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25일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마르코 16,15-18
간절히 기도하면 하느님 뜻을 알 수 있나요?
로버트 기요사키의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 2』에 빌과 애드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마을 촌장이 물을 공급해주는 사람과 계약을 원한다는 공고를 냈습니다.
딱 2명 하고만. 에드가 먼저 땄고, 신이 나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열심히 일하며 두 개의 양동이로 호수에서 물을 날랐습니다.
빌은 한동안 마을을 떠나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에드는 경쟁자가 없어서 더욱 신나게 양동이로 물을 나르며 돈을 벌었습니다.
여러 달이 지난 후 빌은 양동이 두 개 대신 사업 계획을 짜고, 투자가 네 명을 모으고, 일을 할 사장을 구했습니다.
그리고 또 여러 달이 지나고 건설 팀과 함께 마을로 돌아왔습니다.
일 년 동안 빌의 팀은 아주 두꺼운 강철 송수관을 건설해서 마을과 호수를 연결했습니다.
빌은 일을 하건 안 하건 매일 많은 돈을 얻었습니다.
에드는 평생 일만 했습니다.
이야기 끝. 열심히 산다고 다 좋은 걸까요? 더 큰 뜻 안에 머무는 게 더 중요합니다.
오늘은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입니다.
그는 교회를 박해하면서 하느님 뜻을 굳건히 따르고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왜 나를 박해하느냐?”라고 하십니다.
그는 왜 하느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하느님을 박해하고 있었을까요?
하느님 뜻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뜻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끈질기게 기도하면 알 수 있을까요?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가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었을까요? 성경을 읽으면 하느님 뜻을 알 수 있다고도 말합니다.
그러나 바오로가 성경을 읽지 않는 사람이었을까요?
어떤 이들은 마음의 평화가 하느님 뜻을 따르는 증거라고 말합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도 자신이 하느님의 뜻을 따른다는 확신으로 그것에 대해서는 마음이 편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확실히 하느님 뜻을 아는 방법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뜻 안에 머물라고 남겨놓은 흔적들입니다.
해리포터는 학대하는 이모, 삼촌, 사촌 더즐리 가족과 함께 사는 평범한 소년으로 인생을 시작합니다.
그는 자신의 마법적 유산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열한 번째 생일에 해리는 호그와트 마법학교의 사냥터지기인 루베우스 해그리드로부터 자신이 마법사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해그리드는 해리에게 능숙하고 존경받는 마법사였던 그의 부모, 릴리와 제임스 포터에 대해 알려줍니다.
그들은 해리가 아직 아기였을 때 어둠의 마법사 볼드모트에 의해 살해당했습니다.
해리는 이마에 번개 모양의 흉터만 남기고 이 공격에서 살아남았는데, 이는 그를 마법사 세계에서 유명하게 만든 사건이었습니다.
호그와트에서 해리는 호그와트에서 수년 동안 부모를 죽인 볼드모트의 도전과 위험에
직면합니다.
이때 그를 돕는 이들이 나타납니다.
그들은 모두 해리 포터의 부모를 사랑하는 이들이었습니다.
특별히 해리를 싫어하는 듯한 세베루스라는 인물도 있습니다.
사실 그는 해리의 어머니를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볼드모트의 하수인이기는 했지만, 그 사랑이 너무 커서 그녀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고 또 그녀 대신 그녀의 아들인 해피 포터를 지켜주는 이중 첩자였습니다.
그는 볼드모트에게 죽임을 당하면서도 해리 포터를 위하는 따듯함을 보여줍니다.
해리포터는 이들의 희생으로 결국 볼드모트를 물리칩니다.
만약 아이가 늑대와 살면서 열심히 살면 어떻게 될까요? 훌륭한 늑대가 됩니다.
훨씬 중요한 것은 내가 어디에 속해있느냐입니다.
공동체에 내가 살아갈 올바른 뜻이 녹아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남겨놓은 당신 뜻을 알게 만드신 유물은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에서 순교하라고 해서 순교하면 하느님 뜻입니다.
교회에서 순교하지 말라고 해서 순교하지 않으면 그것도 하느님 뜻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교회를 박해함으로써 하느님 뜻에서 멀어졌던 것입니다.
교회가 곧 그리스도이고 교회 안에 있으면 하느님 뜻 안에 있습니다.
교회 밖에 있으면서 아무리 발버둥 쳐도 하느님 뜻을 이어갈 수 없습니다.
