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국지 [列國誌] 762
■ 3부 일통 천하 (85)
제12권 사라지는 영웅들
제 10장 가는 사람 오는 사람 (7)
졔(齊)나라 맹상군(孟嘗君)은 전국 시대를 상징하는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그러나 그의 등장은 그다지 화려하지 않다. 모든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는 가운데
조용히, 조심스럽게 역사의 무대 위로 올라섰을 뿐이었다. 그렇다고 초라한 등장도 아니었다.
BC 319년(진혜문왕 19년),
연횡책의 주인공인 장의(張儀)가 위나라로 거짓 망명하여 재상에 오른 지 4년이 지났다.
그동안 위양왕(魏襄王)은 좀처럼 장의의 연횡책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런 중에 위양왕이 죽고
그 아들이 즉위했다.그가 위애왕(魏哀王)이다.장의(張儀)는 위애왕을 상대로 연횡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러나 위애왕(魏哀王) 또한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합종을 깨고 진(秦)나라와 화친 맺는 것을
꺼려했다."생각해보겠소."그럴 때 남방 대국 초나라의 임금인 초회왕(楚懷王)이 위양왕에 대한
조문을 핑계로 사자를 보내어 은밀히 청했다.- 우리 여섯 나라는 말로만 합종 동맹을 맺었을 뿐
한 번도 행동을 같이한 적이 없소. 이제 여섯 나라가 하나가 되어 진(秦)나라를 공격하는 것이 어떻겠소?
위애왕(魏哀王)은 초회왕의 제안에 선뜻 응했다.- 좋은 생각입니다.
초회왕과 위애왕은 공동으로 한, 조, 연, 제나라 등에 사자를 보내어 연합군을 결성하여
진(秦)나라를 치자고 교섭했다.이무렵 한(韓)나라 임금은 한선혜왕(韓宣惠王)이었고, 조(趙)나라는
조숙후에 이어 조무령왕(趙武靈王)이 군위에 올랐으며, 연(燕)나라는 연역왕이 죽고
그 아들 쾌(噲)가 새로이 왕위에 오른 직후였다.- 호응하겠소.
한선혜왕, 조무령왕, 연왕 쾌는 즉각 답변을 보냈다.이제 제(齊)나라만 군사를 일으키면
처음으로 6개국 연합군이 결성되어 진(秦)나라로 쳐들어갈 판이었다.
제민왕(齊湣王)은 여러 대신을 불러놓고 의논했다.
"우리 나라는 합종 맹약을 준수하여 여러 나라와 함께 행동하는 것이 좋은가,
아니면 단독으로 행동할 것인가?"그러나 의논할 것도 없었다. 제민왕의 총애를 한몸에 받고 있는
소진(蘇秦)이 강력하게 주장하고 나섰다."둘도 없는 좋은 기회입니다. 당연히 연합하여 진(秦)나라를
쳐야 합니다."제민왕(齊湣王)이 고개를 끄덕이며 결정을 내리려 할 때였다.
조정 신하 중 한사람이 조용히 일어나 낭랑한 음성으로 외쳤다."진(秦)나라는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닙니다.
함부로 쳐들어가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고 기껏 맺어놓은 합종의 맹약을 쉽게 깨뜨릴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동맹한 다섯 나라가 격분하여 창끝을 우리에게로 돌릴지도 모르는 일일 테니까요."
"....................?"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이러합니다. 우선 군사를 일으키되 그 행군을 천천히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동맹을 맺은 다른 다섯 나라에 대해 신용을 지키는 것이 되고,
또한 직접적으로 진(秦)나라와 부딪치는 일도 없으므로 원한을 사지 않을 것입니다."
"연합군이 이기면 진격하고, 불리하면 그대로 철수합니다. 이것이 우리 제(齊)나라가 취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계책입니다."모든 사람이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순간 그들은 놀랐다.
출사한 지 얼마되지 않은 약관의 젊은이, 바로 맹상군(孟嘗君)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놀란 것은 맹상군이 신출내기라서가 아니었다.
이제껏 모든 사람은 소진의 의견에 대해 정면으로 반박하지 못했다. 소진의 뒤에 버티고 있는
제민왕(齊湣王)이 두려워서였다.그런데 이제 막 설공(薛公)의 지위를 물려받은 햇병아리
맹상군(孟嘗君)이 겁도 없이 소진의 의견에 정면으로 반대 의사를 표명하고 있질 않은가.
그들은 당연히 제민왕(齊湣王)이 소진의 손을 들어주리라 생각했다.
그렇게되면 맹상군(孟嘗君)은 당분간 조정에 모습을 드러낼 수 없을 것이리라.
'설읍의 기린아(麒麟兒)도 이렇게 사라지는가.'그런데 진짜 놀라운 일은 그 다음에 벌어졌다.
