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밤 - 문하 정영인(文霞 鄭永仁) 수필
너른 우리 집 뒤란, 흙담장 뒤에는 자그만 밤나무 숲이 있었다. 알밤이 익는 가을이 되면 새벽녘에
뒤란 안으로 알밤이 떨어져 구르는 소리가 들렸다.“데구루루, 툭툭, …” 새벽 잠결에 그 소리는
단잠을 깨는 참으로 듣기 좋은 소리였다. 어느 작가는 자신이 듣기 좋은 소리는 ‘알밤 구르는 소리,
함석지붕에 쏟아지는 빗방울소리’ 라 했다.
밤은 외톨이 회오리밤, 두 개인 쌍동밤, 세 개인 삼형제밤이 있다. 밤알이 두 개로 쪼개진 쪽밤도
있었다. 어머니는 쪽밤은 형제들 끼리 꼭 나누어 먹어야 한다고 했다. 아마 형제들 끼리 우애를
강조해서 그러셨나 보다.
밤은 범접(犯接)할 수 없는 기품을 지닌 과일이다. 겉은 고슴도치 같은 밤송이가시로 둘러 싸여
있고, 그 안에는 단단한 밤색껍질이 무장을 하고 있다. 그 중간 껍질을 벗기면 얇고 떫은 보늬로
삼중 무장을 하여 자신을 보호하고 있다. 밤은 그 자체가 씨앗이기 때문에 자기 보호 본능이
강하다고 한다. 밤을 제외한 제사상에 오른 대추, 배, 감은 씨가 따로 있다. 마치 조선의 여인네가
정절을 지키기 위해서 치마끈으로 바짝 가슴을 동여매고, 속곳까지 입은 것처럼….
그렇기 때문에 제사상에 오르는 네 가지 과일 중에서 조율이시(棗栗梨柿라 하여 2위를 밤이 차지
하고 있다. 이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1위 대추는 씨가 하나라 군왕을, 2위 밤은 3개라 삼정승을,
3위 배는 씨가 6개라 육조판서를, 4위 감은 씨가 8개라 팔도관찰사를 의미한다고도 한다.
그러던 조율이시가 지금은 제사상에 귤도 수박도 바나나 등도 올라가니 격세지감(隔世之感)이 든다.
과연 글로벌 시대다.
결혼 폐백 드릴 때, 시부모는 새 며느리 치마폭에다 대추와 밤을 한 움큼 집어 던져 준다.
“며느라, 대추 같이 단단한 손자와 밤톨 같이 손주를 많이 낳아라.”
밤 세 개를 먹으면 인삼보다 낫다고 하였다. 젖이 부족한 산모에겐 밤으로 암죽을 쑤어서
아이에게 먹였다. 또 밤은 도토리, 메밀, 칡 등과 같이 대표적인 구황작물(救荒作物)이었다.
내가 태어난 고향 이름은 ‘작은 밤바위, 그 앞 동네는 큰 밤바위였다. 우리 동네는 밤나무와 바위가
많아서 그렇게 불리었다고 한다. 나는 작은 밤바위에서 태어났다. 그것도 우리 집 뒷산 밤나무
숲이 서걱이는 시월에 태어났다.
가을이면 아직도 떨구지 못한 밤 나뭇잎들이 서걱거렸다. 겨울밤이면 화로에다 군밤, 군구고마,
군감자가 화로재를 뚫고 하품하듯이 ‘포옥’거렸다. 긴긴 겨울밤을 화로 옆에서 어머니의 옛날
이야기를 들으면서, 군밤 호호 불면서 구수한 이야기는 깊어만 갔다.
갈수록 구수한 세상은 다 지나가는 것 같다. 구수한 숭늉을 먹어본지 오래다. 군고구마, 군밤
장수도 시나브로 사라져만 간다. 따라서 구수한 인간관계도 몰아치는 디지털 문명 속에서
화롯불처럼 사위어 가고 있다. 풋밤, 날밤, 찐밤, 군밤 먹던 시절!
아직도 내 귀에는 가을바람이 불면 알밤 구르는 소리가가 들린다. 아직도 내 입에는 군밤 먹던
구수한 냄새가 감돈다. 밤맛은 뭐니 뭐니 해도 엄지손톱으로 까먹던 달착지근한 풋밤 맛이
최고인 것 같다. 자꾸만 세상은 아련한 꿈을 잃어버리는 세상으로 변하고 있다. 꿈을 잃어가는
세대라고나 할까?
오늘은 동지섣달, 설한풍(雪寒風)이 부는 긴긴 밤을 TV나 이리저리 돌린다. 화롯불도 없고,
엄마도 없는, 문풍지가 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외로운 방에서 말이다. 그래도 나의 마음속에
남아있는 아련한 추억속의 화롯불의 여신(餘燼)은 구수하고 따듯한 외로움 속으로 빠져들게
한다. 어디선가 뒤란으로 알밤 구르는 소리가 들린다. “툭툭, 데구루루!”
2025년은 뱀띠, 을사년(乙巳年)이다. 뱀처럼 지혜롭고 정갈한 한해가 되었으면 한다.
그저 을씨년스러운 한해가 아니라 구수하게 삶아지고, 군밤처럼 고소한 한해가 되었으면 한다.
에라, 올해는 구수한 숭늉이나 훌훌 마셔볼란다.
길거리에는 아예 기계로 밤을 까주는 밤장사들이 있지만 구수한 군밤, 군고구마 장사는
붕어빵 장사처럼 자꾸만 줄어든다.
밤송이를 우리 가족에 비하면 회오리밤은 자신인 혼자임을, 짝밤은 부부를, 세 쌍동밤은 자식
3형제가 아닌가 한다. 자기 보호 본능이 강한 밤송이는 마치 우리네 가족과 같다. 보호
본능에서 세상으로 여는 것이 아람이다. 아람이 벌면 부모는 자식을 세상으로 내보낼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