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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 야호♬ (lil_ili@hanmail.net)
친정 ★ 야호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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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의 법칙>
법칙 14. 진심 그리고 10분과 한 달.
- 띠릭.
전자음 소리와 함께 고급스러운 오피스텔 문이 열렸다. 피곤한 얼굴로 들어온 산하가 문고리를 놓자 다시 한번 전자음 소리가
울리더니 자동으로 문이 잠겼다.
오피스텔로 들어오자마자 신발장 위에 놓여진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산하가 피식 웃더니 신발을 벗었다.
청소하는 아주머니가 다녀가신지 얼마 되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산하 자체가 깔끔한 것을 좋아하는지 오피스텔 안은 부자연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깔끔했다.
- 오늘 오후 3시 경, 각 국의 국빈들이……
- 인천국제공항의 지분을……
- 각 지방 교육감 선거가 앞으로……
오피스텔의 거실은 혼자 살기엔 과할 정도로 넓었다. 산하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거실을 쓱 둘러보다가 소파 위에 놓여진
리모컨을 집었다.
전원을 켜자마자 뉴스가 흘러나왔다. 리모컨을 다시 내려놓고 옷을 갈아입으려던 산하가 다시 몸을 돌려 리모컨을 집었다.
채널을 몇군데 더 돌려보지만 결국 각 채널이 모두 뉴스를 내보내고 있음을 깨닫고는 포기한 듯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설레설레 가로저었다.
- Rrr. Rrr. Rrr.
그때였다.
요란한 전화벨 소리에 상의를 갈아입으려던 산하가 미간을 찌푸리며 오피스텔에 놓여진 전화기 쪽으로 몸을 틀었다.
수화기를 집어드는 대신 통화 버튼을 누른 산하가 짜증스레 전화를 받았다.
“누구야.”
- 어, 산하! 집에 있었나? 스케줄 정리해서 보냈는데 메일 봤나?
정식 매니저였다. 우렁차게 자신을 부르며 스케줄 운운하는 매니저의 목소리에 산하가 얼굴 주름을 풀고 상의를 벗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이내 고개를 끄덕여봤자 상대방은 모른다는 것을 깨닫고는 피식 웃었다.
“확인했어. 바뀔만한 스케줄 없는거지? 나중에 스케줄 변경되면 피곤해.”
- 안다, 안다. 그래서 특별히 신경써서 조정했으니까 변할 건 없을꺼다. 아마도.
“그 아마도는 뭐야? 불안하게.”
- 원래 연예인이라는 게 그라지 않나. 하주씨는 만나고 왔나? 아까 전화와서 니 스케줄 알려줬는데.
“만났어.”
나지막이 대답하며 소파에 앉은 산하가 가방을 집어들었다. 가방을 열고 그대로 소파 위에 뒤집자 우르르 짐들이 쏟아졌다.
전화기에선 매니저가 무어라 떠들어대는 목소리가 울리지만 산하에겐 잘 들리지 않았다.
거리도 있었거니와 집중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심드렁히 소파에 널브러진 짐을 살피던 산하의 시선이 6mm 촬영 테이프에서 멈췄다.
- ……래서 내가 말해놨다. 니 들었나?
“어, 계속 말해.”
- 이 새끼 듣는건지 안듣는건지 도통 모르겠네. 니 진짜 듣고있나?
“어.”
기계적으로 대답한 산하가 매니저의 ‘이 섀끼 진짜 듣고있는거가?’하는 말에 피식 웃으며 촬영 테이프를 향해 손을 뻗었다.
긴 손가락 끝이 테이프에 닿자 플라스틱 특유의 느낌이 전해졌다.
한 손으로 턱을 매만지며 테이프를 집어든 산하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텔레비전이 있는 곳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넓은 보폭으로 자리를 옮긴 산하가 몸을 숙여 텔레비전을 받치고 있는 받침대의 투명한 서랍을 살펴보았다.