해리포터의 부모가 남겨놓은 유산들, 곧 부모의 친구들과 부모를 사랑했던 이들, 그리고 그 부모를 따르는 이들 속에 있으며 결국 부모의 뜻을 실현하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에서는 책도 믿을 수 없고 친구도 믿을 수 없고 행복도 믿을 수 없습니다.
바로 자기 부모를 사랑하는 이들의 공동체만이 그의 길을 밝혀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교회를 박해하는 바오로 사도에게 왜 당신을 박해하느냐고 했던 것을 기억합시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월25일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복음: 마르 4,1-20
강렬한 회심과 대대적인 삶의 전환 그 배경에는 끊임없는 기도와 주님 말씀에 대한 진지한 경청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신앙 여정은 그야말로 파란만장, 산전수전이었습니다.
어떤 연유에서인지 그의 부모는 조국을 떠나 타국에서 살았습니다.
바오로 사도 친히 밝힌 것처럼 그는 소아시아 지역 킬리키아의 타르수스에서 태어났습니다.
오늘날 튀르키에 중남부에 있으며, 지중해에 인접한 천연적 항구 도시로서 오래전부터 상업과 교통의 요충지였습니다.
부모와 함께 고국으로 돌아온 바오로는 어린 시절부터 유다인으로서의 탄탄한 가정 교육과
신앙교육을 받으며 성장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전부라고 할수 있는 예루살렘에서 자랐습니다.
뿐만아니라 바오로는 엘리트 교육을 받기 위해 당시 대스승이었던 가말리엘 문하생으로 들어갑니다.
기록에 따르면 가말리엘은 유다 최고 법정인 산 헤드린의 지도적 위치에 있었고 당대 율법교사로서 최고의 명성을 누렸습니다.
그로 인해 최초로 ‘라반’ 영예로운 칭호까지 얻었습니다.
이런 조기교육과 엘리트 교육을 차근차근 이수한 바오로였기에, 그는 조상 전래의 엄격한 율법에 충실했으며, 온몸과 마음으로 하느님을 열성으로 섬겼습니다.
이런 바오로에세 한 가지 심기 불편한 소식이 전해집니다.
당시 정통 유다인 입장에서 보면 이단이요 사이비라고 할 수 밖에 없는 그리스도인들의 출몰과 확산이었습니다.
또한 많은 유다인들이 그리로 건너가니, 바오로 입장에서 피가 거꾸로 솟을 정도로 분노했습니다.
정의감과 종교심으로 충만했던 바오로, 촉망받던 미래 지도자 청년이었던 바오로는 즉시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유다 최고 의회에 체포영장까지 발급받아 그리스도인들의 척결을 위한 선봉장이 됩니다.
이 시점에서 바오로에게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될 중요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생긴 낙마 사건입니다.
그날도 다마스쿠스에 그리스도인들이 집결해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바오로는 즉시 그리로 달려가기 시작했습니다.
다마스쿠스에 거의 도달했을 무렵 바오로는 갑자기 엄청난 광채 속으로 빨려 들어갔습니다.
동시에 그는 말에서 떨어져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습니다.
강렬한 빛으로 인해 그의 눈은 멀어버렸습니다.
그 특별한 상황 앞에서 바오로가 보여준 태도는 눈여겨볼 만합니다.
그 난감한 상황 속에서 바오로는 주님께 거듭 질문을 던집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꼬박꼬박 응답해주십니다.
그 순간 제가 바오로였다면 엄청난 두려움에 까무라쳤을 것입니다.
아니면 잽싸게 줄행랑을 놓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오로는 주님께 질문을 던집니다.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주님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님께서도 바오로 사도의 질문에 명료하게 답하십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자렛 사람 예수다.” “일어나 다마스쿠스로 들어가거라.”
오늘 우리에게도 바오로 사도가 온몸으로 체험했던 절절한 회심, 대대적인 삶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강렬한 회심과 대대적인 삶의 전환 그 배경에는 끊임없는 기도와 주님 말씀에 대한 진지한 경청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바오로 사도처럼 끊임없이 주님께 질문을 던져야 하겠습니다.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주님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강론>(2024. 1. 25. 목)
(사도 22,3-16; 마르 16,15-18)
<바오로 사도의 회심>
“나는 유다 사람입니다. 킬리키아의 타르수스에서 태어났지만 이 도성 예루살렘에서 자랐고, 가말리엘 문하에서 조상 전래의 엄격한 율법에 따라 교육을 받았습니다.
