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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언이라는 말은 잘못된 표현이다.
콜롬부스는 인도를 찾아 떠났다가 도중에 風浪을 만나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했고, 그들을 정성껏 돕고 치료해준 사람들이 콜롬부스는 인디언이라고 착각을 했던 것이다.
그 후 유럽인들은 콜롬부스의 말을 믿고 인디언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콜롬부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은, 貪慾,殺戮,掠奪을 통한 자본주의 시작이 되었다.
미국 연방제와 유럽연합(EU) 의 사상적 배경 아나키즘, 아나키 민주주의 사회를 이룬 사피엔스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종족 인디언,
인디언의 생활, 의식, 종교 그리고 그들의 문명에 대해 들여다봄으로써 그들이 어떻게 높은 가치의 민주제도를 운용하였는지를 살펴 보자.
역사상 가장 멋진 종족으로 불리는 인디언들은 이 땅에서 거의 절멸했다.
그들의 멸망사는 미국의 건국사와 같은 말이다. 자연과 생태와 그리고 권력의 지배 없는 정치제도로 민주주의를 이루고 살았던 인디언들은 그들의 높은 의식 탓으로 이 땅에서 스러져 갔다.
철학자 몽테뉴는 말했다
"신앙, 법률, 선의, 관용, 신의, 솔직함에서 우리가 인디언만큼 갖고 있지 않은 것이 우리에게는 다행이었다. 그들은 그 우월함으로 인해 멸망하고 매도되고 배반당했다."
인디언들의 생태 사상은 많이 알려져 있다. 지금 미국의 바탕을 이루는 헌법 속에도 인디언들의 가치와 정신이념이 있다.
미국인들이 비록 그들을 지배하고 멸망시켰을지언정 그들의 높은 덕목에 대해서는 미국 내 사회적 가치 속에 인디언들의 정신 숨결이 녹아있다.
우리는 '아나키'하면 무정부라는 단어와 연계되어 부정적인 의미로 교육받아왔다.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들이 추구했던 정치제도라고 배워온 것이다.
이러한 아나키의 정의는 아주 협의의 일부만을 뜻한다. 인디언의 아나키가 추구하는 인본주의적 높은 이상은 바로 인디언들의 정치지배에서 드러난다.
단순한 무권력, 무지배, 무정부 상태의 아나키가 아니라 자발적이고 상호존중의 제도하에서는 필연적으로 불필요할 수밖에 없는 정부 권력이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누구도 타인을 지배하지 않으며 마을 어른인 족장도 전쟁하거나 참전을 강요할 권리가 없다.
상호협의체에서 의논하며 개인의 뜻이 존중되는 가운데 공동의 이익을 위한 결정이 내려지게 된다.
세상의 흐름은 왜 정의와 순리에 따라 흐르지 않는가
인디언들의 생태 사상 또한 이미 널리 알려졌고 세계 여러 나라에서 실천되고 있기도 하다.
우주 만물 속에 인간이라는 생명체는 결국 자연의 일부일 뿐이며 자연과 우주의 섭리 속에서 명멸하는 작은 존재일 따름이다.
그런 인간이 자연의 순환과 섭리를 무시하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20세기 들어 널리 전파된 환경운동 덕분에 인간이 자연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과 자연은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순응해야 하는 거대한 섭리라는 것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인디언들의 삶을 들여다보면은 그들이 얼마나 높은 의식과 문명적 가치를 지니고 살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오늘날의 유럽연합(EU)의 사상적⋅철학적 배경은 아나키스트였던 피에르 조제프 프루동이 주창한 연방주의에서 찾을 수 있다.
“20세기는 연방의 시대를 열것이다. 혹은 인간은 다시 천년의 연옥을 시작할 것이다.”
라는 말은 ‘국가들의 연방’으로서 연방주의에 대해 그가 얼마나 확신에 차 있었는가를 보여 준다.
프루동은 대표작인 ‘소유란 무엇인가’를 비롯한 다수의 저작을 발간했다.