한참 미간을 찌푸린 채 안을 살피던 산하가 이내 허리에 통증이 느껴졌는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전화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형.”
- ……라고 하대. 그 새끼 꽤나 싸가지가……엉?
“내 캠코더 어디 있지?”
- 오피스텔.
“텔레비전 밑에 넣어두지 않았나? 없네.
- 그기 없나? 어라? 있을껀데……아! 맞다맞지, 벤에 있을껀데. 왜 그때 니 갖고 내려왔다가 안 갖고 올라갔잖아.
“벤은?”
- 회사 사무실.
소속사까지 갔다오긴 귀찮았는지 회사 사무실이란 단어가 들리자 산하가 단박에 미간을 찌푸렸다.
테이프를 손에 쥔 채 한 손으로 턱을 괸 산하가 물끄러미 전화기를 쳐다보았다.
전화기 너머에서 매니저가 ‘캠코더는 왜?’하고 궁금한 듯 물었으나 산하는 딱히 그렇다할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이내 산하가 전화기 쪽으로 걸음을 옮기더니만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형 지금 한가하지? 캠코더 좀 갖다줘. 급히 필요해.”
*
“어……음, 아…그러니까……”
무어라 말을 내뱉어야 할 지, 그의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향해 어떤 반응을 보여줘야 할 지 막막한 기분에 입만 벙끗거렸다.
말을 내뱉긴 해야하는데 도저히 머리 속에 떠오르는 것들이 없었다.
고작해봐야 ‘아하?’ 혹은 ‘어허?’따위의 추임새 정도랄까.
설마 내게 좋아하는 감정을 느끼고 있으리라 생각조차 하지 못한 것을 어쩌랴.
“그러니까 감독님……으흠, 음…저는……”
나만큼이나 유진태 감독도 난처하겠지 싶어 시선을 살짝 올려 힐끔 그를 쳐다보았다. 귀까지 새빨갛게 달아오른 유진태 감독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꽤나 당황스러웠는지 그의 손가락이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
이럴 땐 내가 먼저 ‘아하! 그러시군요! 고마워요!’라는 식의 대꾸라도 해줘야할 텐데, 머리가 멍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입 안에 담겨있는 것들이 차마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쭈볏거리며 수줍음을 타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초하씨, 괜찮아요.”
“예, 저도 물론 괜찮……에? 아, 아니 감독님 제가 원래 하려던 말은 이런게 아니라 제가 잠시 넋을 놓고 있어서……으으!
죄송해요. 도저히 뭐라고 대답해드려야 할 지 모르겠어요. 정말 죄송해요.”
나지막이 내뱉어진 유진태 감독의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그를 따라 말하다가 깜짝 놀라 허겁지겁 말을 정정했다.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유진태 감독을 쳐다보자 어느새 그는 날 쳐다보고 있었다.
빨갛게 달아올랐던 얼굴은 아까보단 살짝 가라앉아있었지만 그래도 수줍음의 색깔을 완전히 숨기진 못하고 있었다.
꼭 남고 다니는 학생이 첫 인사를 나누게 된 교생 선생님에게 막 첫사랑을 느끼기라도 한 듯.
“아니에요. 정말 괜찮아요, 초하씨. 이렇게 들켜버려서 좀 부끄럽긴 하지만.”
“그래도…….”
“내 감정을 초하씨에게 강요하거나 이해시킬 생각은 없어요. 그냥 내가 가지고 있는 감정일 뿐이니까요.”
당장 좋다, 싫다를 대답할 필요는 없다는 말인가? 순간 이기적이라 손가락질 받을지 모르겠지만 안도의 한숨이 내쉬어졌다.
혹시라도 유진태 감독에게 감정을 강요받게 되면 어떻게 반응해야하나, 앞으로 영화 작업은 어떻게 해야하나 앞이 캄캄했는데…….
나도 모르게 손을 들어 이마에 맺힌 땀을 쓱 닦아내며 유진태 감독을 향해 실없는 사람처럼 피식 웃어버렸다.
