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백의 아름다움, 눈 덮인 설악 / 사진작가 권기원
설악은 지금 눈(雪)의 감옥
강원도 산악에 큰 눈이 온 날, 설악에 사는 친구가 눈 덮인 설악의 사진을 보내왔다. 새하얀 산능선이 한없이 열린 지평 위로 아득하게 아련함이 흐르고 있을 때, 요령처럼 그녀의 부음이 들렸다. 배우 윤정희의 작별이…. 우리의 젊은 날을 눈부시게 했던 그녀는 인생의 끄트머리에서 알츠하이머를 만나 정신줄을 놓더니, 끝내 이생의 눈을 감고 하직했다. 딸 진희의 바이올린 소리를 들으며 꿈꾸듯 편안한 얼굴로….
친구가 설악으로 이주했을 때, 마을 사람들로부터 처음 들은 소리는 대청봉에 세 번쯤 눈이 내려야 마을에 눈이 온다는 것이었다. 설악에 눈이 사박사박 쌓일 때면 친구는 설악의 설경을 사박사박 나에게로 보내주었다. 밤새 눈이 퍼붓다 그친 아침이나 해 질 녘, 금강산의 마지막 봉인 신선봉을 타고 미시령과 황철봉 마등령을 거쳐 주봉인 대청봉으로 뻗어가는 눈 덮인 설악의 스카이라인은 생각만으로도 꼴깍 침이 넘어갈 지경이다.
설악의 겨울은 눈으로 문을 걸어 잠근다. 설악의 주인인 나무와 물과 바위와 봉우리와 골짜기, 그 속에 사는 짐승 미물들까지 모든 생명에게 안식을 주려는 자연의 배려일 것이다. 연중 내내 사람들에게 밟혔던 아픈 허리와 그들이 뿌려놓은 속진을 달래고 정화하며, 새로운 봄날을 잉태해야 한다. 1969년 이맘 때 일이던가. 히말라야 원정을 준비하던 한국산악회 대원들이 눈사태로 열 명씩이나 죽음의 계곡에 파묻힌 때가…. 설악의 비의에 바쳐진 인간의 제물인 셈이었다.
설악의 진리는 하나뿐이다. 그 속에 많은 산이 있고 협곡이 있고, 숱한 길이 있지만 어디서 떠나든 모든 길은 대청봉을 향한다는 것. 정상은 그곳뿐이다. 대청봉에 오르면 더 오를 곳이 없으니 더 이를 데가 없고, 더 바랄 것도 없다. 그곳에서 삼라만상을 내려다보며 인생을 생각하며 나무를 보고 바람을 느끼면서 설악의 아들과 딸이 됨을 자긍 한다. 매몰차게 때리는 비바람과 눈구덩이에 빠지면서도 사람들은 설악의 적자(嫡子)가 되고파, 사시사철 대청봉으로 향하는 길을 놓지 않는다.
눈 덮인 설악은 이름 그대로 눈(雪)의 감옥이다. 유일하게 감옥으로 통하는 문 하나를 빼꼼히 열어둔 곳이 있다면 권금성일 것이다. 해발 800미터 높이에 거대한 암반으로 이루어진 자연의 성채 같은 그곳은 사방에 깊음의 고요만이 잠잠한 눈의 감옥이다. 그 깊음을 깨고 시끌벅적한 케이블카가 깎아지른 암벽 꼭대기로 사람들을 실어다 겨울 설악의 장구한 품을 보여준다.
서쪽으로는 일몰을 관장하는 장대한 저항령 계곡의 정적이 짐승의 발자국처럼 숨 막힐 듯 다가오고, 미시령에서 황철봉으로 이어지는 능선 자락에는 거대한 공룡 벼슬 같은 울산바위가 눈을 삿갓처럼 쓴 채 앙버티고 서 있다. 동으로는 눈 속에 묻힌 속초가 영랑호와 청조호 사이에 납작 엎드러져 있고, 그 너머로 망망대해가 잿빛 하늘과 닿아 있다.
자욱하게 몰려가는 눈보라 속에 말갈기처럼 흘러내린 화채봉도 겨울 설악의 꽃이다. 사람 사는 소리가 아득히 먼곳. 네온 불빛은 없어도 스스로 빛나는 발광체가 설악만큼 아름다운 곳이 어디 있으랴. 저 순백으로도 마음이 선연해지는 겨울 설악의 장엄함과 시베리아 같은 적막 앞에, 찬연한 슬픔이 요염하게 일렁인다. 그때 비로소 모공이 열리고 환하게 느끼는 희열은 설악이 인간에게 주는 최고의 위안일 것이다.
우리가 참으로 겸허한 눈을 가진다면 자연의 어느 것 하나라도 경외심 없이는 바라볼 수 없다. 인간의 힘으로 쌓아 올린 거대한 문명과 지식을 몽땅 끌어와도, 어느 날 자고 나면 담장이나 장독대 위로 아무렇지 않게 쌓인 눈과 담장 밑에 버려진 화분에서 싹을 틔우는 풀잎 하나의 신비와 생명력을 넘볼 수는 없다.
먹고사는 일에, 작은 무엇 하나에도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는 얻을 수 없는 세상에서, 누가 저 웅숭깊은 산곡과 두렵고 아름다운 설봉들을 거저 주었을까…. 소리 없이 밀려오는 제어할 수 없는 힘에 이끌려서 스스로 눈(雪)의 감옥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 곳. 그곳에서 불의를 단죄하지 못하고, 포용하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했으며, 겸손하지 못했던 나를 에워싸는 억겁의 고요와 한없이 작아지는 나를 만난다.
끝 간데없는 눈보라에 실려 아득히 먼 곳으로 떠난 그대여. 우리의 마지막도 그와 같으리니, 더는 오를 데 없고 더는 이를 데 없는 그곳에서 영원한 쉼을 찾으리. 그녀가 남긴 마지막 영화 ‘시(詩)’(감독 이창동)에서 ‘아네스의 노래’를 낭송하던 그녀의 모습이, 시구절이... 눈발처럼 흔들린다. 그때 이미 떠남을 예감이라도 했단 말인가?
‘... 이젠 작별을 해야 할 시간 / 머물고 가는 바람처럼 그림자처럼 / 오지 않던 약속도 끝내 비밀이었던 사랑도 / 서러운 내 발목에 입 맞추는 풀잎 하나 / 나를 따라온 작은 발자국에게도 / 이젠 작별을 할 시간...
오늘 또 설악에서 사박사박 눈 소식이 왔다. 설악은 아직도 눈의 감옥이란다. 나도 답신을 띄웠다. “감옥이 어디 설악뿐이랴. 사람 사는 세상이 온통 감옥이 아니겠느냐?”라고.
-소설가 / daum cafe 이관순의 손편지-
첫댓글 윤정희의 부음을 듣고
그녀의 화려했던 젊은 날들을 티비에서 보며
인생 참 허무함을 느끼게 되더군요
산을 좋아하고
눈 덮힌 설악산을 오르고 싶은
윤주는
오늘 이글이 너무 좋군요
성남님 고맙습니다