그 가운데 1863년 발간된 ‘연방의 원리 및 혁명당의 재구성 필요성에 관하여’에서 ‘국제적 규모의 관세동맹과 공동작업장’의 설립을 주장하고, 국가의 간섭을 받지 않는 ‘연방제(혹은연방주의)’를 제안했다.
그는, 연방의 원리가 유럽에서 힘의 공정한 배분을 결정하게 되면, 평화를 위한 주된 보장 수단으로 기능할 것이라고 보았다.
자발적 계약과 균형의 개념은 프루동이 구상하는 연방주의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프루동은 연방주의의 이념을 ‘지배자 또는 통치가 없는 상태’를 뜻하는, ‘아나키’에서 도출한다. 프루동은 ‘아나키=자치정부=개별정부’, 즉 궁극적으로 ’주인이나 주권자가 부재한 통치형태‘로 보고 있다.
이러한 통치 형태 혹은 지배제도는 권위가 없고, 권력의 분할을 전제로 하는 ’자유‘에 기반한 제도여야 한다.
그러므로 ’개인에 의한 개인의 통치‘로서 ’아나키‘가 인정될 수 있다.
따라서 그가 주장하는 연방주의는 중앙 통제적 혹은 집권적이 아닌 사회의 조직 원리로서 ‘연방’이다.
“20세기는 연방의 시대를 열 것이다”
라고 한 그의 예언대로 오늘날 유럽대륙에서는 EU 체제가 발족하여 지속적인 확대와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인디언에 관한 책을 읽을 때면 항상 느끼는 소회가 억울하고 분하다는 생각이다.
이 세상의 흐름은 왜 정의와 순리에 따라 흐르지 않고 폭력과 협잡과 야만으로만 진행되는가 하는 생각이다.
신이라는 존재도 결국 인간이 그들의 권력을 위해 만들어 낸 가공이라는 것을 인디언들의 사상과 멸망을 보면서도 쉽게 느낄 수 있다.
김대중의 고려 연방제를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한다.
마지막으로, 진정한 평화주의자 시애틀 추장의 연설문을 올린다.
시애틀 인디언 추장의 연설문은
미국대통령 피어스에 의해 파견된 백인 대표자들이
이 땅(오늘의 시애틀 지역)을 팔 것을 강압적으로 요구하자
그에 대한 답글인데 이 문건은 미국독립 200주년을 기념한 '古文書비밀해제'로
120년 만에 세상에 햇볕을 보게 되었다.
당시 피어스 대통령은 추장 시애틀의 편지에 감복한 나머지
이 지역을 '시애틀'이라고 명명했으니 캐나다 접경도시
태평양 연안 이곳이 바로 오늘날의 <시애틀 市>가 된 것이다.
[우리는 모두 형제들이다! ] - 시애틀 인디언 추장의 연설문(1854년)
나와 함께 온, 지금 당신들 앞에 서 있는
한 무리의 이 사람들은 나의 부족이며 나는 그들의 추장이다.
우리는 왜 이곳에 왔는가? 연어 떼를 구경하기 위해서이다.
올해의 첫 연어 떼가 강물로 거슬러 올라오는 것을 축하하기 위해 여기에 왔다.
연어는 우리의 주된 식량이기 때문에 연어 떼가 일찌감치 큰 무리를 지어
강의 위쪽으로 거슬러 오는 걸 보는 일만큼 우리에게 즐거운 일은 없다.
그 숫자를 보고서 우리는 다가오는 겨울에 식량이 풍부할 것인가를 미리 안다.
오늘 우리의 마음이 더없이 기쁜 까닭은 그 때문이다.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연어 떼가 햇살에 반짝이며 춤추는 것을
우리는 우리의 눈으로 직접 보았다.
또 한 번의 행복한 겨울이 우리를 찾아올 것을 짐작한다.
우리가 무리를 이루어 몰려왔다고 해서
전투를 벌이려고 온 것으로 생각하지 말아달라.
