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112](화) [동녘이야기] / [동녘글밭] 사람이지 신이 아닌 우리들
https://youtu.be/DMz_GyxXJn8
오늘은 ‘사람들을 이해하며 사는 문제’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이웃님들’에 대한 이해입니다. 여기에는 당연히 ‘나’가 포함됩니다. 그것은 ‘나’에 대한 이해를 시작으로 자연스럽게 ‘너’에게까지 그 범위를 넓히게 되니까요.
그런데 문제는 이 ‘나’에 대해서는 늘 너그럽게, 하지만 너에 대해서는 까다롭게, 그 기준을 다르게 적용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들의 일상이 그렇습니다. 전혀 다른 기준을 가지고 있는 이 ‘우리들’이 적지 않습니다. 너무도 쉽게 이런 잘못에 빠지게 되지요.
하지만 옛 성현의 가르침은 다릅니다. 혼자 있을 때 도리(道理)에 어긋나는 일을 하지 않도록 스스로 반성하는 신독(愼獨)을 말합니다. 자신에게 보다 ‘엄격’을 요구합니다. 이러한 행동은 ‘너’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라는 말씀까지 덧붙입니다. ‘자기성찰’도 이런 바탕에서 요구되는 삶의 철학일 테지요.
여기에 ‘이해’를 가져옵니다. 나에 대한 이해요, 너에 대한 이해입니다. 결국 사람들에 대한 이해입니다. 사람은 어떤 존재인가를 ‘이해’하는 일이지요. 그렇게 되면 흔히 벌어지는 수많은 갈등을 크게 줄일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가끔씩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욕심을 다루었읍니다. 우리들은 다 욕심의 존재라고요. 욕심이 있기에 존재할 수 있고, 존재해야 그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으니까요.
이제, 욕심의 존재인 우리들과 그 우리들에 대한 ‘이해’까지 왔읍니다. 여기에 신(神)이 등장합니다. 절대의, 완벽의 신을 우리들 안에서 찾고 있는 우리들을 가끔씩 발견하게 됩니다. 불완전한 우리들이기에, 상대적인 우리들이기에 꾸는 절대의 꿈인지도 모를 일이지요.
그렇긴 하지만 ‘사람은 신이 아니’라를 사실을 놓치지는 말아야 합니다. 그럴 필요도 없고요. 헛점투성이인 사람으로 이해하자는 말씀입니다. 그게 사실이니까요. ‘나’가 그렇고 ‘너’ 또한 당연히 그런 존재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그런 ‘우리들인 것을 이해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실망을 넘어 진정한 꿈을 꿀 수 있으니까요. 소박한 꿈에서 위대함을 뽑아낼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참으로 쉽지 않은 문제이긴 합니다. ‘어디까지’인가도 가늠해야 하니까요. 잘못하다간 다시 도돌이표에 갇히게 됩니다. 모순에 빠지게 되지요. 그래서 필요한 것이 상식이라는 기준을 써야 합니다. 그 상식은 양심을 바탕으로 한 상식을 말합니다. 하지만 이 상식을 허무는 일들이 너무도 쉽게, 많이 벌어지는 오늘입니다.
이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갑니다. ‘사람들을 이해하며 사는 문제’입니다. 이 문제는 때로 ‘부분과 전체의 문제’로까지 번지기도 합니다. 그렇게 되면 그 해결 방법으로 ‘다수결’을 따르게 됩니다. 아쉽지만 따르는 것이 바로 문제 해결의 지름길입니다. 지혜요, 슬기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는 자연에 있읍니다. 무질서의 질서로 ‘자연’은 그렇게 늘 존재합니다.
너무 많은 것을, 너무 큰 것을, 너무 완벽을 요구하지 않는 ‘우리들’이 가끔씩 필요합니다. 부족한 듯하지만 이해의 과정을 거치면서 넉넉한 ‘우리들’로 자리를 잡게 됩니다. 밀고 당기고, 넓혔다 좁히면서 제대로의 틀을 잡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제발, 완벽의 틀에 ‘우리들‘을 가두지 말아요.
이런 오늘도 고마움으로 부족을 메꾸어 갑니다, 정말 고마워요.
첫댓글 오늘은 방송할 시간을 넘겨서 눈을 떴읍니다.
정국의 흐름을 살피느라 늦게 잠을 잔 결과입니다.
엊그젠가에 말씀을 드린 대로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어른'이 되어야 하겠읍니다.
그래서 일찍 글밭을 마무리하고, 제때에 방송을 할 수 있으니까요.
오늘 글밭의 제목은 '사람이지 신이 아닌 우리들'입니다.
우리들 자신을 너무 완벽의 틀에 가두지 말자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렇긴 하지만 신독(愼獨)을 놓치는 말아야 할 테지요.
기회가 되시면 한번, 살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