“그냥, 감독님 말 들으니까 웃음이 나네요. 안도가 된달까…….”
“흐음. 그 반응은 조금 슬픈데요? 날 조금도 남자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이잖아요, 그건.”
“에? 아, 아니요 그러니까 제 말은…….”
“알아요, 알아. 장난 좀 쳐본 거에요. 하하.”
유진태 감독이 나지막이 웃더니 손을 뻗어 내 머리를 꾹 눌렀다. 나보다 훠얼씬 큰 유진태 감독이 꾹 내 머리를 누르자 순간적으로
무릎이 접혔다. 그덕에 ‘오잉?’하고 바보스럽게 휘청거렸고 말이다. 윽, 쪽팔려!
짓궂게 장난치는 유진태 감독의 태도에 결국 나까지 소리내어 웃으며 ‘감독님!’하고 불러버렸다. 내 부름에도 불구하고 하하
웃으며 유진태 감독은 주차되어 있는 차를 향해 먼저 걸음을 옮겼다.
물끄러미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다가 어느정도는 확실히 해두어야할 것 같다는 생각에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제가 좋아하는 사람 있다는 거……감독님 알고 계시죠?”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자기도 모르게 무의식 중에 그 사람을 쫓게 된다. 그것이 마음이든, 시선이든 말이다.
같은 곳을 보길 원하게 되고 그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슨 감정을 느끼는지 공유하길 원하게 된다.
만약 유진태 감독이 그러한 감정을 내게 품은 것이라면 내가 독고산하를 좋아한다는 걸 그 또한 눈치챘을 것이다.
비록 독고산하를 향한 내 감정이 겉으로만 보여지는 ‘연기’라 할 지라도 말이다.
“흐음.”
유진태 감독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서있는 자리에선 오로지 그의 뒷모습만 보였기 때문에 그가
차키를 꺼내 열림 버튼을 누르는 그 순간까지 무슨 표정을 지었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다시 그가 몸을 돌려세웠을 때 나지막이 웃는 것은 확실하게 볼 수 있었다. 무척이나 부드럽게 웃는 것을 말이다.
그는 차 문이 열리자 운전석 옆좌석으로 몸을 옮겨 차 문을 열더니 나를 향해 얼른 오라는 제스쳐를 취해보였다.
내 말을 못들었나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가 서있는 곳으로 걸음을 천천히 옮겼다.
“감독님, 저요 좋아하는 사람……”
“알아요.”
어느정도 가까이 다가갔을 때, 이쯤되면 들리겠지 싶어 살짝 말을 내뱉자 유진태 감독이 빙긋 웃으며 내 말을 막았다.
부드러웠으나 단호했다.
괜히 머쓱해진 기분에 손가락 끝으로 콧잔등을 긁으며 차에 타려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진심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알아요.”
“에?…악!”
깜짝 놀라 나도 모르게 몸을 일으킨다는 것이 그만 차에 머리를 부딪혔다. 느닷없이 느껴지는 통증에 저절로 악 소리가 나왔다.
두 손으로 머리를 문지르며 거의 울상이 된 얼굴로 자리에 앉자 유진태 감독이 안전벨트를 채워주며 말했다.
“괜찮아요?”
“네? 아, 네. 괜찮아요. 제가 원래 잘 덤벙거려서…….”
“흐음, 제 차는 괜찮을까요? 초하씨랑 부딪혔는데.”
“어머! 왜이러세요, 저 그렇게 머리 단단하지 않거든요?”
“발끈하는 거 보니까 정말 괜찮나보네. 그럼 됐어요.”
이 사람이 사람 가지고 노나.
피식 웃으며 몸을 일으키는 유진태 감독을 멍청한 표정으로 쳐다보다가 콧잔등을 찡그렸다. 유진태 감독은 ‘주름 생겨요.’라고
나지막이 말하며 내 콧잔등을 톡톡 두드렸다.