나는 당신들이 우리의 땅에 온 것을 기쁘게 여기고 있다.
당신들과 우리는 모두가 이 대지의 아들들이며,
어느 한 사람 뜻 없이 만들어진 사람이 없다.
하지만 한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다.
당신들은 이 땅에 와서, 이 대지 위에 무엇을 세우고자 하는가?
어떤 꿈을 당신들의 아이들에게 들려주는가?
내가 보기에 당신들은 그저 땅을 파헤치고
건물을 세우고 나무들을 쓰러뜨릴 뿐이다. 그래서 행복한가?
연어 떼를 바라보며 다가올 겨울의 행복을 짐작하는 우리만큼 행복한 것인가?
워싱턴의 대추장(대통령)이 우리 땅을 사고 싶다는 전갈을 보내왔다.
대추장은 우정과 선의의 말도 함께 보냈다.
그가 답례로 우리의 우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므로
이는 그로서는 친절한 일이다. 그의 부족은 숫자가 많다.
그들은 초원을 뒤덮은 풀과 같다. 하지만 나의 부족은 적다.
마치 폭풍이 휩쓸고 간 다음에 드문드문 서 있는 들판의 나무들과 같다.
백인 대추장은 우리의 땅을 사고 싶다는 제의를 하며 우리에게는 아무런 불편 없이
살 수 있도록 하겠다고 덧붙였다. 우리는 그대들의 제안을 진지하게 고려해 볼 것이다.
우리가 땅을 팔지 않으면 백인이 총을 들고 와서 우리 땅을 빼앗을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대들은 어떻게 저 하늘이나 땅의 온기를 사고 팔 수 있는가?
우리로서는 이상한 생각이다.
공기의 신선함과 반짝이는 물은
우리가 소유하고 있지도 않은데 어떻게 그것들을 팔 수 있다는 말인가?
우리에게는 이 땅의 모든 부분이 거룩하다.
빛나는 솔잎, 모래 기슭, 어두운 숲 속 안개, 맑게 노래하는 온갖 벌레들,
이 모두가 우리의 기억과 경험 속에서는 신성한 것들이다.
나무 속에 흐르는 수액은 우리들 황색인(혹은 붉은 얼굴)의 기억을 실어 나른다.
백인은 죽어서 별들 사이를 거닐 적에 그들이 태어난 곳을 망각해 버리지만,
우리가 죽어서도 이 아름다운 땅을 결코 잊지 못하는 것은
이곳이 바로 우리 황색인들에겐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땅의 한 부분이고 땅은 우리의 한 부분이다.
향기로운 꽃은 우리의 형제자매이다. 사슴, 말, 큰 독수리, 이들은 우리의 형제들이다.
바위산 꼭대기, 풀잎의 수액, 조랑말과 인간의 체온 모두가 한 가족이다.
워싱턴 대추장이 우리 땅을 사고 싶다는 전갈을 보내온 것은
곧 우리의 아버지가 되고 우리는 그의 자식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땅을 사겠다는 그대들의 제안을 잘 고려해 보겠지만,
우리에게 있어 이 땅은 거룩한 것이기에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개울과 강을 흐르는 이 반짝이는 물은 그저 물이 아니라 우리 조상들의 피다.
만약 우리가 이 땅을 팔 경우에는 이 땅이 거룩한 것이라는 걸 기억해 달라.
거룩할 뿐만 아니라, 호수의 맑은 물 속에 비췬 신령스러운 모습들 하나 하나가
우리네 삶의 일들과 기억들을 이야기해 주고 있음을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물결의 속삭임은 우리 아버지의 아버지가 내는 소리이다.
강은 우리의 형제이고 우리의 갈증을 풀어준다. 카누를 날라주고 자식들을 길러준다.
만약 우리가 땅을 팔게 되면 저 강들이 우리와 그대들의 형제임을 잊지 말고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형제들에게 하듯 강에게도 친절을 베풀어야 할 것이다.