제민왕의 입에서 다음과 같은 말이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일리 있는 말이다. 이번 일은 맹상군(孟嘗君)이 알아서 도모하라."
모두들 어리둥절해 하는 가운데 맹상군(孟嘗君)은 군사 2만 명을 거느리고 임치성을 떠났다.
목적지는 집결지인 함곡관.그 무렵, 함곡관 밖에는 초회왕을 비롯한 다섯 나라 왕들이
각기 군대를 거느리고 모여 있었다.
제(齊)나라에서 군대를 보냈다는 소식을 듣자 그들은 아연 활기를 띠었다.
"초왕을 맹주로 추대해 함곡관을 단숨에 불태워 버립시다."
6개국 연합국 맹주가 된 초회왕(楚懷王)은 의기양양했다.
제나라 군대가 도착하기를 기다릴 겸 매일 각 나라 왕과 장수들을 불러 대책 회의를 가졌다.
그런 중에 제군 장수 맹상군으로부터 전갈이 왔다.
- 제가 함곡관으로 가는 도중 병이 나서 부득이 도착이 늦어질 것 같습니다.
초회왕(楚懷王)은 하는 수 없이 5개국 군사만으로 함곡관을 공격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들은 알지 못했다.위나라 재상 장의(張儀)가 진나라의 간자인 줄을.
진혜문왕(秦惠文王)은 이미 진작에 장의의 비밀 보고를 받은 바 있었다.
장수 저리질(樗里疾)을 함곡관 수비대장으로 파견하여 지연 작전을 펴게 하는 한편,
별동대를 편성하여 초나라로 통하는 가도(街道)를 기습했다.초나라 수도인 언영에서
올라오는 군량을 모두 진(秦)나라에서 가로채자 식량이 부족해진 초군(楚軍)은 부쩍 초조해졌다.
작전을 세우기보다는 식량을 빌리러 다니는 데 더 신경을 썼다.
그러나 자기네 식량도 빠듯한 판에 다른 나라에 빌려줄 식량이 있을 리 없었다.
서로 적당한 핑계를 대며 거절했다.초회왕(楚懷王)은 분노했다.
"이러고도 어찌 동맹국이라 할 수 있겠는가!"분열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싸움에 능한 진혜문왕(秦惠文王)이 그 틈을 놓칠 리 없었다. 진나라의 장수 저리질(樗里疾)은
별안간 함곡관 문을 열고 군사를 몰고 나가 초나라 진영을 급습했다.
가뜩이나 사기가 떨어져 있던 초군(楚軍)은 진군의 기습을 받고 창 한 번 제대로 휘둘러보지 못한 채
지리멸렬(支離滅裂) 흩어졌다.초군(楚軍)이 패하자 나머지 네 나라의 왕은 더 이상 싸울 마음이 없어졌다.
그들은 각기 본국에 일이 생겼다는 핑계를 대고 슬금슬금 돌아갔다.
763편에 계속
열국지 [列國誌] 763
■ 3부 일통 천하 (86)
제12권 사라지는 영웅들
제 10장 가는 사람 오는 사람 (8)
- 연합군 패배이 같은 소식이 곧 맹상군(孟嘗君)의 귀에 전해졌다.
그 무렵, 그는 겨우 제(齊)나라 국경을 벗어나고 있던 참이었다.'내 이럴 줄 알았다.'
그는 별다른 표정을 짓지 않고 군사를 돌려 유유히 임치성으로 돌아갔다.
이로써 처음으로 결성된 6개국 연합군의 진(秦)나라 공격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것이 맹상군(孟嘗君)의 역사 무대 첫 등장이다. 전혀 화려하지도 않고 이렇다 할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
어찌보면 난세(亂世)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처세의 한 방법만을 보았을 따름이다.
그러나 단순히 그렇게 생각할 것만도 아니었다.맹상군(孟嘗君)의 등장으로 지금까지 시대의 주인공으로
자처하던 한 인물이 퇴진하게 되었으니 말이다.그 인물은 다름아닌 소진(蘇秦)이었다.
제민왕(齊湣王)은 맹상군이 돌아오자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다.
"내가 그대의 말을 듣지 않았더라면 참으로 망신만 당할 뻔했도다."이 말이 무슨 뜻인가.
뒤집어 생각하면, 소진(蘇秦)에 대한 불신이 싹텄다고 할 수 있었다.그랬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제민왕(齊湣王)은 맹상군을 부쩍 가까이 한 반면 소진을 멀리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후 몇차례 더 맹상군은 외교적 수완을 발휘했다.- 제(齊)ㆍ초(楚) 동맹
자칫 초나라와의 관계가 멀어질 뻔한 것을 맹상군은 교묘한 외교술로써 제나라와 초나라 간의 동맹을
다시 이끌어내었다.날이 갈수록 맹상군에 대한 제민왕(齊湣王)의 신임은 두터워갔다.
