, 시노달리타스 작업의 완성을 위해 순교자의 마음으로 불철주야 노력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바오로 사도처럼 이미 달릴 곳을 다 달리신 교황님이시지만, 또 다시 힘을 내서 열심히 달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겪고 있는 이 너무나 사소한 고통 앞에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생각하며
인내심을 가져야겠습니다.
매일 죽을 각오로, 오늘을 마지막으로 여기고, 공동선을 위해, 세상의 복음화를 위해 남아있는 우리의 에너지를 활활 불태워야겠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그간 행보는 언제나 일관된 것이었습니다.
노숙인들, 난민들,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에 대한 각별한 관심을 행동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자국의 이익에만 몰두하지, 약소국들의 딱한 처지를 나몰라라 하는 강대국들의 횡포를 강하게 꾸짖으셨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유달리 꺼려하시고 비판의 날을 세우시는 폐해가 있는데, 그것은 교회 안의 성직자들이 보이고 있는 지나친 성직주의입니다.
성직자는 경영자나 관리자에 앞서 겸손한 봉사자이며, 동시에 양냄새가 물씬 풍기는 목자여야 함을 강조하십니다.
많은 분들이 걱정하고 있습니다.
이천년 교회 역사 안에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대 교황님, 영성가이자 활동가, 개혁가이자 교회 쇄신의 적임자이신 교황님께서 너무 고령이시기에, 그분에게 주어진 개혁과 쇄신의 시간이 얼마나 더 주어질지 걱정입니다.
또한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그 고령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개혁을 위해 힘차게 깃발을 올리셨는데, 측근들이, 그리고 지역 교회들이 너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혜성처럼 우리 앞에 등장하신 뜻밖의 선물이신 프란치스코 교황님께
좀 더 많은 시간을 허락하셔서, 좀 더 우리 곁에 머무르실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해야겠습니다.
그래서 당신께서 계획하신 그 좋은 꿈과 희망 사항들이 하나하나 이루어지기를...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13주일 강론>
(2024. 6. 30.)(마르 5,21-43)
<탈리타 쿰!>
“야이로라는 한 회당장이 와서 예수님을 뵙고 그분 발 앞에 엎드려, ‘제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 하고 간곡히 청하였다(마르 5,22-23).”
“예수님께서 아직 말씀하고 계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는, ‘따님이 죽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스승님을 수고롭게 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말하는 것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마르 5,35-36)”
“안으로 들어가셔서 그들에게, ‘어찌하여 소란을 피우며 울고 있느냐? 저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마르 5,39).”
“그리고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 말씀하셨다. ‘탈리타 쿰!’
이는 번역하면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는 뜻이다.
그러자 소녀가 곧바로 일어서서 걸어 다녔다. 소녀의 나이는 열두 살이었다.
사람들은 몹시 놀라 넋을 잃었다(마르 5,41-42).”
1)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께서 죽은 사람을 살리신 이야기들”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죽은 당사자’가 아니라 ‘죽은 사람의 가족’을 위해서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나인이라는 고을에서 어떤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신 이야기를 보면, 예수님께서는 “그 과부를 가엾게 여기셔서”
그 과부의 아들을 살리셨습니다(루카 7,13).
‘라자로’를 다시 살리신 일도 역시 일차적으로는
마르타와 마리아를 위한 기적이었습니다(요한 11장).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일도, 그 소녀가 아니라 그 소녀의 부모를 위해서 행하신 기적입니다.
<우리는 그 소녀가 예수님을 알고 있었는지,
또 예수님을 믿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이 이야기에서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도 않습니다.>
‘죽은 당사자’가 아니라 ‘죽은 사람의 가족’을 위해서 기적을 일으키셨다는 것은, 죽은 사람을 살리신 기적은 당신이 어떤 분인지를 계시하기 위한 표징이었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 덕분에 다시 살아난 이들은 나중에 다시 죽었습니다.
그래서 그 기적은 그들의 수명을 ‘조금 더’ 연장시켜 주신 일인데, 다시 살아난 사람들이 나중에(종말에) 부활해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지 어떨지는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었다가 예수님 덕분에 다시 살아난 일은, 살아난 것으로 완결된 일이 아니라, 그 사람들에게 새로운 숙제를 주신 일이 됩니다.
그 숙제는 기적을 체험하고 크게 기뻐한 가족들에게도 주어진 숙제입니다.
기적을 통해서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게 되었고, 믿게 되었다면, 그 다음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지, 바로 그 숙제가 주어진 것입니다.
2) 누구에게나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은 큰 슬픔과
큰 고통이기 때문에, 죽은 사람이 예수님 덕분에 살아난 일은 분명히 큰 기쁨인데, 그 사람이 나중에 다시 죽음을 맞이할 때, 이미 한 번 겪었던 큰 슬픔과 큰 고통을 또 겪는 일이 되어버리면, 그러면 죽은 사람을 살리는 일이 꼭 기쁜 일이 되는 것은 아닌 것이 되어버립니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실 때 그런 것을 생각 못하신 것은 아닐 것입니다.
따라서 지상에서의 수명을 조금 더 연장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그 기적을 통해서 미리 보여 주신 ‘하느님 나라에서의 영원한 생명’을 알아보고 믿는 것이 중요한 일이 됩니다.
3) 예수님은 생명의 주님이신 분입니다.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요한 5,2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죽은 이들이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렇게 들은 이들이 살아날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요한 5,25).”
“이 말에 놀라지 마라. 무덤 속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의 목소리를 듣는 때가 온다.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 선을 행한 이들은 부활하여 생명을 얻고 악을 저지른 자들은 부활하여 심판을 받을 것이다(요한 5,28-29).”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지상에서의 수명을 조금 더 연장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이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지상에서 아주 오래 사는 것이 꼭 좋은 일인 것만은 아니고, 반대로 일찍 죽는 것이 꼭 불행한 일인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지상에서의 수명에 집착할 이유가 없습니다.>
4) 예수님은 희망의 주님이신 분입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심정을 생각하면, 그가 처음에 예수님을 찾아올 때에는 ‘실낱같은 희망’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랬는데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는 깊은 절망에 빠졌을 것이고,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라는 예수님 말씀에 또다시 막연하게 희망을 품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딸이 다시 살아났을 때에는 예수님이 ‘생명의 주님’이시고 ‘희망의 주님’이시라고 믿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가 그 믿음과 희망을 끝까지 간직하면서 신앙생활을 충실하게 했다면, 자신이 나중에 생을 마칠 때, 또는 가족 중에 누군가의 죽음을 맞이할 때, 그 믿음과 희망 속에서 흔들림 없이 그 일을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한 말을 종합해서, “예수님은 사랑이신 분이고 구원이신 분”이라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신앙인은 그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섬기면서,
주님과 함께 사는 행복을 ‘지금’ 누리는 사람이고,
또 나중에 하느님 나라에서 누리게 될 영원한 행복을 향해서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