내가 앉은 쪽 문을 닫아주기 위함인지 그가 몸을 돌리려는 찰나, 내가 먼저 손을 뻗어 그의 옷을 잡았다.
“왜요?”
“아까 하던 얘기 말인데요, 진심이 아니라는……”
“초하씨. 그 ‘진심’이라는 거 초하씨가 더 잘 알잖아요.”
유진태 감독이 빙긋 웃으며 날 쳐다보았다. 나는 그를 올려다보고, 그는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불안정하게 초점을 맞추지 못하는 내 시선과는 다르게 그의 시선은 올곧게 한치의 피함도 없이 내게 고정되어 있었다.
마치 속마음을 모두 들킨 것 같아 얼굴이 화끈거려오기 시작할 때쯤, 나지막이 유진태 감독이 입을 열었다.
“마음이 바뀌었어요.”
“에?”
정말 내 계획을 알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내 느낌을 알아차린 것뿐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유진태 감독의 목소리에는
여유가 가득 담겨있었다.
마치 이미 내 생각과 시선을 모두 읽고 있는 사람처럼.
순간 무언가에 한 대 얻어맞은 사람처럼 머리가 띵해지더니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이미 당황스러움에 물들었을 내 얼굴만으로도 그는 내 정곡을 찔렀다는 걸 눈치챘을 테지.
아, 난 정말……우주최고킹왕짱 멍청이인가봐.
“아, 아니 저는…….”
“초하씨.”
나지막이 불러진 내 이름에 고개를 들었다. 유진태 감독이 두 손을 뻗어 차 위에 얹었다. 길게 뻗어진 손은 차를 받침대로 삼아
그의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할지 생각조차 하지 못했는데 벌써 그의 그림자가 얼굴에 드리워졌다.
해를 등지고 선 탓에 그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정면으로 보게 된 햇빛이 그의 등에 비춰 여러 곳으로 분산되는 듯한 느낌에 살짝 미간을 찌푸린 채 입을 벙끗거리려는 찰나,
유진태 감독의 입술이 곡선을 그리고 웃음 짓는 것이 보였다.
“내가 아까 내 감정을 강요하거나 이해시킬 생각은 없다고 했죠?”
“예? 아, 뭐……네.”
“단 하나, 마음이 바뀐 것이 있어요.”
햇빛을 정면으로 바라보려니 힘들다. 유진태 감독의 얼굴도 잘 보이지 않는다. 천천히 한 손을 들어 유진태 감독의 뒤에서
강렬하게 빛나고 있는 햇빛을 가려보려는 찰나였다.
유진태 감독이 한 손으로는 여전히 차를 짚은 채, 살짝 몸을 숙여 내 가까이로 다가왔다.
가깝다는 것을 인지하기도 전, 이미 다가온 유진태 감독의 숨소리에 흠칫거리며 어깨를 좁혔다.
그리고 그 순간 나지막이 그가 말을 내뱉었다.
“당신이 품은 그 마음이 진심이 되도록 할 거에요.”
“에? 아니, 이건……”
“단, 나를 향해서.”
눈치없는 핸드폰 벨소리가 유진태 감독의 목소리와 맞물려 같이 들렸다.
하나는 가슴 떨렸고,
하나는 가슴 저렸다.
*
톡톡톡, 톡톡, 톡톡톡, 톡톡.
규칙적인 리듬을 갖고 손 끝으로 테이프를 건드리던 산하가 움찔거리며 행동을 멈췄다. 이내 천천히 고개를 돌려 산하가 현관
문을 쳐다보자, 아니나 다를까 딩동하고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늦어.”
“뭐? 늦어? 이 새끼가 신촌부터 열라 밟고 왔더니만 뭐라 씨부리는거가, 지금?”
“캠코더는?”
“여 있다. 근데 이게 갑자기 왜 급히 필요한건데?”