반면 소진의 입지는 점점 줄어들었다.
이런 분위기를 가장 먼저 눈치챈 것은 그 동안 소진으로부터 배척당한 반소진파 신료들이었다.
일각에서 수근거리는 소리가 잦아졌다."이제 소진(蘇秦)은 왕에게서 완전히 신임을 잃었다.
제 놈이 세도를 누리면 얼마나 누릴 줄 알았더냐!""누가 그 자를 살해하면 속이라도 시원하겠군."
실제로 그런 움직임이 일어났다.
그동안 소진에 의해 따돌림을 당했던 신하들이 서로 뜻을 합쳐 자객을 구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소진(蘇秦)이 제민왕을 알현하기 위해 궁으로 들어갔을 때였다.
복도를 지나는데 시위(侍衛) 무사 중 하나가 소진에게 인사를 하는 척하면서 비수를 뽑아 소진을 찔렀다.
"헉!" 워낙 창졸간의 일이라 소진은 자객의 칼을 피할 틈이 없었다. 그대로 배에 칼을 맞았다.
시위(侍衛) 군사는 이미 복도 저편으로 달아나버렸다.
소진(蘇秦)은 대뜸 자신을 미워하는 자들의 소행임을 직감했다.'누구인지 몰라도 복수를 하리라!'
소진(蘇秦)은 순간적으로 이렇게 결심했다.
비수가 꽂힌 채로 배를 움켜쥐고 비틀비틀 제민왕 앞으로 달려갔다.
"왕이시여, 소진(蘇秦)은 이제 죽습니다."
피투성이가 된 소진의 모습을 보고 제민왕(齊湣王)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좌우 시종들에게 소리쳤다.
"궁중에 자객이 들다니, 이게 무슨 변인가. 당장 범인을 잡도록 하라!"소진(蘇秦)이 만류하며 말했다.
"범인은 이미 달아났습니다. 뒤쫓아간들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하지만 신은 범인을 밝혀낼 수 있습니다."
"이미 달아났는데 어떻게 밝혀낼 수 있는가?"
"왕께서는 신이 죽거든 즉시 신의 목을 끊어 높은 장대에 매달고 그 아래에 다음과 같은 방문을
써 붙이십시오."알고 보니 소진(蘇秦)은 연나라를 위해 활약한 간자(間者)였다.
그렇지 않아도 소진을 잡아 죽이려 했었는데, 누군가가 먼저 그 간악한 자를 죽였으니 다행스러운 일이다.
소진을 죽인 자는 자진 출두하라.간자를 죽인 공으로 1천 금(金)의 상을 내리리라.
'이렇게 하면 반드시 범인을 잡을 수 있습니다."
소진(蘇秦)은 말을 마치자 자기 배에 꽂힌 비수를 뽑았다.피가 분수처럼 쏟아졌다.
소진은 몸을 뒤틀다가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숨을 거두었다.
제민왕(齊湣王)은 소진의 유언대로 그의 머리를 끊어 시정 거리에 내걸었다.
현상금을 주겠다는 방문도 붙였다.며칠 후였다.
궁을 지키는 한 시위 군사가 의기양양하게 제민왕 앞에 이르러 아뢰었다.
"소진(蘇秦)을 죽인 사람은 바로 신이옵니다."동시에 제민왕의 입에서 노한 음성이 터져나왔다.
"저자를 잡아 문초하라."범인이라고 자처한 시위(侍衛) 군사는 엄한 문초를 받았다.
그는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소진을 죽이라고 사주한 배후 인물들을 모조리 털어놓았다.
이에 제민왕(齊湣王)은 소진의 암살과 관련된 자들을 모두 체포해 참형에 처했다.
생각해보면 소진의 사후 복수는 꾸며진 듯한 인상이 짙다.초(楚)나라를 개혁했다가
그 반대파의 공격을 받고 죽은 오기(吳起)의 복수 장면과 비슷하다.
어쨌거나 이렇게 해서 소진(蘇秦)은 역사 무대의 저편으로 사라졌다.
한 사관(史官)은 이런 소진에 대해 다음과 같은 평을 남겼다.
소진(蘇秦)은 죽으면서도 계책을 써 자기 원수를 갚게 했다. 이 정도면 지혜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소진도 결국은 칼에 찔려 죽지 않았는가.
반복무상(反覆無常)하고 충성 없는 자의 말로(末路)답다고 할 수 있다.
지혜 이전에 중요한 그 무엇이 있음을 가르쳐 주는 평(評)이라 할 수 있다.
소진(蘇秦)은 죽었다.
자신을 죽인 범인에 대해 복수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게 끝난 것은 아니었다.
764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