아침 햇살 앞에서 산 안개가 달아나듯이 황색인은 백인 앞에서 언제나 뒤로 물러났지만
우리 조상들의 유골은 신성한 것이고 그들의 무덤은 거룩한 땅이다.
그러니 이 언덕, 이 나무, 이 땅의 흙은 우리에게 신성한 것이다.
백인은 우리의 방식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백인에게는 땅의 한 부분이 다른 부분과 똑같다.
그는 한밤중에 와서는 필요한 것을 빼앗아 가는 이방인이기 때문이다.
땅은 그들에게 형제가 아니라 적이며 그것을 다 정복했을 때 그는 또 다른 곳으로 나아간다.
백인은 거리낌 없이 아버지의 무덤을 내팽개치는가 하면 아이들에게서 땅을 빼앗고도 개의치 않는다.
아버지의 무덤과 아이들의 타고난 권리는 잊혀지고 만다.
백인은 어머니인 대지와 형제인 저 하늘을 마치 양이나 목걸이처럼
사고 약탈하고 팔 수 있는 것으로 대한다.
백인의 식욕은 땅을 삼켜 버리고 오직 사막만을 남겨놓을 것이다. 모를 일이다.
우리의 방식은 그대들과는 다르다.
그대들 도시의 모습은 황색인의 눈에 고통을 준다.
백인의 도시에는 조용한 곳이 없다.
봄날 잎새 날리는 소리나 벌레들의 날개 부딪치는 소리를 들을 곳이 없다.
나는 황색인이라서 이해할 수가 없다.
인디언은 연못 위를 쏜살같이 달려가는 부드러운 바람소리와
한낮의 비에 씻긴 바람이 머금은 소나무 내음을 사랑한다.
만물이 숨결을 나누고 있음으로 공기는 황색인에게 소중한 것이다.
짐승들, 나무들, 그리고 인간은 같은 숨결을 나누고 산다.
백인은 자기가 숨쉬는 공기를 느끼지 못하는 듯하다.
여러 날 동안 죽어가고 있는 사람처럼 그들은 악취에 무감각하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그대들에게 땅을 팔게 되더라도
우리에게 공기가 소중하고, 또한 공기는 그것이 지탱해 주는 온갖 생명과 영기(靈氣)를
나누어 갖는다는 사실을 그대들은 기억해야만 한다.
우리들의 할아버지에게 첫 숨결을 베풀어준 바람은 그의 마지막 한숨도 받아준다.
바람은 또한 우리의 아이들에게 생명의 기운을 준다.
우리가 우리 땅을 팔게 되더라도 그것을 잘 간수해서
백인들도 들꽃들로 향기로워진 바람을 맛볼 수 있는 신성한 곳으로 만들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땅을 사겠다는 그대들의 제의를 고려해보겠다.
그러나 제의를 받아들일 경우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즉 이 땅의 짐승들을 형제처럼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미개인이니 달리 생각할 길이 없다.
나는 초원에서 썩어가고 있는 수많은 물소를 본 일이 있는데
모두 달리는 기차에서 백인들이 총으로 쏘고는 그대로 내버려 둔 것들이었다.
연기를 뿜어대는 철마가 우리가 오직 생존을 위해서 죽이는 물소보다
어째서 더 중요한지를 모르는 것도 우리가 미개인이기 때문인지 모른다.
짐승들이 없는 세상에서 인간이란 무엇인가?
모든 짐승이 사라져버린다면 인간은 영혼의 외로움으로 죽게 될 것이다.
짐승들에게 일어난 일은 인간들에게도 일어나기 마련이다.
만물은 서로 맺어져 있다. 그대들이 온 이후로 모든 것이 사라졌다.
이제 삶은 끝났고 살아남는 일만이 시작되었다.
이 넓은 대지와 하늘은 삶을 살 때는 더없이 풍요로웠지만,
살아남는 일에 있어서는 더없이 삭막한 곳일 따름이다.
그대들은 아이들에게 그들이 딛고 선 땅이 우리 조상의 뼈라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
그들이 땅을 존경할 수 있도록 그 땅이 우리 종족의 삶들로 충만해 있다고 말해 주라.