오늘날 여러분이 모두 그렇듯이 나도 하느님을 열성으로 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또 신자들을 죽일 작정으로 이 새로운 길을 박해하여,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포박하고 감옥에 넣었습니다.
대사제와 온 원로단도 나에 관하여 증언해 줄 수 있습니다.
나는 그들에게서 동포들에게 가는 서한까지 받아 다마스쿠스로 갔습니다.
그곳에 있는 사람들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고 와 처벌을 받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사도 22,3-5).”
바오로 사도는, 필리피서에서는 자기 자신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은 나는 이스라엘 민족으로 벤야민 지파 출신이고, 히브리 사람에게서 태어난 히브리 사람이며, 율법으로 말하면 바리사이입니다.
열성으로 말하면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이었고, 율법에 따른 의로움으로 말하면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었습니다(필리 3,5-6).”
여기서 “율법에 따른 의로움으로 말하면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라는 말은, 교만이나 위선이 아니라, 실제 사실을 그대로 말한 것이라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부모인 즈카르야와 엘리사벳도 “주님의 모든 계명과 규정에 따라 흠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루카 1,6), 바오로 사도도 즈카르야와
엘리사벳과 같은 충실한 신앙인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열성적인 유대교 신자로서 자신의 신앙과 신념에 따라서 그리스도교를 박해했는데, 예수님께서는 그 일을 미리 예언하신 것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회당에서 내쫓을 것이다. 게다가 너희를 죽이는 자마다 하느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할 때가 온다.
그들은 아버지도 나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한 짓을 할 것이다(요한 16,2-3).”
바오로 사도가 그리스도교를 박해한 것은, 그렇게 하는 것이 하느님께 봉사하는 일이고 충성하는 일이라고 ‘진심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때에는 아직 예수님을 모르던 때였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하시는 일을 모르던 때였습니다.
<여기서 “그들은 아버지도 나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라는 말씀은, “하느님을 모르기 때문에”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모르기 때문에”입니다.>
바오로 사도도 자기가 모르고 한 일이라고 말합니다.
“나는 전에 그분을 모독하고 박해하고 학대하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믿음이 없어서 모르고 한 일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1티모 1,13).”
이 말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바치신 기도에 연결됩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죄인 줄 ‘모르고’ 한 일이더라도 죄가 죄 아닌 것으로 바뀌는 것은 아니지만, 회개와 용서의 가능성은 커집니다.
반면에, 알면서도 죄를 짓는 것은 처음부터 회개와 용서를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죄가 큽니다.
어떻든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의 기도가 결실을 맺은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바오로 사도가 ‘어느 날 갑자기’ 예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고 나서 곧바로 변화되고 사도가 된 것으로 생각할 때가 많은데, 바오로 사도 자신은 ‘어느 날 갑자기’가 아니라고 증언합니다.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부터 나를 따로 뽑으시어 당신의 은총으로 부르신 하느님께서 기꺼이 마음을 정하시어, 내가 당신의 아드님을 다른 민족들에게 전할 수 있도록 그분을 내 안에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때에 나는 어떠한 사람과도 바로 상의하지 않았습니다.
나보다 먼저 사도가 된 이들을 찾아 예루살렘에 올라가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마스쿠스로 돌아갔습니다.
그러고 나서 삼 년 뒤에 나는 케파를 만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 보름 동안 그와 함께 지냈습니다(갈라 1,15-18).”
1) 하느님께서는 바오로 사도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그를 선택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계획’이 언제 어떻게 실행되는지 모르지만, 하느님은 즉흥적으로 일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을 ‘섭리’ 라고 표현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 신비스러운 ‘하느님의 섭리’를 잘 나타내는 대표적인 예입니다.
2)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자마자 곧바로 응답하고 사도가 된 것이 아니라, 3년 동안 아라비아 광야에서 기도와 고행을 하는 시간을 가진 뒤에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 3년 동안의 일은 전혀 기록에 없기 때문에 자세한 상황을 알 수 없지만, 아마도 바오로 사도는 회개하고 보속하는 생활을 했을 것이고, 자신에게 주어진 계시를 묵상하면서, 사도로서 일할 준비를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라고 가르치셨습니다(마태 5,44).
‘바오로 사도의 회심’은,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를 잘 나타냅니다.
스테파노가 순교한 뒤에 교회가 큰 박해를 받게 되었을 때, 아마도 분명히, 초대교회 신자들은 주님의 가르침대로 박해자들의 회개를 위해서 기도했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회심은, 그 기도가 응답을 얻은 일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