문을 열고 매니저를 맞이한 산하가 캠코더를 건네받으며 다른 한 손으로 테이프를 흔들어보였다. 촬영 테이프를 본 매니저가
‘그기 뭔데?’하고 묻자 캠코더 전원을 넣어 작동 여부를 확인한 산하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유 감독이 주던데. 작업 들어가기 전에 보면 좋을거래.”
“그기 급한거가?”
“급해.”
“뭐? 아이고, 아무튼 나 좀 들어가서 쉬자. 하도 신인들만 데리고 있었더니 몸이 피곤……”
“잘가.”
산하가 힐끔 매니저를 쳐다보더니 심드렁하게 말했다. 당황한 매니저가 두 눈을 치켜뜨고 ‘뭐어?’라고 말했으나 산하는 이미
손을 뻗어 문을 닫은 후였다.
띠릭-하고 도어락 닫히는 소리와 함께 문이 자동으로 잠겼다.
“야! 야, 이 치사한 섀끼! 캠코더 배달까지 해줬는데 차라도 한 잔 대접해야지! 니가 그러고도 #%&#^%$%^%%^#%^#^…….”
“어, 형. 나도 사랑해.”
매니저가 무어라 떠들어대는 소리를 한 귀로 흘려보내며 산하가 거실로 걸음을 다시 옮겼다. 테이프를 캠코더에 꽂고,
잭을 텔레비전과 연결한 뒤 리모컨만 챙긴 산하가 소파에 앉았다.
긴 손가락으로 퉁명스레 리모컨 버튼을 누르자 새카만 화면이 텔레비전에 떴다.
다소 길다 느껴질 정도로 지속되는 검은 화면에 산하가 빨리 감기 버튼을 누르려는 순간 거리의 소음이 들리더니 화면에
사람들이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다.
재생한지 30초 정도 지났을 무렵이었다.
“하암.”
산하가 하품을 하며 소파에 비스듬히 기댄 삐딱한 자세로 화면을 쳐다보았다. 입을 열면 하얀 김이 보일 정도로 추운 겨울의
서울이었다.
“광화문? 아닌데. 청계천 쪽인가?”
여러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바쁜 거리였다. 출근하는 것인지 혹은 외근을 하는 것인지 시간을 짐작할 수 없는 화창한 날씨였다.
사람들은 바쁜 것인지 촬영 중인 렌즈에 시선을 두지 않았다.
간혹 쳐다보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모두 무표정하게 힐끔힐끔 곁눈질로 쳐다보고 갈 뿐이었다.
웃어준다든지 인사를 해주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간간히 떨리는 카메라는 초하가 추위 때문에 손을 떨거나 무언가 행동을 취했기 때문인 듯 했다. 그 추위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것 같은 느낌에 산하가 소파 위에 널브러진 무릎 담요를 끌어당겨 덮었다.
“잘 찍은건가?”
찍어주는 대로 찍히는 연예인의 입장이다보니 특정한 피사체없이 거리를 찍은 화면이 지루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유진태 감독이 극찬할 정도로 잘 찍은 영상인지도 의문이었다.
의미없이 반복되는 거리 화면에 산하가 다시 리모컨으로 손을 뻗었다.
그냥 꺼버리려는 찰나, 촬영이 끝난 듯 화면이 검게 변했다. 산하의 손 끝이 움찔거리며 멈췄고, 이내 다시 리모컨 버튼을
누르려는 순간 익숙한 웃음 소리가 들렸다.
- 하하, 내놔~ 내꺼잖아.
- 싫어. 자기 소개라도 해봐.
- 뭐어?
- 왜, 재미있잖아. 맨날 찍는 입장이다가 찍히니까 어때? 쑥스러워?
얼굴이 보이지 않는, 아마 촬영중인 사람은 현재 자신의 코디인 윤다……뭐시기 같았고 화면에 가득 찬 사람은 초하였다.
어색한 듯 웃으며 캠코더를 향해 손을 뻗던 초하는 코디의 물음에 뚱한 표정으로 카메라를 쳐다보았다.