우리가 우리 아이들에게 가르친 것을 그대들의 아이들에게도 땅을 우리 어머니라고 가르쳐 주라.
땅 위에 닥친 일은 그 땅의 아들들에게도 닥칠 것이니 그들이 땅에다 침을 뱉으면
그것은 곧 자신에게 침을 뱉는 것과 같다.
땅이 인간에게 속하는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만물은 마치 한 가족을 맺어주는 피와도 같이 맺어져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인간은 생명의 그물을 짜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 그물의 한 가닥에 불과하다.
그가 그 그물에 무슨 짓을 하든 그것은 곧 자신에게 하는 짓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종족을 위해 그대들이 마련해 준 곳으로 가라는 그대들의 제의를
고려해 보겠다. 우리는 떨어져서 평화롭게 살 것이다.
우리가 여생을 어디서 보낼 것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의 아이들은 그들의 아버지가 패배의 굴욕을 당하는 모습을 보았다.
우리의 전사들은 수치심에 사로잡혔으며 패배한 이후로 헛되이 나날을 보내면서
단 음식과 독한 술로 그들의 육신을 더럽히고 있다.
우리가 어디서 우리의 나머지 나날을 보낼 것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렇게 많은 날도 남아있지 않다. 몇 시간, 혹은 몇 번의 겨울이 더 지나가면 언젠가
이 땅에 살았거나 숲 속에서 조그맣게 무리를 지어 지금도 살고 있는 위대한 부족의
자식들 중에 그 누구도 살아남아서 한때 그대들만큼이나 힘세고 희망에 넘쳤던
사람들의 무덤을 슬퍼해 줄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왜 우리 부족의 열망을 슬퍼해야 하는가?
부족이란 인간들로 이루어져 있을 뿐 그 이상은 아니다.
인간들은 바다의 파도처럼 왔다가 가는 것이다.
자기네 하느님과 친구처럼 함께 걷고 이야기하는 백인들조차도
이 공통된 운명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백인들 또한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한가지는
우리 모두의 하느님은 하나라는 것이다.
그대들이 땅을 소유하고 싶어하듯
하느님을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하느님은 인간의 하느님이며 그의 자비로움은 황색인에게나 백인에게나 꼭 같은 것이다.
이 땅은 하느님에게 소중한 것이므로 땅을 해치는 것은 창조주에 대한 모욕이다.
백인들도 마찬가지로 사라져 갈 것이다. 어쩌면 다른 종족보다 더 빨리 사라질지 모른다.
계속해서 그대들의 잠자리를 더럽힌다면
어느 날 밤 그대들은 쓰레기더미 속에서 숨이 막혀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대들이 멸망할 때 그대들을 이 땅에 보내주고 어떤 특별한 목적으로
그대들에게 이 땅과 황색인을 지배할 권한을 허락해 준 하느님에 의해
그대들은 불태워져 환하게 빛날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는 불가사의한 신비이다.
언제 물소들이 모두 살육되고 야생마가 길들여지고 은밀한 숲 구석구석이
수많은 인간들의 냄새로 가득 차고 무르익은 언덕이
‘말하는 쇠줄’ (電話線)로 더럽혀질 것인지를 우리는 모르기 때문이다.
숲 덤불은 어디에 있는가? 사라지고 말았다.
독수리는 어디에 있는가? 사라지고 말았다.
날랜 조랑말과 사냥에 작별을 고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삶의 끝이자 죽음의 시작이다.
우리 땅을 사겠다는 그대들의 제의를 고려해 보겠다.
우리가 거기에 동의한다면 그대들이 약속한 보호구역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거기에서 우리는 얼마 남지 않은 날들은 마치게 될 것이다.
마지막 황색인이 이 땅에서 사라지고
그들이 다만 초원을 가로질러 흐르는
구름의 그림자처럼 희미하게 기억될 때라도,
산기슭과 숲들은 여전히 내 백성의 영혼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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