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석유화학산업이 중국발 공급과잉으로 실적 부진이 장기화되면서 쉽게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업계에서도 구조조정이 불가피하다는 공감대가 확산하는 가운데 우리 정부가 다음달 초 내놓을 석유화학산업 경쟁력 강화 방안에 관심이 쏠린다.
업계에 따르면 한국의 석유화학산업은 주요 수출시장이었던 중국의 변심으로 수익성 악화에 시달리고 있다. 중국의 경기침체로 수요가 부진할 뿐 아니라 중국 내 자급률이 올라 향후 경기가 회복되더라도 상황이 달라질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국내 대기업 4곳 중 롯데케미칼은 3분기 영업손실이 4136억원(약 455억엔)에 달했다. LG화학 석유화학부문은 382억원, 한화솔루션 케미칼부문은 310억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했다. 금호석유화학만 유일하게 651억원의 흑자를 냈지만 전년 동기 대비 22.7% 감소했다.
국내 석유화학업계는 2020년 이후 중국의 대규모 나프타분해설비(NCC) 증설로 직격탄을 맞았다. '산업의 쌀'로 불리는 에틸렌 생산능력은 2020~2024년 세계에서 4500만 t 늘었는데 이 중 중국이 2500만 t으로 55.6%를 차지했다. 여기에 중동까지 석유화학 분야 투자를 확대하고 있어 범용 제품 경쟁은 더욱 치열해졌다. 에틸렌 생산능력은 중국과 중동을 중심으로 2026~2028년에는 약 4000만 t 늘어날 전망이다. 국내에서도 사우디아라비아 국영석유기업 아람코와 자회사인 에쓰오일이 샤힌 프로젝트로 2026년 울산에서 연간 에틸렌 180만 t을 추가로 생산할 계획이다.
현재는 공장을 운영할수록 손실이 나는 상황이다. 수익성 지표인 에틸렌 스프레드(에틸렌 가격에서 원료인 나프타 가격을 제외한 금액)는 2022년 이후 손익분기점인 t당 300달러를 밑돌았으며 올 3분기에는 186.47달러에 그쳤다. 한국의 NCC 가동률은 2021년 93%에서 지난해 74%로 하락했다.
◇ 정부, 사업재편 인센티브 논의
상황이 악화되자 한국 정부는 석유화학 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한 방안을 준비 중이다. 범용 제품으로 부가가치가 높은 스페셜티 중심의 사업재편 유도와 이를 위해 세제·금융 인센티브를 주겠다는 것이다. 한국 기업들은 스페셜티로 사업 다각화를 추진하고 있지만 속도는 나지 않고 있다. 지난 2022년부터 스페셜티 확대에 드라이브를 건 롯데케미칼의 경우 아직 범용 제품 매출 비중이 60%대로 높은 편이다. 생산라인을 단기간에 바꾸기 어렵고 시장 수요도 축소되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는 기업 간 인수합병이 원활히 진행되도록 규제를 완화하고 세제 혜택을 주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사업재편 추진 시 저리의 정책금융 제공, 연구개발 지원 등도 추진할 전망이다. 업계 관계자는 "비주력 사업을 매각할 수 있도록 세제 지원을 강화해달라고 건의하고 있다. 연구개발 세제 지원도 스페셜티 전환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가 파격적인 지원책을 내놓지 않는 이상 과거와 같은 한국 기업 간 빅딜은 어려울 것이라고 예상했다.
◇ 스페셜티 강화한 독일과 일본을 참고로
한국 정부는 일본과 유럽의 석유화학 사업 재편 사례를 참고하고 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비산유국인 독일과 일본의 석유화학 기업은 과거 범용 제품 중심에서 전지, 농화학, 기능성 소재 등 스페셜티 중심으로 다변화하는 데 성공했다. 산업통상자원부 관계자는 기업의 자발적 사업재편을 촉진하기 위한 방안을 준비 중이며 관계 관청과 협의하고 있다. 일본과 유럽의 다양한 사례를 검토할 것이라고 말했다.
유럽에서는 기업이 인수합병을 활성화해 사업재편이 진행됐고, 일본은 정부 주도의 구조조정을 진행했다. 석유화학 세계 1위인 독일 바스프는 적극적인 인수합병을 통해 범용제품 비중을 2005년 42%에서 2022년 17%까지 줄였다. 일본의 주요 석유화학 기업들은 연구개발 강화로 범용 제품 비중을 40%대로 낮췄다. 일본 석유화학업계는 오일쇼크 여파로 1980년대 초부터 사업재편을 진행했지만, 일본 정부는 공정거래법 적용을 한시적으로 유예하는 방식으로 구조조정을 지원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과거 일본 사례 연구를 발주한 상태다.
기업들도 자구책을 마련하고 있다. LG화학은 3월 스티로폼 원료인 스티렌모노머를 생산한 여수 SM공장의 가동을 중단했다. 롯데케미칼은 지난달 말레이시아 합성고무 생산법인 LUSR의 청산을 결정했다. 서강대 화학과 이덕환 명예교수는 스페셜티로의 전환은 공장만 만들면 되는 것이 아니라 큰 폭의 연구개발 투자와 기술 축적이 필요하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한국의 석유화학산업은 그것밖에 출구가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