- 웅, 조금 쑥스럽다. 이제 내놔~
- 이 추위에 촬영 내내 같이 있어줬는데, 오늘 술이라도 한 턱 쏴야지?
- 당연하지! 돼지 껍데기에 쐬주 한 잔 어때? 남산골 할머니네 집 괜찮지? 아니다, 족발 먹을까?
- 돼지 껍데기 콜!
- 좋아, 그럼 이제 카메라 내놔~ 하하. 으, 추워!
춥다면서 초하가 화면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내 촬영이 끝난 것인지 검은 화면이 텔레비전을 화면을 가득 채웠다.
물끄러미 텔레비전을 바라보던 산하가 곧 정신을 차린 듯 리모컨 버튼을 눌렀다.
그러나 그것은 애초에 누르려던 전원 버튼이 아니라 되감기 버튼이었다. 한참 되감아지던 화면이 초하가 처음 등장하던 때로
돌아가자 리모컨을 누르고 있던 산하의 손가락이 떨어졌다.
곧 오피스텔 가득 초하의 목소리가 울렸다.
- 하하, 내놔~ 내꺼잖아.
지금하고 똑같다. 하나도 변한 것이 없다.
텔레비전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산하가 피식 웃으며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볼을 톡톡 두드렸다. 좋아한다고 말하던 초하의
목소리가 어색하게 귓가를 맴돌았다.
산하가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
그러자 온 신경이 청각에 집중되어 초하의 목소리가 더 크게 느껴졌다.
“유진태.”
나지막이 유진태 감독의 이름을 부른 산하가 다시 두 눈을 떴다. 또렷한 시선으로 텔레비전 속 초하를 쳐다보던 산하가 피식
웃으며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일시정지 버튼을 누르자 급작스러운 침묵이 오피스텔을 덮쳤다. 텔레비전 속 초하는 환히 웃으며 그저 화면 속 화소가 되어 빛나고 있을 뿐이었다.
“나한테 ‘여자 민초하’를 보여줘서 어쩌자는 건데?”
알 듯 말 듯한 말을 내뱉은 산하가 텔레비전 화면을 쳐다보다가 핸드폰을 꺼냈다. 문자나 전화가 특별히 들어온 것은 없었다.
돌아간 듯한 매니저가 남긴 ‘18!’이라는 메세지와 전화번호를 용케 알아 낸 팬들이 혹시나 한 마음에서 걸어봤을 법한 부재중 전화 몇 통정도.
무심한 표정으로 핸드폰 폴더를 연 산하가 익숙치 않은 번호를 누르더니 통화 버튼을 꾹 눌렀다.
짧은 신호음이 두어번 울리더니 유쾌한 컬러링이 울렸다.
- 독고산하씨!
“10분.”
- 에?
“올 때 라면 사와.”
핸드폰 너머에서 ‘10분이라니!’하고 내지르는 소리가 들렸으나 산하는 폴더를 닫으며 피식 웃었다.
10분과 한 달이라…….
산하가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텔레비전을 쳐다보았다.
피식, 터지는 웃음이 어쩐지 유쾌했다.
***
날씨가 너모너모 추워요. 모두모두 감기 조심하셔요!
읽어주신 분들과 꼬리말 달아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마음을♡_♡
야호♬ 올림.
첫댓글 잘보고갑니다! 유후후후후 요즘 날씨가 너무 쌀쌀한거같아요ㅠ,ㅠ 얼어 죽을거같답니다앙
역시....독고산하가 초하를 여자로 느꼈으면 하는 바램이 빨리 ~~ㅎㅎㅎㅎ
음.... 근데 감독님은 언제부터...?
이거만 계속 기다리는 거 아세요? ㅎㅎㅎ 아 역시 기다린 보람이 있네요>ㅁ< 유진태감독도 멋있고 산하도 멋있는.. 초하가 부럽네요. ㅎㅎ
재밌어욤, 오늘도 재밌게보고가염- 담편도 기다릴께요-
아우이뻐죽겠어
좋았어!!!
재ㅁㅣ써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